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 없는 세계의 망명지
처음 출간 여부를 살피기 위해 이 시인의 원고를 읽었을 때 나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게임회사에 다니고 있군. 매우 피곤한 회사 생활을 하면서 시 속에 망명지를 만들고 있군. 그리고 어라, 이상하게도 거기 간단치 않은 페이소스가 있군!
이 사실이 흥미로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피곤한 생활로부터 잠시간의 망명을 위해 게임의 세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시집 말미에 실린 산문 「미친 사람」은 그가 시를 쓰고 싶었으나 돈을 벌기 위해 게임 시나리오의 세계로 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러나 게임은 그에게 충분하지 않았다. 상품이 된 게임의 배면에 버려진 시나리오가 있었던 것처럼, 생활의 배면에 언어화되지 못한, 누락된 것들이 있었다. “망해버린 게임처럼” 조용한 세계, 또는 “글을 쓰다가 저장을 잊어버리면 생기는 가여운 열매.”
이 산문이 이 시집에 실린 것이 정말 다행이다. 시집의 튜토리얼 역할을 한다. 이 시인의 산문은 시집 전체의 수수께끼가 시작된 연원이 현실화되지 않은 자신의 게임 시나리오였음을 '보여줌'으로써(혹은 재구성함으로써), 흡사 희곡의 첫머리에 제시되는 인물 소개와 지문처럼 기능한다. 그러면서도 산문 그 자체를 또 하나의 의미 있는 허구로 만들어 시집 전체의 맛을 한층 끌어올린다. “나는 아직도 내가 썼던 글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그걸 계속 생각하고, 미쳐 있고, 미치지 않은 척하고 싶은 거야.” 이 산문 속 고백은 시집 전체를 소급해서 읽게 만드는 열쇠다.
이자연의 시는 통상적인 시적 문법으로부터 자주 벗어나기 때문에 의미의 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문법에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소위 미래파를 지나며 우리가 목도한, 무의식 또는 악몽이 파토스를 이미지화하는 방식과도 딱히 부합하지 않는다. 물론 이즈음의 시들이 가진 여러 특징들을 이 시집도 공유하고 있기는 하다. 현실과 가상의 물렁한 경계, ‘작은 현실’에 대한 집요한 기록의 의지. 우리에게는 이제 체제의 ‘바깥’이 없다고 하지만, 체제의 숨겨진 사각지대에 개구멍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시집의 화자들은, 그리고 아마도 시인 자신은, 현실화되지 않은 게임 시나리오 안에 망명지를 만든 듯하다. 귀신, 무당, 여우, 살인자, 조각 인간, NPC들이 그 망명지를 함께 채운다. “사람들이 말하는 정확한 생각이란 일반 쓰레기야/ 동화 속 주인공들은 사실 어른이야.” 이 시인의 세계에서 NPC는 죽어가면서도 사랑을 고백하고, 조각 인간은 “실수 없이/ 와이파이 없이” 걷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인이 생명을 불어넣는 예술가를 ‘조각가’가 아니라 ‘조각사’라고 부른다는 점이다. 조각사는 예술가이기 이전에 기술자다. 돈을 벌기 위해 시 대신 게임 시나리오를 써온 사람이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는 것은, 체념인지 자조인지 모를 정확한 자기 인식이다. 그 조각사가 공들여 만든 피조물들이 이 시집 안을 걸어 다닌다. 완성되지 못한 게임 시나리오를 시 속에 다시 불러들임으로써, 그는 마침내 진짜 망명지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