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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ho 더 후

외국작가 1964 ~

반란과 오페라... ...자태를 드러내는 록 이념 그룹 후는 흔히 비틀스, 롤링 스톤스와 더불어 ‘록 르네상스’를 주도한 브리티시 인베이전(영국의 침공)을 3분한 밴드로 평가된다. 록과 록의 역사를 다룬 백과사전의 전설들 코너에, 비평가들의 글에 그들이 빠지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록분야를 벗어나면 후라는 이름은 당장 소외된다. 롤링 스톤스와 비틀스는 알아도 그들은 잘 모른다. 행여 이름은 인지하고 있더라도 금방 떠오르는 노래가 없다.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구미에서도 다소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정은 비슷하다. 국내에서는 과거 라이선스 시절 후의 앨범 출발은 앞선 두 그룹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조했다. 롤링 스톤스의 히트곡집 음반은 소개되었지만 후는 그나마 그것도 없었다(하기야 히트 곡이 거의 없긴 했지만). 설사 판을 찍어 봤자 잘 팔리지 않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노래에는 우리 정서가 원하는 선율이 없었다. 따라서 후의 곡이 팝의 일상성을 획득하기란 어려웠다. 그러나 일반 대중과는 달리 그들이 평자를 비롯한 록관계자들로부터 받는 사랑은 편애라 해도 별로 과장된 말이 아니다. 1965년 데뷔작 에서부터 1975년 에까지 그 사이에 발표한 대부분의 앨범들이 수작으로 거론될 정도다. 특히 1969년 와 1971년작인 은 예외 없이 비평가 선정 명반으로 뽑히고 있다. 후가 록역사에서 전설의 자리를 틀어쥐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세 가지 사실이 바로 비평가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며 음악 팬들이 기억해야 할 상식이기도 하다. 첫째 후는 1960년대 중반 영국의 과격한 청춘문화 이른바 모드(Mod)와 함께 등장했고 그것을 강도 높게 반영했다. 모드는 본래 패션 운동으로 저임금의 단조롭고 지루한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영국 중산층 이하의 젊은 노동자들이 TV와 고급 잡지 등의 매체를 통해서 유혹적으로 선전되는 값비싼 것들을 향유할 수 없는 데서 오는 소외감을 독특한 복장에 의한 욕구불만의 발산으로 해소하려 한 것이었다. 오토바이와 로큰롤을 가까이 한 ‘로커(rocker)’와 함께 청춘문화를 주도했으나(비틀스는 로커에 속한다) 모드는 하층민적인 로커와 달리 잘 입고, 정규 직업을 유지하고, ‘스쿠터’를 타며 약물을 즐기는 도시적 패턴을 취했다. 후의 멤버들은 1964년 프리랜서 피트 미든(Pete Meadon)의 권유에 따라 ‘하이 넘버스’(The High Numbers)라는 이름 아래 모드의 세계에 입문한다. 그러나 그들의 표현한 모드 정서는 분노와 청춘 세대의 공격성이었고 무정부주의적인 것이었다. 후의 기둥인 기타 리스트 피트 타운센드(Pete Townshend)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삶에 있어서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가 영국의 모드 운동이었다. 그것은 젊은이들의 운동이었고 히피 무브먼트보다 규모가 컸다. 그것은 군대, 강력하고 거친 틴에이저들의 군대였다. 모드가 되기 위해서는 짧은 머리에 스마트한 복장, 좋은 구두와 셔츠를 살 돈이 있어야 했고 미친놈처럼 춤출 수 있어야 했다. 항상 약에 취해 있어야 하고 램프로 뒤덮인 스쿠터를 가져야 했다.” 후로 그룹명을 바꾼 그들은 1965년 데뷔 앨범을 발표했고 현실을 신랄히 비난하는 모드족의 성가를 만들어 냈다. 그것이 ‘나의 세대(My generation)’였다. ‘사람들은 우리를 억누르려 한다. 단지 우리가 그들이 보기에 몹시 추워 보이는 곳을 돌아다닌다는 이유 때문에. 늙기 전에 죽고 싶다.’ 늙기 전에 죽고 싶다(Hope I die before I get old). 이 한마디가 초창기 후의 이미지 전부를 말해준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은 록역사상 최초로 과격한 어조를 동원해 청춘과 기성 세대와의 분리를 획책한 것이었다. 그만큼 이 충격적 선언은 한편으로 ‘늙기 전에 죽지 못한’ 그들을 막판까지 끈질기게 괴롭혔다. 하지만 데뷔시 그들이 펼친 모드 운동은 그들을 단숨에 살찌울 정도로 인상적인 것이었다. 역시 모드 세대의 찬가인 ‘어쨌든 어찌해서든 어디에서든(Anyway anyhow anywhere)’도 타운센드에 따르면 ‘반 중년, 반 상층 계급 그리고 젊어서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기 위한 의미의 노래’였다. ‘애들이 옳다(The kids are alright)’ ‘난 설명할 수 없어(I can’t explain)’과 함께 이러한 노래들은 어느 노래보다 먼저 ‘청춘의 반란’으로 일컬어지는 록의 규범을 확립한 것이기도 했다. 그들은 연주나 무대 제스처에 있어서도 록의 규범을 제시했다. 이것이 후가 갖는 두 번째 의미이다. 공연장에서 후는 영락없는 네 명의 ‘폭도’들이었다. 드러머 키스 문(Keith Moon)은 부수어대듯 드럼을 쳤고(후 사운드의 상징이다) 피트 타운센드는 펄쩍펄쩍 뛰면서 풍차를 돌리듯 팔을 휘두르며 기타 스트링을 가로질렀으며 싱어 로저 달트리(Roger Daltry)는 마음껏 외치며 청중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나마 베이스 주자 존 엔트위슬(John Entwistle)은 의연한 모습을 유지했지만 그것은 결코 기성 세대나 엘리트의 품위와는 상관이 없었다. 멤버들의 외모도 ‘불량 서클’ 아이들을 무색케했다. 피트 타운센드는 한 마리 독수리였고 키스 문은 무정부주의자 같았으며 로저 달트리는 테러리스트의 인상 그것이었다. 언제나 비(非)스페셜리스트였던 존 엔트위슬도 잘해 봤자 폭도의 ‘보급계’같았을 뿐 큰 차이는 없었다. 도무지 폴 매카트니의 세련된 매너와 믹 재거의 섹스 어필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록의 ‘하위문화’적 특질과 정확히 맞물리는 요소였다. 그들은 록이었기에 도리어 ‘특혜’를 받았고 그에 따른 모범생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들은 또 록의 슬로건인 ‘제한된 공간에서의 파괴’를 증명한 존재들이었다. 무심결에 야간업소 공연에서 낮은 천장으로 인해 기타 목을 부러뜨린 것에 착안, 그들은 이후 콘서트 때마다 악기를 부수어 버리는 파괴 연출을 일상화했다. 실상 영화제작자로 나중 후의 관리자가 된 키트 램버트(Kit Lambert)와 크리스 스탬프(Chris Stamp)의 제안에 따라 이루어진 이러한 행위는 모드와 더불어 그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후의 멤버들은 공연 뒤 머문 호텔마다 그 시설물을 부수는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이런 사람들의 음악이 조용할 리 없다. 후의 사운드는 소음으로 정의되며 애초부터 발라드와는 인연을 맺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앰프 사용을 극대화했다. 일례로 밥 딜런과 함께 공연한 와이트 섬(Isle of Wight) 페스티벌에서는 그때까지 영국에서 가장 커다란 사운드 시스템을 동원해 사상 최고의 출력을 내뿜었다. 그때 스피커 중 하나는 청중들에게 “15야드 안으로 진입하지 말라”는 경고딱지가 붙어 있었다. 1976년 5월에 있었던 미국 찰튼 애드레틱 풋볼 클럽 콘서트는 록 그룹에 의한 ‘가장 시끄러운 공연’으로(무려 1백 20데시벨!) 기네스북에 기록되기도 했다. 그들은 소음 발산을 통해 하드 록 생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하드 록 또는 헤비메탈 계보도의 맨 위에는 후가 있다. 역시 메탈의 산파 역할을 한 지미 헨드릭스도 타운센드가 나서서 공식무대 데뷔를 주선했고 지미의 죽음과 실연 때문에 좌절한 에릭 클랩튼의 재기를 도와준 사람도 타운센드였다. 그의 그룹 후는 또 하나의 공적인 록과 팝의 역사에 깊이 새겼다. 그들을 기억해야 할 세 번째 이유이기도 한 그것은 바로 그들이 록사상 최초로 ‘록 오페라’를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1969년에 만들어 낸 는 타운센드의 탁월한 음악 감각과 정신적 동경이 합쳐진 것이었고 모험적 시도를 넘어 음악 예술의 측면에서도 높은 완성도를 평가받은 작품이었다. 그것은 무대와 음반 세계에 갇혀진 록의 ‘비상’을 뜻하는 신기원이기도 했다. 이제 록은 못할 것이 없어졌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던 오페라를 록이 꾸려 냈다는 것은 록의 무한한 잠재력을 웅변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60년대의 록이 사회성 뿐 아니라 ‘예술성’에도 적극 손짓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는 실로 비틀스의 , 밴 모리슨의 과 함께 록이 더 이상 순간의 흥분이 아닌, 영구 불변의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뽐냈다. 토미는 충격으로 인해 보지도 듣지도 말할 줄도 모르는 아이가 된다. 마음속의 장벽 때문에 자아를 찾지 못하는 토미는 핀볼의 마법사가 되어 대중의 우상으로 떠오른다. 이후 그는 어머니의 호소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사랑의 마음이 생겨나 마침내 새로운 사람이 되는데 성공한다. 대강 이러한 줄거리인 의 메시지는 ‘독립’과 ‘자유’였다. 거창한 듯 하지만 결국은 후가 추구해 온 모드와 무대 위의 폭발이라는 주제와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타운센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상태는 10대의 반란이라는 순간에 지속되는 ‘대결’과 ‘도피’ 사이의 역동성에 대한 은유이다. 그것은 또한 로큰롤의 주제이기도 하다. 10대 때는 자신을 결코 책임지지 못한다. 그러나 당신이 대결하든 도피하든, 클래시(Clash)의 말로 하면 머물든 나아가든 간에(Should I stay or should I go) 틴에이저 시절에 가장 중요한 순간은 당신이 홀로 서 있는 것을 깨달을 때이다.” 가 의미하는 것과 관계없이 그것은 오페라라는 이름만으로도 록의 찬란한 영광으로 남아있다. 오페라 실연으로, 앨범으로 또 1975년 켄 러셀(Ken Russel)의 영화로, 1979년 웨스트 엔드 연극으로, 이어서 1990년대에는 브로드웨이 작품으로 다채롭게 해석되면서 하나의 전설로 상승했지만 최후의 영예는 역시 후의 록이었다. 지는 를 두고 “수미상관은 물론 거창한 어휘인 오페라라고 하기에는 충분한 순환 테마를 가지고 있다”면서 “우수한 곡들로 가득차 있고 우아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긴 형태 록(long form rock)의 경이”라고 극찬해 마지않았다. 사실 를 최초의 록오페라라고 규정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미니이긴 하지만 타운센드가 1967년 의 ‘라엘(Rael)’로 시도한 바 있고 킹크스(Kinks) 그룹의 송사이클 걸작 앨범 도 1969년에 선보였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팀 라이스와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록 뮤지컬 도 1969년이라는 동시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세월은 ‘최초’라는 타이틀마저 에게 안겨 주었다. 의 영광은 엄청난 부담으로 타운센드를 짓누르지만 그는 언제나 보여 온 ‘시대적 추세’와 ‘록 본연의 폭발’의 절충적 감각을 또 한차례 유감없이 발휘해 1972년 걸작 앨범 을 발표, 위세 행진을 계속한다. 1970년대 중후반의 대대적인 공연 성공은 한층 후의 무게를 늘려 놓았다. 롤링 스톤스와 함께 ‘록의 공룡’으로 펑크 진영에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 이러한 대중적 성공과 ‘젊어서 죽기를 거부한’ 자세는 1978년 의 도도함과 거만으로 나타나기도 했다(이 점에서 록의 가장 큰 적은 나이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남긴다). 하지만 그들의 적은 외부의 펑크 세력이 아니라 내부의 드러머 키스 문의 돌연사였다. 그의 죽음은 ‘존 보냄의 사망과 레드 제플린의 관계’처럼 그룹의 총체적 위기로 다가왔다. 후의 멤버들은 해산을 선언한 제플린과는 달리 전 페이시스(Faces) 드러머 케니 존스(Kenny Jones)를 영입하여 중단 없는 전진을 다짐하지만 활력의 소진을 극복하지 못하고 1983년 해산하고 만다. 후의 멤버들은 1985년 라이브 에이드 공연, 1989년 캐나다 토론토 공연차 다시 모이지만 그때 후의 이름은 어느덧 역사가 되어 있었다. 온갖 모순과 교묘한 절충 속에서도 후는 끊임없이 내적 긴장, 진지한 야망, 모험욕을 통해 1960년대 록이 확립한 반란, 파괴 그리고 모험의 이데올로기를 온몸으로 실천했다. 후를 해부하는 것은 실로 록의 호흡과 함께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베이비 붐 세대의 가슴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록의 부활이 기대되는 근래 우리 대중 음악의 변화 조짐을 감안할 때 ‘록의 위대한 개척자’인 후의 재조명이 한층 요구된다. 과정 없이 결과만을 바라는 우리에게는 1960년대 서구 록의 뜨거운 피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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