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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동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문장을 써온 카피라이터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하우즈컴, 휘닉스컴, 실버불렛, TBWA를 거쳐 이노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오버맨 크리에이티브 본부장을 지냈다. 좋은 카피가 가진 단단한 힘을 나누고자 시작한 블로그 〈그녀는, 코피라이터〉는 누적 방문자 수 77만 명을 기록하며 수많은 기획자와 마케터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아날로그적 감성을 감각적으로 빚어내는 일본의 광고 카피에 매료되어 오랜 시간 수집해 왔다. 세계적인 브랜드들이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던진 단 한 줄의 카피에는 인생을 관통하는 통찰과 계절의 생동감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뜨겁게 빛나는 계절, ‘여름’을 테마로 한 명카피 40개를 엄선하여 이 책에 담았다.

이 책을 통해 매일 똑같이 흘러가던 일상이 하나의 선명한 문장으로 기록되기를 바란다. 저서로는 《짜릿하고 따뜻하게》 《오랜 시간, 다정한 문장》 《물거품에 거품 물지 않기》가 있다.

작품 밑줄긋기

r********8 2026.06.23.
p.94
영화 <동사서독>의 '취생몽사'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었 다. 취생몽사는 마시면 지난 일을 모두 잊게 만든다는 술에 었다. 이 영화는 인간에게 번뇌가 많은 이유를 기억력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말에 공감해서인지, 그때도 기억력에 대 한 이야기를 썼다. 잊어야 살아간다는 것. 삶뿐만이 아니라 일이란 것도, 어느 정도의 취생몽사를 마신 듯 살아야 하나 보다. 섭섭한 과거를 계속 끄집어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그냥 나의 에너지만 닳아버린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쏟아 낼 뿐인 것.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에도 어느 정도의 시간은 필요했다. 그 이후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에는 뚜껑을 덮어버린다. 넘치지 않게 그냥 불을 끈다. 곧 식어버린다. 그리고 냄비를 비우며 그곳에 뭐가 있었는지도 잊어버린다. 모두가 힘들게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광고가 중 단되고 물거품이 되는 이유는 클라이언트에게도 그들만의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모두가 속상하다, 라고 생각한다. 쓰레기라고 소리치며 욕한 것도,그러면 안 되는 일이긴 하지만 뭔가 이유는 있겠지, 라고 생각하며 그냥 삭제해버리면 편하다. 나에게 그런 클라이언트가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그러니 밤 11시의 카톡도 삭제해 버렸다. 지금은 어떤 내용의 메시지였는지 잊어버렸다.힘든 일들을 일일이 기억하고 되새길 수 없다. 내 뇌의 용량에는 한계가 있다. 내 마음의 평수도 그렇게 넓지 못하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 나머진 휴지통으로 버린다 영구삭제해도 좋다. 끝없이 저장해두었다간 내가 인어공주처럼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물거품으로 만든 것을, 나 역시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다 광고 말고도 나에겐 번뇌할 것들이 정말 많으니까. 광고 쯤이야······. 건배, 취생몽사
r********8 2026.06.23.
p.77
언젠가 누구에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와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인생이 크게 바뀌는 순간은, 결혼할 때가 아니라 아이가 태어날 때인 것 같다고.결혼하면서 이미 인 생이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를 낳고 보니 그것은 예고편처럼 느껴졌다.이것은 분명 그동안 모르고 있던 새로운 세계였다.하루하루의 소소한 일과뿐만이 아니라 일주일의 시간표 그리고 인생 계획 자체가 완전히 달라져버렸다.출산은 놀라운 일이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식과 상상을 다 초월한 일이었다.아이를 낳고 1년간은 어마어마하게 우울했다.산후우울증이라는 것이 호르몬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대부분의 산모들이 겪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했었다."끝이 없는, 어두운 동굴 같았지만 결국 끝이 보여요"라고 충고해준 사람도 있었다."지금은 아이가 알아보지도 못하고 무조건 애정을 줘야 하지만 아이가 반드시 애정을 돌려줄 거야."그 당시의 나처럼 신생아 육아에 힘겨워하는 사람을 위로했던 문장도 떠올랐다. 엄청 힘들었지만 시간이 흐르면 너무 행복해진다. 내가 고군분투하며 말라가는 사이, 아이는 스스로 뒤집기를 노력했다. 그 모습이 정말 대단했다.여러 번 실패 를 했다. 지금 뒤집어야 한다고 누가 아이에게 가르쳐준 걸까. 갑자기 혼자 노력하더니 끝내 성공해냈다.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아이는 성장의 계단을 혼자서 척척 밟아 가기 시작했다.때가 되자 스스로 기어가기 위해 애를 썼다. 처음엔 앞으 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뒤로 가기도 했다. 원하는 방향으 로 나아가지 못해 끙끙거렸다. 발버둥을 엄청 해댔다. 혼자 여러 시도를 해보더니 조금씩 앞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신의 활동반경을 넓혀갔다. 기어다니다가 스스로 앉았다.
r********8 2026.06.23.
p.80
때가 되자 스스로 기어가기 위해 애를 썼다. 처음엔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뒤로 가기도 했다.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해 끙끙거렸다. 발버둥을 엄청 해댔다. 혼자 여러 시도를 해보더니 조금씩 앞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신의 활동반경을 넓혀갔다. 기어다니다가 스스로 앉았다. 또, 어느 날 갑자기 두 발로 일어서려고 노력하기 시작하더니 두 발로 당당하게 서고야 말았다.자신의 성공에 기뻐하던, 당당한 표정이 나의 사진첩 속에 남아 있다. 무언가를 붙잡으면서 한 발짝씩 걸어나갔다. 뒤뚱뒤뚱. 시킨 것도 아닌데 연습도 정말 열심히. 척척. 아이는 참 대단하다. 1세의 아이가 엄마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했다.지금도 그렇게 느낀다. 모든 것이 낯선 경험인데 아이는 해내고 있다. 나는 아이 덕에 사람이 얼마나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태어나는지를 알았다. 음식을 먹는 것도, 이로 어떻게 씹어야 하는지도 가르쳐야 하고 배워야 하고 연습해야 하는 것이었다.아이는 코 푸는 것도 배워야 했다. 아직까지 그것을 못 해내고 있다. 코 푸는 게 어려운 일일 수 있는 것이다. 나뭇잎도 모래도, 땅의 조그만 돌까지도 모든 것이 낯 설고 새로운 것이었다.세상은 이 아이에겐 엄청 신기한 곳이다. 아이가 처음 바다를 마주했을 때의 옆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경이로운 눈빛을 기억한다. 모든 것이 처음이니 두려운 경험투성이일 텐데, 물러서지 않고 마주하고 있다. 그 열심인 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다시 세상을 배워가고 있다.세상의 절반을 새롭게 발견한 기분이다. 관심 없던 이야기가 관심 있게 들리고, 나의 아이가 소중 한 것처럼 남의 아이가 소중하고 귀여워지기도 한다.가방을 메고 친구와 걸어가는 초등학생만 봐도, 체육복을 입고 뛰어가는 중학생만 봐도, 그 모습이 대견하고 기특하게 느껴진다. 열심히 자라나고 있구나, 생각하면서.
r********8 2026.06.23.
p.25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 호흡을 줄 수 있도록. 책에 쓰이는 것이 아니라 영상과 함께 호흡하며 흐르는 것이니까, 또 대부분 성우의 내레이션이 존재하는 문장이므로 그것을 신경쓴다.시작부터 끝까지 흐름을 타고 가다가 결말은 때론 힘 있게, 때론 여운있게 마무리될 수 있도록.'어색한 단어에 도전해볼 것.' 흔하지 않은 단어를 써보자고 조언하는데, 이건 지금의 나에게도 늘 숙제다.나도 스스로의 어휘력에 벽을 느끼며 좌절하곤 한다. 신입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일본 카피들을 공부하는 이유 역시 그들이 평범 한 어휘를 독특하게 잘 사용하기 때문이다.클라이언트가 어색하다고 싫어할 때가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귀에 걸려 야 하는 것이 카피의 도리니까."어색해야 귀에 걸리죠"라면서 최대한 그 도전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그리고 마지막, 가장 가끔 전하는 규칙은 남을 울리고 싶으면 본인이 울면서 쓸 것.만화 『원피스』에 푹 빠져 살던 언젠가의 일이었다. 무언가에 몰입하면 그에 대해 열심히 찾아보고 공부하는 성향이라서, 일본 사이트까지 찾아가 직접 번역해가며 눈에 불을 켜고 흡수하던 시절이었다.그중 한 이야기가 나의 머리를 유난히 두드리고 말았 다. 대략 '원피스의 등장인물들은 우는 얼굴이 매우 인상적인데, 어떻게 그리느냐' 같은 질문이었고 작가는 이런 느낌으로 답했다."그들이 울 땐 나도 울면서 그리고 있다. 내가 울지 않는 이야기로는 누군가를 울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이 인터뷰 이후로 '밀짚모자 해적단'이 울고 있을 때면 오다 선생님도 울고 있는 거구나, 생각이 들었다.얼마나 감정을 이입하여 그림을 그리고 대사를 쓰고 있다는 얘기인 걸까. 만화와는 다르게 광고는 누군가를 울리는 일이 거의 없긴 하다.한때 나의 소원이 '착하고 따뜻한 카피'를 쓰는 것이었 듯, 그런 광고를 만들 일은 어쩌다가 아주 가끔, 진짜 아주 가끔 찾아온다.그럴 때면 오다 선생님을 본받아 나도 울면서 쓰곤 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신념이 되어버렸다.내가 울지 않은 카피는 누군가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그 광고로 인해 누군가가 울었다는 반응을 전해들었을 때의 보람이 유독 큰 것은, 나의 마음이 잘 전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나이도 최대한 숨기고 성별도 최대한 숨기고, 나의 이름이 남지 않는, 남길 수도 없는 직업이지만 어딘가 틈바구니에 나다움을 남기려고 노력한다.그것이 쌀 한 톨의 틈일지 라도, 소소한 신념대로.한 줄 한 줄 리듬감 있게, 단어 하나 하나 남다르게, 최대한 감정을 이입하면서.물론 광고를 영 화 보듯 몰입해서 보진 않으니 이런 노력이 얼마나 필요가 있겠으며,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을까 싶지만, 그럼에도 이 일로 돈을 받고 있는 이상 프로답게, 진지하게.최대한 나를 숨기면서, 최소한 나를 담아갈 것이다.
r********8 2026.06.23.
p.23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와 일해본 사람들이 가끔 '나' 를 발견해주곤 한다. 그렇게 누군가가 '나'를 발견해줄 때마다 안심하고 있다. 매번 브랜드의 색깔에 따라 다른 광고를 만들어야 한다. 내 아이디어의 스타일도 그 목적에 맞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메인 소비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아이디어의 연령과 성별도 달라지고 있어 내가 절대로 드러날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나를 발견해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래도 나만의 신념을 지켜가며 내 일을 완수하고 있구나 하 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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