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선명한 악몽,
놀라우리만치 시적인 소설!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 화제의 연재작
주술적인 마력의 문장들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불안의 증상들을 짚어낸다.
모두가 자기 얘기를 하기 바쁠 때, 가만히 응시하는 작가.
모두가 더 가벼운 기체가 되려 할 때, 홀로 광물성을 띠는 작가.
김숨의 다섯 번째 장편소설 『노란 개를 버리러』!
이 놀라운 소설을 소개하기에 앞서, 이 소설이 소년과 개가 나오는 따뜻한 로드 무비가 아님을 미리 밝혀야 하겠다. 물론 김숨을 꾸준히 따라 읽어온 독자들은 『투견』『간과 쓸개』『철』『나의 아름다운 죄인들』 같은 작품들의 심저(深底), 혹은 심저(心底)에 흐르는 한국 소설가 그 누구와도 비견 불가능한 독보적 서사를 익히 익혔겠지만 말이다. 김숨은 “어긋남에 대한 예민한 자각”(문학평론가 강동호)에 대해서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 김숨이 소년과 개에 대해 쓴다면, 아주 다른 이야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네이버 문학동네 카페 연재 당시에도 독자들이 충격과 곤혹에 매 회 빠졌었다. 혹시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새를 먹는 소녀」를 알고 계시는지? 노란 개를 먹어버리지는 않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 소년은 그 소녀와 닮았다. 충격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운동이 필요한 소설이다.
이것은 악몽,
소년들의 악몽과 악몽이 그물망처럼 이어진다면.
누구나 악몽을 꾸지만, 만약 악몽의 모든 세세한 부분을 기억해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악몽은 우리의 악몽과는 다를 것이다. 악몽을 꾸고도 견딜 수 있는 건 그 악몽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인데 후각과 촉각까지 생생하게 기억나는 악몽이라면, 악몽의 세계에서조차 현실과 같은 단위로 시간이 흐른다면, 도무지 끝날 기미가 없다면…… “비명과 함께 썩은 어금니에서 악취가 끓어오르는” 이 꿈은 당신을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어느 날, 아빠의 다급한 손길에 깨어난 소년은 키우던 노란 개를 버리러 간다. 소년의 시선에서도 어렴풋이 느껴지지만 이 소설 속의 아빠는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아니다. 아빠는 소리 없이 웃는 사람이라, 아빠가 등을 돌리고 있을 때면 혹 웃고 있는 게 아닐까 소년은 의심에 빠진다. 택시 기사이면서 품 주머니 안에는 술병이 들어 있고, 아이가 지켜보고 있는데 높은 난간에서 뛰어내리며, 깨워도 깨워도 깨지 않는 실종자 손님을 태우고 다닌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돌처럼 딱딱하고 얼음처럼 차갑고 쉰 냄새가 나는 김밥을 내다파는 엄마는, 절망에 빠진 나머지 이불 밖으로 머리카락만 내놓고 잠이 들곤 한다. 소년은 그런 엄마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리며, 엄마의 입속에 거미를 떨구어 심장에 집을 짓도록 한다. 그러면 엄마는 또 깨어나 소년의 손가락으로 바닥의 개미를 꾹꾹 눌러 죽이는, 그런 관계. 가족이 함께 떠나지만 우리가 아는 가족이 아니다. 노란 개가 복슬복슬한 애완견이 아니라 돼지 간 같은 혀를 가진 버려진 개인 것과 같이, 소년이 노란 개에게 트렁크 한 번 열어주지 않고 물 한 모금 주지 않는 것과도 같이.
아니, 정말 그런가? 이 이야기가 악몽인 이유는 어쩌면 세상에는 이런 가족들이 더 많은데 우리가 그 사실을 마주하기 싫어해서인지도 모른다.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아이 앞에서 사채꾼에게 폭행당하며, 동반자살이라는 이름 아래 죽임을 당하는 아이들은 해마다 몇이나 늘어가는지, 실종과 납치와 살해의 뉴스에 우리는 리모컨을 돌린다. 꿈인 듯 꿈인 듯 오래된 동요처럼 흘러가는 이 소설이 불편한 이유는 현실 어느 곳보다 더 현실을 닮았기 때문이다. 유괴범과 아이가 함께 걸어갈 때, 누군가는 그들을 보고 “아빠와 아들이네, 닮았네”라고 무심히 읊조리는 이 잔인한 곳 말이다. 노란 개를 버리러 가는 소년이 끝없는 도로를 타고 스쳐 지나가는 도시마다, 깨어난 다른 소년들이 다시 악몽 같은 삶을 살아갈 때. 소년들의 악몽이 그물망처럼 이어져 세계를 덮어갈 때. 숨이 막혀서 이 책을 덮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덮는다 해도 이미 책 안의 세계에 침식당할 대로 침식당해버렸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이것은 시,
죽은 사람의 냉장고 재료로 시를 쓴다면.
이 장편소설이 속이 좋지 않아질 만큼 선명한 악몽임에도 불구하고, 손에서 뗄 수 없이 몰입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지독하게 시적인 표현들 때문이다. 굳은 시멘트 덩이 같은 달, 감자떡만큼 흐린 유리, 언 조기처럼 차가운 손, 짓무른 시금치 빛깔 바다, 달팽이를 닮은 기린의 얼굴, 입천장에 단추처럼 달라붙는 알약들, 얼린 인절미 같은 논두렁길, 말린 멍게 껍질을 연상시키는 비둘기 다리들, 플라스틱 수초에 꽃처럼 매달린 잘린 지렁이 몸뚱이, 가자미 같은 플라타너스 잎들, 새의 부레로 만든 풍선, 누렇게 쉬어터진 두부로 된 구름, ?처럼 희고 두툼한 매머드 뼈…… 아무래도 이 시의 재료는 죽은 사람의 냉장고 안인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름답지 않은 건 아니다. 비전통적인 비유들이 금을 긋고 지나갈 때마다 아연하다.
그런데 표현만이 시적인 게 아니다. 스타카토 같은 단문의 문장들이 모이고 모여 이색적인 리듬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김숨 소설이 영미 민간 동요와 유사성이 있다고까지 말한다. 절벽에서 떨어져 이제 끝이려니 했는데 다시 절벽, 춤추는 듯한 스텝과 아찔한 낙하가 노래처럼 이어진다. 김숨 소설의 기이한 운율과 비감한 정서를 규정지을 새로운 설명이 필요한 것은 확실히 사실이다.
여기서 문득 소설가 김숨이 시를 쓴다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는데, 그랬다면 반대로 시인 김숨의 소설이 궁금했을 것 같다.
이것은 연극,
열두 명의 코러스가 돌림노래를 부른다.
이 소설이 시라고 말해놓고, 금세 희곡이라고 말하는 데는 근거가 있다. 문학평론가 강동호는 이 소설의 단절과 돌연성을 짚어내며, “베케트적 부조리극에 다가선 텍스트”라고 규정했다. 끝까지 털 한 올 코빼기를 보이지 않는 노란 개는 확실히 부조리극의 상징 기호다. 앞뒤가 꼭 맞물리는 서사, 누가 누구를 죽였는가에 대한 추론 중심의 서사가 아니다. 그보다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불안의 증상”들을 구현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해체의 낯선 형식을 통해 실은 더 원초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숨은 부조리극 작가다.
또 소년과 더불어 이야기의 다른 큰 축을 담당하는 ‘꼭 열두 사람’은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를 연상하게 한다. 주술적인 마력을 가진 말들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며 스스로 변주를 거듭한다. ‘꼭 열두 사람’의 저주 같은 대사를 따라 읽는 것도 이 유례없는 소설을 읽는 좋은 독법이겠다.
데뷔 이후 14년 동안 아홉 권의 책으로 독자들을 만나온 김숨이지만, 『노란 개를 버리러』가 가진 응축력은 그중에서도 가장 획기적이다. 이 응축 다음으로 어떤 폭발적인 분열이 올 것인지, 소설가의 위험한 행보를 숨죽이고 기다린다. “새들은 날 때 두 다리와 발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문장처럼, 김숨은 무심히 소설의 가장 먼 경계까지 날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