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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행일 | 2026년 06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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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쪽수, 무게, 크기 | 384쪽 | 452g | 133*200*30mm |
| ISBN13 | 9791141617226 |
| ISBN10 | 1141617226 |
54명의 예스24 회원이 평가한 평균별점
『새의 선물』, 『빛의 과거』를 잇는 '시간 3부작'의 마지막 편이라는 무게감을 알고 펼쳤지만, 정작 나를 붙든 건 거창한 서사가 아니라 아주 사소하고 구체적인 감각들이었다. 유부초밥을 집어먹는 손끝, 늙어가는 몸에 새겨진 흉터, 서로를 오해하면서도 끝내 놓지 못하는 자매의 시선. 그 사소함이 오히려 이 소설을 오래 붙들고 있게 했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한 사람의 몸에 담긴 시간과 공간과 사회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문장을 읽고서야 소설을 관통하는 질문이 선명해졌다. 안나와 경선, 60대 자매의 삶을 통해 은희경이 정말 묻고 싶었던 것은 '우리는 몸을 어떻게 살아내는가'였다는 것을. 예쁜 아기였던 경선은 외모 품평을 즐기는 노인이 되었고, 어깨가 넓고 머리가 컸던 안나는 사람들의 무관심에는 초연하지만 경선이 나이 들어 받는 푸대접만큼은 부당하다고 느낀다. 몸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조건이면서, 동시에 평생에 걸쳐 사회가 우리에게 붙이는 꼬리표이기도 하다는 것—작가는 이 이중성을 자매라는 가장 가까운 관계를 통해 잔인할 만큼 정직하게 들여다본다.
정직함이 신랄한 것이 아니어서 좋다. 긴 시간 왕래가 없었음에도 자매는 서로를 의식하고 , 오해하고, 변호하면서 시간을 통과해 간다. 이 소설이 관통하는 늙어감이라는, 자칫 서글프기만 할 수 있는 주제를 다루지만 끝내 찌질하지 않고 가벼운 무게감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 소설의 문장은 철저히 현재형으로 쓰였다. 처음엔 낯설었지만 곧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대개의 소설이 이미 지나간 일을 서술하는 과거형으로 쓰이는 것과 달리, 현재형 문장은 안나가 유부초밥을 집는 순간, 경선이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살피는 순간을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만든다. 나는 여기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동시에 그들 곁에 서서 그 장면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듯한 이상한 이중의 시간 감각을 느꼈다.
이 선택이 제목과 정확히 맞물린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시간의 감촉'이라는 말은 은유가 아니라 이 소설이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이었다. 문장으로 시간을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게 하는 것. 늙어감이란 결국 몸에 시간이 쌓이는 일이고, 그 쌓임을 관념이 아니라 감각으로 전달하려면 과거형의 회고적 거리감이 아니라 현재형의 밀착이 필요했을 것이다. 작가가 7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다듬어낸 문장의 이유를 이해하고 나니, 소설을 읽는 경험 자체가 하나의 '감촉'으로 다가왔다.
가장 마음에 오래 남은 것은 노년을 앞두고도 여전히 '첫' 순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 소설이 놓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서로를 반쪽짜리로만 알고 살아온 두 자매가 삶의 저녁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서로를 제대로 보게 되고, 그렇게 새로운 우정의 문 앞에 선다. 그 계기가 되는 손녀 다니엘이다. 다니엘의 젊음과 그녀들의 노후함이 대비된다. 그러나 읽어나갈수록, 발견과 성장에 유효기간이 없다는 것, 오히려 몸이 쇠락해가는 시기에 맞이하는 발견이야말로 더 단단하고 진실하다는 것을 이 소설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요란한 화해나 극적인 사건 없이도, 그저 서로를 오래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관계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 소설은 늙음을 미화하지도, 비관하지도 않는다. 다만 몸이라는 조건을 살아내는 일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때로 얄밉고, 그럼에도 끝내 다정할 수 있는지를 현재형 문장의 밀도로 증명해 보인다. 내 몸에 새겨진 그리고 새겨지고 있고 새겨질 그 시간의 감촉들을 은근히 기대하게 만들었다.
좋았던 문장들 모음
# 한 방향으로 흘러 사라져버리는 시간의 능선에 혼자 남겨진 그 겨울 들판의 꿈, 안나에게는 그것이 고독의 악몽이었다. (72)
#노인이라는 일반화가 너무 강력해서 개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77)
#몸의 고통은 철저히 개인적인 사건이다. (82)
#그때에는 잘 몰랐지만 경선이 기다린 건 어떤 한 계절이 아니었다. 계절의 주기와 시간의 흐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자신의 온몸으로 실험하고 느껴보고 싶었다. (113)
#"그래 , 누군가가 기억하면 그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 거지"(247)
#몸의 일상은 현실의 시간대에서 변해가지만, 언젠가 포착한 적 있었던 꿈과 이상의 시간은 그 나름의 도착지를 향해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게 아닐까(284)
#우리 모두는 고통을 겪고 또 해결하면서 현실을 살아가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 변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했던 순간은 어딘가에서 왕국을 건설하고 사계절을 보내고 있다. (286)
#이미 그 시간을 다 치러냈고 지금은 빗줄기 아래 삿갓을 쓴 채 소멸을 기다려야 할 때이다. 소멸이 아닌 시간의 계주를(287)
#안나는 어쨋거나 오래 만난 사람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조금씩 간격이 멀어지면서 마치 수채화 속 원경처럼 서로를 흐리고 부드러운 윤곽으로 보게 된다고 말한다. (326)
#우리의 '첫'에 대한 기억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가장 오래된'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최근'과 '우리의 다음'이 되기도 한다. (357)
#몸은 기쁨과 고통과 욕망과 상실의 부화장이고 사랑의 꿈과 왜곡을 간직한 도서관, 마지막 삶이 개체의 시간을 끝내고 무한에 섞여드는 여정이다. (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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