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의한 시대<br/>2. 어머니 혜인 스님<br/>3. 금성에 꽂은 깃발<br/>4, 송악에서 싹튼 사랑<br/>5. 기훤의 죽주산성<br/>6. 능환의 지략<br/>7. 신훤과 원회<br/>8. 견훤의 무진주 정벌<br/>9. 미륵세상을 꿈꾸며

1. 출간덕목<br/><br/>민족분단 어언 반세기. 오늘도 우리는 민족의 최대 염원이자 숙제로 대두되어 있는 통일의 여망에 몸부림치고 있다. 무엇이 우리를 다시 하나로 이어주고 모아줄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과연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br/><br/>여기 후삼국시대의 분열되고 흩어졌던 민심을 모아 민족 천년의 정기와 자존을 세움은 물론 오늘날의 코리아로 불리는 대 고려제국을 건설한 태조왕건을 통해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 <br/><br/>역사는 이긴 자의 몫이 아니고 남은 자의 몫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제 대망의 21세기를 맞아 천년전, 고려제국이 우리에게 일깨우고 남겨준 민족의 얼과 통일정신을 되살려 난관 속에서도 약진을 거듭하고 있는 한국사의 오늘에 보다 크고 분명한 주제와 덕목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제시하고자 한다.<br/><br/>2. 기획의미<br/><br/>고려는 외세의 도움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통일의 대업을 이룬 국가이다. 그리고 고려를 세운 태조왕건은 그 스스로 황제를 칭하여 나라를 제국화 하였으며 자신을 '짐'이라 불렀다. 일찍이 우리 역사에 이처럼 호쾌한 시대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제 이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오만하거나 대부분의 나라를 건국하는 인물들처럼 독재적이거나 포악하지도 않았다. 그는 늘 자신을 굽혔으며 백성을 먼저 생각했다. 전쟁보다는 평화를 원했으며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을 때 군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늘 승리했다. 백성과 함께 했고, 신의와 진리를 앞세워 인심을 얻은 결과였던 것이다. <br/><br/>태조왕건은 통일의 대업을 이룬데 있어 몇 가지 결정적인 그만의 훌륭한 방법론을 후세인들에게 제시해주고 있다. 그것은 화합론이었다. 그는 우리 민족의 한 핏줄인 발해의 망국민들을 받아들였으며 천년의 명맥을 유지해온 신라를 평화적으로 이양 받았다. 뿐만 아니라 수십 년간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후백제의 시조 견훤을 제 발로 걸어와 스스로 투항하게 했다.<br/><br/>그것은 끝없는 전쟁으로 일관한 그 시대의 상호관계를 감안한다면 가히 기적적인 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또한 전쟁의 와중에서도 서경(평양)을 두어 끝없이 옛 고구려의 영토회복을 모색하였는데 이는 대륙으로 향하는 우리 민족의 북벌에 대한 거대한 웅지를 잘 보여주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결과로 볼 때 그는 평화적이되 약하지 않았고, 인정을 갖되 본분을 잃지 않았던 군주였던 것이다. <br/><br/>오늘 우리가 '코리아'라는 국제적 나라이름을 갖게된 것도 실은 왕건에 의한 영향력의 결과라는 것을 오늘날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역사물에서 고려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외면 당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는 고증에 관한 어려움과 인용할 학술적 자료가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고려사를 바라보는 왜곡된 시각 때문이었다. 그것은 고려사를 단지 조선의 시각에서 바라본 것에 기인한 결과였다. 반란으로 정권을 잡고 나라를 세운 조선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바로 전 왕조였던 고려를 부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이다. <br/><br/>이제 우리는 밀레니엄을 맞아 새로운 시대를 재조명하여야 할 때가 왔다고 본다. 민족의 자존을 일깨우고 단절된 통곡의 벽을 허물어 민족의 일치성을 부활시킴은 물론, 이 작품이 통일에의 한 초석의 끈이 되어지기를 희망하고 있다.<br/><br/>이제 고려사는 막 시작의 문을 열고 있을 뿐이다. 475년 영욕의 역사는 이 작품을 필두로 하여 그 장구한 역사의 숨겨졌던 모습을 들어내게 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작품의 출간은 그 의의가 매우 높고 크다고 할 것이다. 아울러 이 작품은 물론이고 앞으로의 고려사 전반에 걸쳐서 북한의 협조와 참여는 긴요하고도 필수적인 또다른 문제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결과는 남과 북의 동질성 회복이라는 아름다운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게 될 것이다. <br/><br/>이 작품이야말로 새 천년을 맞으며 한 민족이면 누구나 읽어야 할 대망의 대하 역사소설이 그 어찌 아니라 할 것인가

견훤은 서남해에서 이미 무서운 장수로서의 이름을 얻었다. 그가 속한 군대는 규율이 엄정했다. 그는 또한 작은 여러 집단으로 나뉘어 있던 해적들을 제압하면서 그들을 회유하여 부하로 삼았다. 이중 훗날 수달 장군으로 불리는 포악하고도 거센 대규모의 해적이었던 능창을 자신의 수하로 삼는데 성공하면서부터 그는 일대의 호족들에게 그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견훤은 우연하게 탐관오리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자신의 상사와 갈등을 일으켜 그를 제거하면서부터 비로소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된다. 그는 관아의 창고를 열었고 백성들의 인심을 급격히 모았다. 그는 자신의 것을 챙기지 않았다. 이미 조정과 관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던 그 때, 먹을 것을 주고 도적을 막아주고 백성들의 안위를 보살펴주는 견훤은 그들에게 있어 구세주와 다름이 없었다. 견훤은 독립한 지 한 달만에 무려 오 천의 대병을 거느리는 장수가 되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어려서부터 자신을 보살펴 온 능환이라는 책사의 덕이었다. 이 때쯤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는 서사벌주에서 장군을 칭하고 있었다. 아자개는 견훤 외에도 세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이 있었다. 모두 첩실 소생이었는데 그 중 딸인 대도주금은 여걸이었다. 미모도 뛰어났을 뿐더러 무예가 워낙 출중하여 여장군으로서 그 이름이 천하에 알려져 있었다. 아자개의 딸은 큰 오라비인 견훤과 사이가 무난하였으나 다른 형제들은 마치 철천지원수처럼 등을 돌리고 살아왔다. 그 때문에 견훤 부자는 양쪽이 모두 일정한 세력을 거느리게 되었음에도 서로를 경원하고 있었다. 견훤은 이윽고 호족들의 인심을 얻으면서 오 천의 대병을 몰아 무진주를 습격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왕을 칭하게 되었다. 무진주는 지금의 광주지역을 일컫는다.

그럴 무렵 왕건은 몇 년이 흐르는 동안 소년에서 청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송악일대와 그 주변의 호족들은 여전히 왕륭에게 의지하여 아직까지는 평온한 세월을 살아가고 있었다. 세상이 그토록 어지러워지고 있었지만 이 곳까지는 그 여파가 미처 미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일대의 호족들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들이 있는 곳에도 급격한 변화가 올 것이라는 것을…. 왕륭은 주변의 여러 호족 중 특히나 강장자와 교분이 있었다. 강장자는 훗날 궁예의 왕후가 되는 강씨의 아버지로서 송악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신천 지역의 상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주로 거점으로 삼고 있는 곳은 평주였다. 일찍부터 양가는 자식들의 혼인을 약정해 놓고 있었다. 그 만큼 두 집안은 가까웠던 것이다. 예성강에 무역이 활발할수록 왕건과 강장자의 딸 연화는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어려서부터 친근했었기에 그 만큼 사랑도 일찍 싹텄다. 그들은 나름대로 주변의 호족들처럼 아직은 평온한 상태에 있었다.

그 무렵 궁예는 포악한 기훤을 제거하고 보다 넓은 세계를 향하여 거처를 옮겼다. 궁예가 무리를 이끌고 찾아간 곳은 북원(원주)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양길이었다. 양길은 수천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고 나름대로 원대한 꿈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 시대에 큰 꿈을 가졌던 여러 영웅 중 하나였던 것이다. 궁예는 기훤에게 있을 때부터 남다른 모습을 무리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사람을 가리지 않았으며 무엇이든 나누어주었다. 특히나 절에서 익힌 의술로서 백성들과 수하 장졸들에게 무한한 인정을 베풀었다. 군율은 엄하였지만 의지할 데 없는 백성들과 늘 함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부하들과 함께 잠을 잤고 먹을 것도 함께 나누어 먹었다. 거기에다가 그는 언변이 좋았다. 그는 미륵사상을 설파했고 다가올 유토피아의 세계를 꿈꾸게 해주었다. 의지처를 잃고 방황하던 백성들과 그 백성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농민군들은 어느새 궁예를 살아있는 미륵불로 부르게 되었다. 양길은 그러한 궁예가 필요하였고 궁예 또한 종간의 뜻에 따라 큰 포부를 펼치기 위해서는 양길이 필요하였다. 그들은 의기투합하였고 이윽고 힘을 합쳐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하였다. 궁예의 군대는 미륵의 군대로 불리게 되었다. 군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길을 막고 있던 신라군들은 다투어 항복하기에 바빴다. 주천과 나성, 지금의 평창인 을오 그리고 지금의 울진인 어진 등 명주(강릉)관내의 성들이 속속 미륵의 군대에 함락되어 갔다. 궁예의 이름은 이때부터 넓게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그러한 세월 속에서 왕건은 나이 열 일곱이 되었다. 그때 견훤은 스물 일곱, 궁예는 스물 셋인 서기 893년이었다. 이때 도선선사는 다시 송악을 찾았는데 선사의 나이 70을 바라보고 있던 때였다. 도선은 송악에 있는 도선사에 머물면서 이미 장년으로 성장해 있는 왕건을 불러 그가 훗날에 할 일들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늙은 중이 젊은 호족의 아들을 그저 범상하게 가르치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 시기는 왕건에게 있어 매우 소중한 날들이었다. 왕건은 도선으로부터 하늘의 기운을 살피는 천문법과 사람의 심성을 알아내는 관상법, 그리고 삼한의 풍수지리에 대해 사사 받았다. 몇 달을 머물던 도선이 떠나간 뒤로 늙은 왕륭은 집안의 모든 일을 왕건에게 맡겼다. 왕건은 이 때부터 아버지대신에 가신들을 거느리게 되었고 가병들인 정예 상인 부대를 통솔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성장한 그 만큼 연화와의 사랑도 깊어져 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왕건은 연화 집안의 가신인 유금필이라는 청년을 눈여겨보게 된다. 평소 말수가 적고 빈틈이 없어 보이는 이 청년은 누구의 눈에든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왕건은 머지 않아 그의 인물됨을 알아보게 되는데 그가 바로 왕건을 도와 삼한을 통일하게 되는 희대의 명장, 바로 그 유금필이었던 것이다. 왕건은 스스로 집안의 모든 일을 맡고 부터 자신이 장차 해야할 일들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주변으로 조여오는 압력을 느낄 수 있었다. 어지러운 난세에는 무엇인가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