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무더위가 오기 전 저자가 분단의 상처가 덧나 있는 파주 대동리의 벙커갤러리를 찾아와 이 책의 출판구상을 밝혔을 때, 내가 요청한 것은 오직 하나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하라’는 것뿐이었다. 역사에 대한 통찰과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닌 저자이기에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나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벙커갤러리에서 저자는 전투공간의 의미를 넘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보호하는 둥지로서의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또한 중기관총 거치대에서 바라보이는 북녘의 산하를 보며 생명과 평화, 그리고 사랑의 화살을 찾아낸 이도 바로 그였다. 이 책에서도 그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입법자는 철학자처럼 고민하고 농부처럼 말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농부처럼 고민하고 철학자처럼 말한 법문조차 그의 상상력을 빌리면 법문은 시가 되고 법전은 노래가 된다.
저자는 정치관계법에 관해서 누구에게도 윗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사실 그가 경쟁해 온 것은 옆의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선거사이다. 그래서 그는 치열한 고뇌의 세월도 함께 견뎌내야 했다. 언젠가는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남긴 ‘역사의 간지(奸智)’라는 말의 의미를 그도 이해하는 날이 올 것이다.
내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의 중책을 맡고 있을 때, 저자는 법제국장으로 더 나아가 선거정책실장으로 선거를 총괄 지휘하면서 국민들로부터 큰 사랑과 신뢰를 받았다. 멋진 수호자들과 함께 선거관리위원회의 아름다운 시절(Bella Epoch)을 이끌었던 것이다. 이제는 한여름 밤의 꿈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가 중앙선관위에서 물러난 후 선거관리위원회의 공정성에 관한 사회적 논란이 제기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생각한다. 내가 중앙선관위 사무총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당대 최고의 헌법학자들과 함께 교우하고 토론하면서 미래의 헌법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선거를 민주적 기본질서의 확고한 축으로 담아내려 노력하던 저자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곧 우리였다.
최근에는 2025년 1월 실시된 대한체육회장선거에서 저자와 다시 만났다. 나는 선거운영위원장을 맡았고, 그는 주심위원처럼 논의를 주도했다. 선거결과 대한체육회를 둘러싼 분쟁이 종식되고 갈등이 해소되었다. 이것이 바로 공정선거의 힘이다.
이제 저자가 조합장 선거론을 끝으로 위탁선거에 관한 일련의 집필을 마무리한 후 이 책을 통하여 본업으로 돌아온 점을 기쁘게 환영한다. ‘법은 입법자보다 현명하다’는 말이 있다. 법의 역사성으로 이해한다. 평소 시대정신의 도도한 흐름에 따라 법 해석에 구체적 타당성을 확보하려는 그의 지혜를 사랑하고 존중해 왔다. 이 책을 통하여 그의 지혜는 이제 우리 모두의 것이 되었다.
운명의 신은 다소 특이한 방식으로 저자를 사랑한다. 섬기고 봉사하는 능력은 아낌없이 주었으되, 군림의 권한은 인색하였다. 모름지기 민주주의 신념과 공화국에 대한 열정을 품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견뎌야 할 숙명이다. 글로 다하지 못한 그에 대한 사랑은 내 재능을 살려 책표지의 그림에 담았다. 이제 분단의 철망 아래 수줍게 피어난 작은 들꽃의 향기를 붓에 적셔 작가에게 전하는 말을 남긴다.
“언제나 깨어 있으라! 잠들면 춤출 수 없나니···”
2025. 4.
파주 벙커갤러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