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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작가

페르난두 페소아 Fernando Pessoa
해외작가 문학가
출생
1888년 출생
사망
1935년 사망
출생지
포르투갈 리스본
직업
문학가
공유하기
1888년 리스본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 때 가족 모두가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으로 이주했다. 1905년에 홀로 고향으로 돌아와 리스본 대학 문학부에 입학했으나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학업을 중단하고는 영어 무역 서신을 번역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1912년 『아기아』에 포르투갈 시문학에 대한 글을 발표하면서 작가 활동을 시작했고, 1915년 포르투갈 모더니즘 문학의 시초라 평가받는 잡지 『오르페우』를 창간했다. 일생 동안 여러 잡지와 신문을 통해 130여 편의 산문과 300여 편의 시를 발표했고,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몇 권의 영어 시집을 펴냈다. 1934년 생전에 출간된 저서 중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로 쓴 시집 『메시지』를 출간했다. 틈틈이 기록해놓은 단상들을 모아 『불안의 책』을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간질환이 악화되어 1935년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엄청난 양의 글이 담긴 트렁크가 발견되었고, 아직도 분류와 출판이 진행되고 있다.

작품 밑줄긋기

O* 2026.08.14.
문법은 언어 사용을 규정하면서 옳고 그름을 구분한다. 예를 들어 동사에는 타동사와 자동사가 있지만 현명한 사람들은 느낀 것을 사진처럼 남기기 위해 자동사와 타동사를 일부러 바꾸어 쓰는 경우가 많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불분명하게 보는 대신 그렇게 한다. 내가 존재한다고 말하기 위해 “나는 존재한다”고 말할 것이다. 내 영혼의 개별적인 실체성을 강조할 때는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고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성스러운 능력이 있는 존재임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존재한다”는 자동사를 타동사로 바꾸어 “나를 존재시킨다”고 말할 것이다. 이렇게 문법을 초월한 승리자로서 “나를 존재시킨다”고 말하리라. 이 짧은 두 마디 안에 나의 철학을 구현했다. 마흔 개의 문장을 써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은가? 철학과 언어학에 더이상 무엇을 요구하겠는가?
O* 2026.08.14.
우리의 우월함은 많은 몽상가들이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는 그런 우월함이 아니다. 꿈이 현실보다 우월해서 몽상가가 행동하는 사람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다. 몽상가의 우월함은 현실을 그냥 사는 것보다 꿈꾸며 사는 쪽이 훨씬 더 실용적이라는 이유에서 비롯된다. 몽상가들은 행동하는 사람들보다 삶으로부터 훨씬 폭넓고 다양한 쾌락을 취하기에 실용적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몽상가야말로 진정한 활동가인 것이다.
O* 2026.08.14.
산다는 것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어제 느낀 것을 오늘도 느낄 수는 없다. 어제 느낀 것을 오늘도 느낀다면, 그건 어제를 기억하는 것이지 느끼는 게 아니다. 어제 이미 살았고 그래서 잃어버린 것을 오늘 살고 있는 시체일 뿐이다. 하루가 다음날로 넘어갈 때 전날 있었던 일들을 칠판에서 모두 지우고 감정의 처녀성의 영원한 부활을 경험하며 새벽마다 새사람이 되는 것, 바로 이것만이, 불완전하더라도 지금의 우리인 존재가 되기 위해 해볼 만한 일이고 될 만한 일이다.
O* 2026.08.14.
산다는 것은 물질의 형이상학적 실수 같고, 무기력이 저지르는 실수 같다. 나는 하루가 어떤 날인지, 나의 관심을 돌릴 만한 무엇이 그 안에 있는지 보려 들지 않는다. 여기 내가 쓰는 글 속에 기록됨으로써, 나 자신도 나를 원하지 않는 이 공허함의 찻잔을 채울 수 있는 무엇이 있는지 보려 들지 않는다. 하루가 어떤 날인지 보려 들지 않고, 어깨를 움츠린 채, 슬퍼 보이는 바깥 거리에, 사람들 소리가 지나가는 황량한 거리에 해가 비치는지 아닌지 관심도 없다. 나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고, 가슴이 아프다. 나는 일을 멈췄고, 이곳에서 꼼짝도 하기 싫다. 나는 비스듬히 기울어진 오래된 책상 모퉁이마다 붙여놓은 지저분한 흰색 압지를 쳐다본다. 낙서처럼 휘갈겨진 집중과 산만의 흔적을 뚫어져라 본다. 그중에는 위아래를 뒤집어서 쓰거나 앞뒤를 바꿔 쓴 내 서명들도 있다. 여기저기 숫자들도 몇 개 있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그린 쓰잘 데 없는 그림들도 있다. 압지를 처음 보는 시골뜨기라도 된 것처럼, 생전 처음 대하는 사물을 쳐다보는 자의 눈길로 이 모든 것을 보는 동안 나의 뇌 전체는 시각을 주관하는 뇌의 중심부 뒤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내 안에서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는 내적인 졸음이 밀려온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으며, 아무데서도 도망치지 않는다.
O* 2026.08.14.
나는 항상 현재에 산다. 미래는 알지 못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미래는 모든 것의 가능성이라서 부담스럽고,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 현실이라 부담스럽다. 미래에 대한 희망도 과거에 대한 그리움도 없다. 지금까지 나의 인생은 너무나 자주, 아주 철저히, 내가 원했던 바와는 정반대였다. 그걸 잘 알고 있는 내가, 내일의 인생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날 테고, 내가 원하지 않은 일이 생길 테고, 외부에서 시작된 어떤 일들이 내 의지를 통해 일어날 것이다. 이외에 무엇을 추측할 수 있단 말인가? 내 과거에는 앞으로 반복되어 일어나기를 부질없이 바라면서 떠올릴 만한 일이 하나도 없다. 나는 늘 나 자신의 흔적이거나 복제품에 불과했다. 내 과거란 내가 이루지 못한 모든 것이다. 과거의 감정은 그립지조차 않은데, 그 감정을 느끼려면 그 순간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일단 지나가버리면 페이지가 넘어간 것이고, 이야기는 계속되지만 이미 다른 맥락 안이다.
O* 2026.08.14.
우리의 인생이 창가에 영원히 서 있는 것이라면, 멈춰버린 연기처럼 서서 황혼이 산허리를 아프게 물들이는 똑같은 순간을 항상 지켜보는 것이라면. 그렇게 영원을 초월하여 머물 수 있다면! 적어도 가능한 한 그렇게 멈춰 서서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우리의 창백한 입술로 말하는 죄를 더이상 짓지 않는다면. 날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라!…… 만물의 긍정적인 평온함이 내가 숨쉬는 공기 속 쓴맛과 어울려 분노를 일으킨다. 내 영혼이 아파온다…… 한줄기 담배 연기가 느리게 피어올라 멀리 흩어진다. 산란한 권태 때문에 더는 당신을 생각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다 잉여로구나! 우리와 이 세계, 그리고 이 두 가지 불가사의.
O* 2026.08.14.
인생이란 우리가 인생에 대해 품는 생각이다. 자신이 소유한 경작지가 전부라고 여기는 농부에게 그 땅은 제국이다. 자신이 소유한 제국이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황제에게 그 제국은 한 조각의 땅에 불과하다. 가난한 자는 제국을 소유하고, 제왕은 땅 한 쪽을 갖는다. 우리가 정말로 가진 것은 우리의 감각뿐이다. 그러니 감각이 포착한 대상 안이 아니라 감각의 내면에 우리 삶의 현실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이 말은 다른 것과 전혀 상관이 없다.
O* 2026.08.14.
우리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어떤 사람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이다. 이는 우리가 만든 개념이므로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O* 2026.08.14.
다른 사람의 고통과 좌절을 보면서 은근히 즐거워하는 인간 심리의 어둡고 헤아리기 힘든 사악함. 나는 그 사악함을 나 자신의 고통에 대입해서 관찰한다. 그럼으로써 내가 우스꽝스럽거나 초라하게 느껴질 때, 그게 다른 사람의 일인 양 즐기면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이상하고 신기한 감정의 변형에 의해, 나는 다른 사람의 고통과 실패를 목격할 때 누구나 느끼는 사악하고 지극히 인간적인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곤란해진 모습을 볼 때 나는 아픔이 아니라 일종의 미학적인 불편함과 은근한 노여움을 느낀다. 그건 동정심 때문이 아니다.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사람이 누구든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보일 거라는 사실 때문이다. 나를 화나게 만드는 것은 누군가 다른 사람 앞에서 우스꽝스러워진다는 사실 자체다. 인간이라는 종은 그럴 권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의 처지를 이용해서 웃으려 든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보고 비웃는다 해도 상관하지 않는데, 내 외부에 있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잘 무장된 경멸로 대하기 때문이다. 나와 타인들 사이에 어느 담벼락보다 철저한 경계선을 그어놓고 나만의 정원을 구분지어놓은지라, 나는 타인들을 그들의 위치에 두고서 완벽하게 분리해놓고 완벽하게 관찰할 수 있다.
O* 2026.08.14.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죽음의 불가사의함이야 어차피 내가 꿰뚫어볼 수 없으니 그만두고, 삶이 멈출 때 육신의 감각이 궁금하다. 인간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어렴풋이 두려워할 뿐이다. 보통 사람들은 삶의 전투를 잘 이어간다. 그러다 늙거나 병들면 자신이 심연이라고 인정한 무無의 심연을 두려워하며 거의 쳐다보지 않는다. 이 모두가 상상력이 부족한 탓이다. 특히 죽음이 일종의 잠이라는 생각이야말로 재고의 가치가 없다. 죽음은 잠과 닮은 점이라곤 전혀 없는데 왜 그런 말을 할까? 잠의 핵심은 깨어나는 데 있으나 알다시피 죽음은 그렇지 않다. 만일 죽음이 잠과 비슷하다면 죽음에서 깨어난다는 개념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죽음을 깨어나지 않는 잠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건 정말 아무 의미도 없는 얘기다. 강조하거니와 죽음은 잠과 닮은 점이 없다. 왜냐하면 잠잘 때 우리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우리가 아는 무엇과도 닮지 않았는데, 어느 누구도 죽음이나 죽음과 비교할 만한 것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을 볼 때마다 나는 죽음이란 길을 떠나는 일 같다고 생각한다. 시체는 그가 떠나면서 남긴 옷과도 같다. 누군가 떠났고 그동안 입고 있던 유일한 겉옷은 그에게 더이상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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