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0
2026.03.16.
구세주의 탄생은 그렇다고 쳐도 평범한 인간의 생일은 왜 축하하는 것일까? 그것은 고통으로 가득한 삶을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환대의 의례일 것이다.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좋은 곳에 온 사람들끼리 환대하는 것은 쉽다. 원치 않았지만 오게 된 곳, 막막하고 두려운 곳에 도착한 이들에게 보내는 환대야말로 값진 것이다. 생일 축하는 고난의 삶을 살아온 인류가 고안해낸, 생의 실존적 부조리를 잠시 잊고, 네 주변에 너와 같은 문제를 겪는 이들이 있음을 잊지 말 것을 부드럽게 환기하는 의식이 아닌가 싶다.괴로움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동료들이 주는 이런 의례마저 없다면 삶이 내 의지와 무관하게 강제로 시작된 사건이라는 우울한 진실을 외면하기 어렵다.인간은 모두 변한다. 단, 설득력 있는 '도발적 사건' 을 통해서. 그런데 인물의 변화를 주로 이야기를 통해 접하다보니 어느새 많은 이들이 인간의 의미 있는 변화는 오직 큰 사건을 통해서만 일어난다고 믿게 된 것 같다...우주의 만물이 그러하고, 내가 그러했듯, 그럴듯한 이유 없이도 인간은 얼마든지 변하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오히려 변화보다 더 어려운 것은 변화하지 않는 것이니 이 자연스러운 결과에 굳이 '도발적 사건'을 갖다붙여 설명할 필요는 없다. 모든 지도에 축척이 있듯이 실제 세계는 이야기의 세계를 초과한다. 다만 이해가 잘 되지 않을 뿐.어린 시절의 일기에는 '나'에 대한 말들로 가득했다.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일까를 알기 위해 애썼던 십대의 내가 거기 있다. 그러나 돌아보면, 나라는 존재가 저지른 일, 풍기는 냄새, 보이는 모습은 타인을 통해서만 비로소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천 개의 강에 비치는 천 개의 달처럼, 나라고 하는 것은 수많은 타인의 마음에 비친 감각들의 총합이었고, 스스로에 대해 안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은 말 그대로 믿음에 불과했다.한병철은 "만성적 고통이 견딜 수 없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오늘날의 사회가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만성적 고통은 의미를 상실한 우리 사회를, 우리의 이야기를 잃어버린 시대를 반영한다"고 진단한다. 이야기가 있기는 있다.그러나 그 이야기 속에서 고통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요즘 유행하는 이야기들 속에서 주인공은 전능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주인공의 시련은 독자에게 '고구마를 백 개 먹'는 불쾌한 경험을 제공할 뿐이다. 주인공은 시련이나 통과의례 없이도 매우 유능하거나, 미래에서 와서 과거의 일을 훤히 알고 있다. 또는 갈등 자체를 회피하면서 자기만의 성에 고립된 채 무해하게 살아가고 있다.그랬다. 이야기는 고통과 카타르시스를 교환해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는 장치였다. 이야기 속에서 한 인물이 큰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은 인물이 그 고통의 의미를 안다는 뜻이다. 한 시간의 요가 세션을 마친 뒤 매트에 편안히 누워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를 때마다 내 마음 한구석에서 치밀어 오르는 희미한 불안이 있다. 이것이 지금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의 한계이고, 만일 이보다 더한 고통이 찾아온다면 나는 속절없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고통의 의미를 찾아 견디기보다 몸 가볍게 달아나며 마법 구두를 신은 '그림자를 판 사나이'로 살았다. 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기꺼이 견디고자 할 의미 있는 고통은 어떤 것일까?돌아보면 나는 언제나 이런 유의 이야기에 끌리곤 했다. 스탕달의 『적과 흑』 이 그랬고 위대한 개츠비』 가 그랬다. 신분을 속이거나 없는 교양을 꾸며내어서라도 더 높은 사회적 존중을 얻으려는 인물들의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은 여전히 내 마음속 깊은 곳의 어떤 불안을 건드린다. 그 목소리는 이렇게 속삭인다. 너는 교양인의 흉내를 잘도 내고 있구나.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나는 못 속이지. 너는 아직 충분하지 않아. 너는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그런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나는 여지없이 그 동기의 연구실로 소환된다. 모르는 성악가가 모르는 언어로 모르는 노래를 부르는 그 방의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아 교양인의 관용과 너그러운 미소를 바라고 있다. 내가 어딘가 잘못된 곳에 와 있고,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로 다시 '이탈'해야만 할 것 같은 이 익숙한 충동은 여전히 내 안에 있다."제가 작가가 될 수 있을까요?"그럴 때면 나는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물었다.작가가 되고 싶으면 계속 쓰면 되고, 되고 싶지 않으면 안 쓰면 되지 않나 생각했기 때문이다."선생님께서 가능성이 있다고 하시면 한번 열심히 해보려고요."그 학생들은 '하고 싶음'이 아니라 '할 수 있음'에 더 관심이 많았다. '하면 된다'가 아니라 '되면 한다'의 마음. 나는 누구에게도 답을 주지 않았다..."넌 작가가 될 거야. 틀림없어."'이런 말은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그는 미래에 대한 강한 확신으로 더 열심히 글을 써 유명한 작가가 될까? 아니면 이미 작가가 다 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대충대충 살다가 끝내 다른 일을 하게 될까? 알 수 없다. 미래를 보고 온 내가 현재의 사건에 영향을 주면 다른 미래가 그 지점에서 시작될 것이다. 미래를 보고 오지는 않았지만, 그때 어느 쪽이든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게 되면 나는 다른 사람의 한 번뿐인 인생을 좌우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고 그런 사람은 결코 되고 싶지 않았다...가르쳤던 학생들 중 몇몇은 작가가 되었는데 그중에 내게 가능성 같은 것을 물으러 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묻지 않고 그냥 썼다. 그들은 자기 미래가 궁금하지 않았을까? 많이 궁금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쓰는 게 좋고 작가가 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 계속 썼을 테고, 쓰다보니 작가도 되었을 것이다. 그들도 지금은 나처럼 "언제 작가가 될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라는 질문을 받고 있을 것이다.사공 없는 나룻배가 기슭에 닿듯 살다보면 도달하게 되는 어딘가. 그게 미래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온다. 먼 미래에 도달하면 모두가 하는 일이 있다. 결말에 맞춰 과거의 서사를 다시 쓰는 것이다.'무용의 용'을 주창하는 장자가 있다.장자는 쓸모 있는 나무는 그 쓸모 때문에 일찍 벌목되므로, 쓸모가 오히려 제 몸에 해를 입힌다고 말했다. 가지가 무성한 나무를 자르지 않은 나무꾼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잘라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나무라 자르지 않았다는 나무꾼의 말에 장자는, 이 나무는 쓸모가 없어 천수를 다할 수 있었다고 제자에게 설명하기도 한다.우리가 살지 않은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미래에 나쁜 결과와 마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다. 의미 있는 삶에 대한 갈망은 그 어떤 전략적 고려보다 우선하고, 살지 않은 삶에 대한 고찰은 그런 의미를 만들어내거나 찾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앤드루 H. 밀러, 우연한 생』 ,방진이 옮김, 지식의편집, 2021, 29쪽.물리학 쪽 책을 보다가, 이해는 잘 못하면서도 문득 위안을 받을 때가 있다. 예를 들어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은 그저 지구상의 인간을 위한 편의적 개념일 뿐이라는 설명이 그렇다. 또한 시간은 우리가 우주의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다 다르고, 어쩌면 거꾸로 흐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같은 것.내가 다른 삶을 상상하거나 거기에 매혹되는 이유는 어쩌면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불가역한 시간이라는 개념에 익숙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만약 여기에서 벗어난다면 좀더 편안하게 미지의 미래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미래처럼 보이는 과거일 테니까. 이미 일어난 일인데 내가 아직 모를 뿐이니까. 크리스마스 날 아침까지 풀지 못하는 선물처럼, 놀라움을 위해 알려주지 않는 것뿐일 테니까. 그리고 어떤 세계에서는, 그것이 다른 차원이든 '사건의 지평선' 너머든, 아버지와 엄마는 죽지 않았고, 나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아니, 내가 그들의 부모였을 수도 있다.그 밖에도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내 삶이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무한한 삶들 중 하나일 뿐이라면, 이 삶의 값은 0이며(1/∞=0) 아무 무게도 지니지 않을 것이니, 존재의 이 한없는 가벼움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더는 단 한 번의 삶이 두렵지 않을 것 같다. 태어나지 않았을 때 나는 내가 태어나지 않은 것을 몰랐기에 전혀 애통하지 않았다. 죽음 이후에도 내가 죽었음을 모를 것이고, 저 우주의 다른 시공간 어디엔가는 내가 존재했는지도 모르는 내가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이런 위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