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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 영화음악 (Scott Pilgrim VS. The World OST)

Frank Black, Beachwood Sparks, Beck 노래/Plumtree, T. Rex 밴드 외 3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Universal / Universal | 2019년 11월 29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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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 영화음악 (Scott Pilgrim VS. The World OST)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9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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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분류

디스크

Disc
  • 01 Sex Bob-Omb - We Are Sex Bob-Omb
  • 02 Plumtree - Scott Pilgrim
  • 03 Frank Black - I Heard Ramona Sing
  • 04 Beachwood Sparks - By Your Side
  • 05 Black Lips* - O Katrina!
  • 06 Crash And The Boys - I'm So Sad, So Very, Very Sad
  • 07 Crash And The Boys - We Hate You Please Die
  • 08 Sex Bob-Omb - Garbage Truck
  • 09 T-Rex - Teenage Dream
  • 10 The Bluetones - Sleazy Bed Track
  • 11 Blood Red Shoes - It's Getting Boring By The Sea
  • 12 Metric - Black Sheep
  • 13 Sex Bob-Omb - Threshold
  • 14 Broken Social Scene - Anthems For A Seventeen Year Old Girl
  • 15 The Rolling Stones - Under My Thumb
  • 16 Beck - Ramona (Acoustic Version)
  • 17 Beck - Ramona
  • 18 Sex Bob-Omb - Summertime
  • 19 Brian LeBarton - Threshold (8 Bit)

아티스트 소개 (8명)

노래 : Beck (벡,Beck David Campbell / Beck Hansen)
< Family Line > 데이빗 캠벨 : 벡의 아버지로 크래커, 에어로스미스, 그린 데이 같은 밴드들의 스트링을 어레인지하기도 했던 블루그래스 뮤지션. 벡의 싱글 < Jack-Ass >의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비비 한센 : 한마디로 쿨(Cool!)하다고 할 수 있는 그의 어머니로 13살에 팝 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의 창작 집단 워홀 수퍼스타의 최연소 멤버였고, 배우였으며, 레스토랑의 오너이다. 채닝 한센 ... < Family Line > 데이빗 캠벨 : 벡의 아버지로 크래커, 에어로스미스, 그린 데이 같은 밴드들의 스트링을 어레인지하기도 했던 블루그래스 뮤지션. 벡의 싱글 < Jack-Ass >의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비비 한센 : 한마디로 쿨(Cool!)하다고 할 수 있는 그의 어머니로 13살에 팝 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의 창작 집단 워홀 수퍼스타의 최연소 멤버였고, 배우였으며, 레스토랑의 오너이다. 채닝 한센 : 벡의 동생. 3기 플럭서스의 아티스트이다. 션 카릴로 : 벡의 새아버지로 비비와 함께 LA의 레스토랑을 운영하는데, 1990년대 초반 벡은 그곳에서 종종 연주를 하곤 했다. 션 역시 예술가라고 한다. 알 한센 : 벡의 외할아버지로 플럭서스 운동의 선구자였다. 그는 콜라쥬 작업과 말 많았던 ‘Yoko Ono Piano Drop''이란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벡은 그의 할아버지의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알 역시 < Oderay >앨범의 부클릿에 작품을 싣기도 했다. 벡과 알 한센의 예술세계에 대한 책도 나왔다고 한다. 오드리 한센 : 배우, 모델, 시인이었던 벡의 외할머니. 이러한 핏줄의 흐름을 이어받아 ‘천재는 타고난다? 혹은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이 두가지를 모두 만족시키는 벡은 여전히 ?긍정적인 의미에서- 독야청청, 유아독존의 모습을 고수하고 있는 1990년대 최고의 엔터테이너이다. 1970년 태어난 벡은 그 화려한 혈통의 집안에서 부모의 이혼 외에는 그다지 큰 일 저지르는 것업이 성장했다. 하기야 그런 예술적 기운(?)이 혁혁한 집안에서 무슨 짓을 한들 놀라기야 했겠느냐마는.. 벡이 성장하던 1970년대, 1980년대 초반 LA에서는 펑크의 열풍이 대단했다. 그의 어머니 비비는 펑크 씬과 교류가 있었고, 자신의 집을 그들을 위해 개방하기도 했지만 정작 벡의 관심을 끌은 것은 델타 블루스와 포크였다. 특히 우디 거스리, 블라인드 윌리 존슨, 프레드 맥도웰, 미시시피 존 허트 등이 그에게 영향을 준 아티스트들이고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며 뉴욕의 이스트 사이드로 간다. 당시 뉴욕의 하드코어 씬은 반 포크적인 움직임이 강했는데, 포크와 그 가사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으려는 시도에 벡은 큰 영향을 받았다. 이곳 저곳을 전전하던 벡은 다시 LA로 돌아와 낮에는 비디오 가게 점원 등 여러 변변치 않은 일을 하며, 밤에는 그가 만든 곡들을 가지고 여러 펑크 클럽에서 밴드들의 공연 막간을 이용해 한 곡씩이지만 자신의 공연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오늘날 그의 음악 사운드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홈 레코딩 솜씨를 처음 발휘하며 < Folk/Noise >라는 데모를 만든다. 그리고 1992년, 지역의 힙합 프로듀서인 동료 칼 스티븐슨와 의기 투합하여 후에 1990년도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킨 곡 ‘Loser’를 만든다. 이 곡은 창고에서 1년 가량 썩고 있다가 그의 음악적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작은 인디레이블 ‘봉로드’에서 12인치 한정 싱글로 발매된다. 처음 500장이 한정 발매된 이 싱글은 한 컬리지 방송곡의 엄청난 방송 공세를 힙입어 얼마 가지 않아 미 전역의 컬리지, 모던록 방송국들을 완전히 장악하게 됐다. 벡은 이러한 갑작스런 성공에 당황했지만, 마이너에서의 독자적 활동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메이저사와 계약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 그는 곧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그리고 가장 성공한 패배자(Loser)의 길로 들어선다. 얼터너티브와 모던록, 칼리지 록이 판치던 1990년 초 당시 록 씬은 이들과 유사한 사운드를 지닌 온갖 밴드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초기 사운드를 만들어낸 이들의 아류들이 판치고, 또 그들의 아류들이 생성되며 그야말로 그게 그거인 정형화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 나타난 벡은 어찌 보면 쓰레기 같기도 했던 ‘Loser’ 한 곡으로 가장 독창적이고 영향력 있는 젊은이의 자리를 차지했다. 당시 들고 나타난 벡의 음악이 도대체 얼마나 독창적이고 무엇이 새로운 것이었을까. 벡의 음악에서 그가 차용한 샘플링과 덕지덕지 씌워놓은 조각들만을 보고 혹자들은 그를 난잡한 콜라주의 대가 정도로만 인식했지만 그가 만들어 놓은 콜라주 조각들은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충분한 오리지낼러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그가 왜 각종 시상식과 그해 말 음악지들의 리스트들의 우위를 차지한 것에 대한 답일 것이다. 5년 전 ‘I''m a loser baby, why don''t you kill me''라고 웅얼대며 어슬렁거리며 나타난 그가 한 일 중에 가장 대단한 것은 그의 음악이 어땠든 간에 그가 만들어낸 센세이션이다. 그리고 그 센세이션에 휘둘리지 않으며 시대의 패배자에서 성공한 패배자로의 전환을 이루어 준 < Odelay >는 그가 그저 시류를 타고 한번의 반짝 성공으로 물러갈 멍청한 낙오자가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준다. 절대 ‘Loser’가 아니었던 벡이 단지 엔터테이너로서 만든 음악을 가지고 사람들이 벡을 20세기의 최고 성공한 루저의 자리에 앉혔다는 아이러니와 함께. 자신의 외할아버지인 알 한센의 영향인지 몰라도 벡의 작업들은 레디메이드를 이용한 난자하고 다소 지저분하기도 한 콜라주의 형상을 띠고 있다. 이제 벡 음악적 요소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다른 데서 잘라다 이어 붙이는 ‘패스티쉬’, 이것저것을 섞어 놓는 ‘믹스&매치’, 겹겹이 쌓아놓는 ‘레이어드’ 등은 자칫 그를 영악한 뮤지션으로 몰락시킬 수도 있었던 요소들이지만 벡은 절대 영악을 넘어선 천재적-벡에게 천재적이라는 말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인 머리로 이것들을 요소로 한 음악을 ‘창작’해냈고, 힙합 비트에 랩을 씌우는 그의 초기의 작업은 그것이 익숙해짐에 따라 점점 더 기발한 장르의 혼합을 이루어내고 있다. 베커델릭(Becadelic)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오히려 벡의 오리지낼러티처럼 되어버린 백인 젊은이의 서툰 랩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고, 그가 백인이기 때문에-그것도 어느 정도 외모가 받쳐주는- 여기저기서 뜯어온 힙합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는 얘기는 이제 사라진 지 오래다. 공연에서 보여주는 그의 엔터테이너로서의 정성스런 모습, 음악과 마찬가지로 빈티지를 조각조각 이어놓은 듯한 패셔너블한 의상들,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했던 재기 있는 유머들은 그것만으로도 우리시대에 영향을 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화려하고 열정적인 댄스와 예상을 뛰어넘는 훌륭한 가창력까지. 그리고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자신의 세계를 변화시켜가는 벡에게 이제 1990년대의 엔터테이너, 총아라는 단어를 붙여주는 것에 대해 2, 3년 전과 같은 조금의 망설임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는 똑같은 것을 반복하며 우려먹고 있지도 않으며, 그의 카피는 오리지낼러티를 창조해냈으며, 이 모든 것이 이제는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항상 스타를 죽이고 살리는 것은 대중들이 아니었던가. 그의 엔터테이너로서의 스타성이 대중들에 의해 입증된 이제 다시 그의 음악을 분석하고 파헤치는 것보다 더 적절한 것은, 도대체 벡은 어떤 사람인가라는 것에 대한 궁금증을 푸는 일이 아닐까 싶다.
인디 록 밴드 인디 록 밴드
밴드 : T. Rex (티 렉스,Tyrannosaurus Rex / Marc Bolan & T. Rex)
The Chronology Of Marc Bolan & T-Rex # 1947년 : The Birth Of ‘White Swan’ & 어린 시절 이스트 런던, 아이가 태어나기만을 기다리던 유태인 노동자 부부 시메온과 필리스 펠드는 둘 다 과일 팔거나, 화장품 판매원, 트럭 운전사 등 많은 일들을 전전하는 전형적인 노동자 계층의 부부였다. 1947년 9월 30일,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이들은 아이에게 ... The Chronology Of Marc Bolan & T-Rex # 1947년 : The Birth Of ‘White Swan’ & 어린 시절 이스트 런던, 아이가 태어나기만을 기다리던 유태인 노동자 부부 시메온과 필리스 펠드는 둘 다 과일 팔거나, 화장품 판매원, 트럭 운전사 등 많은 일들을 전전하는 전형적인 노동자 계층의 부부였다. 1947년 9월 30일,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이들은 아이에게 마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마크는 자신은 스타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고 얘기하곤 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내가 아주 뛰어난 존재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른 어떤 인간들과도 달랐다." 마크의 부모는 그가 아주 강하고 거친 소년이었다고 얘기한다. 학교에서 싸우는 것은 늘 그의 몫이었고, 실제로 샥스(Sharks)라는 지역 갱 단의 멤버이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의 음반들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던 어린 시절의 마크가 가장 좋아하던 음악은 그가 자라난 런던과는 아주 먼 나라 미국 개척자들에 대한 노래였다. 빌 헤이즈의 ‘The ballad of david crockett’이 그 곡이었는데, 어느 날 음악에 관심을 보이는 그의 아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빌 헤이즈의 음반을 사러 간 아버지의 사소한 실수가 마크의 인생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바꿔 놓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빌 헤이즈와 ‘빌 헤일리’를 혼동했던 것이다. 8살의 나이에 빌 헤일리의 (이후 시대에 길이 남을 로큰롤 곡인) ‘Rock around the clock’을 들은 마크는 단번에 그의 음성이 이끌리고 말았다. 마크는 단번에 락앤롤과 사랑에 빠졌고, 자신이 기타를 만들고, 부모님를 졸라 8살에 드럼 세트를 받았다. 그리고 9살 때 그런 아들을 위해 그의 부모는 자신들의 한달 봉급에 해당하는 16파운드짜리 기타를 사주었다. 12살 때 베이시스트로 들어간 수지 앤 더 훌라우프라는 3인조 밴드가 그의 첫 밴드였는데,밴드의 보컬이었던 헬린 샤피로는 밴드를 떠나 음반을 발표하며 차트 1위에 오르게도 했다. 그것을 보고 마크는 학교를 그만 두고 자신의 기회를 찾기 시작한다. 13살 때, 그는 모드 패션에 빠져 든다. 그의 모든 돈을 옷을 사는데 썼다고 한다. 후에 이 시기를 얘기하며 마크는 그가 옷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40벌이 넘는 옷을 하루에도 몇 번씩 갈아 입고, 정말로 모드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곤 했단다. 그런 모드 소년 마크는 어느 기자의 눈에 뛰어 모드 잡지를 장식하며 모델 일을 하기도 했다. 15살 이후 그는 파리를 여행하면서 위자드(The Wizard)라고 불리는 흑마술사을 만난다. 그와 몇 달을 그의 부엉이와 샴 고양이와 지낸 후, 로마 근처의 숲 속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런던으로 돌아 온 마크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데카 레코드의 프로듀서 짐을 만나 그의 첫 번째 싱글 ‘The wizard’를 만든다. 당시 마크 펠드(Mark Feld)라는 자신의 이름이 뮤지션의 이름으로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한 그는 마크 보우랜드(Mark Bowland)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는데, 이 때부터는 기독교 식의 ‘K’를 ‘C’로 바꾸고 ‘W’와 ‘D’를 빼버린 마크 볼란(Marc Bolan)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데카에서 만든 두 장의 앨범은 실패작에 그치고 만다. 당연히 데카 레코드는 그를 내던졌다. # 1966 : 솔로활동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첫번 째 실패에도 불구하고 전혀 좌절하지 않은 채 마크는 사이먼 내피어 벨이라는 프로듀서에게 전화를 해서 ‘나는 노래하는 사람인데, 누구보다도 위대한 락 스타가 되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함께 해 줄 훌륭한 매니저가 필요하다’고 대뜸 말한다. 데모를 보내라는 사이먼에게 직접 기타를 들고 찾아간 마크는 그의 앞에서 자신이 만든 노래들을 직접 불렀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의 노래가 모두 끝난 뒤 사이먼은 스튜디오에 전화를 해서 마크의 음악을 위해 예약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녹음된 음악을 받아주는 레코드 회사가 하나도 없었다. 마크는 자신의 꿈이 산산조각 난 줄 알았지만 결국 사이먼은 컬럼비아 레코드의 OK를 얻어냈다. # 1967 : John`s Children & Tyrannosaurus Rex 이 해 6월, 싱글 ‘Hippy gumbo’가 발매됐다. 그러나 런던 라디오의 DJ였던 존 필을 제외한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혹평을 했지만 마크는 두 번째 싱글 ‘Ready, steady, go’를 발표했다. 첫 번째보다는 나았지만 시기가 안 좋았다. 지미 헨드릭스의 첫 영국 TV출연과 그에 대한 영국인들의 환호 속에서 마크의 이름은 가려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마크의 솔로 작업들은 ‘안녕~’이란 말도 남기지 않은 채 끝이 나고 말았다. 사이먼은 당시 지미 페이지가 활동하던 야드버즈와 존스 칠드런(John`s Chidren)이라는 밴드의 음반을 프로듀싱하기도 했는데, 마크 볼란은 이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들어가게 된다. 존스 칠드런으로서는 작곡을 할 수 있는 재능 있는 기타리스트가 필요했고, 마크 볼란으로서는 후(The Who), 지미 헨드릭스와 같은 레이블에서 음반을 낼 수 있다면 (존스 칠드런은 이들과 같은 레이블에 소속되어 있었다) 더 이상 다른 것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기타리스트였던 마크 볼란의 독특한 목소리는 리드 보컬이었던 앤디 엘리슨의 백 보컬에서나 들을 수 있었지만, 라이브 무대에서 마크 볼란의 모습은 다른 멤버들 속에서 유독 두드러져 보였다. 매일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는 멤버들과 달리 마크 볼란은 아주 가끔 와인을 마시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그의 시간 대부분을 곡을 쓰는데 보냈다. 자연히 이들의 합병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마크는 자신이 모든 것을 컨트롤할 수 있는 자신의 락 밴드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존스 칠드런을 떠난다. 그렇게 해서 마크는 자신의 첫 밴드를 만들었는데, 첫 오리지널 라인업은 아직까지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어쨌거나 밴드를 만든 그는 밴드 이름을 생각했다. 결국 자신의 밴드 이름을 다이노서로 하기로 결심했지만 뭐가 약했다. 평범한 다이노서는 성에 안차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크고 가장 포악한 것이어야만 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티래노소러스 렉스 Tyrannosaurus Rex다. 리허설도 못했고, 공연 전까지 단 한번 함께 연습한 채 코벤드 가든에서 가진 이들의 첫 무대는 처참했다. 관객들의 야유 속에서 무대를 내려온 이들은 곧 뿔뿔이 흩어졌고, 남은 것은 낡은 어쿠스틱 기타를 가진 마크 볼란과 달랑 봉고만을 가진 스티브 툭 두 명이었다. # 1968 : Single Debut 락앤롤 스타의 큰 꿈을 가지고 시작한 티래노소러스 렉스는 봉고와 어쿠스틱 기타를 가진 2인조로 붕괴되었고, 그만 음악 역사에서 조용히 사라지기에 충분한 모습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마지막 남은 것이 하나 있었다. BBC방송의 ‘존 필 세션’으로 지금도 유명한 바로 그 존 필이었다. 초기부터의 마크의 가장 큰 팬이었던 존은 자신의 방송에서 티래노서러스 렉스 같은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의 음악을 틀곤 했었다. 불법 방송이 금지되자 존은 자신이 일하기 시작한 미들 어쓰 클럽의 하우스 밴드 자리를 티래노소러스 렉스에게 제공했다. 이후 BBC 라디오 방송 일을 하게 되면서도 그는 이들의 든든한 지원자였다. 존의 이런 도움 속에서 티래노소러스 렉스는 자신들의 팬 층을 만들어가기 시작했고, 곧 많은 대학 공연과 페스티벌에 초대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티래노소러스 렉스는 앞으로 마크 볼란이 보여줄 것들의 잠복기이고 해빙기였다. # Tony Visconti`s Mission Impossible 조 카커, 프로콜 하럼, 무브, 그리고 데이빗 보위의 작업을 프로듀서하던 토니 비스콘티는 회사로부터 하나의 임무를 부여 받았다. 그러나 그건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작전이었다. 바로 비틀스를 대신하여 세계를 열광시킬 넥스트 비틀스를 찾는 것이 임무였기 때문이다. 만남은 UFO에서 이루어졌다. 삼백 명 가량의 히피들이 모여 있던 나이트 클럽 UFO의 무대에서는 한 사람이 기타를 치며 마치 공상 과학 소설에나 나올법한 가사를 웅얼거리고, 그 옆에서는 봉고를 치며 한 명이 하모니를 넣고 있었다. 토니의 생각에 이런 공연에 수백 명이 모였다는 것도 의아했고, 그의 생각에 이들은 넥스트 비틀스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마크 볼란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전형적인 히피 풍의 옷을 입고, 길고 검은 머리를 집시처럼 늘어뜨린 그의 독특한 목소리는 기묘하고 특이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고, 그를 외국인으로 생각한 토니는 스티브에게 다가가 자신을 소개했다. 마크가 영어를 못하는 줄 알고. 그러나 곧 듣게 된 마크의 말은 의외였다. "당신은 우리가 만난 일곱 번째 프로듀서에요, 그 중에는 애플 레코드의 신인을 찾으러 온 존 레논도 있었다구요." 하하~ 하지만 이것은 마크가 머리를 굴려서 만들어 낸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결국 적중했다. 토니는 다음날 아침 바로 회사에 자신이 정말 흥미로운 밴드를 찾아냈는데, 이미 애플 레코드에서 접근을 했다고 상사와 얘기하던 중 마크 볼란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자신들이 로비에 있는데, 오디션을 봐도 되냐고. 마크와 스티브는 자신들이 가져온 러그를 깔고 그 위에 앉아 어젯밤의 곡들을 연주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계약을 했다. # 1968 : Album Debut 7월, 결국 첫 앨범이 발매됐다. 그들의 오랜 동지인 존 필의 극찬을 뒷면에 박고서. 토니는 티래노소러스 렉스의 신자와도 같았다. 그는 자신이 마크 볼란의 재능에 대해 느낀 것을 세계에 알리고 싶어했고, 이들의 음악을 만드는 데 자신의 모든 노력을 했다. 이러한 토니의 노력은 이후 마크 볼란과 T-Rex의 성공을 얘기할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 하나의 젊은 뮤지션 데이빗 보위에게는 큰 희생이었다. 사실 마크 볼란과 데이빗 보위는 십대 시절부터 친구사이였다. 데이빗이 가까스로 마크보다 일찍 음반을 발매하고 빛을 보긴 했지만 이들은 비슷한 과정을 굴러온 친구였다. 토니는 마크와 일하기 이전에 데이빗과 작업을 했지만, 이제 데이빗을 버리고 마크에게 왔다. 위트있고 공격적인 마크의 음악과 달리 데이빗의 음악은 음악 비즈니스 쪽으로 다가갔다. 둘 사이의 우정은 여전했지만 음악적으로 이들은 서로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되었다. 첫 앨범은 차트 34위까지 올라갔지만 평론가들의 평은 하나같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최소한 자신들의 음악이 평론가들의 관심을 끌었다는 데 마크는 만족했다. 마크는 자신을 뮤지션이라기보다 시인이고 이야기작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평론가들이 음악보다도 그의 가사를 분석하는 것에 대해 굉장히 행복해 했다고 한다. 이 당시 마크의 인터뷰들은 신비로움, 난장이 요정, 요술과 마술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반지의 왕(The Lord Of King)이었고, 그 책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또한 자신의 음악을 더 잘 이해시키기 위해 토니에게 그 책을 선물하기도 했다. 인기를 얻기 시작한 이들은 도노반, 지미 헨드릭스, 핑크 플로이드, 로이 하퍼, 제스로 툴 등과 함께 많은 페스티벌에 참여했고 그 해 말, 이들의 두 번째 앨범 < Prophets, Seers, And Sages, The Angels Of The Ages >가 발매됐다. 지난 앨범보다 결과는 좋았지만 마크의 눈에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그러나 앨범의 순위와는 상관 없이 그들을 원하는 공연은 점점 더 많아졌다. 이들의 음악을 원하는 사람들은 어린 음악 팬들이 아니라 20대 후반의 LSD에 경도되었던 당시의 히피들이었다. 핑크 플로이드의 시드 배릿과 같이 마크 볼란은 견고한 컬트 지지자들의 우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컬트 히어로가 되는 것이 마크의 목표는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적어도 영국 안에서 가장 위대한 락 스타가 되는 것이었다. 히피들이 좋아하고 안하고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런 태도는 결국 그를 수퍼 스타의 자리에 오르게 했지만 스티브와는 점점 더 불화의 계기를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 1969 : Bye! 스티브 툭 마크는 그가 어느 앨범보다도 자랑스럽게 여기던 73페이지의 시집 < The Warlock Of Love >를 출판한다. 이 시집은 그가 티래노소러스 렉스의 음악에서 얘기하던 가공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이 시집으로 마크는 평론가들에게 밥 딜런, 도노반, 짐 모리슨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되는데, 당시 베스트셀러가 됐던 이 책은 현재는 100달러가 넘는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지난 두 장에서 보여지는 긴 앨범 타이틀은 세 번째 앨범에서는 한 단어로 짧아졌다. 바로 마크와 스티브의 얼굴이 컬러 사진으로 실려 있는 < Unicorn >이다. 이 앨범 역시 가상의 얘기들을 다루고 있지만 지난 두 장의 앨범에서 생긴 로열티 덕분에 프로듀서인 토니는 더욱 정교한 레코딩 기재를 가지고 보다 훌륭하게 녹음되었다. 마크가 콘웰에서 먹었던 수프의 이름을 제목으로 한 ‘Romany soup’같은 곡은 22트랙으로 녹음되어 믹싱에만 5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며칠 만에 완성된 지난 앨범들에 비하면 정말 오랜 시간을 들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 앨범은 미국에서 처음으로 발매된 앨범이기도 한데, 미국에 받아들여지기에 이들의 음악은 너무나 낯설었다. 지금은 고전이 되었고, 마크와 스티브가 만들어 낸 가장 훌륭한 앨범으로 여겨지지만. 마크와 스티브가 만들어 낸 마지막 앨범이기도 한 이 앨범을 마지막으로 결국 스티브는 티래노소러스 렉스를 떠난다. 이때 나타난 사람이 미키 핀(Micky Finn)이다. 미키는 음악적으로 스티브에 비견될 퍼커션 주자도 아니었고, 그처럼 백 보컬을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마크는 그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마크가 그의 650cc 모터사이클에 마크가 사랑에 빠졌다고도 하지만… 어쨌거나 이들의 만남은 성공이었다. 마크는 서로에게 영감을 주며 함께 작업할 동지를 찾은 것이다. # 1970 Tyrannosaurus Rex Goes Electric & First T-Rex 누구도 이들이 이런 변화를 보일 줄 예상하지 못했다. 마크와 미키가 만든 첫 싱글은 이전과는 다른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처음으로 일렉트릭 기타가 이들의 음악 속에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3월, 앨범 < Beard Of Stars >가 나왔다. 이들의 공연에서 보여지는 일렉트릭 기타와 헤비한 연주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지만 결과는 마크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다음 앨범을 준비하던 중 이들은 다시 미국 투어를 계획했는데, 이 역시 큰 성공을 하지는 못했지만 이전과 같은 커다란 경제적 손실은 없었고, 그 공연으로 이들은 신선한 아이디어들을 얻었다. 10월, 드디어 티렉스(T-Rex)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싱글을 발표한다. 아니 이제 티렉스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12월, 앨범 < T.Rex >는 변형 쟈켓의 모습으로 발매되었다. 이 때 스티브 커리가 베이스 주자로 밴드에 가담했다. # 1971 : The Year Of The Electric Warrior 이 해가 시작될 때 ‘Ride a white swan’은 차트 탑 텐을 장식하고 있었다. 당시 1위 곡은 허비 플라워스가 지키고 있었는데, 마크는 그에게 어떻게 자신의 첫번 째 넘버 1 싱글인 ‘Ride a white swan’을 막을 수 있었냐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드디어 2월 19일, ‘Ride a white swan’이 여전히 차트 12위에 머물러 있는 중에 발매된 싱글 ‘Hot love’는 3월 20일 티렉스의 넘버 1 싱글이 된다. 6주간의 넘버 1을 비롯 24주간 차트에 머물렀던 앨범 < T-Rex >는 그들의 앨범 중 가장 오랫동안 차트를 지킨 앨범이기도 하다. 이들의 인기를 보고 마크가 떠나기로 한 플라이 레코드는 티래노소러스 렉스 당시의 곡들을 모은 < Best Of T-Rex >라는 앨범을 발매해 마크를 열 받게 하기도 했는데, 어쨌든 이 앨범 또한 큰 성공을 거둔다. 7월, 티렉스의 ‘Get it on’이 두 번째 넘버 1 싱글이 됐다. 마크는 팝 음악 계에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말을 했고 많은 팬들은 그 앨범을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9월, 드디어 팬들과 미디어의 환호 속에서 < Electric Warrior >가 발매됐다. 팬들이 비틀즈의 < Sgt.Pepper’s Lonely Heart Club Band > 앨범과 비교를 하기도 하는 이 앨범은 이 해 영국의 베스트셀링 앨범 5위를 기록한다. 이 때부터 모든 TV 쇼들이 티렉스를 불렀고, 모든 신문들이 이들과 인터뷰 하기를 원했다. # 1972 : T-Rex To The Top 1972년은 많은 앨범과 싱글들, 그리고 티렉스가 드디어 팝 음악계의 정상의 위치에 오른 해로 기억된다. 티렉스는 당시 영국 최대의 음반사인 EMI와 성공적으로 계약을 했고, ‘Jeepster’는 차트 3위에서 바로 1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마크의 이전 레코드 회사는 그들의 옛 앨범인 < Prophets, Seers, Sages >와 < My Peoples Were Fair >를 더블 앨범으로 재발매했고 이 앨범 역시 차트 1위에 올랐다. 이들은 엠파이어 풀과 웸블리에서 큰 공연을 가졌고, 이 공연들에은 정말 비틀즈의 공연에 버금가는 많은 팬들이 몰려와 성황을 이루었다. 새로운 싱글 ‘Metal guru’가 차트 정상에 올랐을 때, 지난 레코드 회사는 마크 볼란의 컴필레이션 앨범인 < Bolan Boogie >를 발매했고, 이 역시 차트 1위를 강타한다. 자신들의 인기를 보고 계속 옛 앨범들을 발매하는 플라이 레코드의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모습에 마크는 화를 내고 실망했지만 법적으로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 음반들에서 나오는 로열 티 역시 만만치 않은 수입원이었다. 모든 TV와 신문의 관심을 가져다 준 < Electric Warrior >에 이어 발매된 < The Slider >는 발매 첫 날 10만장의 판매를 기록한다. 하지만 마크가 원했던 넘버 1의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고, 이어 발표된 두 장의 싱글 역시 넘버 1의 자리에는 오르기 못했다. # 1973 : Marc Trucks On 이 해의 첫 싱글은 3월에 발매된 ‘20th century boy’이었다. 그리고 ‘Staggered’가 이어졌다. 싱글에 이어 발표된, 스튜디오에서 많은 시간을 들여 보다 대규모로 작업된 앨범 < Tanx >는 지난 해의 < Slider >와 같이 평론가들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발매 첫 날 10만 장이 팔린 ‘The groover’는 기대와 달리 6위에 그치고 말았고, 1971년 이후 가장 낮은 순위이기도 했다. 마크는 이것이 티렉스 사운드의 마지막이 될 거라고 발표했으며, 그의 말대로 마크 볼란의 솔로 싱글과 앨범이 발매된다. 그리고 이것은 티렉스의 해산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한다. # 1974 : ‘Zinc’ Arrives But Goes Soon 이 해 1월 영국 투어에서 티렉스는 두 명의 드러머와 여러 명의 색스폰 연주자들, 그리고 백 코러스를 대동하여 이전보다 많은 변화를 보였다. 투어 동안 마크 볼란 & 티렉스라는 이름의 첫 싱글 ‘Teenage dream’이 발표됐지만 차트에서는 고작 3주 동안을 머물고 말았다. 차트에 대한 실망보다도 더 크게 다가왔던 실망은 2월, 7년 동안 함께 일을 해 온 토니 비스콘티가 티렉스를 떠난 것이다.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새 앨범이 나왔다. 마크는 분위기를 일신하여 데이빗 보위가 지기 스타더스트를 만들어 내며 많은 글램 락 팬들의 우상이 된 것처럼 자신의 이름을 ‘징크 앨로이(Zinc Alloy)’라고 바꾸고, 자신의 밴드는 ‘내일의 숨겨진 기수들(The Hidden Riders Of Tomorrow)’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 A Creamed Cage In August >로 타이틀이 붙여진 이 앨범을 발표하면서는 너무나 많은 반대와 우려 때문에 밴드명에서는 마크 볼란 & 티렉스라는 이름이 그대로 사용됐다. 징크 앨로이라는 캐릭터는 지기 스타더스트와는 달랐다. 데이빗 보위의 지기는 그가 캐릭터를 죽일 때까지 모든 이들의 우상이었지만, 거창한 홍보에도 불구하고 마크 볼란의 징크 앨로이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고, 모두의 관심 밖에었던 것이다. # 1975-1976 Isolation Years 마크 볼란은 ‘이제 마술은 사라졌다’라는 말과 함께 또 다른 앞날을 준비하기 위해 영국을 떠났다. ‘글램 락은 죽었다. 나는 더 이상 장사꾼이 되고 싶지 않다.’라는 말을 하며. 마크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자신의 팬들이 급격하게 줄었다는 생각이었다. 많지 않은 다이 하드 팬들만이 그가 무엇을 할지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크는 무언가를 더 가지고 있었다. 1975년, 마크는 2 장의 싱글을 발매했다. 7월에 발매된 ‘New york city’는 존경스럽게도 차트 15위까지 올랐다. 그가 생각했던 것 보다는 많은 팬들이 아직 그의 음악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 Bolan’s Zipgun >은 그에게 다시 큰 좌절을 가져다 주었다. 차트에 오르지조차 못하던 1968년의 상황으로 그를 되돌려 놓은 것이다. 그는 좌절 속으로 빠져 들었고, 그 해, 유일한 기쁨은 9월에 그가 동거하던 글로리아 존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롤란 볼란 뿐이었다. 1976년, 마크는 여전히 자신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3월 발매된 싱글 ‘London boys’는 40위에 그쳤지만 미디어들의 반응은 의외로 호의에 찬 것이었다. 마크에게 다시 희망을 가지게 해 준 것은 차트 13위까지 오른 두 번째 싱글이었다. 예전의 마크에게는 실망스러운 결과였겠지만 지금의 마크에게는 너무나 희망적인 결과였다. 그리고 마크와 티렉스는 1971년 이후 가장 큰 공연을 준비했고 한달 후, 발매된 앨범 < Futuristic Dragon >. 이 앨범은 지치지 않고 마크와 티렉스의 음악을 기다려준 팬들에게는 긴 터널을 지나 만나는 빛과도 같이 반가운 앨범이었다. # 1977 : If… ‘마크가 다시 정상에 오를 수 있었을까?’라는 것은 열광적인 팬들만이 가지고 있던 불가능한 생각은 아니었다. 마크는 다시 그 동안 늘어났던 술을 줄이고 몸무게를 빼고 데이빗 보위와 토니를 만나며 자신을 찾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9월 16일, 모든 것이 불가능해 졌다. 운전을 배우지 않았던 마크 대신 운전을 하던 글로리아와 함께 클럽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중, 급커브를 돌다가 글로리아가 길에서 벗어나 나무를 들이받고 만 것이다. 마크 볼란은 며칠 남지 않은 자신의 서른 번째 생일을 영영 맞지 못했다. 그리고 글로리아는 살아 남았다. # 2000년 이미 30년 전에 나타나고 사라진(그것도 영원히) 글램 락 스타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어찌 보면 고리타분한 옛날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래서 여기까지 지루한 글을 읽은 분들께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한마디. 아직까지 마크 볼란과 T-Rex의 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런 연대기 식의 지루한 얘기는 이제 뒤로 하고 당신의 플레이어에 ELECTRIC WARRIOR를 걸고 플레이를 하라는 것이다. 음악을 듣지 않고 이 글을 읽는 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렇게 재미도 없는 글을…
밴드 : Blood Red Shoes (블러드 레드 슈즈)
2인조 영국 록 밴드 2인조 영국 록 밴드
록은 탄소 같은 음악이다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는 60년대가 끝날 때까지 언제나 인기 랭킹 2위였다. 최강의 자리는 늘 라이벌인 비틀스에게 빼앗겼다. 그럴만도 했다. 비틀스의 노래가 밝고 깨끗한 데 반하여 그들의 노래는 거의 끈적끈적하고 지저분했다. 비틀스가 아침이라면 롤링 스톤스는 밤이었고 비틀스의 활동무대가 푸른 초원이었다면 롤링 스톤스의 터전은 어두침침한 묘지였다. 엘리트 백인 팝 문화에 ... 록은 탄소 같은 음악이다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는 60년대가 끝날 때까지 언제나 인기 랭킹 2위였다. 최강의 자리는 늘 라이벌인 비틀스에게 빼앗겼다. 그럴만도 했다. 비틀스의 노래가 밝고 깨끗한 데 반하여 그들의 노래는 거의 끈적끈적하고 지저분했다. 비틀스가 아침이라면 롤링 스톤스는 밤이었고 비틀스의 활동무대가 푸른 초원이었다면 롤링 스톤스의 터전은 어두침침한 묘지였다. 엘리트 백인 팝 문화에 젖어든 우리 60~70년대 사람들에게 롤링 스톤스의 곡들이 환영받을 리 만무했다. 무수한 곡들이 애청된 비틀스에 비해 그들의 인기곡은 고작 ‘눈물이 지나갈 때(As tears go by)’ ‘루비 튜즈데이(Ruby Thesday)’ ‘엔지(Angie)’ 정도에 불과했다. ‘검게 칠하라(Paint it black)’가 어필한 것도 80년대 말 국내 방영된 TV외화 < 머나먼 정글 >에 이 곡이 ‘시그널 송’으로 삽입되고 나서였다. 팝의 본고장에서의 휘황찬란한 히트 행진에 견주었을 때 롤링 스톤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실로 보잘 것이 없었다. 비틀스가 ‘산소 같은 음악’을 했다면 그들은 고집스럽게 ‘탄소 같은 음악’을 구사했다. 바로 그 탄소라는 요소로 인해 그들은 ‘4인의 전설’이 된 비틀스처럼 결코 ‘5인의 전설’이라는 명예 작위를 하사 받지 못했다. 대신 그들이 얻은 꼬리표는 ‘5인의 악동들’이었다. 사실 악동은 출신 성분상 비틀스에 어울리는 용어였다. 그들은 영국 리버풀의 ‘노동계급 로커’들이었다. 존 레논의 경우 여지없이 그 어휘에 딱 들어맞는 존재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스톤스 멤버들은 비틀스처럼 가난하거나 못 배운 청년들이 아니었다. 보컬리스트 믹 재거(Mick Jagger)는 런던 대학 경제학부 출신이며 기타주자 키스 리차즈(Keith Richards) 역시 중산층 자손이었으며 초기 리더인 브라이언 존스(Brian Jones)는 음악가정에서 자랐다. 베이스 담당 빌 와이먼(Bill Wyman)과 드럼 찰리 와츠(Charlie Watts)가 노동계급 출신이지만 스톤스에 가입할 무렵에는 엄연한 ‘직장인’이었다. 신분으로 보자면 그들은 결코 록을 해선 안될 위인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울리지 않게 악동 노릇을 자처했다. 그것은 노동계급 청춘에 의한 하위문화라는 ‘록의 헌법’을 거스르는 위헌 사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그러한 ‘자격 미달’을 의식해서인지 비틀스보다 훨씬 강도 높게 록의 규율을 준수했다. 롤링 스톤스는 기꺼이 악동이 되기를 희망했다. 말쑥한 헤어스타일과 정장 차림으로 비틀스와 겨룬다는 것은 뱁새가 황새를 쫓은 격이었다. 데뷔 당시 비틀스 흉내를 내다가 참패를 맛본 그들은 매니저 앤드류 루그 올드햄(Andrew Loog Oldham)의 권고에 따라 곧바로 정반대 이미지로 ‘차별화’하여 재도전을 단행했다. 그들은 비틀스에 이어 1965년 마침내 대망의 미국 정복에 성공했다. 이때부터 그들의 트레이드마크는 불량, 퇴폐, 반항, 비행, 섹스 그리고 말썽과 같은 ‘하위정서’가 되었다. 그들은 ‘게으른 불량 저능아들’임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가는 곳마다 소란과 골칫거리를 야기시켰다. 기성 세대와 제도권의 ‘계급 공포’는 예고된 것이었다. 영국의 < 뉴스 오브 더 월드 >지는 ‘당신의 딸이 롤링 스톤스 멤버와 놀러 나가는 것을 허락하겠는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 뉴스 위크 >지는 그들을 ‘포르노 같은 가사에 젖어 있는 심술궂은 무리들’이라고 규정했다. 노심초사한 한 여인은 < 타임 >지에 “왜 디스크자키들은 스톤스 같은 쓰레기 노래들을 틀어 대느냐”고 따지는 항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양복 전문지 < 더 테일러 앤드 커터 >는 넥타이 매출이 형편없다고 스톤스에게 제발 넥타이를 매달라고 통사정했다. 클리블랜드 시장 랄프 로커는 스톤스 공연을 보던 17세 소년이 다치자 “그러한 그룹은 우리 공동체의 문화와 오락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며 그들의 콘서트를 불허하는 ‘비민주적’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비틀스에게는 인기폭발의 계기가 된 CBS TV 에드 설리번 쇼의 사례도 유명하다. 객석의 예기치 않은 소요와 그들의 불량스러운 모습에 당황한 나머지 에드 설리번은 상기된 표정으로 선언했다. “그들을 다시는 출연시키지 않겠다! 이 쇼를 구축하는데 자그마치 17년의 세월이 걸렸다. 단 몇 주만에 쇼를 망치게 할 수는 없다” 에드 설리번은 물론 이 선언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지만 2년 뒤인 1967년 섭외 때도 그들의 노래 ‘밤을 함께 보냅시다(Let’s spend the night together)’의 제목을 ‘시간을 함께 보냅시다(Let’s spend some time together)’로 고쳐 부르기를 강요했다. 그러나 사회적 지탄이 있으면 그에 비례하여 응원군도 출현하는 법이다. 어느 록밴드보다 흑인 리듬 앤드 블루스(R&B)를 뛰어나게 소화했기 때문에 ‘소울의 왕’ 오티스 레딩은 가장 좋아하는 그룹으로 롤링 스톤스를 지목했으며 그들의 레퍼토리를 리메이크해 음반에 담기도 했다. 1965년 미국 콜로라도 존 A 러브 주지사는 성공적으로 공연에 감사하는 뜻으로 ‘롤링 스톤스의 날’(11월 29일)을 공식 선포했다. 믹 재거가 1964년 난폭 운전으로 면허 취소의 위기에 몰렸을 때 사무 변호사 데일 파킨슨의 간청은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 “면허가 취소되면 믹 재거와 그의 그룹이 움직이는데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이다. 영국은 그들이 벌어들이는 달러를 필요로 하며 그들은 어느 수출업체보다도 많은 달러를 번다.” 재거는 16파운드의 벌금을 내고 다시 차를 몰 수 있었다(좌우지간 유명해지고 봐야 한다!). 1967년 재거와 리차즈가 마약 불법 소지 사건으로 무거운 형량을 선고 받고 이어 브라이언 존스도 런던 아파트에서 같은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도 그랬다. 이번에는 언론이 도왔다. 보수신문으로 정평 나있는 < 더 타임스 >지가 놀랍게도 ‘누가 바퀴로 나비를 찢어 죽이나?(Who breaks a butterfly on a wheel?)’라는 제목의 비호 기사를 게재한 것이었다. 당시 언론은 롤링 스톤스에 대한 대중의 집단 히스테리를 알고 있었다. 롤링 스톤스는 당시 기성 가치에 거스르는 ‘히피 보헤미안’들의 정서를 반영했다. 그들의 곡에는 의도했든 안했든 히피 세대의 분노와 불만이 스며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60년대 록정신의 한복판에 ‘구르는 돌’의 깃발이 휘날리게 된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차를 운전하고 있을 때 라디오에 그 양반이 나오더군, 점점 더 쓸데없는 정보만 늘어놓는 거야. 내 상상을 불태우려는 듯 말야. 노력해 도 노력해도 난 도무지 만족할 수 없어’-‘난 만족할 수 없어(I can’t get no satisfaction)’중에서 이 노래는 세 번째 구절의 ‘여성 생리’ 관련 가사로도 어필한 것이 사실이지만 청년 대중들이 주로 멜로디 부분에 맞춰 “현실 상황에 절대 만족할 수 없음”을 목청 높여 부른 것에 힘입어 빅히트했다(그들의 최초 미국 차트 1위곡). 믹 재거 스스로도 “이 곡은 모든 것에 대한 나의 욕구 불만을 담았다. 그것은 꾸밈없는 10대의 반항이었다”고 말했다. 히피 세대들은 정말 스톤스의 말을 따라 순종을 거부했고 도전했고 싸웠으며 싸돌아다녔다. 스톤스 또한 확고한 이데올로기에 근거하지 않았지만 시종일관 그들에 대한 ‘자극’을 즐겼다. ‘그녀가 왜 자유로워지려는지 묻지마. 그녀는 그게 유일한 낙이라고 말할 거야. 그녀는 삶에 묶여 있지 않아. 그런 대가를 치러 봤자 인생은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어’-‘루비 튜스데이’ ‘난 자유를 갖고 있지만 많은 시간은 없다. 신념은 무너졌고 눈물은 쏟아야만 해. 우리가 죽고 난 뒤 어떠한 생을 얻읍시다. 야생마는 날 질질 끌고 다니지 않지. 어느 날 우리는 야생마를 타게 될 거야’-‘야생마(Wild horses)’ 1960년대 그들의 음악은 라이벌 밴드 비틀스에 끌려 다닌 측면이 없지 않았다. 1966년 작 < 여파(Aftermath) >는 재거와 리차즈가 존 레논과 폴 메카트니의 콤비 자작곡인 < 러버 소울(Rubber soul) >에 충격 받고 ‘우리도 그렇게 해보자’는 자세로 제작에 임한 것이며, 1967년 사이키델릭 음반 < 악마 폐하의 요청(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 >만 해도 비틀스의 <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 >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황급히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2등이었다. 결코 비틀스로부터 왕관의 소유권을 이전 받지는 못했다. 비틀스는 록밴드에서 ‘전천후 팝 밴드’로 승천하면서 어느 세대에도, 어느 계층에도 적(敵)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 서전트 >의 시점부터 음악의 축을 로큰롤의 흥분에서 팝 예술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롤링 스톤스는 적이 많았다. 기성 세대들은 록의 부랑아인 그들을 꺼렸으며 록이란 또 애초부터 전 세대를 포괄할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음악이었다. 결국 비틀스는 록을 버려 ‘국민그룹’이 된 것이다. 만약 비틀스에게 약점이란 것이 있다면 바로 ‘록과의 작별’일 것이었다. 이 비틀스의 허점이 롤링 스톤스에게는 강점을 의미했다. 롤링 스톤스는 록을 배신한 비틀스에게 실망한, 그리하여 멀어져 간 ‘록 충절파들’을 끌어 모으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그 팬들에게 ‘우리가 진정한 로큰롤 밴드’임을 열심히 음악으로 웅변했다. 비틀스의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은 1966년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어른들이 비틀스가 훌륭하고 비틀스가 재미있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해졌다. 기성 세대들은 우리를 좋아했다. 그리하여 진정한 ‘히피’ 아이들은 또는 그렇게 자신을 생각하는 애들은 우리를 떠나 버렸다. 그들에게 관심 있는 것은 스톤스의 팬이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부모는 롤링 스톤스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록밖에 몰랐다. 그것도 기타와 드럼 베이스가 물려 빚어내는, 단순하고 경쾌한 원시 로큰롤로 일관했다. 1960년대 후반으로 가서는 데뷔 시절에 더러 다루곤 했던 느린 리듬 앤드 블루스나 발라드의 비율마저 낮추어 버렸다. 1960년대 후반기에 발표한 3장의 앨범 < 단추 사이에(Between The Buttons) >, < 거지의 향연(Beggar’s Banquet) >, < 렛 잇 블리드(Let It Bleed) >가 뚜렷한 히트 싱글이 없음에도 록비평가들이 일제히 걸작 음반으로 꼽는 것도 이 앨범들이 철저히 록음악에 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 거지의 향연 >에 수록된 곡 ‘거리의 싸움꾼(Street fighting man)’에 내비친 그들의 ‘로큰롤 신념’을 들어보자. ‘내 이름은 소란이라고 하지. 난 외치고 울부짖을 거야. 난 왕을 죽이고 그의 종복들을 박살낼테야. 가난한 아이가 로큰롤 밴드에서 노래하는 것 말고 할 게 뭐 있나. 졸린 런던 타운에서 거리의 싸움꾼을 위한 장소는 없기 때문이지!’ 그들의 록에 대한 헌신은 < 타임 >지로부터 ‘피에 굶주린 로큰롤 앨범’이라는 칭찬을 받은 기념작 < 스티키 핑거스(Sticky Fingers) >와 이듬해의 음반 < 대로의 추방자(Exile On Main Street) >로 절정에 달했다. 록 비평가 로버트 크리스트고(Robert Christgau)는 “적어도 펑크가 도래할 때까지 아무도 그들처럼 몰아(沒我)의 에너지로 철저히 록을 한 사람들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롤링 스톤스는 록에 온몸을 내던진 대가로 막대한 부와 명성을 창출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록의 ‘낙오자 정서’와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록이 제도권의 스타가 아닌 거리의 청년들에게 소유권이 있음을 입증한 펑크 밴드들에게 공격 타깃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이와 관련하여 섹스 피스톨스 자니 로튼이 “롤링 스톤스와 후는 비위에 거슬린다. 그들은 더 이상 젊은이들에게 제시할 것이 없다”고 성토한 것은 유명하다. 그들은 순식간에 ‘록의 공룡’으로 둔갑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일말의 ‘반성’도 없었다. 오히려 의기양양하게 1978년 당시의 인기 음악인 디스코를 채용한 ‘네가 그리워(Miss you)’를 노래하며 제도권 한복판에서 유유자적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위기 속에서도 록의 공격성을 잃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펑크 록은 펑크 세대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자신들이 오래 전에 터득한 ‘그들만의’ 원시적인 로큰롤을 했다. 록의 뿌리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원형 록을 보존하며 그 ‘충실성’을 옹호한 것이었다. 1980년대 들어서도 그들은 그렇게 록을 했고 끊임없이 해체설이 떠도는 가운데에서도 1989년 < 강철바퀴(Steel Wheels) >를 통해서 원형 록으로 재기했다. 1994년에 발표한 < 부두 라운지(Voodoo Lounge) >나 1995년 말에 내놓은 < 스트립드(Stripped) >도 거친 로큰롤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변한 것이라곤 1969년 브라이언 존스가 사망하자 믹 테일러(Mick Taylor)가 그 자리를 메꾸고, 1974년 다시 그 자리에 그룹 페이시스의 전 멤버 론 우드(Ron Wood)가 들어온 것, 또한 1994년 빌 와이먼이 탈퇴한 것뿐이었다. 이제 멤버들 대부분의 나이 50세를 넘어섰다. 롤링 스톤스는 오랫동안 록이 가지는 열정과 흥분에 몸바치면서 쌓은 금자탑에 또 하나의 글귀, ‘록은 늙어서도 할 수 있다’를 새겨 넣었다. 그러면서 펑크 진영의 지탄도, 얼터너티브 록의 대공세도 거뜬히 극복했다. 믹 재거는 1988년 이렇게 말했다. “만약 로큰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배우나 작가, 감독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렸을 때 로큰롤이 나를 휘어잡았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여기 있는 것이다” 그의 롤링 스톤스는 < 스트립드 > 앨범에서 밥 딜런의 고전 ‘구르는 돌처럼(Like a rolling stone)’을 불렀다. 이 한 곡이 아마도 이 앨범이 말하려는 바와 그들의 음악과 역사를 축약하는 노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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