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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주체의 자발적인 자기 착취
- 한병철, 『피로사회』
한병철이 쓴 『피로사회』는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는 우선 20세기를 면역학적 패러다임으로 분석한다. ‘면역’이라는 말에 드러나는 대로, 20세기는 자아가 다른 타자들을 부정하는 방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면역학적 예방법은 “면역반응을 촉발하기 위해 다만 타자의 파편만이 자아 속으로 투입된다.”(10) 자아 속으로 들어온 타자의 파편은 자아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자아를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보호한다. 면역학의 시대에 타자는 자아의 확립을 위해 꼭 필요한 요소였던 셈이다.
지은이는 부정성의 패러다임이 지배한 20세기와 달리 21세기는 긍정성의 패러다임이 지배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긍정성’이라는 개념은 여기서 부정성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긍정성의 과잉이라는 현상에서 지은이는 21세기의 질병인 우울증의 원인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우울증의 근원에 긍정성이 있다고?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 말 속에 지은이가 21세기 피로사회를 바라보는 핵심이 들어 있다.
과잉생산, 과잉가동, 과잉 커뮤니케이션이 초래하는 긍정성의 폭력은 ‘바이러스적’이지 않다. 면역학은 그러한 폭력에 대해 아무런 수단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 저항이 아니라 소화 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 반응으로 나타난다. 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 역시 면역 반응은 아니다. 그것은 모두 신경성 폭력 현상으로서 면역학적 부정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이러스성 폭력에 해당되지 않는다. (18~19쪽)
20세기는 이질적인 것, 낯선 것이 폭력을 낳는 원천이었다. 이질적인 것을 같은 것의 외부로 몰아버리면 사람들은 안심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21세기에는 같은 것마저도 폭력의 원천이 되어버린다. 과잉생산, 과잉가동, 과잉 커뮤니케이션이 사람들을 긍정성의 폭력이 행해지는 광장으로 몰아넣는다. 긍정성의 폭력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를 향한다. 부정성의 폭력은 타자라는 원천이 제거되면 일시적으로 휴식기에 접어들지만, 긍정성의 폭력은 ‘과잉’에서 나오는 현상이므로 이러한 휴식기가 없다. 과잉은 또 다른 과잉을 낳지 않겠는가? 무언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곧바로 무언가가 또 생긴다. 자기를 기원으로 하는 과잉은 그래서 마음의 질병=우울증을 일으킨다.
지은이는 “긍정성의 폭력은 절대성을 전제하지 않는다.”(21)라고 이야기한다. 관용을 베푸는 사회라고 해서 긍정성의 폭력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 이유는 이미 앞에서 이야기했다. 긍정성의 폭력은 자신의 내부에 그 원천을 두고 있다. 신경성 폭력은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22) 지은이는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을 긍정성 과잉의 징후로 판단한다. 동질적인 것이 과잉된 세계에는 이질적인 것으로 대표되는 적대성은 사라진다. 적대성이 사라진 자리는 동질적인 것으로 채워진다. 지은이가 세계의 긍정화, 곧 세계화를 긍정성의 과잉=대량화라고 비판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21세기 주체는 이런 점에서 자기 개발에 목숨을 거는 상황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동질적인 것들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자기 개발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21세기 성과사회와 그 사회 속의 성과주체는 이렇게 탄생한다. 성과주체는 사회 규율에 단련된 주체이다. 그 누구보다 그는 사회 규율을 따르며 그 속에서 무한경쟁의 깃발을 들고 내달린다. 문제는 무한경쟁 사회에서 성과주체는 스스로 자기를 증명해야 한다는 점에 있다. 사회 규율에 따르기만 하면 무한경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승리는 1인자를 말한다). 스스로 남이 따라올 수 없는 성과를 내야 한다. 성과주체는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한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정도 성과도 낸다. 하지만 성과를 향한 무한경쟁은 긍정성의 과잉이라는 폭력과 곧바로 마주친다. 능력을 넘어서는 성과를 이루기 위해 그는 휴식도 없이 자신을 일터로 내모는 것이다.
우울증은 모든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있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전쟁 상태에 있다. 우울증 환자는 이러한 내면화된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이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28쪽)
성과를 내야 하는데 성과를 내지 못할 때 성과주체는 우울증의 늪에 빠져버린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라는 말이 우리말 어법에 어긋나긴 하지만, 지은이는 능력 밖의 일을 자꾸만 하려고 하는 성과주체의 강박증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성과주체는 자신과 전쟁을 한다. 무한경쟁 사회는 타인과 경쟁하는 주체를 자신과 경쟁하는 주체로 뒤바꿔버린다. 자신과 경쟁하는 주체는 쉬지 않고 일을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자기를 뛰어넘을 수 없다. 꿈속에서도 자기와 경쟁하는 끔찍한 세상이 우리가 그토록 외쳤던 무한경쟁 사회의 본래 모습이었던 것이다.
타인과 경쟁관계를 형성하면 이겨야 할 대상이 분명히 정해진다.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긴 주체는 그래서 쉴 시간이 생긴다. 하지만 자기와 경쟁하는 자는 어떨까? 자기를 넘어서려는 욕망은 사실 불가능한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를 넘어선다는 건 곧 죽음에 이르는 일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소모, 자기 착취라는 말로 전개되는 성과주체의 무한경쟁은 이렇듯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소진(消盡)’으로 이어진다. 자기를 규율하는 존재가 자기라면 그 결과 역시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한다. 성과에 대한 강박증은 자기와 경쟁하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피할 수 없다. 남들이 빨리 하면 나는 더 빨리 해야 한다. 기준은 항상 밖에서 오지만, 그 기준에 또 다른 기준을 더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성과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쏘는 것은 이로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해야 하겠다.
한병철은 성과사회의 이런 특성을 ‘활동사회’라는 말로 바꿔서 표현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활동사회’는 휴식이 없는 사회를 의미한다. 도핑을 해서라도 성과를 내려는 스포츠 선수들에 빗대어 그는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라고 주장한다.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어 무한경쟁에서 이기려는 마음은 과거에는 ‘정신력’이라는 이름으로 권장되었다. 정신력만 강하면 어떤 상황도 극복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성과사회를 사는 주체들을 탈진에 이르게 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탈진 상태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쉬는 방법밖에는 없다. 지은이는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71)라고 규정하면서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를 그 맞은편에 세우고 있다. 무위의 피로는 ‘안식일’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말 그대로 아무 일도 안 하고 쉬는 “막간의 시간”에 해당되는 셈이다. 막간의 시간은 무한경쟁의 바깥에 있다. 이 시간에 이르러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72) 「우울사회」라는 또 다른 글에서 지은이는 피로한 사람이 “막간의 시간”에 느끼는 이러한 태평함=평화로움을 “치유적인 피로, 상처를 아물게 하는 피로”(82)라고 표현한다. 자신을 탈진 상태로 내모는 자아 피로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셈이다.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자유를 지니고 있다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다만 무한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성과를 내지 못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만끽할 수 없다는 말이다. 성과주체의 무한 자유는 그러므로 성과를 내는 주체가 누리는 무한 자유로 정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누리려면 성과를 내야 한다.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는 성과주체는 결국 자유를 얻기 위해 자유를 희생하는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기를 끊임없이 착취하면서도 그것을 ‘온전한 자유’로 느끼는 이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성과사회의 주권자는 자기 자신의 호모 사케르”라는 한병철의 주장은 여기서 그 근거를 얻는다. 조르조 아감벤은 주권자=권력자 앞에 벌거벗은 생명으로서 호모 사케르를 이야기한다. 그들은 법 밖에 있으므로 언제든 죽여도 되는 존재들이다. 아우슈비츠에 감금된 유태인들이 그 예에 해당한다. 하지만 후기사회의 성과주체는 이런 유태인과 다른 상황에 처해 있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를 호모 사케르로 만드는 저주는 성과의 저주이다.” 성과주체는 자기가 자유로운 존재라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성과라는 강박증에 시달리며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 착취하면서 그는 또한 스스로를 끊임없이 챙긴다. 잘 먹고 잘 사는 ‘웰빙’이 건강의 이름으로 성과주체들을 다독인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없다. 몸이 회복되면 다시 자기 착취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한병철의 「피로사회」와 「우울사회」는 후기근대 성과주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질병의 은유를 바탕으로 논의가 전개되는 이 책에서 지은이는 스스로를 자유로운 존재로 착각하며 자기 착취를 일삼는 성과주체의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다. 성과주체의 이런 모습이 우리 사회를 분석하는 틀이 될 수 있는지는 논란이 있지만, 우리 사회가 무한경쟁을 중시하는 성과사회로 진입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어느 이론이나 현실의 전모를 담아내기는 힘들다. 한병철의 이 책 역시 그가 경험한 세계(독일)를 분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이론을 한국사회에 적용하는 문제는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는 있다.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자기 착취도 서슴지 않는 사회를 살고 있다. 속도 경쟁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는 여유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 여유가 없이 무한경쟁의 속도에 자신을 내맡긴다면 지은이의 주장처럼 우리는 곧바로 탈진할 수밖에 없다. 성과주체의 자기 착취에 스스로 빠져드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게 될 거라는 말이다.
우리의 욕망과 의지는 과연 우리의 것인가? 우리는 정말 자유로운가?
이책 심리정치는 이전의 스스로를 착취하는 피로사회,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투명사회 라는 책들의 결산물과도 같다.
이저자의 특성상 글이 너무 함축적이다 보니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럼에도 몸에 딱 들어맞는? 옷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그건 아마도 철학이란게 우리와 밀접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철학을 잘모른다...)
어쨋든 그럼에도 그러한것들을 느끼지 못했거나 아니면 느꼈더라도 그것을 글로 쓰지 못하는것들을
보게 되어 반갑다.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호감을 사고 욕구를 채워주고 하는 ‘스마트 권력’이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적, 무의식적 사고를 읽고 분석하며,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종해 자본에 의존하게 만든다. 이러한 심리정치 시대에는 지배가 그냥 저절로 이루어지며 사회적 거상이 일어나는 대신 우울증 환자가 양산된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지배 관계에 들어오도록 유도하는 권력의 기술이 훨씬 더 효율적이다. 그것은 가로막고 억누르는 대신 사람들을 더 활발하게 하고 더 자극하고, 가능한 한 최상의 상태로 만들고자 한다. 신자유주의적 권력 기술의 목표는 인간을 온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존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작가가 말하는 새로운 권력은 스스로 활발하게 활동하게 만들어 그것을 권력이나 자본이 유리한 방향으로 조종하여 자본에게 권력에게 의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예전에 모회사 컴퓨터 교육강좌에서 접했던 빅데이터에 대한 부분이 인상깊었다.
그때 그걸 보고 조금 아니 많이 과연...그것이 거대한 자본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거기에 대해 반박을 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없었기에 찜찜함이 남아 있었는데 웬지 이책을 읽으니 그 찜찜함을 씻어주는듯 속이 풀리는듯하다..
축적되는 어마어마한 데이터 더미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아무런 답도 해주지 못한다. ‘ 양화된 자아” 역시 자아에서 의미를 완전히 제거해버리는 다다이즘적 자아 기술이다. 자아는 온갖 데이터로 분해되어 결국 의미의 진공 상태에 이르고 만다. 양화된 자아의 구호는 “ 수치를 통한 자기 인식” 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가능한 모든 데이터와 수치를 쌓아 올린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자기 인식이 만들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수치는 자아에 대해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못한다. 계산은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자아를 지탱하는 것은 이야기다. 계산이 아니라 이야기가 자기 발견과 자기 인식에 이르게 해준다.
빅데티터는 매우 파편적인 지식만을 제공할 뿐이다. 빅데이터가 보여주는 상관관계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지 못한다. 빅데이터에는 개념도 없고 정신도 없다. 빅데이터가 약속하는 절대지는 절대무지와 다름이 없다.
--빅데이터 중에서 --
인간의 기억은 하나의 이야기 이며, 그것은 망각을 필수적 구성 요소로서 포함한다. 반면 디지털 기억은 빈틈없는 덧붙이기이며 누계이다. 저장된 데이터는 셀 수 있을 뿐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다. 저장과 호출은 서사적 과정인 회상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이를 테면 자서전이 서사적인 회상의 기록인데 반해, 타임라인은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타임라인은 그저 사건과 정보 들의 열거와 덧붙이기에 지나지 않는다.
망각:
기억은 살아 있는 역동적 과정으로서 그 속에서 상이한 시간의 층위가 서로 간섭하고 영향을 미친다. 기억은 부단한 고쳐쓰기와 재배치의 과정 속에서 형성되고 변화해간다. 프로이트 역시 기억을 유기적 생명체로 파악한다. “ 자네도 알다시피, 나의 연구는 우리의 심리적 매커니즘의 중첩된 여러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네 때때로 현존하는 기억 자취의 재료가 새로운 관에 따라 재배열되고 재기술되는 과정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지, 그러니까 내이론의 본질적 새로움은 기억이 다양한 종류의 기호로 기록되어 있어서 한 겹이 아니라 여러 겹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이 있네” 그러므로 늘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며 동일한 형태로 호출될 수 있는 유일한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망각 중에서 --
우리는 디지털의 총체적 기억 속에 갇혀버렸다. 반면 벤담의 파놉티콘에는 효율적인 기록 시스템이 없다. 다만 집행된 형벌과 그 이유를 적어둔 ‘ 조치 대장”이 있을 뿐이다. 수감자의 삶은 기록되지 않는다. 감시하는 빅브라더는 어차피 수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소망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건망증이 심한 빅브라더와는 반대로 빅데이터는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이미 이러한 이유만으로도 디지털 파놉티콘은 벤담의 파놉티콘도바 더 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빅데이터는 새로운 디지털 계급사회를 만들어낸다. “ 쓰레기”로 분류된 사람은 최하층 계급에 속한다. 점수가 낮은 사람은 신용대출을 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페놉티콘과 나란히 ‘ 바놉티콘 ‘ 이 수립된다. 파놉티콘이 시스템에 갇힌 수감자를 감시한다면 바놉티콘은 시스템에서 떨어져 있거나 시스템에 대해 적대적인 자들을 불청객으로 낙인찍고 배제하는 기구다. 고전적인 파놉티콘이 훈육의 기능을 수행한다면, 바놉티콘은 시스템의 안전과 효율을 보장한다.
바놉티콘의 궁극적 목적은 쓰레기가 “가치 있는 “ 생산물과 분리되어 쓰레기 처리장으로 보내질 수 있도록 확실히 치워두는 데 있는 것이다.
디지털 기억은 무차별한, 마치 언데드와 유사한 현재의 점들로 이루어져 있다. 살아 있는 것의 시간 구조가 넓게 펼쳐진 시간적 지평을 본질로 한다면, 디지털 기억에는 그런 지평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로써 디지털화된 삶은
생동성을 잃어버린다.
정신은 하나의 결론, 즉 부분들이 지양되어 의미 있게 담겨 있는 전체다. 전체는 결론의 형식이다. 정신이 없다면 세계는 단순히 덧붙여진 것들의 더미로 해체되고 말 것이다. 정신은 자기 안에
모든 것을 모아들이는 세계의 내면, 세계의 총화를 이룬다. 이론 역시 부분들을 자기 안에 포함하고 거두어들이는 하나의 결론이다. 크리스
앤더슨이 선포한 ‘이론의 종말”은 결국 정신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빅데이터는 정신을 완전히 불구로 만든다. 순수하게 데이터의 힘으로 추진되는 인문과학은 더 이상 인문과학이 아니다. 총체적인
데이터 지식은 정신의 원점에 놓여 있는 절대적 무지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지각 자체가 결론에 이를 능력을 상실했다. 지각은 무한한 디지털 망을 폴짝 폴짝 뛰어다릴 따름이다. 지각은 완전히 산만해지고 말았다. 오직 사색적인 머무름만이 결론에 이를 수 있다. 눈을 감는 것은 결론에 대한 상징적 이미지다. 정보의 빠른 교체는 눈 감기를, 사색적 결론을 불가능하게 한다. 모든 이성적인 것이 결론이라면, 빅데이터의 시대는 이성이 없는 시대인 셈이다.
데이터가 모든것을 알 수 있다?
과연..
인간의 모든 행동엔 원인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 원인이라는것이 수학의 공식처럼 한가지가 아니겠지만 그 수만가지 원인이 될 수 있는것을 다 읽어낼수 있을까..
오늘 철학공부를 하다가 내일 경제학공부를 하면 나는 또 어떤 인간이 될까...
육류를 좋아하던 사람이 어느날 뜬금없이 야채비빔밥을 먹고 싶을 수도 있을것이며
아니 야채비빔밥을 좋아하던 사람이었는데 빅데이터엔 육류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남아있을수도 있다..
공부를 죽어라 하기 싫던 아이도 생각지도 못했던이유로 공부를 하고 싶을수도 있을 것이다.
어제 문득 이책의 저자가 한국에서 보다 독일에서 유명하다는 것을 보면서 독일이란 나라가 궁금해졌다. 이시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이 유명해졌다는건 그만큼 자유롭고 열려있는 곳이 아닐까...
히틀러만 떠올랐던 독일이란 나라가 갑자기 궁금해 조금 검색했다..
독일여행 을 검색한 이런 나의 맘을 빅데이터는 알런지.....
이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외국여행을 꿈꾸는 철없는 인간으로 분류된건 아닐런지...ㅎ
조금 어려운 표현을 이해하는데 마직막 역자의 글이 도움이 되었다.
이 책보다 더 난해한 시대를 살아가는 한방법으로 이런방법을 제시한다..
우리는 이미 자본에 너무나 깊이 길들여져 있고, 자본이 제공하는 레디메이드 자유의 촘촘한 그물 속에 잘 적응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가 지니는 예속성을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적어도 자본이 확장해가는 새로운 가능성에 열광적으로 달려들기 전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이 추진해가는 선택적 자유화의 과정에서 선택되지 않은 자유의 가능성에 대해, 자본이 결코 착취할 수 없는 자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힘을 한병철은 말한다.." 바로 사유야말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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