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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행일 | 2012년 06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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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쪽수, 무게, 크기 | 304쪽 | 392g | 145*205*30mm |
| ISBN13 | 9788957076651 |
| ISBN10 | 8957076654 |
9명의 예스24 회원이 평가한 평균별점
누구를 잃고, 누구를 만나던 의심하지 않을 것.
활자로 만나는 루시드드림
책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 없이 무작정 펼쳐들었던 탓일까, 이 그로테스크한 소설 앞에서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내가 이 책에 끌린 건 순전히 제목 덕분이었다. 『레몽뚜 장의 상상발전소』. 상상발전소라니, 얼마나 창의적이고 희망이 묻어나는 제목인가? 게다가 주인 ‘레몽뚜 장’이라니. 프랑스 남부 지방에서나 맛볼 수 있는 부드럽고 달콤한 디저트의 이름 같지 않은가? 물론 내 이런 상상은 보기 좋게 흩어져버렸지만.
더 이상 문학의 장르를 편식하기 않기로 했던 터라, 1장 까지는 무척이나 흥미롭게 읽었다. 다소 의식의 흐름대로 쓰여진 글이 아닌가, 하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기는 했어도 다행히 마태수와 조, 그리고 마리의 캐릭터가 뚜렷한 윤곽으로 다가와 생경한 이야기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토끼의 등장은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있는 곳으로 이들을 데려갈 것만 같은 복선이었는데.
2장, 매력적인 소녀 ‘고’의 등장으로 나는 토끼 따위는 잊어버리고 다시 소설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는 태아인지, 개구리인지 모를 괴상한 생물체만을 잉태하고 공중분해되고 만다. 아니 이 소설은 분명 단편이 아닌, 장편이었는데? ‘고’는 단지 레몽뚜 장의 상상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나? 그렇다면 레몽뚜 장이 말하는 상상발전소란, 이토록 개연성 없이 그렇지만 뭔가 ‘그럴 듯한’ 어두운 분위기로 물감을 덧칠한 추상화 같은 것인가? 그러나 나는 의문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이내 3장으로 넘어가야만했다. 다시 ‘고’가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있었으니까.
다시 마태수와 조와, 그리고 마리가 등장했다. 어딘가 조니뎁을 연상케 하는 레몽뚜 장까지도. 이번에는 매력적이지도, 심지어 실체조차도 없는 여자 ‘리’가 등장한다. 이제 마태수와 조와, 그리고 마리는 ‘리’의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레몽뚜 장의 상상, 아니 어쩌면 그들 각자의 상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는 3장이 가장 실망스러우면서도 또 이 소설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여태까지 누구의 상상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함이 바로 3장에서는 그 진가를 발휘한다는 것이었다. ‘리’를 찾아 나서는 것은 어쩌면 레몽뚜 장이 숨긴 또 하나의 카드일 뿐, 마태수와 조와 그리고 마리의 트라우마가 잠들어 있는 상상을 깨우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목표를 갖고 발을 내딛은 이들은 서로의 상상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나는 어쩌면 이런 순환이야말로 바로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상상의 발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4장과 5장은, 독자마저 의식의 흐름대로 읽게 하는 내용들로 얽혀있었다. 잉글랜드에서 도쿄로, 다시 파주와 도쿄를 거쳐 잉글랜드에서 신림동으로…… 드라마 ‘닥터 후’도 아닌 것이 무작정 시간 여행을 감행하는 플롯이 못마땅했다. 왜냐하면 나는 여태껏 이를 단편으로 이해해야할지, 장편의 연장으로 이해해야할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4장을 개별적인 이야기로 치자면, 괜찮은 구성이었다고 생각한다. 손님 없는 B&B를 운영하는 할머니와, 상상 속의 집을 현실에서 마주한 이방인이라는 캐릭터가 ‘고’만큼이나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로테스크하지도 않았고. 나는 이쯤에서 이제 이 상상이 누구의 상상인지는 궁금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A의 상상으로 시작되었다가 C의 상상으로 끝날 수도 있는 게 상상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독자에게 바랐던 자세가 아니었나 싶었다.
5장에서는 토끼는 마지막 부활을 꿈꾸지만 이내 사라지고 마태수와 조, 그리고 마리는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누군지 알 수 없는 화자인 ‘나’가 등장하고 역시나 정체가 모호한 누군가 그에게 ‘레몽뚜 장’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혼란에 빠진 장자의 호접지몽처럼 레몽뚜 장이 나인지 내가 레몽뚜 장인지, 이 상상은 나의 상상인지 누구의 상상인지 끝까지 마침표를 찍지 못한 채 이야기는 한 점 빛으로 달아나버린다.
책의 막바지에 다다라서야 나는 어딘가 익숙하고도 낯선 기분의 근원지를 찾아냈다. 마침 며칠 전에 읽었던 최제훈의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이 떠오른 것이다. 이는 단순히 그로테스크한 분위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장편의 탈을 쓴 단편인 듯, 혹은 자신의 앞선 이야기를 끊임없이 복제하는 듯한 플롯도 한몫했다. 먼저 최제훈의 단편 중 「여섯 번째 꿈」에 등장한 상상 속 살인이 비슷하게 이뤄진다는 점과, 「π」에서 소설 속 등장인물이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 토로하는 부분이 자꾸만 오버랩 되었다.(π에서는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작가가 죽인 소설 속 등장인물이라면, 상상발전소에서는 소설 속 주인공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하는 여인이라는 차이점?)
나는 대체로 책을 읽고 깊게 생각하지 않은 편인데,(책을 읽으면서 생각하는 편) 이 책이야말로 모처럼 마지막 장을 덮고도 분석을 자극하는(심지어 해설도 없었다!) 이야기였다. A4 한 장이 넘어가는 리뷰도 오랜만에 적어본다. 내 지식과 감성이 부족해서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분명 있었으리라. 그래서 더 나이를 먹기 전에 만나서 반가운 책이랄까. 독서를 했다기 보다, 짧은 시간 동안 아주 많은 꿈을 꾼 것 같다.
"나는 레몽뚜 장, 현실과 상상을 헤매는 지친 영혼에게만 보이는 존재예요." p.2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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