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작을 발표하면서 우리 시대의 문학을 이끌어가는 대표작가 중 하나로 손꼽혀온 김연수의 세번째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가 출간되었다. 이번 소설집에는 인간의 진실을 찾아, 기록된 사실 이면에 숨겨진 굴곡을 다각도로 보여주는 9편의 연작이 수록되었다. 작가는 구체적 사실을 중심에 놓고 다양한 텍스트들을 읽고 상상하고 짐작하면서 역사와 문헌에 씌어진 것을 문학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발군의 역량을 보여준다.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는 수록작품 모두 편차 없이 고른 성취를 보이고 있다. 진지한 문제의식, 우아한 농담, 밀도높은 문장, 출중한 형식미가 어우러져 있어 소설가 김연수의 개성을 뚜렷이 느낄 수 있다. 한편 비디오아트와 일러스트, 카툰 등 다양한 작업을 통해 활발하게 사회에 말걸기를 시도하고 있는 젊은 미술인 이부록이 작품 편편마다 독특한 해석의 일러스트를 선보여 책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었다.
제목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서 ‘유령작가’의 사전적 의미는 대필작가(ghostwriter)이다. 작품 뒤에서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소설이라는 허구의 시공간을 움직이고 있지만 그 이야기는 단순히 작가 개인의 것이 아니다. ‘써줄 사람이 없기에 소설이 되지 못한 것’을 자신이 쓸 수밖에 없다는 꿈과 열정이 담긴 글쓰기이다. 구전되는 이야기 바깥의, 문헌에 기록된 문장들의 행간에 담긴 진실과 거기 숨겨진 무수한 ‘나’의 흔적을 치밀하게 그려보려는 것이다. 그 속에서 개인과 사회가 서로 반향하고, 기억은 다채로운 무늬를 보여준다.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 수록된 작품들을 보면 작가가 다양한 글쓰기 실험을 지속하고 있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작가는 「뿌넝숴」 「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는 독백체의 진술문으로, 「거짓된 마음의 역사」는 일방적인 보고를 위한 서간문으로 쓰고 있으며 「연애인 것을 깨닫자마자」에서는 개화기 지식인의 문체를 응용하고 있다.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는 히말라야 산맥이나 등산에 대한 지식을 풍부하게 사용할 뿐만 아니라 중국을 무대로 할 때는 한시를, 19세기 미국인이 화자인「거짓된 마음의 역사」에서는 휘트먼(Whitman)의 영시를, 개화기 지식인 화자로서는 일본 시가와 식민지 시절의 어휘를 풍부하게 구사한다. “주제에 합당한 문체를 추구”하는 작가의 철저하고 집요한 태도가 짐작되는 부분이다.(김병익, 문학평론가)
책의 첫머리에 실린 작품「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의 주인공은 서른네살의 회사원이다. 우연히 전철에서 여섯달 전에 이혼한 전처를 재회한 ‘나’는 그녀와 함께 안국동, 가회동, 재동 길을 걷다가 작별인사도 없이 어정쩡하게 헤어진다. ‘나’는 며칠동안 그녀와의 만남을 곱씹어본다. 지도를 사서 그날 걸었던 길을 표시하고 되짚어보며 그녀와 나의 관계가 어떤 것이었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느 지점에서 내 삶이 틀어지기 시작한 것인지 반추해본다. 하지만 ‘나’에게 삶은 “며칠 굶은 짐승의 내장처럼 어둡고 습하고 꾸불꾸불한, 그러나 텅 비어 막히지 않고 계속 어디론가 이어지는 골목길” 같은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그래도 ‘나’는 “어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한번 버텨보”면서 “결코 질문을 멈추지 않을 작정”이라고 말한다.
「뿌넝숴」는 중국 연변의 중국인 관상가가 한국인 소설가를 만나 한국전쟁 당시에 중공군으로 참전했던 기억을 회고하는 내용이다. 사연을 들려주면서 중국노인은 역사라는 건 책이나 기념비에 기록되는 게 아니며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몸에 기록되는 것이라 믿고 진실한 삶은 ‘결코 말해질 수 없다’며 ‘뿌넝숴’(不能說)라고 되뇐다. 지평리 전선에서 외진 농가에 고립되었던 그는 조선인 간호사로부터 수혈을 받고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그에게 피를 넣어준 간호사는 생명을 잃는다. “지평리에서 무엇을 보았는가”에 대해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하는 화자는 두 남녀가 부상당한 채 탈진상태의 몸으로 서로의 몸을 탐하게 될 때 “살아 있다는 건 그토록 부끄럽고도 황홀하고도 아픈 일”이었다고 기억한다. 기록된 역사의 이면에 숨겨진 인간의 진실을 탐구하기 위해 이야기를 끌고 간 힘과 유려한 문체가 인상적이다.
서간체 형식을 띤 「거짓된 마음의 역사」는 19세기말 조선에 파견된 미국인 간호사를 찾아 데려오는 일을 맡은 미국인 사설탐정 벤저민 스티븐슨의 편지 여섯 통과 미국공사관 파커 서기관의 편지 한 통으로 이루어져 있다. 탐정 스티븐슨은 조지 워싱턴 브룩스 씨에게 약혼녀 엘리자베스 닷지 양을 무사히 데려다주는 임무를 지고 한국까지 그녀의 행방을 추적해왔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닷지 양을 만난 탐정은 그녀와 조선에서 잘살겠다고 편지를 띄운다. 언뜻 농담처럼 느껴질 법한 이야기 속에 작가는 서양문명에 의해 형성된 ‘오리엔탈리즘’의 문제를 뛰어나게 포착한다. “귀하가 믿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굳이 날짜변경선을 넘어 이 먼 동아시아까지 직접 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 총칼을 앞세우고 여기로 찾아온다고 해도 말릴 생각은 없습니다만, 우리를 찾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상상한 것만을 볼 수 있을 뿐인데, 이곳에서 살아가는 우리에 대해 귀하는 그 무엇도 상상할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라고 쓴다. 미국인 사설탐정인 ‘나’를 화자로 배치하고 동아시아에 대한 전도된 오리엔탈리즘을 고백하도록 설정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녹록지 않은 작가의 내공을 엿볼 수 있다.
「남원고사에 관한 세 개의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은 우리가 알고 있는 춘향전의 이야기를 비틀어 전혀 다른 맥락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사실은 보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춘향과 변사또 간의 서로 다른 이야기로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 작품은 춘향, 옥을 지키는 군뢰사령, 변사또의 시선으로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고 현전하는 최고(最古)의 춘향전에 관한 하나의 주석을 덧붙여놓았다. 명백한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는 듯 보이는 춘향전에 숨겨진 상상의 이야기는 가령 이런 것이다. 춘향은 이몽룡에게 뜨거운 사랑을 영원히 간직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옥중에서 ‘그것이 이몽룡만을 향한 마음이었을까?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하는 생각으로 슬픈 느낌에 사로잡힌다. 춘향을 가까이서 지켜봤던 군뢰사령은 독백을 통해 변사또가 수청을 강요한 파렴치한이라는 소문은 사실무근이라고 진술한다. 변사또는 남원에 도착한 어사또에게 자신의 사연을 들려준다. 열녀를 잡아 수청 들게 했다는 거짓소문으로 인해 곤경에 빠질 뻔한 변사또의 이야기가 변사또와 어사의 대화를 통해 독자에게 전해진다. 우리말을 다루는 감각이 뛰어나면서도 인문학적 비판력을 겸비한 작가의 재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은 나는 누구인가, 진실은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탐구하는, 작가정신이 돋보이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소설의 화자는 ‘나’와 ‘그’로 교묘하게 나뉘는데 이런 형식은 소설을 더욱 생동감있고 탄력있게 만든다.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에 참여하여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읽으며 등반준비를 하는 화자 ‘그’의 애인은 “야만의 시대에 더이상 회색인이나 방관자로 살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후회는 없어.”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그’는 수많은 책을 읽고 문장을 옮겨 적고 죽은 애인과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로 썼으며 낭가파르바트 원정대 등반일지를 적는다. ‘그’가 보낸 소설을 받은 ‘나’는 ‘그’가 읽고 있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주석본을 펴낸 교수이다. 작가는 역사든 소설이든, 문자로 씌어진 것이 결코 삶 그 자체로 치환될 수 없다는 확인을 곳곳에 깔아놓는다. ‘그’는 등반기록을 쓰면서 문장으로 남길 수 없는 일들이 삶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은 사람들이 “인과관계에 어긋나는 일들은 문장으로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꾸준히 등반일지를 적어가던 ‘그’는 결국 등반에 실패하고 낭가파르바트 설산에서 실종된다. 하지만 ‘나’는 그의 등반일지 바깥에 그의 꿈과 기록되지 못한 진실들이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방대한 자료조사를 통한 인문적 소설쓰기로 우리 문학에서 뚜렷하게 자리를 굳힌 작가 김연수의 개성을 드러내는 수작이다.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는 언니 세희, 그녀와 동거하는 일본인 유학생 네즈미, 세희의 부름을 받고 방문한 동생 세영 등이 런던에서 함께 지내는 동안의 미묘한 감정적 교류를 묘사한 작품이다. 「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는 50여년 전 좌우이데올로기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역 혐의를 받아 사형 당하게 되는 여인의 사연을 철저한 독백체로 담아냈다. 그밖에도 1930년대의 개화기 지식인을 화자로 삼은 「연애인 것을 깨닫자마자」, 동생을 중국 교포 처녀와 결혼시키기 위해 방문한 하얼삔에서 주인공이 겪는 심리적 갈등을 그린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 등 편편마다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또렷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숨어 있는 진실을 어림하기 위해 거듭 현실을 반성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잘 드러난다.
글쓰기를 위해 흘린 땀이 깊이 스며들어 빼어난 문학성을 선사하는 이번 작품집이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읽힐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