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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

NPO 라디오 컴필레이션: 2000년대 히트곡 모음집 (Top 2000 - The 90's) [2LP]

오아시스 / 큐어 / 이기 팝 / 포티쉐드 / 스콜피온스 / R.E.M 외

[ 180g / 게이트폴드 ]
Ronan Keating, Faithless, Robbie Williams, Paul Weller, Liquido 노래 외 18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Music on Vinyl / Music on Vinyl | 2021년 12월 10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126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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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O 라디오 컴필레이션: 2000년대 히트곡 모음집 (Top 2000 - The 90's) [2LP]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21년 12월 10일

관련분류

음반소개

LP 구매시 참고 사항 안내드립니다.
※ 재킷/구성품/포장 상태
1) 명백한 재생 불량 외에 경미한 재킷 주름, 모서리 눌림, 갈라짐 등은 반품/교환 대상이 아님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2) 속지(이너 슬러브)는 디스크와의 접촉으로 인해 갈라질 수도 있는데, 이는 반품/교환 대상이 아닙니다.
3) 디스크 라벨은 공정상 매끄럽게 부착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4) 본품에 문제가 없는 겉포장 비닐의 손상은 교환/반품 대상이 아닙니다.

※ 재생 불량
1) 톤암 혹은 무게 조절 기능이 없는 턴테이블을 사용하시는 경우, (주로 올인원 형태 모델) 다이내믹 사운드의 편차가 큰 트랙을 재생할 때 튀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는데 이는 대부분 가벼운 톤암 무게가 원인입니다.
기기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재생 불량 현상에 대해서는 반품/교환이 불가하니 톤암 조절이 가능한 기기에서 재생하실 것을 권유 드립니다.
2) 디스크는 정전기와 먼지로 인해 재생이 원활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전용 제품으로 이를 제거하면 대부분 해결됩니다.
3) 바늘에 먼지가 쌓이는 경우에도 재생이 원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디스크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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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재생 음역의 왜곡을 최소화 하고 반복 재생시에도 최대한 일관되게 유지되도록 디스크 센터 홀 구경이 작게 제작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턴테이블 스핀들에 맞지 않는 경우에는 전용 제품 등을 이용하여 센터 홀을 조정하시면 해결됩니다.
3) 간혹 디스크에 미세한 잔 흠집이 남아있거나 마감이 깨끗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재생에 이상이 있는 경우에만 반품이나 교환이 가능합니다.

※ 컬러 디스크
아래에 해당하는 경우는 불량이 아니므로 반품 및 교환은 불가하오니, 구매시 참고를 부탁드립니다.

1) 컬러 디스크는 웹 이미지와 실제 색상이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2) 컬러 디스크의 특성상 제작 공정시 앨범마다 색상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3) 컬러 디스크는 제작 과정에서 다른 색상 염료가 섞여 얼룩과 번짐, 반점 등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 교환/반품 안내
1) 명백한 불량으로 인한 교환/반품 요청 시에는 불량 내역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 및 동영상과 재생기기 모델명을 첨부하여 고객센터에 문의 바랍니다.
2) LP는 잦은 배송 과정에서 재킷에 손상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고 재판매가 어려우므로 오구매, 변심으로 인한 반품은 어렵습니다. 신중한 구매를 부탁드립니다.

디스크

Disc1
  • A1 Brian May - Too Much Love Will Kill You
  • A2 Iggy Pop - Candy
  • A3 Crowded House - Weather With You
  • A4 UB40 - Kingston Town
  • A5 Manic Street Preachers - Motorcycle Emptiness
  • A6 Elvis Costello - She
  • B1 Lenny Kravitz - Are You Gonna Go My Way
  • B2 Live - Lightning Crashes
  • B3 The Cranberries - Linger
  • B4 Jeff Buckley - Hallelujah
  • B5 Portishead - Glory Box
  • B6 Scorpions - Wind Of Change
Disc2
  • C1 Oasis - Wonderwall
  • C2 Nick Cave & The Bad Seeds - Into My Arms
  • C3 K's Choice - Not An Addict
  • C4 Soundgarden - Black Hole Sun
  • C5 Liquido - Narcotic
  • C6 Paul Weller - You Do Something To Me
  • D1 The Cure - Friday I'm In Love
  • D2 Therapy? - Diane
  • D3 Robbie Williams - Let Me Entertain You
  • D4 Faithless - Insomnia
  • D5 Ronan Keating - When You Say Nothing At All
  • D6 R.E.M. - Find The River

상세 이미지

상세 이미지 1

아티스트 소개 (23명)

2001년 영국에서 가장 많은 앨범을 팔았다는 다이도(Dido)... 그녀는 자신의 음악에 담긴 일렉트로니카의 요소들의 성공을 자신의 음악을 프로듀싱한 페이스리스(Faithless) 멤버들의 덕으로 돌렸다. 포크적 감성으로 만든 다이도의 음악에 일렉트로니카의 서정성을 덧입혀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이끌어 낸 주인공들이 바로 페이스리스이다. 1995년 영국에서 결성된 일렉트로니카 밴드 페이스리스는 다이도가 속해 있던... 2001년 영국에서 가장 많은 앨범을 팔았다는 다이도(Dido)... 그녀는 자신의 음악에 담긴 일렉트로니카의 요소들의 성공을 자신의 음악을 프로듀싱한 페이스리스(Faithless) 멤버들의 덕으로 돌렸다. 포크적 감성으로 만든 다이도의 음악에 일렉트로니카의 서정성을 덧입혀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이끌어 낸 주인공들이 바로 페이스리스이다. 1995년 영국에서 결성된 일렉트로니카 밴드 페이스리스는 다이도가 속해 있던 그룹으로 뒤늦게 국내에도 그 이름을 알렸다. 다이도가 팝 뮤지션으로서의 역량을 키운 페이스리스의 메인 브레인은 다름 아닌 그녀의 친오빠 롤로 암스트롱(Rollo Armstrong)... 페이스리스는 1993년 프로듀서 겸 리믹서로 이름을 날리던 롤로 암스트롱과 DJ로 인기를 누리던 시스터 블리스(Sister Bliss)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롤로 암스트롱은 1992년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펠릭스(Felix)라는 이름으로 ’Don’t you want me’를 제작하여 25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린 바 있으며 영국 차트에서 세 곡의 No.1과 4곡의 Top10 싱글을 리믹스 해 낸 정상의 프로듀서와 리믹서로 활약해 왔다. 롤로와 함께 페이스리스를 이끌어 가는 시스터 블리스 역시 이전 경력이 화려하다. 최고의 하우스 DJ로 대접받는 그녀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수업을 정식으로 받았으며, 섹소폰과 베이스를 연주하기도 했던 실력파 뮤지션이다. 1987년부터 하우스 뮤직에 심취한 그녀는 여러 악기를 다룰 수 있다는 그녀만의 차별화 된 능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음악들을 만들어 가며 영국 최고의 DJ로 자리 한다. 1993년 페이스리스로서의 작업을 시작한 화려한 경력의 두 하우스 뮤지션은 1995년 두 명의 보컬리스트 재미 카토(Jamie Catto)와 맥시 재즈(Maxi Jazz)를 영입하여 데뷔 싱글 ’Salva mea’를 발표한다. 재미 카토는 빅 투르스 밴드(The Big Truth Band) 출신의 보컬리스트이자 송라이터로 현재는 그룹을 탈퇴하고 솔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소울 푸드 카프 밴드(The Soul Food Caf Band) 출신인 맥시 재즈는 재즈, 힙합 보컬리스트이면서 동시에 DJ로도 활약하며 그룹의 또 하나의 핵심 인물로 자리해 있다. 1983년에 힙합을 시작한 그는 1980년대 DJ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명성을 쌓았고, 1992년에는 자신의 레이블인 나무 레코드(Namu Record)를 세우기도 하였다. 후에 자미로콰이(Jamiroquai)의 밴드 멤버로 투어를 하기도 했던 그는 불교 신자로서 그룹에 레게 스타일과 애시드 스타일의 곡을 제공하고 있다. 화려한 경력의 DJ들로 구성된 페이스리스는 ’Salva mea’를 크게 히트시키고, 연이어 ’Insomnia’, ’Reverence’로 성공 행진을 이어간다. 멤버들이 DJ, 프로듀서로서 솔로 활동을 해 나가고 있었던 만큼 이들은 프로젝트 그룹의 성격이 강했지만 세 싱글의 연이은 성공은 이들의 결속력을 강화 시켰고, 1996년 롤로의 레이블인 치키(Cheeky) 레코드를 통해 데뷔 앨범인 < Reverence >를 내놓으며 페이스리스의 이름을 이어가게 된다. 하우스 씬의 강자들답게 이들의 데뷔앨범은 영국 댄스 씬에서 히트했고, 각 멤버들은 자신들 나름의 바쁜 활동 속에서도 ’페이스리스’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일렉트로닉 시도들을 이어나가게 된다. 데뷔 앨범의 성공으로 메이저 레코드사인 아리스타(Arista)와 계약을 체결한 이들은 1998년 두 번째 앨범 < Sunday 8pm >을 발표한다. 맥시 재즈의 곡인 ’God is a DJ’를 비롯한 여러 곡들이 히트하면서 명성을 이었고, 1999년에는 인기에 보답하듯 < Sunday 8pm >을 리믹스 앨범으로 다시 선뵈기도 하였다. 하우스라고 하는 최종적으로 춤을 위한 일렉트로니카 음악을 하는 이들이지만 이들의 음악이 단순한 하우스 비트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일렉트로니카 음악 속에서도 감수성을 잃지 않고 있으며, 일렉트로니카의 소울 음악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소울이 가진 보컬의 가치, 가사의 가치, 선율의 가치에도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 소울 리메이크 곡들이 눈에 띄는 리믹스 앨범 < Back to Mine >에서는 이러한 특징이 더욱 강하게 부각되어졌다. 2001년 이들은 다이도의 후광(?)을 업고 세 번째 정규 앨범인 < Outrospective >를 내놓았다. 데뷔 앨범 시절부터 백보컬 등으로 활약하며 그룹의 일원으로 활약해 온 다이도와 폴린 테일러(Paulin Taylor)가 그룹의 보컬로 전면에 자리한 이 앨범 역시 페이스리스만의 감수성이 돋보이는 앨범으로 일렉트로니카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래어 버드(Rare Bird)의 명곡 ’Sympathy’를 샘플링하기도 하였으며, 다이도가 4곡에서 보컬로 등장하며, 오빠에 대한, 또 자신을 키워준 밴드에 대한 고마움을 선사하고 있다.
# 테이크 댓의 미운 오리에서 영국 음악의 희망으로 거듭난 로비 윌리엄스 지난 2001년 2월 26일 거행된 < 브릿 어워즈 >는 영국 내에서 로비 윌리엄스의 드높은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자리였다. ‘영국의 그래미’라 불리는 이 시상식에서 그는 최우수 영국 남자 가수를 포함 싱글 ‘Rock DJ’로 최우수 싱글, 최우수 뮤직비디오 등 주요 3개 부문을 독식했다. 특히 이번 수상은 여러 부문에서 수상이 점쳐지... # 테이크 댓의 미운 오리에서 영국 음악의 희망으로 거듭난 로비 윌리엄스 지난 2001년 2월 26일 거행된 < 브릿 어워즈 >는 영국 내에서 로비 윌리엄스의 드높은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자리였다. ‘영국의 그래미’라 불리는 이 시상식에서 그는 최우수 영국 남자 가수를 포함 싱글 ‘Rock DJ’로 최우수 싱글, 최우수 뮤직비디오 등 주요 3개 부문을 독식했다. 특히 이번 수상은 여러 부문에서 수상이 점쳐지던 로비의 최대 라이벌 크레이그 데이비드(Craig David)를 완전히 제친 쾌거여서 더욱 가치가 빛났다. 이러한 결과를 볼 때 당분간 영국에서 그의 인기는 예전보다 더욱 맹위를 떨쳐 나가지 않을까 싶다. # 영국의 국민가수 그러나 국내에서는 찬밥? 이렇듯 영국 내에서 로비 윌리엄스는 ‘국민가수’로 대접받고있다. 그렇다면 영국 밖에서는? 유감스럽게도 미국이나 특히 국내에서는 그 같은 지명도가 적용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미국 공략을 위해 발표한 편집앨범 < The Ego Has Landed >는 평론가들로부터 비교적 호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팬들을 사로잡는 데는 실패했다. 국내에서는 상황이 더 좋지 못하다. 테이크 댓(Take That)의 팬층이 두텁게 포진하고 있는 국내의 여건이지만 오히려 그 탓에 로비의 음악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의 솔로작품들은 테이크 댓 시절의 음악과는 전혀 개념이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른’ 음악은 보이밴드의 달콤함에 친숙한 국내 음악팬들에게는 다소 난해하게 느껴질 만하다. 로비 윌리엄스는 90년대 초·중반을 풍미했던 보이밴드 테이크 댓 출신이다. ‘뉴 키즈 온 더 블록에 대한 영국의 답변’이라고 평가받던 테이크 댓은 다섯 미소년들의 깔끔한 이미지와 ‘Back for good’ 같은 소녀 취향의 아름다운 발라드로 영국인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다. 팀의 막내였던 로비는 그러나 그룹의 그러한 댄디한 성향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멤버였다. 말하자면 별종이랄까? 약물이나 여성편력 등으로 말썽을 일으켰으며 그로 인해 팀의 리더 게리 발로와 자주 충돌했다. 그 결과 1995년 로비 윌리엄스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룹을 떠났다. 사실 그룹 내에서 그의 비중은 아주 적은 편에 속했다. 자신의 발언이 별로 반영이 되지 않는 그룹보다 솔로활동이 그의 비범함을 과시하기에 훨씬 적합했다. 따라서 그의 음악이 테이크 댓과 이질적인 건 당연하다. 솔로 데뷔와 함께 그가 가장 먼저 주력한 것은 ‘보이밴드 이미지 없애기’였다. 테이크 댓 시절엔 ‘반작용’을 일으켰던 알코올과 마약중독, 섹스어필은 아주 유용한 변신수단이었다. 그것은 단정한 보이밴드의 애송이가 아닌 불량한 성인 로커의 이미지였다. 이미지뿐 아니라 음악성향도 완전히 변모했다. 그룹 시절의 ‘안전한’ 버블 검 팝을 거부하고 록음악을 도입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솔로활동 초반 그의 ‘성장’을 촉진시킨 스승은 또 다른 ‘악동’ 오아시스의 갤러거 형제였다. 그들은 로비 윌리엄스가 마약에 빠지도록 이끌었으며 자신들의 스트레이트한 로큰롤 사운드를 그에게 전수했다. 그때까지는 갤러거 형제가 로비에게 베스트 프렌드이자 정신적·음악적 지주였다. 하지만 얼마 후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절친했던 사이가 영국 최대의 앙숙으로 돌변하고 만다. # 새로운 악동 출현 이러한 로비 윌리엄스의 ‘불량함’은 방정맞은 영국 타블로이드 신문을 통해 유통되었다(오아시스와 블러의 브릿 팝 전쟁, 스파이스 걸스의 걸 파워 선풍 등 영국언론이 한 번 손대기만 하면 뭐든지 요란해진다. 그것은 그만큼 자국 뮤지션에 대해 애정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는 못했다. 처음엔 영국인들도 미심쩍은 눈초리로 관찰할 뿐이었다. 영국인들 역시 국내 팬들처럼 로비의 변이가 낯설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1995년부터 오아시스와 음악적 교류를 나누던 그는 동시에 술과 마약의 향연을 이어갔고 ‘살찐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좋지 못한 닉네임까지 얻었다. 이 무렵 로비는 레코드사와 불화를 거듭하다가 1996년 드디어 아티스트의 자유를 염원하는 자신의 첫 싱글 ‘Freedom `96’을 발표했다. 조지 마이클의 곡을 커버한 이 곡은 레코드사와 투쟁한 조지 마이클에게 존경을 표하는 곡이었으며 또한 그의 성공적 솔로활동을 닮고 싶은 열망을 담고 있는 곡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싱글은 참담한 실패를 맛봤고 이어 1997년 말 발표한 솔로 데뷔앨범 < Life Thru A Lens >도 발표 당시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로비의 뒷심은 무서웠다. 그의 데뷔작은 발매한 지 28주만에 차트정상을 차지하며 뒤늦은 흥행가도를 달렸으며, 이듬해 발표한 2집 < I`ve Been Expecting You > 곧바로 1위에 올랐다. 게다가 그는 1999년 < 브릿 어워즈 >에서 최우수 영국 남자 가수 등 3개 부문을 수상하며 영국 최고의 인기스타로 떠올랐다. 이미지만이 아닌 그의 진정한 모습, 즉 뮤지션의 모습이 영국 팬들에게 비로소 수용되는 순간이었다. 음악과 더불어 그는 팬들을 즐겁게 해주는 엔터테이너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했다. 각종 쇼와 공연을 통해 섹시함과 자유분방한 기질을 발휘하며 팬들의 눈과 귀를 만족시켰다. 2000년 < 브릿 어워즈 >에 수상자로 나온 로비가 오아시스의 리암 갤러거에게 결투를 신청한 대목은 그 절정이었다. 끊이지 않는 스캔들도 주요 관심대상이다. 트레이시 쇼 같은 여배우들을 시작으로 올 세인츠의 니콜 애플턴, 스파이스 걸스의 전 멤버 제리 할리웰 등과 화려한 연애행각을 벌이며 연일 신문과 잡지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양성애자라는 소문도 심심찮게 들리며 특히 결별한 옛 약혼녀 니콜 애플턴이 최근 그의 숙적 리암 갤러거와 결혼 직전이어서 앞으로 이 둘의 ‘결전’이 더욱 흥미롭다. # 보이밴드 출신으로 가장 성공한 솔로 뮤지션 영국에서의 성공을 기반으로 로비 윌리엄스는 1999년 5월에는 1집과 2집의 히트싱글들을 모은 편집앨범 < The Ego Has Landed >를 미국시장에 내놓았다. 축구광이기도 한 그는 축구게임 < 피파 2000 >의 메인 테마 ‘It`s only us’를 부름으로써 전세계 축구 팬들의 기억에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2000년 9월 발표한 3집 < Sing When Your Winning >은 영국에서만 1백5십만 장이 팔려나갔고, 비틀스의 < 1 >에 이어 ‘아쉬운’ 판매 2위를 기록했다. 특히 첫 싱글 ‘Rock DJ’는 엽기 뮤직비디오로 쇼킹함을 주었다. 그 충격요법은 록의 이단아 마릴린 맨슨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3장의 정규앨범을 발표한 로비 윌리엄스는 현재 그의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치며 영국 음악계를 평정한 상태다. 테이크 댓의 핵심멤버였던 게리 발로와 마크 오웬이 각각 솔로앨범을 내며 활동을 벌였지만 로비의 활약에 비할 게 못된다. 그는 비틀즈의 존 레논, 왬의 조지 마이클에 뒤이어 그룹 출신으로서 성공적인 솔로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아무튼 브릿팝의 쇠퇴와 미국 틴 팝의 득세로 한동안 침체기를 맞고 있는 영국 음악계에 그의 존재는 분명 활력소로 작용할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다시 국내로 돌아온다. 워낙 자국의 음악이 강세인 미국은 그렇다 치고 국내에서 그의 성적은 가혹할 정도다. 현재 국내에는 보이밴드의 나긋나긋한 버블 검 팝 아니면 림프 비즈킷 류의 하드코어라는 이분법이 통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라면 그리 멜로딕하지도 않고 그리 세지도 않은 로비 윌리엄스 식 록음악은 아마 쉽게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한번 테이크 댓이나 보이밴드의 음악은 과감히 포기하고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이 남자의 ‘어려운’ 음악에 귀기울여 보자. 색다른 음악세계를 발견하는 기쁨을 얻을지도 모른다.
멤버 : 제프 배로우(Geoff Barrow), 베스 기븐스(Beth Gibbons) 트립합(Trip-hop), 그 중에서도 브리스톨(Bristol) 사운드의 시초였던 매시브 어택(Massive Attack)이 잠시 활동을 중단한 사이, 브리스톨 사운드가 다시 조명을 받게 된 것은 순전히 포티스헤드(Portishead)의 공로이다. 특히 이들은 트립합의 대중화에 가장 큰 기여를 한 밴드로 평가받고 있다. 밴... 멤버 : 제프 배로우(Geoff Barrow), 베스 기븐스(Beth Gibbons)

트립합(Trip-hop), 그 중에서도 브리스톨(Bristol) 사운드의 시초였던 매시브 어택(Massive Attack)이 잠시 활동을 중단한 사이, 브리스톨 사운드가 다시 조명을 받게 된 것은 순전히 포티스헤드(Portishead)의 공로이다. 특히 이들은 트립합의 대중화에 가장 큰 기여를 한 밴드로 평가받고 있다. 밴드의 리더인 제프 배로우(Jeoff Barrow)는 어린 시절부터 스튜디오에서 일을 했는데, 그 곳에서 그는 매시브 어택의 멤버들과 교류를 갖게 되었고, 그들과 유사한 음악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후, 그는 여러 아티스트들의 리믹스 작업과 프로듀싱을 하면서 활발한 음악 활동을 펼쳤다. 그가 광고 회사 직원이자 지역 클럽 밴드의 보컬이었던 베스 기븐스(Beth Gibbons)를 만난 것도 이 즈음이다. 앨범 발매 전에 이들은 파랗게 칠한 마네킹을 영국 각지에 세워 놓은 일종의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을 유명하게 한 것은 이러한 음악 외적인 행위들이 아닌 ‘음악 그 자체’였다. 1994년의 데뷔작 < Dummy >에서 포티스헤드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재료들을 사용하여 ‘우울한(blue) 펑크(funk)’ 앨범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펑크와 힙합 리듬 라인을 기초로 하여 그 위에 다양한 요소들을 결합시킨 이들의 음악은 우울하고 고딕적이며 때로는 세기말적인 느낌을 보여주었다. 상업적으로도 (예기치 못하게) 성공했을 뿐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매우 호평을 받았고, 결국 그 해 머큐리 음악상(Mercury Music Prize)의 ‘올해의 앨범’을 수상했다. 또한 본작으로 포티스헤드는 미국 차트에 최초로 등장한 트립합 뮤지션이 되기도 하였다. 1997년에 발매된 2집이자 셀프 타이틀인 < Portishead >는 겉으로는 1집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이들을 대표하는 음악적 성분인 우울한 펑크, 그리고 흡사 오래된 흑백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들은 여전히 앨범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하지만, 사운드적인 면에 있어서 이들은 미묘한 변화를 시도했다. 더욱 밀도 있고 세련된 프로듀싱과 보컬인 베스 기븐스의 매혹적인 목소리의 훅(hook)에 의해 주도된 두 번째 결과물은 이전의 성과를 계승함과 동시에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 후 이들은 팬서비스 차원에서 라이브 앨범인 < PNYC >(1998)을 발표했다. 매시브 어택에 의해 수면 위로 부상한 트립합은 포티스헤드가 등장하기 전까지 완전한 자리 매김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포티스헤드의 성공으로 인해 트립합은 비로소 많은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다. 포티스헤드가 높게 평가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제프 버클리(Jeff Buckley)는 1990년대의 가장 독보적인 싱어 송라이터이자 얼터너티브 포크 록 뮤지션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폭발적이면서도 감미로운 목소리로 독자적인 음악 스타일을 구축했지만 안타깝께도 1997년 5월,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의 죽음과 함께 1990년대 음악계의 가장 비극적 사건이었다. 더욱이 단지 한 장의 앨범만을 남긴 뒤였기에 그 슬픔은 더했다. 제프 ... 제프 버클리(Jeff Buckley)는 1990년대의 가장 독보적인 싱어 송라이터이자 얼터너티브 포크 록 뮤지션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폭발적이면서도 감미로운 목소리로 독자적인 음악 스타일을 구축했지만 안타깝께도 1997년 5월,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의 죽음과 함께 1990년대 음악계의 가장 비극적 사건이었다. 더욱이 단지 한 장의 앨범만을 남긴 뒤였기에 그 슬픔은 더했다. 제프 버클리는 1960년대 유명한 포크 뮤지션이었던 팀 버클리(Tim Buckley)의 아들로 태어나 고등학교 시절부터 밴드 활동을 시작했다. 졸업 후, 음악 공부를 위해 L.A로 이동한 뒤 레게 뮤지션이었던 샤인헤드(Shinehead)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내공을 쌓아나갔다. 이후 기타리스트 게리 루카스(Gary Lucas)와 결성했던 음악 공동체 가즈 앤 몬스터즈(Gods & Monsters)로 어느 정도 이름을 홍보하는데 성공했다. 밴드를 그만두고 결국 솔로로 전향한 제프 버클리는 1994년 데뷔작이자 생전 마지막 음반인 < Grace >를 발표했다. 앨범으로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예상했던 세간의 평들을 완전히 깨부순 그만의 싱어 송라이팅 스킬을 뽐내며 단숨에 주목을 받았다. 특히 동시대의 주류였던 그런지 사운드와는 완연히 다른 독특한 포크 록 소리샘이 돋보였다. 일종의 얼터너티브에 대한 얼터너티브였던 셈. 웅장하면서도 흐느끼는 듯한 그의 목소리와 탁월한 작곡 능력, 백 밴드의 안정감 있는 연주가 만난 걸작이었다. 또한 작품 전반에 걸쳐 흐르는 재지한 느낌은 앨범을 제목 그대로 ‘우아하게’ 만들어주었다. 메시지면에 있어서도 당시 얼터너티브의 염세적, 부정적인 정서가 아닌 ‘음악을 통한 사랑의 전파’라는 소신을 피력, 컬트 팬들을 세력권으로 집결시켰다. 이 후 2집 앨범을 준비하던 중에 떠난 미시시피 강으로의 여행에서 제프 버클리는 익사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데모상태로 존재했던 트랙들은 다행히도 사후 그의 어머니의 노력으로 1998년에 < Sketches (For My Sweetheart the Drunk) >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다. 2집 역시도 1집에 버금가는 뛰어난 성과물이었으나 다만 ’그가 직접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았다. 그리고 2000년에는 제프 버클리의 첫 번째 공식 라이브 앨범인 < Mystery White Boy >(제프 버클리를 일컫는 듯한)가 나와 그를 못 잊는 팬들을 달래주었다. 1970년대에 시작된 ‘싱어 송라이터’라는 개념은 직접 곡을 쓰고 노래를 하는 뮤지션을 지칭하는 의미를 지녔었다. 특히 그들은 1960년대의 ‘우리’의 입장이 아닌 철저히 ‘개인적인’ 감수성을 노래했다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바로 1960년대를 ‘we decade’, 1970년대를 ‘my(혹은me) decade’라 명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싱어 송라이터는 또한 ‘독보적인 음악 파일을 완성한’ 아티스트를 말할 때 쓰일 수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1990년대에 제프 버클리만큼 자신만의 소리 메커니즘을 들려 준 아티스트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도 단 한 장의 앨범으로 말이다.
노래 : Lenny Kravitz (레니 크라비츠)
‘1990년대의 지미 헨드릭스’라 불리는 레니 크라비츠는 90년대 이후 최고의 흑인 올라운드 뮤지션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뛰어난 싱어 송 라이터일 뿐 아니라 절정의 기타리스트이자 프로듀서다. 여러 정상급 뮤지션들의 앨범에서 기타연주와 프로듀서를 맡았으며 특히 마돈나의 에로틱 송 ‘Justify my love’를 프로듀스해 더욱 유명해졌다. 그의 음악편력은 아주 다채로워서 록, 펑크(funk), 블루스, 소울, 재... ‘1990년대의 지미 헨드릭스’라 불리는 레니 크라비츠는 90년대 이후 최고의 흑인 올라운드 뮤지션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뛰어난 싱어 송 라이터일 뿐 아니라 절정의 기타리스트이자 프로듀서다. 여러 정상급 뮤지션들의 앨범에서 기타연주와 프로듀서를 맡았으며 특히 마돈나의 에로틱 송 ‘Justify my love’를 프로듀스해 더욱 유명해졌다. 그의 음악편력은 아주 다채로워서 록, 펑크(funk), 블루스, 소울, 재즈, 힙합, 테크노 등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다양한 장르를 소화해낸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 지미 헨드릭스부터 커티스 메이필드, 존 레논, 데이비드 보위 그리고 프린스까지 연상된다. 그래서 더욱 청취욕구가 생겨나기도 한다. 레니 크라비츠는 1964년 뉴욕에서 유태인 아버지와 보헤미안 어머니의 혼혈로 태어났다. 쇼 비즈니스에 종사하던 부모님들의 영향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자유분방하게 자라며 음악에 일찍 눈을 떴다. 주로 존 레논과 지미 헨드릭스 풍의 사이키델릭과 커티스 메이필드 풍의 소울을 즐겨듣던 크라비츠는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건스 앤 로지스의 전 기타리스트 슬래시와 음악적 교류를 나누었다. 1987년부터 데모 테이프를 녹음하는 등 본격적인 음악활동에 들어간 그는 1989년 데뷔앨범 을 발표했다. 크라비츠는 이 앨범에서 기타, 베이스, 키보드 그리고 드럼까지 모두 도맡아 완벽하게 연주해내며 그 ‘천재성’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프로듀서로도 큰 활약을 보였다. 1990년에 마돈나의 히트곡 ‘Justify my love’를 제작했고, 걸프전이 발발했던 이듬해에는 존 레논의 메시지송 ‘Give peace a chance’를 재편곡해 녹음했다. 그 곡은 오노 요코와 숀 레논 모자가 참여하기도 했던 에 수록되었다. 같은 해 크라비츠는 복고적 색채가 가득한 2집을 내놓았다. 미국과 영국차트를 강타했던 싱글 ‘It ain’t over ’til it’s over’를 수록하고 있는 이 앨범은 존 레논의 팝적 느낌과 커티스 메이필드의 펑키하면서도 진한 소울 감성이 공존하는 작품이었다. 과거 선배들의 여러 분파를 규합한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은 계속 이어졌다. 1993년 그는 상업적.비평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3집을 발표했다. 그러나 2년 뒤 출시한 4집은 별다른 히트곡이나 음악적 성과가 감지되지 않는 평범한 작품이었다. 이어 발표한 5집도 평이 좋지 못했지만 ‘Fly away’, ‘American woman’ 등 ‘괜찮은’ 곡들이 히트했다. 천재의 범작은 범인의 수작보다 낫다? 1999년에는 게스 후의 곡을 리메이크한 ‘American woman’이 코미디 영화 에 삽입되었으며, 그의 보석 같은 히트곡들을 모은 선집이 2000년에 발매되었다. 그는 이 앨범의 유일한 신곡 ‘Again’을 싱글차트 4위에 랭크시키며 여전한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노래 : Elvis Costello (엘비스 코스텔로)
변화무쌍한 음악은 절대로 권태를 허락하지 않는다. 엘비스 코스텔로의 음악 파일이 그렇다.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그가 대중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준 이미지와 소리샘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색을 달리했고, 해마다 허물을 벗었다. 사계절의 변화처럼 각양각색의 색깔을 띠며, 차려진 밥상을 거부했다. 항상 굵은 뿔테 안경을 쓰고 꾸부정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그저 외양일 뿐이다. 아웃사이더의 리더로 브리티시 펑크... 변화무쌍한 음악은 절대로 권태를 허락하지 않는다. 엘비스 코스텔로의 음악 파일이 그렇다.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그가 대중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준 이미지와 소리샘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색을 달리했고, 해마다 허물을 벗었다. 사계절의 변화처럼 각양각색의 색깔을 띠며, 차려진 밥상을 거부했다. 항상 굵은 뿔테 안경을 쓰고 꾸부정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그저 외양일 뿐이다. 아웃사이더의 리더로 브리티시 펑크 록을 이끌었고((1997년)), 신나는 레게 리듬과 애조 띤 켈틱 선율에 올라타며 제3세계 음악에 흠뻑 젖었다(스페셜스(Specials)의 (1978년)과 포구스(The Pogues)의 (1985년). 그리고 미국의 리듬 앤 블루스와 소울을 하얗게 바꾸었고((1980년)), 내시빌로 들어가 컨트리를 끄집어내기도 했다((1981년). 또한 그는 챔버 밴드 브로드스키 쿼텟(Brodsky Quartet) 등과 클래식에도 발을 담갔고, 위대한 팝의 전설 버트 바카라크(Burt Bacharach)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크루너(Crooner)로 나서기도 했다. 코스텔로의 이런 종횡무진 행보는 단순히 변신을 위한 인위적인 선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풍부한 음악 공력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이끌림이다. 아마 지금도 그의 곳간에는 평생 일용하고도 남을 음악 양식이 가득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1954년 8월 25일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열 다섯 살 무렵부터 기타를 치고 노래를 작곡하며 뮤지션에 대한 꿈을 키웠다. 고등학교를 중도에 포기한 그는 낮에는 런던의 한 공장에서 컴퓨터 기사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갔고, 밤에는 클럽에서 연주하며 음악 내공을 쌓아갔다. 아티스트로써 첫 이름을 등록한 결과물은 1977년 싱글 ’Less than zero’. 이 노래는 파시스트 단체의 리더 오스왈드 모슬리(Oswald Mosley)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화제를 모았는데, 이는 코스텔로의 의식 세계가 일반적인 곧은 길과는 거리가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첫 싱글을 발표한 후 그는 5년 동안 다니던 공장을 그만두고 키보디스트 스티브 니브(Steve Nieve), 베이시스트 브루스 토마스(Bruce Thomas), 그리고 드러머 피트 토마스(Pete Thomas) 등을 규합하여 자신의 백밴드 어트랙션스(The Attractions)를 결성하고 프로 세계로 뛰어들었다. 이후 어트랙션스는 엘비스 코스텔로와 우정 - 불화 - 재결합 과정 등을 거치며 오랜 기간 함께 한다. 코스텔로는 영국의 퍼브 록(Pun Rock)과 펑크 록을 완벽하게 구현한 전형적인 ’브리티시 로큰롤’ 음반인 1977년 데뷔작 (영국 14위, 미국 32위)와 1978년 2집 (영국 4위, 미국 30위) 등을 연이어 발표하여 일약 대영제국 최고의 로커로 떠올랐다. 이어 내놓은 1979년의 (영국 2위, 미국 10위), 1980년의 (영국 2위, 미국 11위), 1981년의 (영국 9위, 미국 28위), 1982년의 (영국 6위, 미국 30위) 등도 영국 록 히스토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걸작 음반으로 대접받을 정도로 엘비스 코스텔로가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일궈놓은 음악 스케이프는 소리 하나 하나가 반짝 반짝 빛을 발했다. ’Watching the detectives’(영국 15위), ’Pump it up’(영국 24위), ’Radio radio’(영국 29위), ’Oliver’s army’(영국 2위), ’Accidents will happen’(영국 28위), ’I Can’t Stand Up For Falling Down’(영국 4위) 등의 히트곡들이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의 앨범들의 수록곡이 스무 트랙을 넘으면서도 곡 당 타임이 채 3분을 넘지 않는 전형적인 로큰롤과 펑크의 형식미를 취하고 있지만 깊이가 있고 다양한 움직임과 명암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코스텔로만이 할 수 있는 비법일 것이다. 코스텔로의 이런 월드와이드 동선이 가능하게끔 된 데는 뒤에서 막후 조정 역할을 한 닉 로우(Nick Lowe)의 공헌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상기한 작품들 중에서 를 제외하고는 모든 음반들의 프로듀싱을 도맡음으로써 코스텔로와 찰떡궁합을 과시했다. 이후에도 닉 로우는 코스텔로 대부분의 앨범들을 프로듀스하며 환상적인 사운드를 연출해냈다. 코스텔로의 전성시대가 펑크와 뉴 웨이브의 정점기였던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이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외의 시기들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현재까지도 꾸준한 활동을 해오며 별다른 기복 없이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포크와 블루스뿐만 아니라 컨트리, 아이리시 음악 등 다양한 음악적 뿌리 등을 탐구한 1986년의 (영국 11위, 미국 39위), 하드록의 강렬함을 드러낸 같은 해의 (영국 16위, 미국 84위) 등이 1980년대 후반기를 빛낸 대표적인 앨범들이다. 1990년대 초반에도 의욕적으로 음악 작업을 했지만, 눈에 띄는 평가를 받지 못한 코스텔로는 1990년대 후반 들어서 전성기 때 못지 않은 인기를 회복했다. 그는 1998년 전설적인 작곡가 버트 바카라크와 함께 한 음반 (영국 32위, 미국 78위)로 그래미상을 수상하며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1년 뒤인 1999년에는 영화 [노팅 힐]의 주제가 ’She’를 부르며 대중적인 인기를 이끌어내는 등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 그리고 올해에는 17번째 스튜디오 앨범 을 발표하며 음악에 대한 식지 않은 열정을 드러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불기 시작한 20세기 대중음악 총 정리 붐. 그 동안 음악팬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던 ‘소외 뮤지션’들을 부활시킨 계기가 되었다. 말로만 ‘펑크의 대부’이지 제대로 된 평가한번 받지 못했던 이기 팝에게도 그것은 커다란 축복(?)이었다. 그를 팬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만든 첫 타자는 바로 펑크의 세례를 받고 자란 헤비메탈 키드 건스 앤 로지스(Guns `N` Roses)와 슬레이어(Slayer)...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불기 시작한 20세기 대중음악 총 정리 붐. 그 동안 음악팬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던 ‘소외 뮤지션’들을 부활시킨 계기가 되었다. 말로만 ‘펑크의 대부’이지 제대로 된 평가한번 받지 못했던 이기 팝에게도 그것은 커다란 축복(?)이었다. 그를 팬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만든 첫 타자는 바로 펑크의 세례를 받고 자란 헤비메탈 키드 건스 앤 로지스(Guns `N` Roses)와 슬레이어(Slayer). 이들은 각각 펑크가 자신들의 음악적 토대임을 증명하는 1993년 펑크 커버 앨범 < The Spaghetti Incident? >와1996년의 < Undisputed Attitude >에서 이기 팝의 스투지스 시절의 곡인 ‘Raw power’와 ‘I`m gonna be your god’를 각각 실었다. 생기가 없이 방치되던 그의 음악에 살아 펄떡대는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이기 팝 바로 세우기’는 이에 그치지 않고 영화에까지 손을 뻗쳤다. 1996년 개봉되어 컬트 무비의 걸작으로 평가받은 영화 < 트레인스포팅(Trainspotting) >에 그의 곡 ‘Lust for life’가 삽입된 것이다. 이는 그의 음악 지지층이 소수에서 다수로 저변 확대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고 지난해 개봉되었던 영화 < 벨벳 골드마인(Velvet Goldmine) >을 통해 그와 데이비드 보위와의 묘한(?) 관계가 낱낱이 공개됨으로써 그는 또 한차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본인이 아닌 그의 열혈 추종자들에 의해 음악과 인생 이력서가 쓰여진 것이다. 이기 팝은 자신을 향한 이러한 스포트라이트에 새 앨범 < Avenue B >로 화답했다. 하지만 그와의 만남이 짧은 팬이라면 아무 일 없다는 듯 넘어가겠지만 그가 행해왔던 기괴한 퍼포먼스와 니힐리즘이 가득한 펑크 애티튜드를 생각한다면 이번 신보는 예삿일이 아니다. 그가 자신의 주무기를 버리고 명상음악처럼 아주 듣기 편안한 음악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기 팝의 이런 ‘탈(脫)펑크’는 그의 오랜 지기이자 조력자인 데이비드 보위를 만나면서부터 예견된 상황이었다. 물론 ‘펑크의 클래식’으로 평가받는 1973년 음반 < Raw Power >의 프로듀서를 데이비드 보위가 담당했지만 그것 또한 펑크의 미래를 예시한 작품이었다. 한발 앞서 나가는 뮤지션을 대동한 그의 음악이 진보하는 것은 당연지사. 데이비드 보위의 그늘에서 벗어나 만든 이번 앨범에서 이기 팝은 재즈밴드 메데스키 마틴 앤 우드(Medeski Martin & Wood)와 함께 고급화를 지향하고 있다. 단지 ‘SHakin` all over’, ‘Corruption’에서만 펑크의 흔적을 추적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내가 50세였을 때 겨울이었다. 내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정말로 혼자였다.”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시작하는 담담한 독백 ‘No shit’처럼 이기 팝은 이 음반에서 자신의 인생에 대해 회고하고 있다. 특히 그를 거쳐간 여인에 대해서 진솔하게 털어놓고 있다. ‘Nazi girlfriend’, ‘Miss argentina’, ‘She called me daddy’, ‘I felt the luxury’ 등에서 투영되고 있다. 그의 삶의 궤적을 되짚어보는 좋은 본보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강성(强性) 펑크의 선봉장 역할을 자처했던 이가 팝이었기에 안타까움도 던져주고 있다. 갑자기 노쇠해져버린 그의 음악에서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힘없이 주저앉아버린 그의 나약함을, ‘상처뿐인 영광’으로 남은 그의 상반신을 감추고 싶기라도 하듯 옷을 걸치고 돌아서는 그의 모습에서는 펑크의 한계를 발견할 수 있다. 재평가 작업이 한창 진행중인 이기 팝. 이제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은 것 같다.
노래 : Brian May (브라이언 메이)
록 밴드 퀸의 기타리스트이자 프로듀서. 의 군중 사운드를 수학적으로 계산해내고, 직접 기타를 조립해서 연주했을 정도로 지적이고 다재다능하다. 밴드 Smile(퀸의 전신)을 창단하고 차례로 로저와 프레디와 존을 영입해서 사실상 전설적 록 밴드 ‘Queen’의 최초 탄생의 순간에 있었던 인물이며, 현재까지(아마 미래에도 영원히, 끝까지) 퀸의 건재를 보여주고 있다. 프레디 머큐리 사... 록 밴드 퀸의 기타리스트이자 프로듀서. 의 군중 사운드를 수학적으로 계산해내고, 직접 기타를 조립해서 연주했을 정도로 지적이고 다재다능하다. 밴드 Smile(퀸의 전신)을 창단하고 차례로 로저와 프레디와 존을 영입해서 사실상 전설적 록 밴드 ‘Queen’의 최초 탄생의 순간에 있었던 인물이며, 현재까지(아마 미래에도 영원히, 끝까지) 퀸의 건재를 보여주고 있다.
프레디 머큐리 사후 퀸의 창작 활동은 주춤해졌지만, 브라이언 메이 개인의 행보는 더 활발하고 넓어졌다. 밴드 퀸의 영예를 기리는 다양한 활동에 참석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단 모교인 임페리얼 대학으로 돌아가 천체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동물보호단체 ‘세이브 미(Save Me)’를 세워서 구조 활동에 앞장서고 있으며, LSC(London Stereoscopic Company. www.londonstereo.com)를 설립해서 11살 이후로 매료되어 있던 스테레오 사진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일에 열정을 쏟고 있다.
알이엠(R.E.M.)은 통상 얼터너티브의 원조 혹은 전형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그들의 디스코그라피 중 가장 예외적 사운드를 보여주는 < Monster >(1994)를 제외한다면, 알이엠의 음악은 시애틀 4인방으로 대표되는 얼터너티브 사운드와는 거리가 있다. 일례로 그들의 최고 히트곡인 ‘Losing my religion’은 디스토션 사운드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경쾌한 ‘팝송’에 가깝다. 그렇다면 문제는 사운... 알이엠(R.E.M.)은 통상 얼터너티브의 원조 혹은 전형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그들의 디스코그라피 중 가장 예외적 사운드를 보여주는 < Monster >(1994)를 제외한다면, 알이엠의 음악은 시애틀 4인방으로 대표되는 얼터너티브 사운드와는 거리가 있다. 일례로 그들의 최고 히트곡인 ‘Losing my religion’은 디스토션 사운드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경쾌한 ‘팝송’에 가깝다. 그렇다면 문제는 사운드가 아닌 그들의 ‘태도’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알이엠은 대학가에서의 인기를 기초로 전국적 돌파를 감행했던 최초의 사례이다. 언더그라운드 씬에서 내공을 갈고 닦으며 결국 주류음악계에 진입한 케이스인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지금은 비록 일반화되었다지만, 그 당시에는 없었던 일이다. 이러한 본보기는 1990년대초의 많은 얼터너티브/그런지 밴드들에게 하나의 모델을 제시해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그들의 사운드는 동시대의 그 누구와도 구분되는 독창적인 것이었다. 바로 이 점, 당시의 지배적 취향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알이엠을 ‘얼터너티브의 선구자’라고 평할 수 있겠다. 1집 < Murmur >(1983)는 레이건 신보수주의가 득세하던 때에 발매되었다. 보수적인 분위기를 대변하듯 당시의 미국 주류 음악계는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으로 대표되는 팝이 지배하는 상황이었다. 그 당시의 화려한 사운드에 극명하게 대비되는 포크 성향이 짙은 조용한 사운드는 그래서 더욱 의외의 반역이었다. < 롤링 스톤 >은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Madonna), 폴리스(The Police) 대신 이 앨범을 ‘ 올해의 음반’으로 선정했다. 1984년에 발매된 2집 < Reckoning >은 빌보드 앨범 차트 30위권에 올라가는 대성공을 거두게 됨으로서 컬리지 록의 개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단순한 곡 구조 속에서도 미묘한 변화를 일궈내는 그들의 음악적 역량이 돋보였다. 이전과는 달리 어둡고 사이키델릭한 분위기로 일관한 3집 < Fables of Reconstruction >(1985)뒤에 발매된 4집 < Life''''s Rich Pageant >(1986)는 근본적으로 그들이 강한 비트를 지향하는 로큰롤 밴드임을 잘 보여준 수작이었다. 5집 < Document >(1987)는 인디 시절을 총결산하는 이들의 대표작 중 하나임과 동시에 주류로의 입성을 준비하는 작품이었다. 전반적인 앨범의 톤이 선명해진 것과 메시지의 전달을 시도한 점이 돋보였다. ‘Losing my religion’과 함께 이들의 대표곡이 된 ‘The one I love’(빌보드 싱글 차트 탑 텐 기록)는 (이 후 밴드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알이엠 특유의 미드 템포 발라드 넘버이고, ‘Exhuming McCarthy’는 미국 사회의 전반적인 우경화 경향에 대한 이들의 경고성 메시지였다. 메이저로 입성하여 < 워너(Warner) >와 계약한 뒤 발표한 < Green >(1988)은 전반적으로 5집과 비슷한 구성과 사운드를 보였다. 하지만, 다양한 악기(페달 스틸 기타, 만돌린, 첼로)들의 도입으로 더욱 고급스러운 사운드를 생산함으로서 차별화를 시도했다. 물론 목소리도 잃지 않았다. ‘World leader pretend’에서는 정치가들의 교만을 조롱했고, ‘Orange crush’는 베트남전의 고엽제를 신랄하게 비판한 곡이다. 밴드 해체의 위기(장기 투어로 인한 스트레스가 주요 이유였다.)를 딛고 발매한 7집 < Out of Time >(1991)은 메시지가 후퇴한 대신 개인적 감정을 노래한 조용한 포크 성향의 앨범이었다. 알이엠하면 떠오르는 ‘Losing my religion’의 대성공과 함께 이들은 드디어 미국을 벗어나 전 세계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다음 앨범인 < Automatic for the People >(1992)은 이러한 성공을 더욱 확고하게 만든, 알이엠의 마스터피스라 불릴 만한 예술적 성취를 이루었다. 정치적 발언도 잊지 않은 이들은 ‘Ignore land’에서 공화당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이는 민주당의 클린턴이 당선됨으로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커트 코베인의 자살로 인해 얼터너티브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갈 무렵 발표된 < Monster >(1994)는 난데없는 그런지 사운드를 선보인 앨범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지 사운드를 그냥 답보하지 않고 알이엠화된 사운드로 살짝 방향을 틀어놓음으로서 동시대의 다른 밴드들과 자신들을 구분지었다. 이 후, 투어 중에 써놓은 곡들을 모아 발표한 < New Adventures In Hi-Fi >(1996)는 전반적으로 자성적이고 침잠된 무드를 보여주었다. 뉴욕 펑크의 대모 패티 스미스(Patti Smith)가 참여한 ‘E-bow the letter’, 알이엠의 숨겨진 명곡으로 평가받는 ‘Leave’가 돋보였다. 드러머 빌 베리의 탈퇴(뇌수술로 인함) 이 후 발매된 < Up >(1998)은 이들의 대표적인 음악 스타일인 징글 쟁글한 기타 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수록곡 대부분이 발라드적인 감수성을 보여주었다. 빌 베리의 탈퇴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듯한(나머지 멤버들은 이에 부인하지만)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전작보다 더욱 내면 지향적이고 고요한 사운드를 보여주었다. 2001년에 발매된 < Reveal >은 이전 앨범의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결과를 반영해서인지 전성기였던 < Automatic for the People >(1992)이나 < Out of Time >(1991)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준다. 또한 현재의 흐름에도 적극적이어서 앨범 곳곳에 배치된 일렉트로닉 효과음들은 이들에게 또 다른 정체성을 부여해 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시도들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완전히 ‘알이엠화’된 상태에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은 이들이 왜 아직까지도 수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는 지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큐어(The Cure)는 스미스(The Smiths)와 함께 1980년대의 영국을 대표했던 밴드이다. 하지만 3장의 앨범만의 남긴 채 해체되었던 스미스와는 달리 이들은 20년이 넘는 활동기간 동안 리더인 로버트 스미스를 중심으로 다양한 음악 스타일을 선보였다. 그 첫 번째 행보는 1979년에 발표한 싱글 ‘Killing an Arab’이었다. 제목대로 아랍 풍의 이국적인 선율을 지닌 넘버였지만 동시에 인종차별주의... 큐어(The Cure)는 스미스(The Smiths)와 함께 1980년대의 영국을 대표했던 밴드이다. 하지만 3장의 앨범만의 남긴 채 해체되었던 스미스와는 달리 이들은 20년이 넘는 활동기간 동안 리더인 로버트 스미스를 중심으로 다양한 음악 스타일을 선보였다. 그 첫 번째 행보는 1979년에 발표한 싱글 ‘Killing an Arab’이었다. 제목대로 아랍 풍의 이국적인 선율을 지닌 넘버였지만 동시에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같은 해에 나온 < Three Imaginary Boys >는 포스트 펑크의 야수성과 팝 적인 멜로디를 결합하여 ‘포스트 펑크 팝’을 들려주었지만 전체적으로 엉성했으며 미완성의 느낌이 강했다. 그러나 데뷔 앨범은 앨범의 몇몇 곡들의 재녹음 버전과 신곡들을 결합하여 만든 < Boys Don’t Cry >(1980)와 함께 초기 큐어 사운드의 맹아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이후 발표한 < Seventeen Seconds >(1980), < Faith >(1981), < Pornography >(1982)를 통해 이들은 당시 영국 언더그라운드 씬의 유행이었던 고딕 문화의 일원에 포함되었다. 본인들은 이를 부정했지만 음산하고 불길한 무드의 사운드 메이킹과 로버트 스미스의 우울하면서도 분노에 찬 듯한 목소리는 ‘고딕’적이라고 말하기에 충분했다. 진한 화장을 선호했다는 점 또한 이 소문에 근거를 더해주었다. 원치 않았던 펑크와 고딕 씬에 포함되면서 멤버들의 고통은 심해졌고 이는 로버트 스미스 혼자 남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잠시 수지 앤 더 밴시스(Siouxsie and the Banshees)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곧 이를 접고 새로운 라인업으로 < Japanese Whispers >(1983), < The Top >(1984), < Head on the Door >(1985)를 발표했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특유의 팝 적인 송라이팅에 대한 감각을 유감 없이 발휘함으로서 실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밴드 공동의 작업이 아닌 스미스 혼자의 개인 작업적인 성격이 짙었다.(그의 독불장군격인 성격은 워낙에 유명하다.) 멤버들을 다시 모은 후 1986년에 내놓은 싱글 모음집인 < Staring at the Sea >는 큐어가 ‘밴드로서’ 다시 출발한다는 신호탄이었다. 이 때부터 이들은 서서히 영국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인기 있는 밴드가 되었고 가는 곳마다 구름관중을 동원하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에 힘을 얻은 밴드는 왕성한 창작 활동을 벌였고 이는 1987년의 < Kiss Me, Kiss Me, Kiss Me >를 18곡(CD는 17곡에 한 장)이 수록된 더블 앨범으로 선보인 원인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곡마다 뚜렷하게 구분되는 다양한 스타일을 조합하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현명함이 돋보였다. 2년 뒤에 발매한 < Disintegration >은 현재까지도 밴드 최고의 명반으로 평가받고 있는 전성기 시절의 결과물이었다. 편집증에 걸린 사랑 노래 ‘Love song’, 제목과는 달리 잠을 깨우려는 듯한 ‘Lullaby’ 등이 히트했다. 큐어는 이후 이전 곡들을 리믹스한 < Mixed Up >(1990)과 전형적인 기타 팝 넘버들로 채워졌고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 Wish >(1992)를 발표하며 세계적인 밴드로 도약했다. 그러나 4년 간의 긴 공백 끝에 나온 < Wild Mood Swing >의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밴드는 마지막 앨범인 < Bloodflowers >(2000)를 끝으로 20년 간의 긴 활동에 종지부를 찍었고 로버트 스미스의 이후 행보는 아직 들리지 않고 있다.
사운드가든(Soundgarden)은 1984년에 시애틀에서 결성되어 1997년 4월 9일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바로 이 점, 시애틀 출신이라는 태생적 배경 때문에 그런지(Grunge)의 카테고리에 소속되었지만 사운드가든의 음악적 뿌리는 어디까지나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와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영향권 안에 있는 헤비 메탈이었다. < 스핀 >지가 이들을 ’메탈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 사운드가든(Soundgarden)은 1984년에 시애틀에서 결성되어 1997년 4월 9일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바로 이 점, 시애틀 출신이라는 태생적 배경 때문에 그런지(Grunge)의 카테고리에 소속되었지만 사운드가든의 음악적 뿌리는 어디까지나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와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영향권 안에 있는 헤비 메탈이었다. < 스핀 >지가 이들을 ’메탈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메탈 밴드’라 평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즉, 사운드가든이 그런지로 분류되는 것은 음악적인 이유보다는 성장 스토리에 기인한다. 1990년대 얼터너티브 밴드의 전형적인 경력 쌓기라 부를만큼 점진적인 과정 속에 슈퍼 밴드의 지위를 획득했기 때문이다. 기타리스트인 킴 테일(Kim Thayil)과 베이시스트 히로 야마모토(Hiro Yamamoto) 그리고 브루스 파비트(Bruce Pavitt)는 워싱턴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언더그라운드 음악 신에 투신했다. 후에 파비트는 저 유명한 < 서브 팝(Sub Pop) > 레이블을 설립하며 비즈니스로 방향을 선회했고 야마모토는 친구인 크리스 코넬과 그룹 결성의 의지를 다졌다. 여기에 킴 테일과 드러머 맷 카메론(Matt Cameron)이 합류하며 공식적으로 사운드가든이 발족했다. 다음 수순은 예상대로였다. 친구 파비트가 세웠던 서브 팝과 계약한 사운드가든은 1987년과 1988년 EP < Screaming Life >와 미니 앨범 < FOPP >을 연속으로 내놓았다. 두 작품으로 음악성을 인정받은 넷은 수많은 메이저 음반사들의 유혹의 손길에도 불구, < SST >와 손잡고 < Ultramega OK >를 1988년 말에 발매했다. 앨범은 얼터너티브와 메탈 양진영 모두로부터 대환영을 받는 성공을 거두었다. < A&M >으로 배를 갈아탄 뒤 발매한 < Louder Than Love >(1990)는 밴드 역사상 중요한 순간을 일궈낸 수작이었다. < 그래미 >에 노미네이션 되는 쾌거를 이룩한 것. 비록 수상은 못했지만 멤버 모두를 자신감에 충만케 한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사운드가든은 전국적인 명성을 확보해 나갔다. 아쉽게도 시련은 바로 이즈음에 찾아왔다. 오랜 음악 동지였던 야마모토가 탈퇴하게 된 것이다. 너바나(Nirvana)의 기타리스트였던 제이슨 에버맨(Jason Everman)이 공석을 잠시 메꾸웠고 이후 벤 셰퍼드(Ben Shepard)가 합세하며 다시 4인조로서의 위용을 갖추었다. 전열을 가다듬은 뒤, 1991년에 등장한 < Badmotorfinger >는 불운한 음반이었다. 초반에 앨범 차트 39위까지 오르며 선전하는가 했지만 같은 해의 혁명적 명반이었던 너바나의 < Nevermind >에 밀려 빛을 잃고 말았다. 허나 현재까지 이 앨범을 밴드 최고반으로 꼽는 이가 많을 만큼 높은 수준의 연주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실보다는 득이 많은 시기였다. 너바나가 폭발하면서 시애틀은 새로운 음악 도시로 각광받았고 사운드가든도 그런지 4인방에 소속되면서 집중 조명을 받는 행운을 누렸다. 1994년의 < Superunknown >이 발매되자마자 앨범 차트 1위에 오른 것이 이를 증명한다. 싱글 ’Black hole sun’의 인기와 더불어 3백만장이 넘게 판매되었고 두 개의 < 그래미 >를 거머쥐기도 했다. 1996년에 사운드가든은 < Down on the Upside >로 돌아왔다. 전체적으로 전작의 대중적 버전이었던 앨범은 차트 2위로 등극했고 200만장이 팔리면서 변치 않는 팬층을 과시했다. 하지만 얼터너티브 씬 전체의 하락세와 더불어 사운드가든은 롤라팔루자 헤드라이너 임무를 완수한 직후인 1997년 운항을 중단했다.
밴드 : K's Choice (케이스 쵸이스)
벨기에 록 그룹 벨기에 록 그룹
밴드 : Nick Cave And The Bad Seeds (닉 케이브 앤 더 배드 시즈)
From Him To Eternity 명장(名匠) 빔 벤더스(Wim Wenders) 감독의 영화 < 베를린 천사의 시 >(1987)를 본 음악 팬이라면 대개 어떤 특정 장면을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꼽기 마련이다. 바로 천사가 클럽으로 들어갈 때 울부짖으며 ‘From her to eternity’를 노래하는 한 남자를 포커스로 맞춘 신이다. 그의 이름은 닉 케이브(Nick Cave). 1957년 태어난 호주 출신의 ... From Him To Eternity 명장(名匠) 빔 벤더스(Wim Wenders) 감독의 영화 < 베를린 천사의 시 >(1987)를 본 음악 팬이라면 대개 어떤 특정 장면을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꼽기 마련이다. 바로 천사가 클럽으로 들어갈 때 울부짖으며 ‘From her to eternity’를 노래하는 한 남자를 포커스로 맞춘 신이다. 그의 이름은 닉 케이브(Nick Cave). 1957년 태어난 호주 출신의 국가 대표급 뮤지션으로서 대중 음악계의 소문난 기인(奇人) 중 한 명이다. 닉 케이브는 어린 시절 독실한 영국 국교회 집안에서 성장했다. 이런 환경 때문에 그는 지금껏 종교와 이를 통한 대속적 사랑, 그리고 영생(永生)의 문제에 광적으로 집착해왔다. 허나 단순한 신봉자로 그를 재단하는 것은 절대금물.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닉 케이브는 줄곧 기독교 전반에 대해 비판적 성찰을 멈추지 않았고 때론 극단적 태도로 그것에 린치를 가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 닉 케이브는 친구들과 더 보이 넥스트 도어(The Boy Next Door)라는 상호(商號)로 밴드를 결성하며 음악 인생의 시작점을 찍었다. 믹 하비(Mick Harvey, 기타, 드럼, 오르간, 피아노), 롤랜드 하워드(Rowland Howard, 기타), 트레이시 퓨(Tracy Pew, 베이스), 필 칼버트(Phill Carlvert, 드럼) 등이 그들이었다. 한 장의 앨범과 EP를 발매한 뒤, 밴드 명을 버스데이 파티(Birthday Party)로 바꾼 그룹은 영국 런던의 클럽 신을 중심으로 서서히 지명도를 쌓아나갔다. 당시 영국의 지배적 음악 트렌드였던 포스트 펑크(post-punk) 사운드를 주무기로 장전한 총 3장의 음반을 통해 평자들로부터 높은 성적표를 받아냈다. 1983년에 버스데이 파티를 해산한 닉 케이브는 재도약을 위한 계획 수립에 들어갔다. 롱런을 위한 필수 조건은 무엇보다 좋은 음악 동료들. 고심 끝에 그는 평생 파트너인 믹 하비, 매거진(Magazine)의 베이시스트였던 배리 아담슨(Barry Adamson), 아인슈튀르젠데 노이바우텐(Einsturzende Neubauten)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인 블릭사 바르겔드(Blixa Bargeld)를 영입해 닉 케이브 앤 더 배드 시즈(Nick Cave And The Bad Seeds)를 출범했다. 앞서 설명했던 데뷔작 < From her to eternity >(1984)를 통해 닉 케이브는 새 음악 항로를 성공리에 개설했다. 포스트 펑크와 고딕의 그림자를 거의 지운 대신 블루스, 포크 등의 전통적인 음핵(音核)들을 한데 묶어 자신만의 독특한 소리 메커니즘을 조직해냈던 것. 물론 이런 올드 장르들로 유턴했음에도 그만의 극단적 면모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테마를 다루는 ‘방식’만 변화했을 뿐, 큰 물줄기는 고스란히 유지되었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과거의 음악 자양분을 맘껏 섭취하려는 그의 욕망은 여러 커버 곡들을 수록한데서 특히 잘 드러났다. 밴드 최초의 싱글인 엘비스 프레슬리의 ‘In the ghetto’, 1집에 실렸던 레오나드 코헨(Leonard Cohen)의 ‘Avalanche’등이 대변한다. 이는 소포모어 작품인 < The Firstborn Is Dead >(1985)를 지나 등장했던 1986년의 3집 < Kicking Against The Pricks >에서의 전곡 리메이크로 그 완성을 보았다. 1986년 4집 < Your Funeral…My Trial >을 발매한 뒤, 닉 케이브는 < 베를린 천사의 시 >(Wings of Desire)에 출연키 위해 2년 간의 공백기를 가졌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이며 찬사를 얻어낸 덕에 그의 몸값은 급속 상승했다. 이 외에도 그는 다방면에 재주가 많음을 뽐냈는데 감옥 제도의 잔인함을 고발한 호주 필름이자 그가 O.S.T.를 담당했던 < Ghosts… Of The Civil Dead >(1989)에서 호연을 펼쳤고 우화 소설 < And The Ass Saw The Angel >(1989)과 시와 가사 모음집인 < King Ink >(1988)를 발표, 작가로서의 재능도 과시했다. 계속해서 정규 5집과 6집인 < Tender Prey >와 < The Good Son >을 1988년과 1990년에 내놓았던 닉 케이브는 1992년, 걸작 < Henry’s Dream >으로 이후의 월드 마케팅을 위한 탄탄한 초석을 마련했다. 4년 뒤인 1996년, 그는 < Murder Ballads >(한국판은 < Lovely Creature >)에서 음악적으로 일취월장하며 비평, 상업 모두에서 큰 폭의 도약을 일궈냈다. 앨범은 제목 그대로 살인에 관한 서사시. 한 술집에 들어가 그 곳의 전부를 살해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9분 여에 걸쳐 묘사하는 ‘O`Malley`s bar’, 동향 출신의 댄스 여제(女帝) 카일리 미노그(Kylie Minogue)와 입맞춘 ‘Where the wild roses grow’, 피제이 하비(PJ Harvey)의 목소리를 빌려 헨리 리라는 바람난 애인을 살해하는 여성을 그린 ‘Henry Lee’ 등이 많은 사랑을 받았다. 후속작 < The Boatman`s Call >(1997)은 닉 케이브가 < Murder Ballads >와 완연히 대조적인 애티튜드를 취했다는 면에서 흥미로웠다. 부드러운 크루닝으로 사랑에 관해 조용히 노래했던 것. 물론 이는 1994년의 8집 < Let Love In >에서 이미 시도한 바이기는 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그 맥을 달리했다. 2001년작 < No More Shall We Part >(2001) 역시 마찬가지. 음반은 한마디로 전작의 심화 버전이었다. 잔잔한 발라드와 그에 맞는 심플한 곡 구조가 이를 잘 말해주었다.
"미국 얼터너티브 록에 짓눌린 영국 음악계의 권위를 되찾자!" 1990년대 초반 너바나를 필두로 한 그런지 록의 엄청난 물량공세에 맞서 영국 매스컴들이 내건 대항 캐치프레이즈였다. 그들은 구제방안으로 ‘브릿 팝’을 내세웠다. 미국 록에 대한 차별화 나아가 특화(特化) 정책이었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그들은 대표주자를 물색했고 바로 블러(Blur)와 오아시스가 국가대표로 낙점 됐다. 블러는 그러나 1995년 앨범... "미국 얼터너티브 록에 짓눌린 영국 음악계의 권위를 되찾자!" 1990년대 초반 너바나를 필두로 한 그런지 록의 엄청난 물량공세에 맞서 영국 매스컴들이 내건 대항 캐치프레이즈였다. 그들은 구제방안으로 ‘브릿 팝’을 내세웠다. 미국 록에 대한 차별화 나아가 특화(特化) 정책이었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그들은 대표주자를 물색했고 바로 블러(Blur)와 오아시스가 국가대표로 낙점 됐다. 블러는 그러나 1995년 앨범 < Parklife >를 통해 ‘반미(反美)성향’의 음악 이데올로기를 탈피하지 못한 채 자국내 태풍을 야기한데 만족해야했다. 하지만 오아시스는 같은 해 발매된 <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를 통해 블러와 정반대의 ‘친미(親美)성향’ 음악으로 북미대륙 공습에 성공했다. 그 음악은 다름 아닌 ‘비틀스’였다. 비틀즈 신화를 가슴속 깊이 간직하던 미국인들은 오아시스를 전폭 지지했다. 이 같은 혁혁한 업적으로 그들은 단숨에 ‘비틀스의 환생’ ‘제3차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선두’라는 영국 언론과 팬들의 찬사세례와 함께 ‘영국 음악의 국보’로 솟아올랐다. 오아시스는 1980년대 영국 록의 산파지로 불리는 ‘예향’ 맨체스터 출신이다. 지역만으로도 그들의 기본기가 충실함을 알 수 있다. 그들은 1990년대 초 맨체스터 사운드 첨병 중 하나인 인스파이럴 카페츠(Inspiral Carpets)에서 아르바이트하던 노엘 갤러거(Noel Gallagher)가 막내 동생인 보컬 리암 갤러거(Liam Gallagher)와 베이스 폴 맥귀건(Paul McGuigan), 드럼 토니 맥캐롤(Tony McCarroll)이 꾸려가던 밴드 레인(Rain)에 스카웃 되면서 낙원의 청사진을 마련했다. 이어서 1993년 글래스고우의 한 클럽에서 연주하던 오아시스에게 펑크와 뉴 웨이브 전문 레이블인 크리에이션(Creation)의 사장 앨런 맥기(Alan McGee)가 러브콜을 보냈다. 그룹의 잠재력을 대번에 안 맥기와 의기투합한 그들은 싱글 ‘Supersonic’과 ‘Shakermaker’를 잇따라 내놓으며 시장의 반응을 탐색했다. 결과는 예상 대로였다(노엘의 위풍당당. "오만하게 들리겠지만 우린 정말 베스트 오브 베스트 밴드다. 어떤 그룹도 우리보다 곡을 잘 쓰진 못한다!"). 곡들이 차트에 진입하며 팝 인구들에게 오아시스란 이름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이에 용기를 얻어 그들은 1994년에 데뷔 앨범 < Definitely Maybe >를 들고 나와 영국 앨범 차트 1위를 정복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작품에서 그들은 ‘전통’ ‘정통’ 로큰롤을 구사하며, 영향을 준 섹스 피스톨즈, 비틀스, 롤링 스톤즈, 후 등 영국 록의 거인들을 더욱더 빛나게 했다. ‘과거로의 음악여행’이 그들로부터 실현된 것이다. 질풍노도의 오아시스는 드러머를 토니 맥캐롤에서 앨런 화이트(Alan White)로 교체하고 ‘브릿 팝의 세계화’를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그들의 2집이자 스매시 히트음반 <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가 그 결과물. 여기에 구사된 수려한 멜로디 감성은 비틀스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Wonderwall’ ‘Don’t look back in anger’ ‘Some might say’ 등 발표하는 싱글마다 모조리 영국차트 정상에 올랐고 ‘Wonderwall’의 경우는 브릿 팝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 차트 톱10이라는 영광을 포획했다. 국내에 브릿 팝 열풍을 몰고 온 것이 바로 이 앨범이다. 특히 그룹내의 ‘음악독재자’ 노엘 갤러거는 < Champagne supernova >에서 영국 록의 대부 폴 웰러(Paul Weller)를 초빙하여 이른바 ‘데드 록’의 출현을 알리기도 했다. 이것은 ‘실낙원’이 되어버린 영국 음악의 명예와 자긍심을 회복해 ‘복낙원’으로 재건하고자 한 그룹의 의지와 준비가 낳은 소산이었다. 순항에 장애물이 없진 않았다. 그룹의 노엘과 리암 형제의 반목이 이 때부터 노골화되었다. 틈만 나면 불거진 형제들의 ‘첩혈쌍웅’과 그에 따른 그룹의 해산설, 탈퇴설이 꼬리를 물고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그러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형제애는 음악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노엘과 리암의 팽팽한 심리전을 극복했고 그들은 1997년 3집 < Be Here Now >로 ‘패밀리 비즈니스’를 복원했다. 수록곡 ‘Stand by me’ ‘All around the world’에서 필생의 과업인 ‘비틀스 따라잡기’는 계속되지만 전체적으로는 ‘비틀스 벗어나기’를 감행한 앨범이었다. 그들의 음악적 성숙도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들의 포인트인 곡의 질과 음반판매량은 전작보다 후퇴했다. 오아시스는 이후 브릿 팝과 성공의 굴레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음악으로 실천하고 있다. 멤버들의 잇단 동요로 지난해 구조조정을 단행한 오아시스는 곧 정규 4집이 될 새 앨범 <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 >을 내고 돌아올 채비를 갖추었다. 첫 싱글 ‘Go let it out’을 비롯해 비틀즈의 향기는 여전하지만 이미지 탈출을 위한 노력이 곳곳에 투영되어있다. 얼마만큼 성공을 재현하느냐는 매스컴의 관심일지 모르나 갤러거 형제들은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들은 차라리 데뷔시절부터 계속되어온 언론의 집중 공세를 어떻게 피하느냐를 자신들의 ‘숙원사업’으로 여길 것이다.
멤버 : 돌로레스 오리어던(Dolores O), 퍼갤 로울러(Fergal Lawler, 드럼), 노엘 호건(Noel Hogan, 기타), 마이크 호건(Mike Hogan, 베이스) 1992년 10월 데뷔 싱글 ‘Dreams’를 발표하며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크렌베리스가 올해로 데뷔 10년을 맞이했다. 1991년 10월 내놓은 EP < Uncertain >부터 치면 11주년이 되는 해이다. 강산도 변한다는... 멤버 : 돌로레스 오리어던(Dolores O), 퍼갤 로울러(Fergal Lawler, 드럼), 노엘 호건(Noel Hogan, 기타), 마이크 호건(Mike Hogan, 베이스)

1992년 10월 데뷔 싱글 ‘Dreams’를 발표하며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크렌베리스가 올해로 데뷔 10년을 맞이했다. 1991년 10월 내놓은 EP < Uncertain >부터 치면 11주년이 되는 해이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시간동안 그들은 단 한차례의 라인업 변화와 기복 없이 논스톱 여정을 해왔다. 지금까지 전세계적으로 3,300만장이 팔려나간 4장의 정규 앨범 공개, 그 후속타로 전개된 지칠 줄 모르는 월드 투어와 각종 인터뷰, 그리고 자선공연 참여 등등 그들은 자신을 버리고 오직 크렌베리스를 위해 모든 것을 투자했고, 헌신했다. 아일랜드 서부의 조그만 마을 라임릭(Limerick)의 동네 꼬마 녀석들에서 월드 스타로 훌쩍 커버린 그들은 이제 자신들을 돌아보려 한다. 그리고 10년은 그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다. 잠시 짬을 내어 과거를 회고하고 또 다시 새 출발 할 수 있는. 이번에 선보이는 신보 < Wake Up And Smell The Coffee >는 그래서 더욱 각별하다. [아일랜드의 서정과 비애] 부침이 심한 대중 음악계에서 크렌베리스는 아주 성공적인 행보를 거듭해오고 있는 팀이다. 시류에 휩쓸려 등장한 수많은 밴드들이 도태되고, 좌초되는 비정한 음악세계 속에서 그들은 독특한 팝/록 사운드로 꾸준한 인기를 누려왔다. 여기서 말하는 ‘독특함’이란 바로 그들의 조국 아일랜드의 분위기를 일컫는다. 영원한 신비의 장소이자 비극의 참호 아일랜드. 그 빛과 어둠의 그림자를 크렌베리스는 고스란히 품고 있다. 아름답고 서정적이면서, 한편으론 슬프고 절망적이다. 그들의 음악은 스미스(The Smiths)의 징글쟁글 기타 팝을 기본으로 하면서, 그 안에 아이리시 포크와 켈틱 민요 등을 은근하고 깊은 맛이 우러나게끔 녹여낸다. 때문에 밴드가 표현해내는 아일랜드는 드러내고 과시하기보다는 깊게 감춰두고 서서히 향기를 풍김으로써 신비롭고 애잔한 느낌을 들게 한다. 날카롭고 폭발적인 힘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매혹적인 천상의 목소리를 뽐내는 홍일점 돌로레스 오리어던(Dolores O’Riordan, 1971년 9월 6일 생)의 보컬과 선명하고 찰랑거리는 톤을 뽑아내는 노엘 호건(Noel Hogan, 1971년 12월 25일 생)의 기타가 아일랜드의 서정과 비애를 그려내는데 일등 공신임은 물론이다. 그들을 세계적인 그룹으로 만들어준 ‘Linger’, ‘Ode to my family’, ‘Zombie’ 등의 히트곡들이 잘 말해주고 있다. 노랫말도 마찬가지다. 어려서부터 보아온 아일랜드의 현실을 그들은 외면하지 않았다. 솔직하고 직접적으로 아일랜드의 분단과 전쟁을 가사에 실어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선배 그룹 유투(U2)의 노선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당신의 머리 속에서/ 당신의 머리 속에서 그들은 탱크와 폭탄을 가지고 싸우고 있어요/ 당신의 머리 속에서/ 당신의 머리 속에서 그들은 울부짖고 있어요’ -1994년 2집 < 다툴 필요 없어(No Need To Argue) >의 수록곡 ‘Zombie’ 중에서- 크렌베리스는 언뜻 보아도 심상치 않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곡에 대해 < 롤링스톤 >과의 인터뷰에 "좀비는 IRA 폭탄에 의해 두 명의 어린이가 죽은 영국 워링턴 폭파 사고에 대하여 쓴 노래이다"라고 설명했다. 이런 자신들의 조국 아일랜드의 상황에서 불붙기 시작한 그들의 가시도친 시선은 점차 지구촌의 문제로 확대됐다. 1996년 3집 < To The Faithful Departed >에 수록된 ‘War Child’, ‘Bosnia’ 등이 대표적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보스니아 내전 등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분쟁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아이들에 대한 곡들이다. 돌로레스 오리어던이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가 주최한 보스니아의 전쟁 고아를 돕기 위한 자선 공연에 참여하여 ‘아베마리아’를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전쟁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은 바로 어린이들입니다. 그들은 연약합니다." 그러나 모든 곡들이 냉소적이고 비극적인 것은 아니다. 잠시 떨어져 있는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노래(Ode to my family), 함께 현실을 헤쳐나가자는 화합의 노래(Animal instinct) 등 강고한 서정으로 둘러싸인 노랫말도 있다. 스케치가 될 듯 하면서도 곧바로 사라져 버리는 안개 속에 숨겨진 아일랜드의 포근하면서도 차가운 모습을 크렌베리스는 음악과 가사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0년간의 논스톱 여정] 크렌베리스는 1989년 아일랜드의 라임릭에서 기타리스트 노엘 호건과 베이시스트 마이크 호건(Mike Hogan, 1973년 4월 29일 생) 형제, 그리고 그들의 친구인 드러머 퍼걸 롤러(Fergal Lawler, 1971년 3월 4일)와 보컬리스트 나이올 퀸(Niall Quinn)에 의해 결성됐다. 당시 그룹명은 크렌베리 소 어스(The Cranberry Saw Us). 밴드는 1년 뒤인 1990년 음악적 견해차로 퀸이 탈퇴하고, 그가 소개시켜? 낭랑 18세의 매력적인 처녀 돌로레스 오리어던이 가세하면서 완벽한 짜임새를 갖췄다. 돌로레스는 이미 다섯 살 때부터 교회 성가대, 음악 페스티벌 등에 참가하며 노래 실력을 키워왔으며, 12살이 되던 해에는 ‘Calling’이라는 곡을 작곡하는 등 어려서부터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왔다고 한다. 라임릭, 더블린의 클럽 등에서 공연을 하며 음악 내공을 쌓아가던 그들은 같은 해 프로듀서 피어스 길모어(Pearse Gilmore)를 매니저 겸 프로듀서로 영입하고 < Nothing Left At All >이라는 타이틀이 붙여진 데모 테이프를 제작하여 메이저 레이블들에 보냈다. 1991년 여러 레코드사의 유혹을 뿌리치고 < 아일랜드 >와 여섯 장의 앨범 계약을 체결한 그들은 첫 결과물로 EP < Uncertain >을 공개했다. 하지만 미니 음반은 크렌베리스의 진면목을 보여주기에는 ‘불확실한’ 부분이 있어 그들은 곧바로 데뷔 앨범 작업에 착수했다. 그들은 불화로 인해 매니저를 < 러프 트레이드 레코드(Rough Trade Records) >의 창립자 제프 트래비스(Geoff Travis)로 교체하고, 스미스와의 작업으로 유명한 스티븐 스트리트(Stephen Street)를 프로듀서로 맞이하여 제작한 1993년 1집 < Everybody Else Is Doing It, So Why Can’t We? >에 수록된 발라드 넘버 ‘Linger’(미국 차트 8위)의 스매시 히트로 인해 데뷔와 동시에 세계적인 지명도를 획득했다. 이러한 그들의 초고속 행진은 1994년 소포모어 앨범 < No Need To Argue >, 1996년 세 번째 앨범 < To The Faithful Departed >의 연속 히트퍼레이드로 반짝 인기가 아님을 여실히 증명됐다. ‘Ode to my family’, ‘Zombie’, ‘I can’t be with you’, ‘Ridiculous thoughts’, ‘Salvation’, ‘Free to decide’, ‘When you’re gone’ 등이 영국과 미국 차트에서 맹위를 떨쳤다. 하지만 정상의 위치에 선 대가로 크렌베리스는 많은 것을 잃어야만 했다. 그들이 음반을 발표할 때마다 주위에서 짓누르는 압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보다 나은 앨범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들을 옥죄어왔고, 쌓아올린 록 스타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이 그들의 뇌리를 압박했다. 쉬지 않고 앨범 홍보와, 콘서트, 각종 행사 등에 참석하며 인기의 끈을 놓지 않으려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당연하게 그들은 지쳤다. "우리는 삶이 없다. 밴드가 우리의 삶이었다." 3집 공개 직후 노엘 호건의 말이다. 크렌베리스의 삶은 있을지라도, 멤버 개개인의 삶은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오아시스(Oasis), 블러(Blur) 등이 주도한 브릿 팝의 거대한 물결도 그들을 위축시키는데 한몫 했다. 영국을 뒤덮고 세계로 힘차게 뻗어나가는 새로운 음악 무브먼트에 대항하기란 쉽지 않았다. 또 보컬리스트 돌로레스가 솔로로 전향할 것이라는 루머가 불거져 나온 시점도 이때여서 톱 클래스 밴드가 짊어져야 할 시련을 한꺼번에 맞닥뜨려야 했다. 결국 멤버들은 잠시나마 자연인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 동안 잊고 지냈던 사랑하는 가족들의 품에 안겼다. 그들이 결정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노엘은 "우리는 변화를 위해 집이 필요했고, 평범한 삶을 원했다."고 했고, 돌로레스 역시 "우리는 집에서 진정한 행복을 발견했다."며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언급했다. 1996년 3집 발표이후 후속 앨범 < Bury The Hatchet >이 3년이 지난 1999년에서야 공개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재킷 사진의 변화, 사운드의 록 필 강화 등 여러 모습을 취하고 있는 4집은 전세계 17개 국가에서 앨범 차트 1위라는 기염을 토해냈고, 6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는 등 오랜 공백으로 인한 크렌베리스의 불안감을 말끔히 해소시켰다. 모든 것을 버리고 초심으로 돌아간 그들의 과감한 결단이 성공한 것이다.
밴드 : Manic Street Preachers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 [매닉스],The Manics)
1991년 영국 웨일스(Wales)에서 결성된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이하 매닉스)는 근래에 보기 힘든 음악계의 이단아들이다. 섹스 피스톨스, 클래시 같은 펑크 그룹들의 직계라 할 수 있는 이들은 데뷔 초 ‘막시스트’라 불릴 정도의 과격한 메시지를 쏟아내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 ‘미친 거리의 전도사’들에게 미제국주의는 응당 ‘베어버리고, 불태워야 할’ 것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영국왕실 역시 극도의 혐오대... 1991년 영국 웨일스(Wales)에서 결성된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이하 매닉스)는 근래에 보기 힘든 음악계의 이단아들이다. 섹스 피스톨스, 클래시 같은 펑크 그룹들의 직계라 할 수 있는 이들은 데뷔 초 ‘막시스트’라 불릴 정도의 과격한 메시지를 쏟아내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 ‘미친 거리의 전도사’들에게 미제국주의는 응당 ‘베어버리고, 불태워야 할’ 것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영국왕실 역시 극도의 혐오대상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메시지들은 초강력 펑크 사운드에 실려 이들의 지지자들을 선동했다. 하지만 이들의 강성 이미지와는 달리 감성적인 멜로디라인을 지닌 이들의 음악은 팝 팬들마저도 흡수시킬 수 있었다. 작사를 전담한 기타리스트 리치 제임스(Richey James), 보컬 겸 기타리스트 제임스 딘 브래드필드(James Dean Bradfield), 드러머 션 무어(Sean Moore), 베이스 주자 니키 와이어(Nicky Wire), 이 4인조로 매닉스는 출발했다. 이들이 처음 활동하던 무렵 영국에는 ‘24시간 신나게 놀자’는 애시드 하우스와 신발만 바라보고 연주하는 ‘슈게이징’이 붐을 타고 있었고, 브릿팝 진영이 막 태동하고 있었다. 매닉스는 그러나 그러한 경향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리얼리즘’이라는 절대적 사명감을 표방하고 나섰다. 당시 만연했던 자포자기 식의 향락주의나 소극적 사운드를 쫓는 것이 아니라 대외적인 힘을 발휘하는 ‘강하고 적극적인 음악’을 설파한 것이다. 글램 록을 연상시키는 진한 메이크업을 한 외모로도 유명했던 이들은 한때 이들의 음악이 가짜, 즉 창조성이 결여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단지 선배들의 고전을 무작정 추종하기만 한다는 ‘오리지널리티’의 문제였다. 1991년 영국 록 잡지 < NME > 기자에게 그 같은 질문을 받은 기타리스트 리치 제임스는 즉석에서 그렇지 않음을 보여줬다. 답변으로 그는 말없이 칼로 팔에 ‘4 REAL(우린 진짜다)’라는 글자를 새겼다. 이 무시무시한 자해소동으로 그러한 의심은 어느 정도 불식되었으며 매닉스의 ‘광적인’ 면모는 더욱 부각되었다. 1992년 데뷔앨범 < Generation Terrorists >을 발표하며 이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진지한 설교를 전도해나가기 시작했다. 2집 < Gold Against The Soul >과 3집 < The Holy Bible >에 이르면서 이들의 무정부주의적 좌파 성향은 극에 달했다. 한편 극심한 신경쇠약 증세로 요양과 투어를 병행하던 ‘문제의’ 리치 제임스는 3집 발매 전날 런던의 호텔을 떠나 실종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리치의 부재로 3인조가 된 매닉스는 친구 잃은 슬픔으로 과격함을 잠시 접고 내면으로 침잠했다. 1995년 출시된 4집 < Everything Must Go >는 전작들에서 보인 투박하고 거친 사운드와 정치적 태도 등을 다소 누그러뜨리고 주류 브릿팝 사운드로 화해를 시도한 걸작앨범이다. ‘모든 것은 사라져야만 한다’는 의미심장한 문구를 내건 이 앨범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매닉스는 일약 영국음악계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2년 뒤 발표된 5집 < This Is My True Tell Me Yours > 역시 이들의 진지함이 돋보이는 수작이며, 1999년 말에 초창기의 강성 모습이 담긴 싱글 ‘The masses against the class’가 발표되었다. 2001년 3월에는 역시 데뷔 초의 ‘열혈 펑크 순수주의자’로 되돌아간 여섯 번째 앨범 < Know Your Enemy >가 발표되었다. 매닉스는 직선적이고 단순한 사운드로 좌파적 메시지를 더욱 각인시켰다. 자주 들리는 이들의 반복구는 무모할 정도다. 이러한 이들의 단순함은 같은 영국그룹 라디오헤드의 복잡함과 흥미로운 비교거리다. 라디오헤드의 분열적 변종 미학과 매닉스의 단순 명료함은 분명 서로 ‘극과 극’이다. 음악적 지향도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고 할까. 이 두 밴드는 위력을 잃고 있는 현 영국 음악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누구보다도 독보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쿠바의 아바나에서 공연한 이들은 쿠바에서 공연한 최초의 록 그룹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북한과 더불어 사회주의의 최후의 보루인 쿠바도 매닉스의 혁명성을 인정한 셈이다. 앞으로도 그 같은 정치적 메시지는 이들의 존재가치로 의미를 더할 전망이다.
밴드 : UB40 (유비포티)
영국의 실업수당 신청 카드넘버(Unemployment Benefit) 40의 준말인 유비포티(UB40)는 1980년대와 1990년대 가장 큰 인기를 누렸던 팝 레게 밴드이다. 4명의 흑인과 4명의 백인으로 구성되어 ‘평등한 다민족 공동체’를 모토로 내걸었던 그들은 특히 시그니처 송인 ‘Red Wine’과 엘비스 프레슬리의 고전인 ‘Can’t help falling in love’ 등을 통해 전세계의 팬들의 뇌리에... 영국의 실업수당 신청 카드넘버(Unemployment Benefit) 40의 준말인 유비포티(UB40)는 1980년대와 1990년대 가장 큰 인기를 누렸던 팝 레게 밴드이다. 4명의 흑인과 4명의 백인으로 구성되어 ‘평등한 다민족 공동체’를 모토로 내걸었던 그들은 특히 시그니처 송인 ‘Red Wine’과 엘비스 프레슬리의 고전인 ‘Can’t help falling in love’ 등을 통해 전세계의 팬들의 뇌리에 ‘가장 성공한 메인스트림 레게 그룹’으로 남아있다. 때는 1978년. 유비포티는 당시 끝없는 경제의 추락으로 신음하고 있던 영국에서 밴드 발족의 깃대를 꽂았다. 형제인 로빈 캠벨(Robin Campbell, 리드 기타)과 알리 캠벨(Ali Campbell, 기타, 리드 보컬)의 주도 하에 얼 팔코너(Earl Falconer, 베이스), 미키 버튜(Mickey Virtue, 키보드), 브라이언 트래버(Brian Travers, 색소폰), 짐 브라운(Jim Brown, 드럼), 노만 하산(Norman Hassan, 퍼커션), 테렌체 “아스트로” 윌슨(Terence “Astro” Wilson, 랩) 등으로 구성된 그들은 최초 악기를 잘 다룰 줄 아는 멤버가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 음악적 열정 하나로 뭉치며 앞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알리 캠벨이 바에서 행해졌던 일대일 격투에서 번 돈으로 장비를 구입해 연주하는 등, 고된 하루하루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다마호사(多魔好事)라고, 1980년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갑작스레 급변을 거듭했다. 프리텐더스(The Pretenders)의 공연에 게스트로 참여한 뒤, 콘서트 장에서 그룹을 눈 여겨본 < 그래듀에이트(Graduate) >사와 음반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싱글 ‘Fool For Tonight’이 영국 차트 10위 권에 진입하면서 유비포티는 단 2년 만에 무명의 딱지를 떼어내는 쾌거를 일궈냈다. 같은 해에 발표한 데뷔작 < Signing Off > 역시 대박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레이블 < 데프 인터내셔널(DEF International) >을 설립한 유비포티는 1년 뒤인 1981년 2집 < Present Arms >(영국 2위)을 통해 이후 전개될 차트 맹폭격의 전조를 알렸다. 수록곡 중 대처 시절의 경제상황을 비판한 ‘One in ten’이 팬들과 공감대를 형성, 큰 히트를 기록했다. 1983년은 그룹 역사상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커버송 모음집인 < Labour of Love >이 닐 다이아몬드(Neil Diamond) 원곡의 싱글 ‘Red red wine’의 대활약에 힘입어 영국 차트 정상을 밟았던 것. 동시에 그들은 미국 차트에서도 최초로 얼굴을 들이밀며 그토록 원하던 대서양 횡단에 시작점을 찍었다. 1984년의 < Geffery Morgan >과 1985년의 < Little Baggaridim > 또한 반응이 뜨겁기는 마찬가지였다. 크리시 하인드와 함께 부른 ‘I got you babe’(1위)와 ‘Don’t break my heart’(3위)가 특히 많은 리퀘스트를 이끌어냈으며 이러한 폭풍과도 같은 히트 퍼레이드는 구(舊) 소련 공연의 계기를 마련해준 < Rat in the Kitchen >(1986)과 이후의 < Watchdogs >(1987), < UB40 >(1988)까지, 도무지 사그러들 줄을 몰랐다. 1988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개최된 넬슨 만델라 자유 공연에서 ‘Red red wine’을 멋지게 부르며 관중들의 박수세례를 이끌어낸 유비포티는 이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서벌(西伐)에 나섰다. 곡이 빌보드 싱글 차트 1위까지 치솟은 것을 비롯, 이후 내놓았던 음반인 < Labour of Love 2 >에서 ‘The way you do the things you do’와 ‘Here I am’ 두 곡이 각각 6위와 7위에 랭크되었던 것이다. 1993년에 출시되었던 < Promises And Lies >(미국 6위, 영국 1위) 역시 샤론 스톤 주연의 영화 < 슬리버 >에 삽입되었던 ‘Can’t help falling in love’(1위)의 선전에 힘입어 유비포티의 장기집권체제 유지에 큰 기여를 해주었다. 레게 스페셜리스트로서 당시의 그들에게 대적할 이들은 거의 전무한 듯 보였다. 이후 1997년 < Guns in the Ghetto >를 발표하며 전세계 순회공연을 가졌던 그들은 1999년 닐 다이아몬드의 ‘Holly holy’가 소폭 히트한 < Lobour of Love 3 >를 발표, 레게 음악의 전도사로서 식지 않는 열의를 잘 보여주었다.

음반 속으로

Oa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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