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만 허락된 자연, 세계, 시간을 꿈꾸는 이들에게 바치는 보헤미안의 에세이
그리고 우리들의 영원한 감동으로 남은 알래스카 포토그래피
알래스카를 사랑한 동양의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의 에세이집 『여행하는 나무』가 출간되었다.
『여행하는 나무』는 10년 전 그토록 사랑했던 알래스카의 자연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난 호시노 미치오가 세상에 남은 사람들에게 바치는 격조 높은 여행기이자 서간집이며 일기장이다. 그리고 그의 삶의 궤적을 쫓을 수 있는 자전적 에세이이기도 하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숙명적인 여행
저자가 극북의 향기 속에서 터득한 인생의 지혜가 담긴 30여 편의 에세이는 소통 없는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숨통을 틔워주기에 충분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여행을 하고 있다.”
그는 알래스카를 통해 자기 자신과 만나는 과정을 ‘여행’이라고 표현했다.
모든 생명은 이 순간에도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잣새 한 마리가 강가에 떨어뜨린 씨앗은 아름드리 나무로 자라고, 오랜 세월 후 밀려온 강물에 휩쓸려 저마다의 생을 마감한 채 바다로 흘러 나갔고, 다시 긴긴 여행 끝에 머나먼 북극의 해안에 당도한 등피나무... 하늘을 향해 솟구치던 옛 시절은 간 데 없이 벌거벗은 유목으로 남았지만, 티티새의 날개를 쉬게 해주고 북극여우의 보금자리가 되어주고, 대지의 자양분이 되어 아름다운 꽃밭으로 다시 태어나는 그 나무처럼 독자들의 인생도 그리 지루하지 않은 여행길임을 넌지시 일러준다.
모든 존재가 늘 같은 장소에 멈춰 있지 않다는 진리와 함께….
첫사랑의 열병에 걸린 소년처럼 알래스카를 사랑하다
저자의 여행 종착지, 에스키모 말로 ‘위대한 땅’ 이라는 뜻의 알래스카. 그곳은 세계가 한 울타리 안에 있는 듯한 지금도 여전히 태곳적 신비를 간직하고 있으며, 아직도 수만 년 전의 원시인들이 세운 토템 폴이 마을마다 우뚝 솟아 있고, 카리부 사슴의 대이동이 빙하를 울리고 썰매를 타고 대륙을 횡단하는 에스키모들의 고향이자, 24시간 해가 지지 않는 백야의 땅, 인간과 자연이 대등한 땅이다.
1973년 19세의 호시노 미치오는 도쿄 시내 간다의 헌책방에서 조지 모블리의 알래스카 사진집을 발견한다. 알래스카 끝자락 쉬스마레프 마을의 사진을 보고 운명적 끌림을 느낀 그는 ‘미국, 알래스카, 쉬스마레프 촌장’ 앞으로 꿈 같은 편지를 띄운다. 그리고 반 년 후, 기적처럼 초대 답장을 받아 3개월의 알래스카 생활을 경험하게 된다.
처음 만난 알래스카의 곰, 바다표범과 순록 사냥, 태양이 한없이 반복되는 백야, 에스키모들과의 즐거운 시간,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는 진리의 깨달음….
1978년 사진기자가 되어 다시 알래스카를 찾는 호시노, 그곳은 그의 고향이 되고 만다.
대지, 동물,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다
20여 년 동안 그곳에 집을 짓고 가정을 꾸린 저자의 눈에 알래스카는 단순히 미개척지가 아니었다. 물론 핵기지 건설의 여파가 남아 있고, 끊임없이 자원개발이 논의되고, 이주민과 원주민 간의 갈등이 현존하는 곳이었지만, 호시노에게 그곳은 인간과 동물이, 모든 생명이 서로 의존하며 극한의 자연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사는 곳이었다.
추운 북극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보다 중요한 게 동물이고 동물보다 중요한 게 대지였던 에스키모와 인디언들, 그들이 느끼는 현대문명에 대한 불안감조차 이미 그 땅의 사람인 저자에게는 자기 삶이 돼버렸다.
주노 시내의 헌책방 ‘옵서버 트리’의 낡은 소파에 앉아 산더미처럼 쌓인 책들을 들춰보면서 정신의 위로를 받기도 한 그는 어찌 보면 알래스카가 허락한 행운아였을지도 모른다.
알래스카 사람들은 저자에게 ‘미리기로크’라는 에스키모식 이름을 지어주고, 동물사냥은 ‘자연이 허락한 선물’이라며 기꺼이 고래사냥에 함께함을 허락하고, 에스키모들의 올림픽에 초대해 웅장한 태고의 춤을 헌사하고, 원주민 친구는 저자의 태어날 아이를 위해 자신의 엄마 이름을 바쳤다.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저자는, 사람이 살 수 없다고 생각했던 차가운 벌판마다 사실은 사람의 흔적이 가득함을 깨닫게 된다. 모든 생명은 결국 화석이 되고 말지만 바람 속의 옛이야기로 현재의 우리들 귓가를 울리고 있다는 생명의 순환을 말이다.
대자연만큼이나 크고도 섬세한 카메라 워크
알래스카의 모든 것을 기록할 운명을 갖고 태어난 듯, 저자의 카메라는 부지런히, 찬찬히, 그러나 무모하지 않게 움직인다. 그리하여 생명체의 연약함과 강인함, 당당함과 아름다움을 호들갑스럽지 않게 포착해낸다.
생명에 대한 그의 연민은, 빙하지대에서 혼자 텐트를 치고 몇 달을 지내며 카리부 사슴의 대이동과 오로라를 기다리다 감동적인 사진을 얻게도 하지만, 아기 사슴의 탄생을 방해하지 않고 축복하는 마음과 북극의 가녀린 꽃들에게 조심스레 인사하는 렌즈의 미학도 발휘한다.
20여 년 동안 저자의 카메라는 알래스카뿐만 아니라, 남미 갈라파고스 제도의 원시림과 잘츠부르크의 고색창연함, 미국의 도시들까지 여러 곳을 담아낸다.
그가 남긴 사진의 저 깊은 곳에는, 브룩스 산맥을 넘나드는 파일럿, 문명사회의 상처를 치료코자 알래스카를 찾은 백인들, 세월 저편으로 사라졌지만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준 학창시절 친구와의 소중한 인연이 담겨 있다.
사색의 울림 가득한 편지를 받는 즐거움
아마도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였을 호시노 미치오의 소중한 기록들은 이제 독자들의 우편함에 꽂히게 되었다.
“자연도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입니다. 모든 생명에게는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는 강인함이 있습니다. 또 너무나 쉽게 사라지는 연약함도 있습니다. 나는 생명이 가진 이 연약함 때문에 알래스카를 사랑합니다. 이런 연약함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어떤 한계 내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허락된 추억의 힘에 대하여-저자에게는 ‘인간이 깨닫지 못한 숨은 지혜를 가르쳐주는 성스러운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비밀 장소가 있다. 루스 빙하, 그곳에는 저자가 자기 기억 속에만 기록해놓은 추억이 있다. 매킨리 산에서 내려와 루스 빙하를 거쳐 먼 북극점 지대를 향해 끝없이 이어지던 단 한 마리 늑대의 발자국. 반복되는 일상에 지칠 때면, 그 발자국은 홀로 여행을 떠난 늑대의 숨결처럼 슬그머니 나타나 놀라운 힘으로 권태로운 시간을 이겨낼 힘을 건네주곤 한다.
또 하나의 시간에 대하여-인간은 자신이 이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자연에겐 그저 하나의 생명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들이 대도시 빌딩 속에 살고 있는 이 시간에도 알래스카의 바다에는 고래들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자연의 시간인 것이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에서 또 하나의 시간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아무것도 낳지 않은 채 그냥 흘러가는 시간들... 독자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 외에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했던 그의 시간을 그저 함께하고 싶을 뿐이리라.
“결과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실패라는 단어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결과에 상관없이 지나온 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진정 의미를 갖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그렇게 쌓인 시간들이다. 그리고 이런 시간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인생일 것이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뿐이다. 주어진 순간을 놓쳐가면서까지 과거와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기만의 여행을 떠나 알래스카의 일부가 되었고, 불곰의 습격을 받아 바람처럼 자연으로 돌아간 영원한 보헤미안, 그가 전해주는 이런 마음의 울림들이야말로, 기계음처럼 반복되는 지금 우리들의 삶에 이 책 『여행하는 나무』가 꼭 필요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