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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행일 | 2025년 11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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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쪽수, 무게, 크기 | 208쪽 | 348g | 128*188*18mm |
| ISBN13 | 9791141614072 |
| ISBN10 | 1141614073 |
| KC인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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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 올리브에게 (루리/문학동네)
루리의 『나나 올리브에게』는 전쟁이 지나간 자리의 공허한 잔해, 그리고 그 속에 남은 사람들의 몸짓을 따라가는 소설이다. 전쟁의 총성과 폭발음보다 먼저 다가오는 것은 부서진 집, 멈춘 시계, 반 토막 난 식탁이다. 사소해 보이는 것들에 새긴 균열과 상처, 그 틈 사이로 인간다움이 어떻게 버티고 살아가는지를 잔잔하게 드러낸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올리브나무 집’이 있다. 북동쪽의 어느 마을에 자리한 이 집은 물리적으로는 붕괴 직전이지만, 수많은 이들에겐 여전히 돌아갈 수 있는 자리, 머물 수 있는 공간이다. 문을 잠그지 않던 나나 올리브의 습관, 그 정신을 이어받는 딸과 손녀, 그리고 집을 찾아오는 월터, 다리스, 카릴라, 메이까지. 서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같은 상처를 나누며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이루어 간다. 책은 혈연이 아닌 상처를 중심에 놓고, 폐허 속에서 다시 관계를 잇는 과정을 그려낸다.
이 책의 대부분은 손녀가 부재한 할머니에게 쓰는 편지 형식이다. 이미 떠난 이에게 말을 건네는 행위는 사라진 사람을 현재의 시간 속으로 소환한다. 코흘리개는 편지를 쓰면서 자신의 공포와 무력감을 문장 속에 걸어 두고, 나나의 말투와 손길을 떠올리며 나나의 빈 자리를 조금씩 대신 채운다. 코흘리개가 쓰는 할머니의 자리를 이어 받으려는 조용한 결심이자, 주인공이 스스로를 지탱하는 방식으로 보인다. 전쟁이 삶을 산산이 흩어 놓을 때, 글쓰기가 어떻게 한 사람의 내면을 겨우 붙들어 두는지 잘 보여 준다.
이 집을 오가는 인물들은 원인은 비슷하지만, 제각기 다른 결핍을 안고 있다. 전쟁의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인 월터는 평생 ‘부끄러움’에 사로잡혀 산다. 전우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파괴에 가담했다는 자괴감이 그를 잠식한다. 그러나 암 선고 이후 올리브나무 집으로 돌아와 시계를 고치고, 식탁을 손보고, 카릴라에게 비누 만드는 법을 알려 주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손으로 다시 무언가를 살려 내는 길을 선택한다. ‘Hope’라는 그의 이름은, 절망에 가까운 삶도 마지막에는 다른 색으로 마무리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타국에서 성공했지만 자기 뿌리를 잃어버렸다는 감각에 사로잡힌 다리스, 비누 공장의 폭격으로 가족을 잃고 비누라는 사물 자체에 트라우마를 느끼는 카릴라, 헬기 소리에 몸부터 먼저 굳는 메이. 이들 모두 전쟁의 상흔을 품고 살아간다. 이들이 올리브나무 집에서 하는 일이 거창하지 않다. 부서진 문을 고치고, 반 토막 난 식탁에 파란 물감을 칠하고, 다리를 다친 개에게 휠체어를 씌워 준다. 그러나 바로 그 작은 손길들이 이 소설에서 가장 밝게 빛난다. 지금 내 앞의 존재를 조금 덜 아프게 만드는 일. 이 작품은 그런 사소한 배려와 돌봄에 무게를 실어 준다. 세상은 바꾸는 일, 그건 절대 거창한 일이 아니다.
전쟁은 사람을 적과 아군으로 나누지만, 자밀라는 그 구획 앞에서 오래 멈칫하다 결국 물과 도움을 내민다. 나나 올리브가 평생 문을 잠그지 않았듯, 폐허 속에서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문은 무모한 낭만이 아니라, 인간성의 마지막 경계이자 최소한의 자존심처럼 그려진다.
작품 속 상징들은 모두 이 주제와 맞물려 있다. 폭격으로 허리가 꺾였지만 새순을 틔우는 올리브나무, 반쪽이 된 식탁에 칠해진 파란색, 버려진 조각들로 만든 풍경, 멈췄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뻐꾸기시계, 다리를 다친 개에게 씌워진 작은 보조 바퀴. “모든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라는 체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건 한 번 부서진 세계를 어떻게든 다시 이어 붙이려는 몸짓이다. 완벽하게 원상 복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 난 채로도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노력들이다.
『나나 올리브에게』는 전쟁을 끝내는 영웅이 나오지 않는다. 대신 밥을 짓고, 개의 상처를 살피고, 부서진 물건들을 다시 쓰기 위해 손을 움직이는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일상을 지키려는 집요함이야말로 재난의 시대에 남은 마지막 저항이다. 폐허 위에 다시 집을 짓는 일, 무너진 자리에 다시 식탁을 놓는 일, 누구의 신분도 묻지 않은 채 문을 열어 두는 일. 이 소설은 그걸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준다.
나나 올리브의 집은 특정한 어느 나라의 어느 전쟁터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마음속에도 하나씩 자리하고 있다. 세계는 여전히 불안정하고, 언제든 또 다른 파괴가 찾아오겠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밥을 짓고, 문을 열어 두고, 이름을 불러 주고 있다는 믿음. 『나나 올리브에게』는 바로 그 믿음을 잃지 않게 해 주는 소설이다.
2025.11.28
#나나올리브에게
#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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