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가 “모든 견고한 것들이 녹아 사라진다”고 말했을 때, 견고한 것들이 녹아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것은 더욱더 견고하고 완벽해진 새로운 질서였다. 그러나 지금 여기 ‘액체 근대’ 세계에서는 정말로 모든 것이 녹아 사라지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바우만은 이 책에서 안정적이고 견고한 ‘고체’와 달리 끊임없이 변화하는 성질을 가진 ‘액체’ 개념에 기초하여, 우리가 어떻게 ‘무겁고’ ‘고체적이고’ ‘예측/통제가 가능한’ 근대에서 ‘가볍고’ ‘액체적이고’ ‘불안정성이 지배하는’ 근대로 이동해왔는지 탐구한다. ‘액체 근대’의 도래는 인간 조건의 모든 측면에 심오한 변화를 불러왔다. 그 변화는 인간 조건을 해명해주던 낡은 개념들을 재고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액체 근대’에 대한 일련의 작업의 출발점이며 가장 핵심적인 통찰을 담고 있는 이 책에서 바우만은 그 요청에 응해 해방, 개인성, 시/공간, 일, 공동체--이 다섯 가지 인간 조건을 둘러싼 주요 개념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있다.
과거 비판이론의 목표였던 ‘해방’의 과제는 어떻게 조정되어야 하는가?
해방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비판이론가들은 예속된 처지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상황과 타협하며 자유를 얻을 기회를 거부하는 ‘밑바닥 계층의 부르주아화’(‘행동’ 대신 ‘현상 유지’를 내세운다는 점에서)를 지적하며 해방의 기획이 지닌 곤경을 토로했다. 반면에 비판이론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해방이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었다. 불확실성 속에서 무언가 끊임없이 결정을 할 때마다 개인들은 괴로움에 시달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보기에 오히려 인간을 진정으로 해방시키는 것은 ‘규범’이었다. 사회적 규범을 따르는 것이 바로 해방적 힘이며 인간이 합리적으로 자유를 향유케 할 유일한 희망이 된다. 이런 견해는 인간이 근대의 도래와 함께 이미 모든 자유를 얻었다는 견해를 지지한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베풀어진 전대미문의 자유는
전대미문의 무능을 동반하고 온 것이다.
그러나 레오 스트라우스의 지적처럼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베풀어진 전대미문의 자유는 전대미문의 무능을 동반하고 온 것”이었다. 자유로운 개인들이 ‘비판’의 역할을 등한시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들의 ‘비판’은 그들의 삶의 조건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올 수 없었다. 이는 우리 사회가 비판적 사고와 행동을 수용하는 하나의 방식을 만들어내면서 그러한 수용이 초래하는 결과에 둔감해졌기 때문이었다. 현대의 ‘비판’은 캐러밴 이동주택 단지가 운영되는 방식과 닮아 있다. 바우만은 이를 무기력한 ‘소비자 스타일의 비판’이 비판이론가들이 수행하던 ‘생산자 스타일의 비판’을 대체한 것이라고 표현한다.
모든 운전자는 각자의 여행 일정표와 시간 계획표가 있다. 단지의 관리자에게 이들이 원하는 것은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크다고 볼 수 있는 소망, 즉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고, 간섭받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 대가로 그들은 관리자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사용료를 제때 내겠다는 약속을 한다. 돈을 내기 때문에 때로는 요구사항이 있을 때도 있다. (……) 그러나 이들이 이동주택 단지의 관리 철학에 질문을 던지거나 이를 두고 교섭하려고 마음먹는 일은 결코 없다. 하물며 단지를 운영하는 책임을 떠맡는 일은 두말할 나위 없다. 기껏해야 앞으로 이곳에 다시는 오나봐라 하며 친구들에게도 이곳이 좋지 않다고 말해주자고 마음먹는 정도이다. 각자가 자신의 일정에 따라 단지를 떠날 무렵, 그곳은 이들이 도착했을 때 그대로 남아 있다.(41-42쪽)
비판이론의 과제는 전도되었다.
텅 비어버린 아고라, ‘사적 영역’이 지배하는 세계.
비판이론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근대성과 그 인식론적 틀은 오늘을 사는 세대들의 삶을 구성하는 근대성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었다. 비판이론가들이 경험한 ‘고체 근대’ 세계에는 전체주의의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관심은 온통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 문제에 투사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모든 과제와 책임이 사회에서 개인의 어깨 위로 떨어진 ‘액체 근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현 단계의 개인화는 ‘주어진 것’으로서의 인간의 정체성이 아니라 ‘개인화를 하나의 과제’로 삼아 그 과제를 수행할 책임을 행위자에게 지운다. “내가 누군가이기 위해서는 그 누군가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기반이 해체된 시대의 개인들은 새로운 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전망이 없다. 운명으로서의 개인성과 자기주장을 위한 실제적 능력으로서의 개인성 간에 좁힐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하는 것이다. 개인화의 또 다른 문제는 그것이 ‘시민의식’의 점진적 해체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개인은 ‘공공의 선’이나 ‘대의명분’에 대하여 회의적이?. 전체의 이해란 집단적 감정이나 이웃에 대한 공포심이 가져온 이기주의의 조합으로 축소되고, 공적 사안은 공적 인물들의 사생활에 대한 호기심 정도로 격하된다. 비판이론이 그렇게도 우려했던바, ‘공적인 것’이 ‘사적인 것을’ 식민화한다는 말은 이제 옳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비판이론의 과제는 전도되었다. 과거의 비판이론의 과제는 전지전능하고 비인격적인 국가와 그러한 국가의 수많은 관료주의적 촉수들, 또는 그보다 규모가 작은 복제물들의 압제적인 규칙 아래에서 괴로워하는 사적인 자율성을 ‘공공영역’의 전진 부대로부터 수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비판이론의 임무는 사라져가는 공공영역을 수호하는 것, 아니 그보다는 빠르게 비어가는 (……) 공적 공간을 정비하여 사람을 채워 넣는 일이다.(64쪽)
개인화는 전례 없는 자유를 가져다주었지만 자유의 결과와 대면해야 하는 전례 없는 과제 역시 안겨주었다. 과거 비판이론의 목표가 오늘날 의미를 지니려면, 사적으로 추구되던 문제들을 개인적 관심들의 단순한 총합이 아닌 더 넓은 차원의 공적 관심사로 응축해내고, 지금까지 생활정치가 떠맡아오던 것들이 다시 대문자 ‘정치’의 장에서 논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망각된’ 시민의 기술과 도구들을 개인들이 다시 되찾을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어야 할 것이다.
‘여호수아 담론’에서 ‘창세기 담론’으로
: 무한한 가능성과 불확실성의 집합의 세계로
바우만은 나이젤 드리프트의 ‘여호수아 담론’과 ‘창세기 담론’ 구분법을 빌려온다. 무질서가 규칙이고 질서가 예외인 창세기 담론과 달리 여호수아 담론에서는 질서가 규칙이고 무질서가 예외이다. 여호수아 담론을 떠받치고 이를 믿을 만한 것으로 만든 것은 포드주의적 세계였다. “설계와 실행, 주도하는 자와 따르는 자, 자유와 복종이 세심하게 구분되고, 이러한 대립 항들을 단단히 결합시키면서 전자로부터 후자로 명령을 순조롭게 전달”시키는 포드주의의 세계가 질서를 목표로 하는 사회공학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성취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무거운 자본주의에서 가벼운 자본주의로 이동하면서 ‘창세기 담론’이 ‘여호수아 담론’을 대체하게 된다. 무질서가 지배하는 ‘창세기 담론’의 사회에서는 추구할 가치가 있는 목적들을 ‘절대화’할 능력을 갖춘 ‘최고 권력기구들’이 사라진다. 때문에 인간은 자명한 목적을 위한 수단을 찾아내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목표를 선택할지의 문제를 고민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면서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의 총집합이 되어버렸다. 외견상 무한한 기회 속에 산다는 것은 ‘대단한 사람이 될 자유’의 달콤한 향을 풍긴다. 하지만 이 달콤함은 뒷맛이 쓴데, ‘된다’는 것은 어떤 것도 아직 끝나지 않았고 모든 것이 그대로 저 앞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게임이 계속되리라는 것, 아직도 일어날 일들이 많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것은 영원한 불확실성, 절대로 충족되지 않는 갈망, 고뇌 상태가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비자의 불행은 선택의 결핍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과잉에서 비롯된다. ‘내가 가진 수단으로 최대한의 이득을 이끌어냈는가?’라는 질문은 시도 때도 없이 소비자를 엄습하여 잠을 설치게 만든다.
“사회 같은 것은 없다.”
파멸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너에게 있다.
가볍고, 소비자 친화적인 자본주의는 독점적인 권력기관 대신 여러 개의 권력기관들이 공존하도록 놓아둔다. 권력기관들은 더 이상 명령하지 않는다. 선택자의 비위를 맞추며 유혹하고 꼬드길 뿐이다. 파멸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너에게 있다. 자유로운 주체인 네가 자유롭게 행동한 결과이다. 무거운 자본주의 세계에 ‘정의롭고 올바른 사회’를 목표로 노력을 기울이는 지도자가 존재했다면, ‘액체 근대’ 세계에서는 “사회 같은 것은 없다”는 마가렛 대처의 악명 높은 구호가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고 있다. 이는 왜 자기계발서와 자기 고백적인 토크쇼에 대한 수요가 끊이지 않는지 설명해준다. 토크쇼에서는 매우 사사로운, 그래서 말로 꺼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경험을 가리키는 단어나 구절들이 공개적으로 발언된다. 토크쇼들은 사적 문제들에 대한 공적 담화를 합법화한다. 그렇다고 그 문제들이 공적 이슈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문제들은 정확히 사적 이슈라는 테두리 안에서 토론된다.
바우만은 여기서 사적 영역이 공적인 것에 의해 식민화되고 있다는 하버마스의 경고를 다시 한번 언급한다. 바우만은 하버마스의 주장과 달리,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공적 영역이 사적인 드라마가 상연되거나 관람되는 영역으로 재규정되고 있는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런 식의 전개가 불러온 가장 중대한 결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정치’ 행위의 죽음일 것이다.
횿 쇼핑에 중독되는가?
날카롭게 신경을 건드리는 불안감과 숨 막히는 불확실성에 대한 힘겨운 투쟁.
자기계발서나 토크쇼 못지않게 개인들이 중독되어 있는 것은 소비 행위이다. 소비의 경주에서는 가장 빨리 달리는 주자보다도 결승점이 늘 더욱 빠르게 달아난다. 따라서 경주의 지속, 경기에 계속 참여하고 있다는 만족스러운 자각이 진정한 중독이 되는 것이지, 결승점에 닿을지도 모를 극소수의 사람들을 기다리는 어떤 특별한 상에 중독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소비자 사회의 구성원들이 달리고 있는 이 특별한 경주의 원형은 쇼핑행위이다. 쇼핑은 음식, 구두, 차량, 가구 등속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새롭고 개선된 인생의 본보기나 비결을 열심히, 끝없이 찾는 것도 쇼핑의 한 단면이며, 생계를 꾸리는 데 꼭 필요한 기술과, 우리가 그런 기술이 있다고 장래의 사장들을 설득할 수단도 쇼핑의 대상이 된다. 쇼핑 목록은 끝이 없다. 그러나 그 목록이 아무리 길어도 쇼핑을 하지 않을 방법을 고르는 것은 그 목록에 없다.
‘쇼핑’에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는 이유가 있다. 쇼핑은 날카롭게 신경을 건드리는 불안감과 숨 막히는 불확실성에 대한 힘겨운 투쟁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단 한번이라도 확실함과 자신감, 자기확신, 신뢰를 얻기를 바란다. 쇼핑을 다니면서 그들이 찾은 상품은 그 확실성의 약속을 완전하게(혹은 잠시 동안 그래 보이는) 실현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놀라운 가치가 있다.
‘뱉어내는 공간’ ‘먹어치우는 공간’
이방인에게 말 걸지 말라.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인류의 역사에서 타자성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두 전략, ‘뱉어내는’ 전략과 ‘먹어치우는’ 전략이 사용되었다고 말했다. 첫번째 전략이 낯설고 이질적으로 간주되는 타자들을 추방하거나 전멸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두번째는 타자성을 유예시키거나 무효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를 공간에 적용한다면, 프랑스의 라데팡스는 ‘뱉어내는’ 전략을 사용한 장소이고, ‘소비 공간’은 ‘먹어치우는’ 전략이 실천되는 장소이다. 이러한 공간들은 ‘공적’인 공간이지만, 전혀 공적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공간, 바우만에 따르면 ‘공적이되 예의 없는’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이방인을 만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 교류는 피할 수 있다. 동질성에 대한 지향, 차이를 척결하려는 노력이 효과적일수록 이방인들을 대할 때 편안함을 느끼기 어렵게 되고 차이는 더욱더 위협적이고 강렬하게 된다.
‘액체 근대’ 세계에서는 공동의 이해관계에 대한 협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동의 정체성에서 안정감을 찾는 일이 가장 분별력 있고 유익한 방식으로 부상하고 있다. 동일한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만 허용하고 이외의 모든 이들의 접근을 차단하는 목적이 주변 이웃을 동질화하는 데 있는 만큼 민족성은 인간이 생각해낸 다른 어떤 정체성보다도 그 목적에 가장 잘 부합된다. 이러한 현상은 정치 영역에도 적용된다. 정치가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지를 고려하는 대신, 공적 무대에 모습을 비추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성 문제가 대두된다. 소통하고 조정할 필요를 사전에 없애는 결정은, 사회적 유대 관계에 새롭게 등장한 취약성과 유동성을 바탕으로 한 실존적 불확실성에서 연유한 것이다. ‘외부인들’의 침입이 곧 개인의 안전에 대한 위협이라고 여기는 우리의 경향, 섞이지 않은 순수함이 곧 위협이 없는 안전이라고 보는 경향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이방인에게 말 걸지 말라” 정상적 삶을 사는 성인들의 전략적 교훈이 되어버렸다.
광속여행을 하는 소프트웨어적 우주에서
‘저 멀리’와 ‘바로 여기’의 차이가 무효화된다.
근대는 시간이 공간에서 분리되어 공간을 정복해나가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근대성은 가속화와 토지 정복을 수호성으로 하여 태어났다고 말해진다. 공간을 정복하는 것, 그리고 소유를 증빙하는 구체적 증거들과 ‘침입 금지’ 푯말을 달아 그 공간을 지키는 것이 고체 근대 시대의 으뜸가는 목표였다. 공간은 그것이 통제될 때 진정 ‘소유되었다.’ 그리고 통제는 무엇보다도 ‘시간을 길들이는 것,’ 시간 속에 존재하는 역동성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일정보다 일찍 열차가 달려온다든가 공장의 부품 조립선반에 다른 부품보다 먼저 자동차 부품이 도착하는 것은 무거운 근대에서는 가장 끔찍한 악몽이었다. 잘 가공된 합리성의 표준인 ‘포드주의적 공장’에서 영구히 지상에 묶인 노동이 자본에 ‘결합되는’ 동안, 규격화된 시간은 노동을 지상에 묶어두었다. 자본과 노동 모두 움직이길 원치 않으며 움직이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러나 가벼운 근대가 도래하자 모든 것이 변했다. 광속여행을 하는 소프트웨어적 우주에서 공간은 문자 그대로 ‘순식간에’ 오갈 수 있게 되며, ‘저 멀리’와 ‘바로 여기’의 차이가 무효화된다. 모든 공간 구석구석까지 동일한 시간 범위 안에 도달될 수 있게 되면서 ‘특별한 가치’를 지닌 공간은 사라진다. 지속적 관리 감독이나 땅을 일구고 경작하는 고되고 위험천만한 일에 들어가는 비용을 감당할 이유는 더더욱 없어진다.
지배는 불확실성의 원천에 대한 근접과 동일시되었다. 그들 자신은 구속받지 않고 규범에서 자유로우며 따라서 예측 불가능한 생활을 하면서도, 피지배자들의 행동을 규범적으로 규제하는 사람들이 바로 지배자이다. 지배는 도망가고, 결속을 끊고, ‘다른 어딘가에 있을’ 능력과 이것들을 실행하는 속도를 결정할 권리에 있다. 가벼운 근대는 자본과 노동의 양편 가운데 자본을 새장 바깥으로 놓아주었다. 이들의 상호의존성은 일방적으로 깨졌다. 달리 말해, 노동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홀로일 경우에는 불완전하고 자본의 존재를 반드시 필요로 하지만, 이제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덩치와 규모는 이제 재산이 아니라 빚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덩치 큰 사무용 빌딩들을 열기구 객실들과 기꺼이 맞바꾸길 바라는 자본가들에게는, 떠다닌다는 것이 가장 수지맞는 자산이고 따라서 그들이 가장 아끼는 자산이다. 떠다니게 되면 가장 강력해질 수 있는데, 열기구 너머로 쓸모없는 짐들을 버리고 심지어 필요 없는 선원까지도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짐들 중에서도 가장 부담스러운 것은 대규모 직원들을 관리하고 감독해야 한다는 성가신 과제이다.(196쪽)
일은 무거운 자본주의 시대에 부여받았던
중심의 위상을 잃게 되었다.
일이 근대의 주요 가치로 떠오르게 된 것은 무형의 것들에 형태를 제공하고 일시적인 것들에 지속성을 부여하는 놀라운 능력 때문이었다. 일은 미래를 개척하고 말뚝을 박고 식민화하는 근대적 야심을 품고, 혼돈을 질서로, 우연성을 예측 가능한 사건들로 교체하는 과정에서 가장 크고 결정적인 역할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일이 질서를 창출한다는 관념은 인류를 스스로의 운명의 책임자로 여기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불확실성이 영구적인 것이 되고, 인간의 노력이라는 지평에 궁극적으로 완벽한 상태라는 것이 보이지 않게 되자, 일은 질서를 세우고 미래를 통제하는 영역에서 게임의 영역으로 떠내려왔다. 일은 조심스럽게 단기적 목표를 세워 그저 한두 걸음만 앞으로 내딛는 게임 참가자의 전략처럼 되었다. 중요한 것은 한 걸음마다 얻게 되는 즉각적 결과로, 그것은 바로 그 현장에서 소비될 만한 것이어야 한다. 형이상학적 뿌리가 잘리고 나니, 일은 무거운 자본주의 시대를 지배하던 가치들의 집합체 속에서 부여받았던 중심의 위상을 잃게 되었다. 일은 이제 사람이 자신을 정의하고 정체성이나 평생의 계획들을 설정하고 수정할 때 중심이 되는 확고한 축을 제공하지 못한다. 일은 윤리적인 생산자요 창조자라는 프로메테우스적 천직의 의미가 아닌, 감각을 추구하고 경험을 수집하는 소비자의 미학적 필요와 욕구를 만족시키고 즐겁게 해주는 능력 여부로 평가되고 측정된다.
무거운 자본주의 시대는 상호 의존성으로 강화된 자본/노동이 결합된 시대였다. 국가는 자본가들이 노동을 구매할 적합한 상태인지, 시가대로 지불할 능력이 있는지 감독해야 했다. 실업자들은 진정 ‘산업예비군’이었고 여하한 경우에도 일하라는 요청이 떨어질 경우 바로 뛰어들 만반의 준비가 된 상태여야 했다. 반목과 무력행사, 그리고 그에 뒤이은 협상이 서로 반목하는 양편의 결속을 강화했다. 자본주의 초기에 공장에 모여든 기술자들이 분노했던 그 비인간적 시간표는 경영진 측이 가하는 억압과 지배의 행위였지만, 이는 또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주장할 수 있는 영역, 자기들의 힘을 강화하는 영역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공공의 이해’라는 개념은 점점 더 불명확해지면서 과거 합리적 전술로 여겨졌던 단결은 그 위상을 잃었다. 부르디외는 최근 시작된 사태가 과거 연대의 토대를 무너뜨렸으며, 결속 끊기가 전투적 정신과 정치 참여의 죽음에 병행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오늘날 불안정성은 도처에 있다.
오늘날 노동자들은 일에 도사린 좌절을 피하기 위해 직장에 지나치게 충성하거나 삶의 목표를 직장의 미래 속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불확정성, 불안정성, 불안은 우리 시대에 가장 널리 퍼진 삶의 조건들의 특색이다. 구조적 실업의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진정 안전하게 느낄 수 없다. ‘유연성’이 오늘날의 표어이다. 이 말은 안정과 확고한 헌신, 미래의 자격을 내재하지 않은, 그저 특정 기간 동안만 유지되거나 다시 갱신해야 하는 계약, 사전통고 없는 해고, 일체의 보상 없음을 조건으로 제시하는 일자리들을 예고하고 있다. 장기적 안정의 부재로, ‘즉각적 만족’이 하나의 합리적 전략처럼 여겨진다. 삶이 던져주는 그 어떤 것이든 지금 여기에 당장 달라. 믿지 못할 사회 경제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개인들은 이 세상을 일회용 물품처럼 보는 훈련을 하고 있다. 오늘날의 헌신이 다음날 오는 기회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헌신이 가볍? 피상적일수록 손해가 줄어든다. 따라서 노동시장의 운영자들이 의도적으로 시장을 ‘불안정화’시키는 정책을 시행하면, 삶의 정책은 그 정책을 지원하고 부추기게 된다.
실제 삶에서 공동체들을 찾아보기 힘들게 된 최근 수십 년 동안처럼
‘공동체’라는 말이 무분별하고도 공허하게 남발된 적은 없을 것이다.
에릭 홉스봄은 “사회학적 의미에서의 공동체들을 실제 삶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된 최근 수십 년 동안처럼 ‘공동체’라는 말이 무분별하고도 공허하게 남발된 적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액체 근대에서 공동체주의가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은, 인간적 가치의 필수불가결한 한 쌍(자유와 안정) 가운데 안정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방향으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추세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들은 그 어떤 것도 확실치 않은 이 세상에서, 확실하고도 영원하게 소속될 수 있는 집단을 찾고 있는 것이다.
공동체주의 복음에서 공동체는 민족 공동체의 유형을 본떠 구성된다. 공동체에 대한 욕망은 자기 방어적인 것이다. 내부는 동질적이며 조화로운 단일체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 외부에서 온 섭취되지 않는 물질들은 제거되고, 모든 진입지점이 면밀히 감시, 통제, 보호된다. 그리고 그 바깥은 중무장이 되어 있으며 어떤 해도 입히지 못할 갑옷과 투구로 단단히 감싸여 있다. 공동체라 일컬어지는 것의 경계는 마치 몸의 외부 테두리처럼, 신뢰와 자상한 보살핌을 쏟을 영역과 위험과 의심과 항시적 감시를 할 황야의 영역을 나누도록 되어 있다. 몸과 공동체라 일컫는 것은 공히 내부는 융단 같고 외부는 뾰족한 가시철망 같다. 이는 이민자들과 다른 국외자들을 거부하고 위험에서 벗어나 일체성이라는 안식처로 가고 싶은 충동에서 비롯된다.
해방의 가능성은 공동체주의자들의 관심사였던 적이 없다. 공동체주의자들이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한 가지 가능성은, 인간의 자유를 넓히고 파고들어가게 되면 인간 전체의 안정의 합이 늘어날 수도 있고, 자유와 안정이 상호 공존 속에서 각각 증대됨은 물론이고 이들이 같이 성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을 무시하고 구성된 공동체들의 효과는 사회성의 충동을 집약하고 집단적 행동을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고독을 영구화하는 데 기여한다. 법적인 개인의 능력과 개인에게 실제로 주어진 능력 사이에 드리워진 메울 수 없는 골에서부터 생겨난 고통들에 대한 치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