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원력을 이어가는 길
초여름으로 접어드니 해인사 백련암 뒷산에는 짙푸른 녹색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어두운 거리를 환하게 밝혔던 연등 물결이 아직도 마음에 여울져 남아 있건만, 하안거 결제를 앞두고 진행되는 아비라기도의 법신진언 소리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 힘찬 기운이 되어 백련암 마당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런 좋은 시절에 혜달스님이 지나온 길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세상에 내놓는다 하니, 두 번째 은사恩師로서 반갑고 고마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소납은 혜달스님이 보내온 원고를 읽으며 한동안 옛 추억에 잠겼습니다. 제가 백련암에 출가하여 좌선실 한쪽에 앉아 있을 때, 다른 쪽 구석에서 경전을 읽고 때로는 꼿꼿이 앉아 정진하던 젊은 사형이 있었습니다. 원명圓明스님이었습니다. 저보다 속가 나이는 어렸지만 백련암에는 먼저 들어온 사형師兄이었고, 그 맑고 단정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 사형이 훗날 영어를 익혀 세계에 한국불교를 전하겠다는 원을 세우고, 스리랑카와 영국을 거쳐 방글라데시, 네팔, 러시아, 중앙아시아까지 다니며 국제포교의 길을 열 줄이야 그때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출발점으로 1987년 9월에 서울 소격동에 연등국제불교회관을 창립해서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들에게 한국불교를 알리겠다고 했을 때, 그로부터 10년 후 강화도에 연등국제선원을 세우겠다고 했을 때, 사제로서 도움은 되어 드리지 못하고 걱정만 앞섰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원력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계산으로는 어려워 보여도 원력으로는 길이 열리는 법입니다.
혜달스님은 바로 그 원력 위에 피어난 한 송이 연꽃이라 생각합니다. 인도 아루나찰 프라데시에서 차크마족으로 태어나, 안띰 프리야라는 이름으로 불교의 숨결 속에서 자라고, ‘사사나 키티’라는 이름으로 상좌부 불교의 비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와서 원명스님의 상좌가 되어 혜달이라는 법명을 받았습니다. 한 생에 한 번 출가도 어려운 일인데, 스님은 인도와 한국이라는 두 불교의 물길을 건너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한국에 왔다고 해서 길이 순탄했을 리 없습니다. 말이 다르고, 법도가 다르고, 절집 살이의 습관도 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혜달스님은 피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어와 예불을 익히고, 여러 나라 도반들과 살며, 한국 선불교의 안거정진을 몸으로 배웠습니다. 외국인 스님으로만 머문 것이 아니라 한국불교 안으로 한 걸음 한 걸음 힘차게 걸어들어왔습니다.
그러던 중 첫 번째 은사인 원명스님이 홀연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승을 잃은 상좌의 막막함이야 말로 다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때 혜달스님은 소납의 상좌가 되어 조계종 비구로서 다시 우뚝 섰습니다. 저로서도 이 인연을 가벼이 여길 수가 없습니다. 원명스님의 원력을 이어가는 일이고, 성철 큰스님의 법맥 안에서 한 수행자를 다시 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책의 부제처럼, 혜달스님의 삶은 참으로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본래 정진하고 공부하는 이판의 길을 좋아했던 스님은 연등국제선원이 흔들리고 원명스님의 뜻을 이어갈 사람이 필요할 때, 사판의 소임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2012년 강화도 연등국제선원의 주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 후 강화도에서 밭을 일구고, 템플스테이를 통해 외국인과 한국인을 맞이하고, 차를 내고, 참선을 가르치며 살아온 그 세월이야말로 자기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자기 앞에 놓인 인연을 따라 살아가는 수행자 본연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 차크마족의 아픔을 알고, 낯선 나라의 외로움을 알고, 스승을 잃은 막막함을 겪은 혜달스님이기에 “자기를 위하지 말고 남을 위해 기도하라”고 늘 말씀하신 성철스님의 가르침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실천해 왔으리라 믿습니다.
이 책의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이 책과 인연을 맺는 독자분들은 책에서 한 외국인 스님의 고생담만을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국경을 넘어 이어지는 불법의 인연, 스승의 원을 이어가는 제자의 정성, 그리고 주어진 인연을 피하지 않고 살아가는 수행자 본연의 마음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원명스님의 국제포교 원력이 혜달스님의 정진 속에서 더욱 밝아지고, 강화 연등국제선원이 이름 그대로 세상을 밝히는 연등의 도량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끝으로 혜달스님의 이야기를 글로 엮어주신 이윤미 선생, 교정교열을 보신 정인숙 선생과 종이책 출판의 저조 속에서도 흔쾌히 책을 펴내신 메종인디아의 전윤희 대표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불기 2570(2026)년
하안거 결제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