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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5년 12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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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36쪽 | 394g | 145*210*20mm |
ISBN13 | 9788954639040 |
ISBN10 | 89546390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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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았다. 부엌에는 플락스틱 반찬통, 바구니, 김치통, 약봉지, 유리그릇, 냄비, 밥통, 생활용품들이 가득했다. 필요해서, 필요할 것 같아서 사 둔 물건들은 바닥을 점령했다. 비닐봉지는 왜 그렇게 많던지. 사놨는데 어디 있는지 몰라서 또 산 물건들이 가득했다. 칫솔, 치약, 행주, 수세미, 키친타월, 크린랩. 물건 정리와 청소 좀 한다던 나조차 기가 질렸다.
거실은 옷과 이불로만 산을 이뤘다. 작은 방도 마찬가지였다. 비닐째 쌓여 있는 옷들을 정리했다. 먼지와 곰팡이, 묵은 냄새들이 코를 찔렀다. 인터넷을 떠올리자 빛이 들어왔다. 검색했더니 여러 업체들이 딸려 나왔다. 몇 군데 전화를 걸었다. 그즈음 나는 전화 거는 것, 부탁하는 것, 물어보는 것에 기가 질려 있었다. 친절하지 않은 음성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자세한 견적을 뽑고 싶어 구구절절 설명했다. 계단이 있고 집이 높고 짐이 많다는 것. 백오십만 원을 불렀다. 말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백오십이 누구 집 이름이냐. 우리끼리 해보자. 헌 옷 업체 부르고 종량제 봉투 사다가 쓰레기장으로 짐들을 날랐다. 쓰레기장은 멀었다. 골목을 내려가고 다시 내려가고 길을 하나 건너서 골목으로 들어갔다. 중간에 나는 출근한다는 핑계로 빠져나왔다. 남은 두 사람이 그 짓을 다 했다. 비염 증세가 도지고 있다, 허리가 아프다, 너희들은 백수니까 나는 힘든 건 못하겠다. 뻔뻔하게 그런 말이 잘도 나왔다.
중간에 헌 옷 업체 남자가 옷 값을 깎았다. 냄새가 나고 소재가 가볍다는 이유였다. 그거라도 팔아서 밥값, 종량제 봉투값, 커피값하려던 계획이 물 건너갔다.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텔레비전 값이 삼만 원이었다. 나머지 가전제품을 가져간다는 조건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고개를 자주 끄덕였다. 네, 그러세요. 마음대로 하세요. 제발 가져가고 가져가세요. 나중에 헌 옷 남자가 이제 오기 싫다고, 무섭다고 했다. 그래도 옷과 이불, 냄비가 남아 있었다.
삼겹살 8인분을 시켜 먹으면서 익은 것만 확인하고 고기를 먹으면서 그냥 백오십에 맡길 걸 후회했다. 몸이 힘들었다. 우리가 해보니 백오십을 줘도 안 할 것 같았다. 백오십은 적게 부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는 내 변명도 통하지 않았다. 숨을 몰아쉬며(코로는 숨을 쉴 수 없으니까, 얼마나 다행인지 입과 코가 있어서) 쓰레기장까지 짐들을 버렸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공사장 인부들처럼 고기를 먹어댔다. 오리, 삼겹살, 삼겹살, 소고기, 소고기. 그렇게 먹어도 힘이 나지 않았다.
정리하면서 좋았던 순간은 비닐봉지에 쌓인 동전들을 발견할 때였다. 나올 때마다 은행에 가서 바꿨는데 어떤 동전은 썩어서(돈이 썩었다는 말은 비유가 아니라 진짜다) 바꿔줄 수가 없다고 했다. 그 외에는 먼지와 짐들의 무게 때문에 힘들었다. 처음에는 분류라는 것을 했는데 나중에는 봉지 안을 보지도 않고 버렸다.
이유의 『소각의 여왕』은 우리가 했던 일을 하는 인물이 나온다. 해미와 지창씨는 고물상을 운영하면서 살아간다. 두 부녀는 서로에게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사이좋게 운전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해미의 뒤통수에 불이 나긴 하지만. 허파에 바람이 드는 유전병을 지창씨 역시도 가지고 있다. 고물상에서의 돈은 정직하다. 일 한 만큼 벌어간다. 웃음밖에 안 나오는 돈이지만 고물상에 오는 사람들에게는 하루 노동의 소중한 대가이다.
친구 정우성은 지창씨의 현금을 전선에 피복 벗기듯 벗겨간다. 그러다 오랜만에 나타나서 희귀금속을 만들 수 있다는 기계의 도면을 보여준다. 해미는 제발 지창씨가 허파에 바람이 빠졌으면 하지만 내버려 둔다. 그 대신 지창씨가 하던 일을 이어간다. 죽은 사람들의 유품을 정리하는 일. 힘도 세고 냄새 제거도 확실히 하는 해미. 집에서 오랫동안 앓아누운 엄마가 있었고 편의점이라도 차려서 앞으로의 삶을 기대고 싶기도 한 해미.
『소각의 여왕』에서 그리는 세계는 한 편의 동화를 보는 듯한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기운을 가지고 있다. 고물들이 잔뜩 쌓여 있는 그곳에서 해미는 목욕탕 의자에 앉아 전선을 벗기고 파지를 골라내고 지창씨는 창고에서 자신이 만들어낸 기계와 씨름한다. 초 단위로 사람들은 죽어간다. 사고로 사고 같은 자살로 혼자 죽기 싫어 같이 죽고 아파서 죽는다.
이 소설에서 죽음은 흔하게 등장한다. 태어나는 것에 이유가 없듯 죽음에도 이유가 없다. 고통과 죽음은 다르다고. 죽음은 다른 차원의 일이라는 것이다. 죽음으로 향한 사람들이 남긴 것들을 정리하는 해미에게 죽음은 견적은 뽑아내야 하는 일이고 가능하면 산 사람들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일이다. 힘이 드는 건 씻어도 가시질 않는 냄새 때문이다. 죽음은 냄새를 남긴다. 살이 썩어가고 눈동자가 풀리는 일이다. 해미와 지창씨는 죽음 앞에서 고통 앞에서 할 만큼 한 사람들이다. 잘못 썼다. 할 만큼 한 사람들은 없다. 고통을 동반하는 죽음의 기운 앞에서 굴복한 사람들이다.
소설의 끝이 어떻게 됐는지 자세하게 알고 싶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자세히 알아야 할 것도 없는 일이다. 허구의 세계든 현실의 이야기든 끝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죽음이 끝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지창씨가 결국 만들어낸 결말은 허파에 바람이 들어차지 않아도 웃음이 나오는 일이다. 김중혁의 『나는 농담이다』의 주인공 장우영이 하던 말이 계속 떠오른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소고기 세 팩을 사서 구워 먹었는데 일 년에 한 번뿐이니까 많이 먹으라고 농담했다. 『소각의 여왕』에서는 삼겹살 한 근, 반 근씩을 사서 구워 먹는다. 사 먹어 놓고 이렇게 비싼 걸 먹어도 되나 후회가 들어 걱정하는 것으로 반성했다. 무슨 말인지. 후회를 했다는 건지 걱정을 했다는 건지 반성을 했다는 건지. 소고기 사 먹는 게 이렇게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일인 건지 의문이 들기는 한다. 물건으로 남길게 아니라 기억과 경험으로 오그라드는 말이지만 추억으로 남길 일이다, 돈으로는. 어마어마한 짐들을 정리하면서 얻은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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