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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8년 01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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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544쪽 | 692g | 140*210*35mm |
ISBN13 | 9788954649919 |
ISBN10 | 8954649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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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어이하나, 안타까운 마음 부여잡고 도리고를 따라 정글 라인을 헤매고 태즈메이니아 산불지역에 갇힌 아이들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달리다보니 어느새 18세기 하이쿠 시인 시스이의 임종 시에 닿고 말았다. 원 하나만 오롯이 그려진 불가사의한 게송. 그건 젠체하는 장식물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붙박인 북극성처럼 거역할 수 없는 엄정한 이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별빛을 좇아 좁은 길을 돌고 돌아 마침내 먼 북에 도달한 자만이 끄덕일 수 있는 비의였다.
먼 북은 어딜까
모두들 바라보는 북극성, 우린 뭘 좇으며 살아갈까? 무엇이 일상에 침잠해있는 우리를 일으켜 생의 의지로 달뜨게 할까? 안온한 삶의 조건이 보장돼 있던 도리고에게 모든 일은 식상하고 의미 없었다. 그를 일깨운 빛은 무엇이었을까
밤에는 엘라에게 편지를 쓰면서, 문학작품에서 배운 사랑의 구절들과 표현에 푹 빠지려고 애썼다. 편지는 길고 따분하고 거짓이었다. 책에서 읽은 적이 없는 생각들과 감정들이 그를 괴롭혔다. 그래서 이것이 사랑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키스의 아내를 향해 소용돌이치는 증오와 욕망을 느꼈다. (115쪽)
아이를 갖게 한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아내로 맞은 남편, 무미건조하게 의무감으로 대하기만 하는 그와 가식적인 결혼생활을 이어오던 에이미에게 반짝 다가온 별은 또 무엇이었을까
에이미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을 그 키 큰 의사에게 했음을 깨달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클럽에서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린 이유도, 그가 방을 나가려고 할 때 자신이 그를 붙잡은 이유도,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다질 뿐이었다. (155쪽)
그건, 사랑이었다. 간절히 닿고 싶은 욕망이었다. 본능적 이끌림이었다. 그 지향점이 있었기에 태국 밀림 속 흙구덩이, 아비규환의 생지옥을 견딜 수 있었다. 복귀한 다음에도 권태로운 일상을 버텨내며 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구역질나는 남편과의 관계를 인내하고 조롱도 참아내며 가난을 이길 수 있었던 힘도 거기서 비롯되었다.
사랑은...
사랑을, 당의정을 입힌 기호품으로 여기곤 한다. 달콤하고 따스한 이미지만 선망하고 소비한다. 그런 환상에 휘둘려 있으니 실망하게 마련이다. 사랑은, 독이 든 사과다. 다만 독이 한쪽 면에만 퍼져있고 나머지 부분까진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사실. 덥석 베어물다보면 독이 잔뜩 오른 부분일 수 있다. 알아챘다면 뱉어내거나 참고 다른 델 맛보면 되는데, 그 당연한 이치를 놓치곤 한다. 그게 인간이다. 그런데 독은 때론 치명적이기도 하다. 그러니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벼랑 끝에서 한 걸음 내딛듯 생을 던져야 한다. 에이미는 사랑의 양면성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의 세계를 전면적으로 파괴하기도 한다는 것을 머리론 분명 헤아렸다. 그런데도 묘한 떨림 앞에 이치와 계산은 까무룩 사라져버렸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알면서도 삶을 소진할 수밖에 없는 것, 사랑은 비극이었다.
등 뒤에서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그의 몸을 느끼며 사랑은 선도 행복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키스와 함께 있을 때 반드시 항상 불행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도리고에 대한 감정이 항상 딱히 행복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에이미에게 사랑은 우주에 닿는 것, 한 사람 안에서 폭발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우주 안으로 폭발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세상을 파괴하는 멸절이었다. 그녀는 누워서 등 뒤에서 조용히 흐느끼는 키스를 느끼며, 사랑은 기쁨과 즐거움만큼이나 불행과 잔인함과 망각에 힘을 소진한 뒤에야 비로소 끝난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녀는 밤마다 그렇게 누워 뱃속에서 깨진 유리 파편들이 굴러다니며 베고, 베고 또 베는 것을 느꼈다. (202쪽)
그 길은 왜 그리 좁을까
아무리 애써도 결국 한 점, 예정된 비극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별짓 다하고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길길이 날뛴 후 언뜻 돌아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만 못한 경우도 있다. 왜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는 걸까, 사랑은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물고기들은 모두 파면을 따라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으며, 부서지는 파도의 손에서 탈출하려고 미친 듯이 헤엄치고 있었다. 그래도 파도는 항상 그들을 힘으로 붙들고 제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갔다. 물에 젖어 번들거리는 그 물고기들이 예정된 운명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에이미는 부풀어 오르는 파도를 따라 자신 또한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기대와 흥분으로 긴장했다. 자신의 파도를 제대로 잡을 수 있을지, 만약 잡아낸다면 자신과 물고기들이 어디로 실려 갈지 알 수 없었다. (157쪽)
그건, 인간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리고의 눈에 에이미가 반짝 들어온 것, 에이미의 남편이 도리고의 고모부였던 것, 도리고가 돌본 가디너가 형 톰의 사생아였던 것, 고타 대령과 나카무라 소령이 하이쿠를 좋아하는 미적 감수성을 지녔다는 것은 본질이나 필연이 아니다. 우연이고 실존이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인간의 지성과 의지로 넓힐 수 있는 길이 결코 아니었다. 예측 불허의 바람에 휩쓸리고 통제할 수 없는 격랑 가운데 내던져진 존재로선 어이할 수 없는 숙명이었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의 지적 설계에 따라 예정된 결말로 이어지는 한 길, 좁디좁은 길 외에 다른 노선이란 주어지지 않는다. 거센 풍향을 거스를 수 없는 작은 새처럼, 운명을 거역할 수 있는 인간이란 없는 것이다.
도리고와 에이미의 길은 엇갈리게 세팅돼 있었다. 아무리 애써도 합류 지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간절히 원하고 견결하게 노력하면 파도를 되돌리고 길을 열 수 있을 거라 믿으며 실낱같은 끈을 놓지 않았다. 도리고는 전장으로 떠나면서 에이미에게 기다리라고, 돌아와서 결혼하자고 고백한다. 약혼녀 엘라가 엄연히 있었지만 뇌구조의 작은 점도 차지하지 못했다. 에이미도 약속을 믿고 질곡을 견딘다. 그러나 도리고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남편 키스 멀베이니, 에이미가 폭발사고로 숨졌다는 신문기사를 보낸 아내 엘라 랜즈베리의 거짓은 일말의 가능성마저 앗아가 버렸다. 그 순간 이들은 죽어버렸다. 의미가 사라진 후 남은 삶은 구차하게 연명하는 셈이니.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으랴
파도에 떠밀려 결혼이란 형식을 수용한 도리고는 겉돌기만 했다. 잦은 스캔들은 엘라를 나락으로 몰아넣었다. 도리고의 무신경과 무책임에 절망했다. 에이미와의 관계에 넌덜머리가 났었는데 늙수그레한 즈음까지 불륜을 거듭하는 남편이 못마땅해 죽을 지경이었다. 아이들도 아빠를 데면데면 없는 사람 취급했다.
그때 도리고를 향한 손가락질은 얼마나 따가웠을까? 그는 지탄받아 마땅한 존재였을까? 가족도 모르는 냉혈한이었을까? 도리고의 심경은 어땠을까? 섹스를 탐닉하며 희희낙락 즐겁기만 했을까? 아마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에이미와의 사랑을 지켜내지 못하고 세속적인 셈법에 따른 정략적인 결혼을 했다는 자책이 그를 늘 억눌렀다. 괴로움을 반항과 일탈로 풀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움의 대상이 엘라나 가족은 결코 아니었다. 바로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무기력했던 자신이 한심해서 못 견딜 지경이었던 것이다. 전쟁의 트라우마도 그를 괴롭혔다. 전쟁 중에나 전후 기념사업 때에도 그는 사랑과 인술의 화신으로 칭송받았다. 스스로도 그렇게 믿었고. 그런 도리고의 뇌리에 맴도는 것이 다키 가디너를 체벌할 때 암묵적으로 동조했던 일이다. 사랑하며 지켜줘야 할 어린 양의 처참한 고통을 끝내 모른 체 해버렸던 것이다. 엘라는 그런 도리고를 이해하지 못했고 안아주지 않았다.
삼백 명의 사람들이 자신이 아는 사람을 세 명이 망가뜨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중략) 그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동의했고, 저 진동에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도리고는 가장 먼저 박자를 맞췄다. 너무 늦게 도착해서 한 일이 거의 없으면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동의한 것이다. (중략) 순간적으로 그는 무서운 세상의 진실을 본 것 같았다. (365쪽)
에이미를 잃고 전장에서 자존감도 상실한 그는 엇나갔고 엘라는 도리고를 미워했다. 사랑 없는 결혼생활에 진저리치며 스스로를 갉아먹어 나갔다.
그를 향해 칼날을 벼리던 엘라, 그녀도 결국 사랑을 확인한다. 도리고의 진심을 읽었던 것이다. 태즈메이니아 거센 산불을 뚫고 기어이 찾아온 도리고 에번스, 그는 엘라와 가족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사지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에이미를 사랑한 방식과는 달랐지만 나름의 사랑의 끈을 꼭 쥐고 있었다. 결코 놓지 않았다.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으며 함께 살아온 두 사람의 고통과 절망, 함께 살면서도 함께 하지 못하는 삶, 애정과 질병과 비극과 농담과 수고로 이루어진 음모, 결혼생활, 기묘하고 무서운 인간 존재의 한없음. (523쪽)
그러니 어찌 도리고를 탓할 수만 있으랴. 그를 단죄할 수 있는, 그를 향해 돌을 던질 수 있는 자 어디 있겠는가. 그도 운명의 격랑에 휩쓸린 한낱 여린 인간이었으니. 사랑 앞에 스러지고 사랑 없음에 아파하며 좁은 길 걸어온 이였으니.
그래서 먼 북은 결국 사랑이었다. 운명적 끌림이기도 하고, 경험을 공유한 자들의 의무감 같기도 한, 바로 사랑이었다. 모든 지남철이 가리키는 한 곳, 중심에 정확히 가닿으면 바늘이 한없이 떨린다는 그 지점, 좁은 길을 거쳐야 비로소 닿을 수 있는 생의 비의, 그 먼 북이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 사랑이 이들을 구원했다. 이 죄인들을 용서한 것이다.
이 책은 기억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처음에는 잊을 수 없도록 선명했던 현실이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져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각색되어지는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기억이 윤색되어져야 살 수 있는 세상이었다. 고통의 순간이 매번 현실처럼 생생하게 회상된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일본에는 죽음을 앞둔 시인이 마지막으로 시를 짓는 모습을 공개하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그 시들을 모아 임종시로 묶어낸 뒤 많은 사람들이 같이 읽는다는 것이다. 이런 일본의 전통을 시작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인공이 18세기 하이쿠 시인인 시스이가 임종시로 남겼다는 동그라미 하나를 의미 깊게 들여다보는 것으로 시작해서 그 동그라미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으로 끝났다. 삶이 시작되어야 비로소 죽음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책 속에는 일본의 하이쿠와 영국 시인 테니슨의 시들이 중요한 모티브 역할을 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외진 섬에서 나고 자란 도리고 에번스는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나 좀 더 성공하고 싶은 욕망에 떠밀려가고 있었다. 뛰어난 재능과 성실한 노력으로 남들 앞에 서게 됐을 때 그는 자신의 삶에 조금은 자신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역사는 더 어두운 구석으로 그를 몰고 갔다. 평생 그를 힘겹게 만들 기억이 될 일본군 포로가 된 것이다. 세계 2차대전 때의 일이었다.
이 책에 나오는 일본군 포로의 삶은 죽음과 똑같은 무게였다. 버마의 정글에서 별다른 장비도 없이 철도를 만드는 노역에 투입된 포로의 삶은 비참이라는 말보다 훨씬 더 비참한 모습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 비참이 정직하게 그려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의 제사(題詞)는 파울 첼란의 "어머니,그들은 시를 써요."다. 일본인들의 이중성과 저열함을 고발하는데 이 구절만큼 적합한 것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공감했다.
일본군은 포로들을 하나의 도구로 보았다. 망가지면 다른 것으로 대체하면 되는 부속품이었다. 그래서 포로들이 끊임없이 죽어야 했다. 맨손으로 만든 선로 곁에는 죽은 포로들의 뼈와 가죽이 함께 있었다. 의사며 장교였던 도리고 에번스는 원하지 않았지만 천 명 포로의 리더가 되었다. 아침마다 일터로 나가야 하는 사람의 숫자를 맞추는 것이 그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었다. 그가 의사로서 애써 살려놓았던 환자들은 일터로 나가면서 죽었다. 자신이 저승의 뱃사공 카론이었다는 사실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가장 힘없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그 시간을 밟고 그보다 조금 강한 사람들이 조금 더 살았다.
철도건설현장은 일본군의 저열함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사람 목숨을 그 어떤 사물보다 더 하찮게 여겼던 나까무라 소령과 고타 대령이 전후까지 살아남아서 삶에 아첨하는 모습은 정말 보기 딱했다. 자결하지 않고 포로가 된 이들을 그토록 멸시했던 일본군인들이 이름을 바꿔가며 숨어살다가 세월이 지나자 전쟁의 향수에 빠져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인간 속에서 괴물을 봐야하는 고통이었다.
우리의 삶은 시작과 끝이 맞물려 있는 동그라미다. 그 동그라미의 크기를 만드는 것이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발걸음 일 것이다. 그 걸음을 옮기는 동안 우리는 친구와 연인을 만나고 사랑의 의미를 찾으며 희로애락의 시간을 보낸다. 마침내 희로애락의 시간이 잠 속에서 걸러지고 잊혀지면서 마지막 발자국을 뗄 때가 돼야 이 땅에 온 것이 어차피 돌아가기 위한 것이라는 자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제 대부분 자신이 온 곳으로 떠났다. 그들이 잊은 이야기를 기억하기 위해 작가는 책을 쓰고, 독자는 그들의 이야기를 붙잡는다.
모임 자리에서 남자들은 군대이야기, 여자들은 산통을 즐겨 주제로 삼는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고통은 무뎌지고 조금씩 떨어져나가 마침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가장 단단한 청춘의 기억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가 남았다. 아이들은 계속 태어나고, 전쟁도 끝나지 않았다. 아이들은 자라서 군대에 가야하고, 모든 사람은 죽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버마의 정글에서 철로를 만들기 위해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던 그런 군대는 사라져야하지 않을까. 이것이 이 아픈 기억을 여러 갈래로 끌고 와서 마침내 세상에 내놓은 작가의 꿈이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잊기 힘든 기억을 가지게 된 나는 1940년대 버마 정글에서 벌어진 고통에 대해 한동안 떠들고 다닐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 이 이야기는 잊게 되겠지만 기억의 어느 곳에는 이미 각인되어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때때로 삶이 아프다는 것을 느낄 것 같아 마음 무겁게 읽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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