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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행일 | 2015년 12월 0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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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쪽수, 무게, 크기 | 348쪽 | 128*190*30mm |
| ISBN13 | 9788990978943 |
| ISBN10 | 8990978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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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즐거운 것이다. 비록 한정된 여유일지라도 내가 매어있는 장소와 시간을 모두 벗어나 자유의 일단을 맛보게 해주니. 그래서 우리는 기를 쓰고 여행을 떠난다. 수백만원을 들여 열 몇 시간씩 좁은 비행기 좌석에 처박혀 유럽으로 떠나기도 하고, 버스와 기차와 셔틀을 번갈아 타며 바닷가의 리조트를 찾기도 한다. 단풍철이면 모두가 사실상 줄을 지어 한발짝 씩 옮겨야 하는 색고운 명산을 올라가느라 하루 온종일을 낭비하면서도 우리는 떠난다. 그런데 가끔 나는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다. 우리가 찾아가는 곳들이, 우리가 정말로 좋아해서가 아니라 다만 내가 살아가는 지금-여기가 싫고 진저리나기 때문은 아닌가 하고. 우리는 그저, 집과 회사가 아니라면 어디든 상관없
는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정원선의 책을 세 번 째 읽는다. 제주, 전주를 거쳐 아주 작은 도시 제천에 다다른 그의 삶을. 그는 이전에 역사와 문화가 남다른 섬을 이야기했고, 또 후백제의 수도이면서 조선왕조의 본향인 예향의 고장 전주를 구석구석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충청북도 산골 제천이다. 서울과 2시간 거리로 멀지 않으면서도, 딱히 기억나는 무언가가 없던 제천을 그는 왜 선택했을까. 독자들인 우리는 제천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작가가 말하는 제천은, 넓고 크다. 단지 면적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가 아주 섬세한 혜안으로 그 소도시의 내력을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그의 냉철하면서도 다감한 문장은 제천의 곳곳을 때로는 가혹하게 논파하고, 때로는 애정 가득히 어루만지며, 때로는 제천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운명을 민족의 운명과 국가의 존망과 포개 몇 겹으로 들여다보면서 그들의 인생과 독자의 삶을 위무한다. 제천의 입구인 박달재는 그의 책 속에서 통시적 생명을 얻어, 구석기 시대의 피한경로가 되고, 망한 신라의 왕족들이 안식처를 찾다가 비로소 삶을 깨닫는 '철학의 거리'가 된다. 유배지로 쫓겨나는 어린 단종을 저버리지 못하는 생육신 원호의 '통곡의 벽'이 되고, 거센 박해를 피해 산골 토굴로 숨어드는 천주교인 황사영의 베이스캠프가 된다. 동학의 이념으로 세상을 구하고자 했던 농민군의 바람찬 노숙지이면서 또한 구한말 의병을 일으켜 외세와 긴 싸움을 벌이다 끝내는 만주와 상해로까지 건너가는 한국 임시정부의 뿌리가 되기도 한다. 하나의 고개를 말하면서 역사적 희노애락과 살아가는 일의 슬픔과 외로움을 하나로 껴안는 그의 문장에는 확실히 유장한 아름다움이 있다.
이번 책에서 작가는 구성에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진지하고 속깊은 이야기 꼭지와, 능청스럽고 유머러스한 이야기 꼭지가 거의 번갈아 가면서 이어져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어 지루하지 않은 호흡을 선사한다. 원호와 황사영을 다룬 꼭지에서는 끝내 실패했으면서도 도저히 실패라 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여정 가운데 지독한 슬픔과 격렬한 공감을 자아내고, 빵카페와 술집을 다룬 꼭지에서는 기발한 재치와 격의없는 농담으로 평범한 인생으로 살아가는 일에도 해학과 골계를 담을 수 있음을 증명한다.
저자가 낸 세 권의 책 가운데 이번 책이 단연 으뜸인데, 사건을 다루고 분석하는 솜씨나 때로는 희극적으로 때로는 비극적으로 정서를 몰아가는 리듬이 모두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있다. 책 곳곳에 전면 사진(통 사진)을 많이 써 시원하고 편안하게 상상력을 도와주는 편집도 이를 뒷받침한다. 나는 정말 두통약을 먹기라도 한 것처럼, 금세 책 바깥의 현실을 잊고 책 속에 빠져들었다. 책은 350여페이지로 짧지 않은데, 읽고 나면 이상하게 짧다고 느껴진다.
아름다운 바닷가나 계절색 가득한 산을 찾아가는 것도 좋고, 휴양으로 이름난 여름날씨의 이국으로 떠나거나, 볼꺼리가 많은 새로운 대륙으로 날아가는 것도 당연히 좋은 선택이겠다. 그렇지만 만약 여행이, 그저 몸의 이동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과 경험을 얻는 일이라면, 다시 말해 여행이 삶을 내부에서부터 변화시키는 하나의 기회라면 나는 독자로서 정원선 작가의 책을 아주 특별한 지적 여행으로 권하고 싶다. 우리 곁에 있는 작은 도시, 별 것 없다 느꼈던 작은 산골도시는 그의 글에 힘입어 이 땅 역사의 연원깊은 장소,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천혜의 자연이 오밀조밀 살아있는 강렬한 색감의 도시, 생명력 가득한 소우주로 탈바꿈한다.
여행은 결국 장소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내 자신을 바꾸는 어떤 사건일지도 모르겠다고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생각했다. 그런 즐거운 변화가 우리네 일상에 매일 벌어지는 일은 아닐테니, 삶이 지겹고 대도시가 지루한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그의 책을 들고 소도시를 산책하는 일, 그의 눈으로 커지고 넓어진 작은 산촌마을의 광대한 깊이와 소소한 내력을 확인하는 일. 그건 아주 즐거운 작업이다. 올해 겨울에는 제천을 여행해 볼까 한다. 작가가 나에게 세상에 없던 도시를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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