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다루는 세 개의 주제에는 정말로 ‘황금’(golden)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하다. 신학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공시적(synchronic)으로 또한 통시적(diachronic)으로도 의미심장하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정의’를 생각하고 탐구하는 시절이 있었나? 그런가 하면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칭의’를 둘러싼 현란한 논쟁은 어떤가? 그리고 ‘연합’은 현대신학의 새로운 도전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은가? ‘사슬’(chain)이라는 표현도 독창적이면서 탁월하다. 연합과 칭의와 정의를 이런 식으로 다룬 예가 드물기도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의’(義)라는 개념이 마치 혈류처럼 이 셋 가운데를 관통하며 면면히 흐르고 있기에 그러하다. 먼저 ‘연합’이라는 조금은 고전적인 주제를 새롭게 들고나온 인물은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이라 할 수 있다. 연합은 주지하다시피 ‘삼위 하나님의 연합’(unio trinitatis)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전통적으로 이를 교회와 신자 간의 ‘신비한 연합’(unio mystica)의 원천으로 보았다. 하지만 몰트만은 교부들의 전승에서 ‘페리코레시스’라는 개념을 새롭게 들고나와 상호관계성을 부각시켰다. 전통신학을 자처하는 이들에게는 신선하고 충격적인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교회는 느슨하고 약화된 그리스도와 연합을 회복하는 근본적인 방책을 모색”해야 한다는 저자들의 주장은 이런 성찰 위에 서 있는 매우 적절한 시대적 탐색이라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현대신학자들 주장과는 달리 철저하게 성경 텍스트를 중심으로 연합의 원리를 살핀다는 점이 훌륭하다. 당연히 출발은 창세기일 수밖에 없지만 성경 전반에 걸쳐 펼쳐지는 연합 사상이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 결론적으로 나타나고 성취된다는 사실을 제시하는 부분은 병기한 관련 설교와 함께 대단한 흥미를 유발한다.
다음으로 저자들도 오늘날 ‘바울에 관한 새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과 ‘바울에 관한 급진적 새 관점’(Radical New Perspective on Paul) 진영으로부터 지속적인 도전이 있다고 언급할 정도로 ‘칭의’ 또한 여전히 뜨거운 주제이다. 더군다나 한국에서는 최근 모처럼 ‘능동적 전가’에 관한 논의가 활발했는데, 이 역시 ‘칭의’와 관련이 있는 신학적 논쟁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이 책이 참으로 시의적절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의미가 되겠다. 하지만 저자들은 놀랍게도 ‘헨리 발나베스’(Henry Balnaves)라는 16세기 종교개혁기의 인물을 소환한다. 그리고 전문적인 연구자들에게도 이름조차 소원한 그가 남긴 ‘이신칭의에 관한 신앙고백서’(1548)를 소개하는데, 학적 호기심과 지적 욕구를 충족하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상당한 정서적 감동을 선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총 3부에 걸쳐 28장으로 이루어진 문장들을 저자들은 하나씩 꼼꼼하게 분석하는데, 그 결과 발나베스가 인용한 성경 구절은 장만 있지 절은 빠져 있거나 심지어는 잘못 인용된 경우가 상당수라는 사실들이 드러난다. 그러나 오히려 감동과 도전이라는 역설적인 상황을 만난다. 감옥에서 성경책도 없어 기억에 의지하며 오직 믿음으로 고백하는 작품이라는 사실을 여러 번 소개했기 때문이다. 결국 ‘칭의’는 추상성이 아니라 구체성을 담보해야 하며, 결국 의인은 고난 가운데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저자들의 결기(結己)를 같이 느껴보시기 바란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주제는 ‘정의’이다. 특히 부제(회복-선교적 의미를 중심으로)를 보아 알다시피 이 책은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나 ‘선교적 정의’(missional justice)라는 개념들을 강조한다. 그러나 가장 주목해야 할 지점은 저자들이 성경 전체를 통해서 드러내기를 시도하는 ‘성경적 의’(義)라고 본다. 성경에서는 주로 ‘공의’로 번역한 ‘미셔파트’라는 히브리어 명사나 ‘정의’로 곧잘 표현하는 ‘체다카’라는 용어가 중요하다. 법학적으로 말하면 전자는 실체적 정의 그리고 후자는 절차적 정의의 속성이 강한 개념이지만, 저자들은 오경에서부터 시가서와 선지서로 이어지는 구약 전체와 복음서와 서신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으로 이어지는 신약 전체에서 드러난 용례들을 일일이 살피는 데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의의 성경적 정의’ 내지는 ‘의의 역사적 의미’라는 설명을 붙여도 충분할 만큼의 귀한 노고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도대체 왜 의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지를 여러 학자의 견해를 참고하여 고민하면서 일종의 대안까지 마련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마지막 단락에서 제시하는 ‘빈곤, 경제정의, 지역개발, 공정사회, 정치 정의, 인권, 젠더 정의, 폭력, 생태와 기후 정의, 예배적 정의’라는 열 가지는 불의가 상식이 되고 의와 화평이 갈라서기 십상인 지금 이 시대에 참으로 첨단적이고 적실하기 짝이 없는 범주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의’란 무엇인가가 중요하다. 각자 저마다 옳다고 소리치는 소견이 가득한 세상이라 더욱 그렇다. 우리에게는 ‘성경적 의’ 외에 다른 의가 없다. 성경적 의는 의 그 자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연합’은 그 자체가 의의 출발이다. 구체적인 삶의 정황 속에서 또한 신자는 주를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주어진 의를 또한 삶 속에서 실천하고 세상에서 실현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연합과 칭의와 정의를 황금사슬이라 표현한 이 역작의 대략이 아닐까 한다. 이 아름답고 도전적인 사슬을 함께 짊어지고 나아가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