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시간에 조금 늦은 작가는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채 나타났다. 염색 한번 안 해봤을 것 같은 검은색 직모에 갈색 뿔테 안경이 언뜻 완고한 인상을 주지만, 잘 어울리는 라이프가드 숄더백과 친근한 눈웃음은 작가를 보통 사람보다 조금 더 성실하고 조금 더 근성 있어 보일 뿐인 사람으로 멋지게 완성시킨다.
작년 2월에 출간된 『꾿빠이, 이상』 이후 소설가 김연수 씨의 다섯 번째 책으로 기록될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는 연작소설집이다. 경북 김천시 평화동 80번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역전 뉴욕제과점의 막내아들이었던 작가는 유년에서부터 스무 살 이전까지의 기억을 근거로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을 써 나갔다. 1997년부터 올 봄까지 쓴 소설을 모았다고 한다.
자신의 목소리가 제대로 녹음될지 모르겠다며 녹음기를 바싹 앞으로 당길 만큼 목감기가 지독하기는 했지만, 작가는 건강해 보이는 인상을 지니고 있다. 작가는 이번 소설집으로 인해서 앞으로 더 나아갈 힘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잘못된 길을 간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보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어설프게 소설을 써왔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제겐 계속 새로운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어요. 우리 사회에선 그런 것들을 따지니까. 그래서 포스트 모더니즘 소설이니 실험소설이니, 이상한 소설을 많이 썼단 말이죠. 한참 쓰다 보니까 공허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짜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을 쓰고 있는지, 아니면 분위기 때문에 써야 하는 소설을 쓰고 있는지.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출발하여 소설 쓰기에 대하여 확인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을 쓸 수 있겠다, 생각한 거죠."
1994년 스물 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등단한 그는 소설 쓰기에 대하여 주춤주춤하던 무렵이 있었다. "이것도 나쁘지는 않네" 같은 마음으로 하는 사랑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 정도의 사랑이라면 당연히 책임질 이유가 없기 때문에 소설 말고 다른 일을 해서 먹고 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꾿빠이, 이상』은 이런 작가의 생각을 바꾸어놓았다.
"『꾿빠이, 이상』을 쓰면서 온몸으로 하는 사랑을 하게 되었어요. 다 주어도 안 아까운. 잃을 것이 없으니까요. 놀라운 감정이죠, 아무런 보상이 없는데, 내가 이렇게 쏟아부을 수 있다는 것. 내 모습을 새롭게 본 거예요. 내 안에 이런 면이 있구나,라는 것. 일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해낸 것이죠. 긍정적으로 만들어주고. 사랑할 때의 모습과 같은 것 같아요."
쓰고 싶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우선 소설 쓰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야지 싶어서 시작한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작업 이후, 정말 '쓰고 싶은 소설'을 쓰게 된 작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자신감이 배어나온다.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의 자신감. 일단은 부러워하고 볼 일이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작품 중 「뉴욕제과점」은 자전적인 작품이다. 빵집 막내아들로서 지니고 있는 뉴욕제과점에 대한 기억과 주변의 풍경들을 연필로 써 내려갔다.
"지금은 전업 작가를 선언했지만, 「뉴욕제과점」을 쓸 때만 해도 회사원이었어요. 일하다 몰래 나와서 카페에서 작은 노트에다 틈틈이 썼어요. 이 작품이어서 연필로 썼지, 다른 작품이었다면 아마 그러지 못했을 거예요. 연필로 쓰니까 효과는 매우 달랐던 것 같아요. 목소리가 낮아지고, 따뜻한 느낌이 들고……."
작가는 개인적으로 「리기다소나무 숲에 갔다가」가 제일 마음에 든다고 한다. 「리기다소나무 숲에 갔다가」는 대학 영문과 신입생이자 군입대를 앞두고 있는 '나'와 삼촌 그리고 도라꾸 아저씨가 멧돼지 사냥을 하러 리기다소나무 숲에 갔다가 생명의 소중함과 맞닥뜨리게 된다는 내용의 단편소설. 살아 있는 생명을 있는 그대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야말로 용기 있는 일이라고 말하는 작품이다. 작가는 옛날에는 이런 식으로 생각을 안 해봤다며 "내가 어떻게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그들의 삶은 모두 소중하며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살아가는 것은 그대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더 용기 있는 행동이라는 생각을 작가는 이 소설을 쓰며 새로이 하게 되었다.
「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에서 작가는 5월 광주에 대한 기억을 얘기한다. 그러나 그가 기억하는 광주는 나가 싸우고 죽이는 그런 광주가 아니라 싸우지 못한 사람의, 경상도에서의 광주이다.
"광주 이야기를 하면 보통 당시 광주 현장에 대해서만 말하죠. 하지만 그 시간에 경상도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별로 이야기하지 않더라구요. 그때 경상도에서는 광주 사람들을 마치 백인이 흑인 대하듯 했거든요.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작가는 대부분의 광주 사람들이 아마 '마지막 날'에는 나가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함께 하지 못해 어떤 의미에서든 죄책감을 가지고 있을 그들이지만,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며 또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그렇게 살아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아버지'가 당시의 신문기사를 한 달 내내 스크랩하며 자신의 죄값을 치르듯 말이다. 인생에 대한 작가의 헤아림은 떠나는 자의 뜨거움보다 남은 자의 비애가 우리네 삶의 진정성을 더 보여준다는 것을 그려내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작가는 소설 쓰는 것이 옛날에도 재미있었지만 "이제는 너무너무 재미"있다고 한다. 쓰고 싶은 주제도 많다. 정체성에 대해서도 계속 탐구해보고 싶고,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도 고증과 연구를 통해 새롭게 해석해보고 싶고, 매우 코믹한 글도 써보고 싶고…. 지금은 사랑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불륜 소설도 많이 읽었는데, 제 또래들에게 듣는 얘기와 차이가 나더라구요. 우리 세대는 어떻게 사랑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요. 사회학적 사랑에 대해, 법률은 어떻게 사랑을 규정하는지, 결혼의 근거는 무엇인지 등을 공부하고 있어요. 선배들은 불륜을 아름답게 묘사하지만 과연 그렇게 아름다울까…. 사실 골치 아픈 문제거든요."
해박한 서지학적 상상력 등으로 매우 지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다고 평가 받는 작가이기도 하지만, 그는 소설가는 늘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쨌든 소설가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 대해 규정을 내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보편타당한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임지지 못하는 말을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거니와 독자들에게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자신의 좁은 식견을 알아볼 독자 때문에라도 갈고 닦으며 계속 공부를 해야 한다고 작가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가 지적으로 현란하거나 거창한 사유가 녹아 있는 소설을 쓰고 싶어한다고 이해되면 더욱 곤란한 일. 소설가 김연수 씨는 단지 "재밌는 소설"을 쓰고 싶어한다. 작가가 거의 개입하지 않으며 서사가 뚜렷하고, 이야기가 재미있는 소설, 그렇지만 탄탄한 근거 위에 튼튼하게 세워진 소설 말이다. 그런 소설을 쓸 때까지 작가는 "끝까지 밀어보"기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기로 결심했다. 이 고집스럽고 성실한 작가가 쓸 사랑을 주제로 한 다음 소설이 기다려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