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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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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꿈'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연스레 '자아실현'이 나 '나다움' 같은 단어가 떠올랐다. 오랜 시간 그렇게 배워 고 믿어서였다. 그래서였을까? 과거 내 초기작을 보면 4 는 나한테 관심이 참 많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당시 4 는 '나'로 시작해 '나'로 끝나는 「영원한 화자」 같은 단편을 비롯해 "엄마! 아빠! 나는 어떻게 태어났나요?"라고 묻는 인물의 이야기를 여러 번 썼다. 그건 내가 나의 이야기에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데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렇다고 그다음에 내가 바깥과 잘 만났는가 하면 꼭 그런 건 아니었다. 세상 어딘가에는 '무아···· '라는 훌륭한 경지 도 있다는데, 내게는 여전히 어렵게 다가올뿐더러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 편 한 편 소설을 쓰다 엉겁결에 어떤 경계를 넘는 순간이 있었다. 내가 죽어 깨끗이 비워 진 자리에 다른 사람이 서고, 다른 생이 차오른 듯한 찰나 가. 철저히 혼자인 동시에 누군가와 함께인 기분이. 널뛰기 하다 본 담 밖 풍경처럼 언뜻 본 진실, 잠깐 쐰 공기에 나는 매혹됐다. 그것은 자아실현이라기보다는 자기 이해에 가깝 고 성취보다 성찰에 가까운 무엇이었다. 내가 거기 없는 동 시에 생생하게 현존하는 기분. 그때 느낀 깨끗한 고양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어쩌면 다른 이들 역시 그렇게 자기 안에서 일어난 일을 잊지 못해 계속 읽고 쓰는 삶을 이어 나가는 게 아닐까. 그러니 "무아란 지금의 내가 죽고 다른 '나'가 태어나는 사건이며, 그런 사건을 영원히 반복하는 것"*이라는 말이 맞다면, 그때 내가 언뜻 경험한 찰나 또한 무아와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같은 이유로 몇 해 전부터 나는 나의 농도를 조금씩 옅게 만들려 노력중이다. 덕분에 그저 '자아실현'이라고만 여겼으면 섭섭했을 일을 '노동'이 라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그저 '자아 성취'라고만 믿었으면 초조했을 일을 '삶의 기예'라 바꿔 부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밥 때문에 비루해질 때 꿈은 내 체면을 세워주고, 꿈 때문에 허약해질 때 밥은 내가 세상과 더 적 극적으로 만날 용기를 줬다. 그건 아마 두 단어가 단순히 업을 일컫는 게 아니라 삶에 대한 큰 조망이자 지향, 성찰 과 이해를 모두 품은 말이라 그럴 거다. 그래서 실은 누구 도 쉽게 답을 줄 수 없는 말. 긴 시간, 나는 나였다가, 또 나였다가, 충분히 나였다가, 혹은 나인 줄 알았다가 '내가 되지 않는 꿈'을 꾼다. 자연인 으로서도 창작자로서도 그렇다. '진정한' 내가 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얼마나 안심이 되나. 얼마나 해방적인가. 아마 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에는 영영 다다르지 못할 테지 만, 세상 어딘가 그렇게 쳐다볼 경지, 바라볼 자리가 있다 는 데 위안받는다. 나이들면 타인과 세상에 대한 관심이 열 어진다 했던가? 일단 시간과 체력이 줄어 그렇다고. 그러 니 어느덧 사십대 중반에 들어선 지금이야말로 내게는 '내 가 되지 않는 꿈'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싶다. 그동안 쌓 인 편견과 고집을 버리고 정결한 장소에서 새 손님을 맞는 일. 미적지근하니 힘 빠진 득도가 아니라 치열하게 사수할 무지. 그사이 세상은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나 나는 내게 새로 생긴 이 꿈을 좀더 길게 꿔보고 싶다. 밥과 꿈을 너무 높이지도 그렇다고 낮추지도 않으면서. 내 부모처럼, 잇사 처럼, 당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