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베세는 1950년 8월 26일 밤 자신의 42번째 생일을 두 주일 앞두고 토리노에 있는 호텔 「로마」에서 평소 복용하던 수면제를 과다하게 먹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 자아와 외부 세계 사이의 장벽을 넘지 못한 채 마치 군중 속의 외로운 섬처럼 살아온 그의 머리맡 테이블에는 수면제 봉지들과 함께 자신의 작품 『레우코와의 대화』가 한 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책 첫 페이지 여백에는 이런 마지막 작별의 글이 적혀 있었다. 「나는 모두를 용서한다. 그리고 모두에게 용서를 구한다. 되었는가? 너무 수다를 떨지 않기를.」- 역자 해설에서
이탈리아 신사실주의 문학을 대표하며 실험적인 작품들을 선보인 체사레 파베세의 실험적인 작품 『레우코와의 대화』가 김운찬의 번역으로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었다. 소설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닌 듯 일종의 실험적 작품으로서 『레우코와의 대화』는 그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다. 삶이란 「피곤한 노동」(1936년 발표한 첫 시집의 제목)일 뿐이라 생각한 파베세에게 신화는 인간의 삶과 현실을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종종 급진적인 신화 해석으로 이어지는데, 그것은 현재의 관점에서 고전 신화를 바라볼 뿐 아니라 일부 에피소드에 대해 그 원인이나 배경을 새롭게 바꿈으로써 새로운 인식의 틀을 제공한다. 신화라는 환상적이고 허구적인 세계에 대한 이야기에서, 파베세는 현실을 바라보기 위한 거울로서 동착적인 신화 다시 읽기를 시도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는 엄청나게 흥미진진한 책이 될 것이다.
문학 작업을 통해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려는 노력은 파베세 자신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삶의 막바지에 이를 때까지 그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일기(『삶이라는 직업』, 사후인 1952년 출판)에서 알 수 있듯이, 글쓰기는 자신의 내적 고통을 토로하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것은 순간적인 것을 영원으로 만들고 보잘것없는 삶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게 길을 열어 주었다. 파베세는 삶에서 비롯된 욕망, 불안, 동요에서 벗어나려고 스스로 죽음을 통해 자유를 찾으려 했다. 이러한 두 가지 해결책의 격렬한 충돌에서 이제 그의 글들만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작품들을 통해 그는 지금도 우리 곁에 살아 있다.
제목에 쓰인 「레우코」는 이 작품 속 등장인물로, 그리스 신화 속 인물 「레우코테아」의 애칭이다. 테바이의 왕 카드모스와 하르모니아의 딸 이노는 헤라의 분노 때문에 광기에 사로잡혀 자기 아들과 함께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는데,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바다의 여신 또는 님프가 되어 레우코테아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리스어 이름은 「하얀 여신」이라는 뜻으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거품과 관련하여 그렇게 부른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레우코는 1947년 이 책의 출판 당시 이탈리아 지성계의 요람이었던 에우나우디Einaudi 출판사에서 함께 일했고 파베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시칠리아 섬 출신의 여인 비안카 가루피Bianca Garufi와도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비안카는 「하얗다」는 형용사의 여성형으로 레우코는 바로 그녀를 가리킨다.
모두 27편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는 이 작품은, 26편까지는 이름이 명시된 두 등장인물이 나누는 간략한 대화로 되어 있고, 마지막 한 편은 마찬가지로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화자들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있다. 등장인물은 대부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과 영웅, 괴물이며,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로 헤시오도스와 레스보스 섬의 여류 시인 사포도 포함되어 있다. 그 외에 사냥꾼이나 목동, 거지, 신전의 창녀, 요정, 사티로스 등이 등장한다.
대화들은 마치 희곡 대본처럼 직접 화법으로 이루어지는데, 대부분 짤막하고 간결하며 한 편의 분량은 그리 많지 않아 서너 페이지를 넘지 않는다. 각 대화 앞에는 고유의 소제목과 함께 대화의 배경이 되는 에피소드나 상황, 주제, 계기 등과 관련하여 짤막한 메모가 붙어 있는데, 그것은 대화의 안내자 역할을 하면서 작가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파베세는 산문이지만 운문을 지향하는 독특한 문체로, 운명, 죽음, 절벽, 미소, 만남, 기억, 언어 등 신화적인 분위기를 띤 여러 가지 주제에 관한 대화로 삶과 죽음, 운명, 고통, 존재 등 인간이 겪는 근본적인 주제들에 접근해 간다. 아테나이의 영웅 테세우스가 귀향길에 검은 돛을 내리고 흰 돛을 다는 것을 잊어버린 이야기, 저승에서 데려가던 에우리디케를 뒤돌아본 오르페우스의 이야기, 또는 아테나이의 이카리오스와 그의 딸 에리고네의 비극적인 이야기에 대해 파베세는 상당히 과격하고 급진적인 해석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런 해석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레우코와의 대화』는 열린책들이 2009년 말 펴내기 시작한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의 153번째 책이다. 「열린책들 세계문학」은 젊고 새로운 감각으로 다시 태어난 고전 시리즈의 새 이름으로, 상세한 해설과 작가 연보로 독자들의 깊이 있는 이해를 돕는 한편 가볍고 실용적인 사이즈에 시선을 사로잡는 개성 있는 디자인으로 현대적 감각을 살렸다. 앞으로도 열린책들은 세계 문학사의 걸작들을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를 통해 계속 선보일 예정이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 낡고 먼지 싸인 고전 읽기의 대안
불멸의 고전들이 젊고 새로운 얼굴로 다시 태어난다. 목록 선정에서부터 경직성을 탈피한 열린책들 세계문학은 본격 문학 거장들의 대표 걸작은 물론, 추리 문학, 환상 문학, SF 등 장르 문학의 기념비적 작품들, 그리고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해야 할 한국의 고전 문학 까지를 망라한다.
* 더 넓은 스펙트럼, 충실하고 참신한 번역
소설 문학에 국한하지 않는 넓은 문학의 스펙트럼은 시, 기행, 기록문학, 그리고 지성사의 분수령이 된 주요 인문학 저작까지 아우른다. 원전번역주의에 입각한 충실하고 참신한 번역으로 정전 텍스트를 정립하고 상세한 작품 해설과 작가 연보를 더하여 작품과 작가에 입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했다.
* 품격과 편의, 작품의 개성을 그대로 드러낸 디자인
제작도 엄정하게 정도를 걷는다. 열린책들 세계문학은 실로 꿰매어 낱장이 떨어지지 않는 정통 사철 방식, 가벼우면서도 견고한 재질을 선택한 양장 제책으로 품격과 편의성 모두를 취했다. 작품들의 개성을 중시하여 저마다 고유한 얼굴을 갖도록 일일이 따로 디자인한 표지도 열린책들 세계문학만의 특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