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덜리히 '마지막 리사이틀'
콘래드 윌슨('스코츠맨 The Scotsman') / 이재준
어제 저녁, 어셔 홀에서 있었던 프리츠 분덜리히와 후베르트 기젠의 '시인의 사랑'(슈만)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설렌다. 슈투트가르트와 뮌헨의 모차르트 가수로 알려진 분덜리히는 다른 오페라 가수들보다 훨씬 격의 없는 매너로 리트를 불렀다. 그는 리릭 테너로서 맑고 부드러운 음성을 지녔고, 자유자재로 음색과 표현을 조절할 수 있는 높은 기량의 소유자이다. 혹자는 어셔 홀이 이러한 미덕을 제대로 살리지 못할까도 생각했지만, 어제 연주됐던 슈베르트와 베토벤, 슈만의 리트는 우리에게 황홀한 저녁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분덜리히는 또한 풍성한 앙코르를 통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매력도 함께 주었다.
위대한 연주가의 '마지막 리사이틀'은 콜렉터들에게 언제나 의미심장한 아이템이다. 그 연주가가 뜻하지 않게 요절했다면 그 가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36세에 횡사한 테너 프리츠 분덜리히(1930-1966)의 '마지막 연주회'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마지막 연주회는 1966년 9월 4일 영국의 에딘버러에서 열린 가곡 리사이틀. BBC가 녹음한 이 실황은 원래 DG가 분덜리히 사후 LP로 발매하려했으나, 녹음 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유가족이 반대하는 바람에 오랫동안 묻혀있었다. 하지만 음원을 보관한 영국 바비칸의 음악 공연 연구센터(MPRC)가 간간이 연주회를 공개해 왔고, 90년대 중반 미토(MYTO) 레이블이 몇 개의 곡을 제외하고 CD화했기 때문에 이미 매니아들 사이에 '컬트작'으로 여겨져 왔다. 이제 DG가 보다 발달된 기술을 이용해 먼지 묻은 마스터테이프를 우량한 음질로 복원했다.
당시 분덜리히는 슈투트가르트의 뷔르템부르크 오페라단과 함께 에딘버러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자신의 최고 배역인 타미노(모차르트-마술 피리)를 불렀다. 모차르트 테너로 이름이 높던 가수는 이 시기 독일 리트에도 탁월한 재능을 과시하면서 리사이틀리스트로도 명성을 확고히 다지고 있었다. 페스티벌의 매니저였던 피터 다이아몬드가 오페라와 별도로 분덜리히의 가곡 리사이틀을 마련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일상과 같던 리사이틀은 3주 후 분덜리히가 급작스럽게 타계함에 따라 영원히 '전설'로 남게 된 것이다.
분덜리히에게 가곡은 오페라, 종교 음악과 함께 음악성을 이루는 3대 기둥이다. 하지만 데뷔부터 큰 호평을 받은 두 장르와 달리, 가곡 분야에서의 성공은 후천적 노력의 결과이다. 여기에는 짧은 인생 여정의 동반자였던 반주자이자 가곡 연구가인 후베르트 기젠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분덜리히가 슈투트가르트 오페라단에 입단하던 1955년부터 시작되었다. 음악원을 갓 졸업한 분덜리히는 데뷔부터 탁 트인 음색과 파워풀한 톤, 지적인 표현력으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빠르게 인지도를 높여갔다. 당시 슈투트가르트의 '퍼스트 테너'로 불린 요제프 트락셀은 기젠에게 '신참'을 소개하면서, "언제나 나를 대신해 타미노를 부를 수 있는 가수"라고 평했다.(실제로 분덜리히는 트락셀의 대역으로 타미노를 열연하여 유명해졌다) 하지만 이 때부터 두 사람이 함께 연주활동을 벌인 것은 아니다. 잠깐 동안의 만남 후 8년 동안, 분덜리히는 프랑크푸르트와 잘츠부르크, 뮌헨, 빈을 거치며 오페라에 전념했다. 여러 레퍼토리 가운데 특히 모차르트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페터 안더즈를 잇는 정통 독일 리릭 테너로서 입지를 굳혀 나아갔다. 1959년 안스바흐 페스티벌에서 그의 노래를 듣고 충격을 받은 바리톤 피셔-디스카우는 이후 분덜리히를 '놀라운 테너'(분덜리히의 앞글자 'Wunder'는 '놀라운'이란 뜻이다)라고 지칭했다. 하지만 리릭 테너로서 마땅히 욕심을 냈던 리트에서는 사람들의 반응은 그다지 신통치 안았고 본인도 자신의 노래에 대해 못마땅해했다. 1960년 뮌헨에서 가진 가곡 연주회에 대해 '남독일 신문'의 평론가 발터 파노프스키는 '분덜리히는 훌륭한 오페라 가수지만 가곡 창법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듯하다'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고민하던 가수에게 해법을 제시한 이는 동료인 바리톤 헤르만 프라이였다. 59년 잘츠부르크의 '그림자 없는 여인' 공연을 통해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음악적인 견해뿐 아니라 사적인 문제까지 교환하는 절친한 사이였다. 프라이는 분덜리히에게 기젠을 추천하며 단서를 달았다. "하지만 주의하게. 그가 하는 말에 토를 달아서는 안돼. 그가 말하는 전부가 바로 자네가 해야할 것들이니까."
기젠의 회고록에 따르면 분덜리히는 너무나 느닷없이 나타났다.
"1963년 초, 슈투트가르트 오페라 극장 앞에서 차에 타려던 순간, 누군가 내 쪽으로 달려 왔다. 분덜리히였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외치듯 말했다 '당신을 찾고 있었어요. 지금부터 제 반주자가 돼 주셔야만 합니다.'"
당황한 기젠은 그동안 분덜리히가 겪은 마음고생을 듣고는 그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첫 과제는 슈만의 '시인의 사랑'이었다. "첫 곡을 함께 연주한 뒤 분덜리히가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난 머뭇거렸다.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어요. 그게 내가 여기 이유니까요' '별로 좋게 들리지 않는군' '그렇죠, 제 생각도 그래요' 분덜리히는 내가 위안을 준 듯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기젠의 '가곡 훈련'은 강도 높았다. 분덜리히의 열의도 대단해서 중요한 오페라 스케줄도 바꾸면서 '수업'에 임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난 후 두 사람은 처음으로 공개 리사이틀을 가졌다. 장소는 바로 분덜리히의 고향인 쿠젤. 무료로 열린 이날 연주회로부터 분덜리히의 가곡 여정은 닻을 올렸다. 그의 창법은 가곡의 틀에 정확히 맞혀져 있었다. 좀더 능숙하게 레가토를 다루게 됐으며, 아티큘레이션과 인토네이션 또한 시상과 완전히 결부되었다. 물론 오페라에서의 건강한 발성은 여전히 유효했다. 65년 8월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Orfeo)은 분덜리히와 기젠의 파트너십이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이상적으로 무르익었는지 알려주는 지표이다.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가곡, 슈만의 '시인의 사랑'으로 이뤄진 프로그램은 몇 개월 뒤 스튜디오로 고스란히 이어져 역사적인 명반(DG) 탄생의 밑거름이 된다.
이후부터 오페라와 가곡 분야에서 그야말로 분덜리히의 전성기가 펼쳐졌다. 그의 실력은 이미 대륙 밖에서도 널리 인정받았다. 65년 런던 코벤트가든 데뷔(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중 돈 오타비오역)와 더불어, 66년 9월 에딘버러 페스티벌 참가는 그의 국제적인 위상을 알려준다. 앞서 말했듯, 분덜리히는 이 페스티벌에 오페라단과 초청 받았다. 9월 2일 '마술피리'의 타미노를 완벽하게 부른 그는 하루를 쉰 다음 유서 깊은 어셔 홀에서 리사이틀을 가졌다. 독일-오스트리아권 밖에서 처음 갖는 연주회였기 때문에 객석에는 독일에서 온 가수의 지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베토벤과 슈베르트, 슈만으로 이어지는 프로그램은 63년 첫 호흡 때부터 정형화된 것으로, 1년 전 잘츠부르크 실황과는 단 세 곡만 다를 뿐이다. 음반을 들으면 알 수 있듯, 분덜리히의 음성은 당시 최고조에 달한 그의 예술성을 반영한다. 그의 노래는 포르테의 강건함과 피아니시모의 감미로움을 오가며 지성적이고 격조 높은 이벤트를 만들었다.
글 앞머리에 인용한 당시 '스코츠맨'의 리뷰를 좀더 살펴보자.
'보통 리릭 테너는 '시인의 사랑'의 절망적이고 우울한 면을 놓치기 쉽다. 하지만 '불평하지 않으리'는 분덜리히가 지닌 어둡고 극적인 톤, 강력한 감정의 세기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그 이전 곡들에서 나긋하고 섬세한 스타일을 생각할 때 더욱 놀라운 것이다. 이 곡으로부터 악곡은 설득력 있게 전개된다. 풍부한 경험이 녹아든 해석으로부터 청중은 각 곡마다의 미묘한 감정변화를 즐겼을 뿐 아니라 전체의 흐름 속에 은밀한 관계를 이해할 수 있었다...(증략)...68세인 후베르트 기젠이 보연준 가수와의 유니즌과 악흥은 몇몇 실수를 완전히 잊게 했다. 슈베르트에서 그의 환상적인 '휴지(休止)'는 어제 연주회의 가장 유쾌한 경험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