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커상 수상작, 아카데미 9개 부문 수상한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원작 소설
“사막보다 깊은 서정, 전쟁보다 장엄한 로맨스”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1997년 아카데미 9개 부문 상을 휩쓸며, 그해 최대 화제작이 되었다. 영화의 원작소설 역시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부커상을 수상(1992)하면서 현대의 고전이 되었고 전 세계 30여 개국에 번역 출판된 베스트셀러이기도 하다. 소설은 1990년대에 국내에 번역된 적이 있지만, 작품의 본래적인 의미를 잘 살리지 못한 탓에 독자들의 아쉬움이 컸었다. 소설의 진가는 영화가 보여주듯이 사막에 묻어둔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에만 놓여 있지는 않다. 이 작품은 깊고 아름다운 문체로 사랑의 로망스이자 전쟁의 서사시를 그림으로써 평단과 독자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 20세기 주요 영문학 작품으로 꼽혀 왔다.
이름도 기억도 지워버린 한 남자, 영국인 환자에게서 이야기는 시작되고…….
모르핀보다 중독성 강하고 화상보다 치명적인 사랑 이야기
2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에서, 젊은 간호사 해나가 심한 화상으로 죽어가는 남자를 돌보고 있다. 이름도 얼굴도 불타 버린 영국인 환자에게는 헤로도투스의 책 한 권만이 있을 뿐이다. 해나는 그에게 책을 읽어주고, 몸을 씻겨주고, 모르핀을 준다. 그리고 불구가 된 도둑 카라바지오, 용의주도한 인도인 공병 킵이 모여 살면서 네 사람의 상처 입은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영국인 환자 알마시에겐 사하라 사막에 묻어둔 가슴 아픈 사랑이, 화려한 도둑이자 스파이인 카라바지오에겐 나치의 고문 후유증이, 킵에게는 서방에 대한 배신감이, 그리고 해나에게는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이 있다. 해나는 운명에 이끌려 킵과 천진난만한 사랑을 나누고 영국인 환자도 킵과 친구가 된다.
죽음을 눈앞에 둔 영국인 환자는 모르핀보다 중독성 강하고 화상보다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 아름답지만 슬픈 러브스토리를 그들에게 들려주게 되며……. 알마시의 모험과 불온했던 사랑이 드러나는 동안, 서로에게 끌리며 서로를 묶고, 상대의 이야기 속에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이들 넷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추리 구조 속에서 펼쳐진다.
사랑의 상실과 전쟁의 황폐함 속에서, 온전한 인간으로 남고자 하는 사람들,
그들이 치르는 또 다른 전쟁의 이름, 상처와 치유……
마이클 온다치의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보인 수작이자, 불멸의 현대 고전이다. 사위어 가는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알레고리이자 비판을 담은 이 작품은 전쟁을 소재로 다루었기 때문에 전쟁 문학으로 읽힌다. 그런가 하면, 남녀 간의 이루어지기 힘든 연애를 담은 로맨스 소설이자, 그 로맨스를 추리구조로 풀어낸 추리 소설로도 읽히며, 모험과 미스터리도 함께한다. 다시 말해 “시인의 심장을 가진 소설가”가 쓴, "모험과 미스터리, 로맨스, 철학이 함께 있는 소설"(〈시카고 트리뷴〉)이다.
그렇지만, 영화의 여운으로 원작을 찾는 독자라면 원작과 영화 사이의 큰 차이에 적잖이 당혹하게 된다. 영화와 원작은 같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지만 다른 서사이며, 다른 양식이기 때문이다. 가령, 이야기는 알마시, 해나, 카라바지오, 킵 등 네 인물에 동일한 비중을 두며 이루어진다. 각 인물들의 이야기를 나란히 전개하면서, 1인칭과 3인칭을 섞어간다. 인물들의 다양한 목소리와, 이 스토리를 짜 맞추어 나가는 것은 독자의 상상력의 몫이다. 영화에서와 달리 소설에서는 결말을 어느 정도 열어둔 채로 끝을 맺기 때문에 이 역시 독자의 상상력의 공간을 무한히 확장하도록 한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묘미는 인물들의 다양한 정체성에 있다. 영국인 환자는 실은 헝가리인이며, 해나는 캐나다 출신이지만 유럽에 파견돼 있고, 이탈리아식 이름을 가진 카라바지오는 캐나다에서 온 연합군의 스파이이자 도둑이며, 킵은 영국 군대에 속한 인도 시크 교도이다. 유럽의 변방 한 골짜기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 시골의 수도원에 머물고 있지만, 이들은 각각 하나 이상의 정체성을 가지고 다른 (모든) 세계를 표방한다. 알마시는 이름과 기억과 국적을 잃었고, 카라바지오는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몸의 일부를 잃었고, 해나는 아버지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고, 킵은 나라를 잃었다. 전쟁이라는 우연적인 사건이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인물들을 한 공간과 한 시대에 모아놓았던 것이다.
이 소설에는 네 인물들이 각각 이끌어가는 네 가지 이야기가 있다. 즉, 이 소설은 네 가지 사랑 이야기이자 네 명이 겪은 각자의 전쟁 이야기이다. 작가는 이탈리아 시골의 수도원에 사랑의 상실을 겪고 전쟁의 황폐함으로 고통받는 네 사람을 모아놓았다. 그곳에서 온전한 인간성을 되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또 다른 전쟁을 치르기 시작한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상실을 겪은 과거를 딛고 새로운 현실을 살고자 몸부림치며 전쟁으로 황폐해진 세계를 다시 이으려 애쓴다. 그러므로 그들이 치르는 전쟁은 상처와 치유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전쟁 속에서 인물들은, 특히 젊은이들(해나와 킵)은 과거(알마시)를 벗고 변모하려 하며 깨달음을 얻어간다.
따라서 이 작품은 과거에 있었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가 지속되는 현재에 세계와 개인이 어떻게 변화해 나가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알마시와 캐서린의 불같은 사랑, 영국인 환자에게 보이는 해나의 헌신적인 사랑, 킵과 해나의 천진난만한 사랑 등을 통해 그 주제를 풀어나간다. 마이클 온다치는 전쟁과 사랑, 젊음과 소멸, 유럽과 식민지, 과거와 현재, 사실과 허구를, 한 공간과 한 시간에 집약하여 그림으로써, 인간의 삶은 어떻게 이어지는가, 라는 물음을 던지고자 한 것이다.
서사를 서정으로 읊은 시인, 마이클 온다치
서정을 영상으로 그린 감독, 앤서니 밍겔라
이렇듯 소설의 깊이와 완성도가 높기 때문에, 이를 영상화하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이다. 앤서니 밍겔라 감독이 만든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알마시와 캐서린 클리프턴 사이의 로맨스에 초점을 맞추면서 작품의 다중적 의미, 즉 주제성을 약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럼에도 영화는 1997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한 9개 부문을 수상하게 되는데, 이는 어쨌든 원작소설의 작품성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할 수 있다. 영화 팬이라면 눈여겨볼 만한 원작과 영화의 차이는 영상과 소설의 근본적인 차이만큼이나 깊다.
우선 주제의 측면이다. 영화가 알마시와 캐서린의 로맨스에 이야기의 중심을 맞춰 나가는 반면, 소설은 네 명의 캐릭터가 똑같은 비중을 지닌다. 그리고 영화의 주제를 "기억 속에 남은, 영원한 사랑"이라고 단적으로 짚어낼 수 있다면, 소설에서는 이것이 과거의 로맨스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은 사랑을 잃고 전쟁으로 황폐해진 인물들이 온전한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치르는 또 다른 전쟁(상처와 치유)을 담아낸다.
영화가 로맨스 장르가 되면서 인물들의 비중이 달라진 것은 당연했다. 그렇지만, 원작에서는 영국인 환자와 간호사 말고도 카라바지오와 킵의 비중이 다른 인물과 같다. 알마시와 캐서린의 로맨스도 현재가 아닌 과거의 이야기이다. 영국인 환자, 즉 알마시가 사위어가는 제국주의를 알레고리화한 것이라면, 동양인인 킵과 전쟁의 희생양인 카라바지오가 형상화하는 알레고리 역시 중요한 주제적 함의를 갖는다. 소설의 후반부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이후, 인도인인 킵은 영국인 환자에게 총을 겨누면서 크게 분노하게 되며, 카라바지오 역시 "백인은 백인 나라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리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인물들은 작품의 탈식민지적 주제를 부각시킨다.
소설과 달리 영화는 많은 연출 기법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소설은 영화가 제공하기 힘든 색다른 요소와 장치들을 갖고 있어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소설에는 시, 노래가사, 음악, 춤, 벽화 그리고 책 등에서 인용하거나 장면을 오버랩시킨 대목이 많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오는 장면은 그대로 알마시와 캐서린의 연애사와 겹친다. 그런가 하면, 해나의 피아노 연주는 킵과 처음 만나게 되는 매개다. 음악과 춤, 벽화 등은 영화에도 그대로 옮길 수 있었지만, 그밖에도 영상으로 담아내기 힘든 대목이 많았다. 대신 영화는 소설의 다양하고 복잡한 이야기들을 단순화하여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럼에도 한계는 있었다. 앤서니 밍겔라 감독은 소설의 플롯을 영화로 각색하는 것이 매우 매혹적이고도 도전적인 작업이었다고 고백했으나, 소설이 갖고 있는 작품의 완결성을 그대로 스크린으로 담아내지는 못했다. 작품 본래의 의미와 깊이를 놓쳤다는 평이다.
영화에 비해서 소설이 지니고 있는 가장 큰 강점은, 과거의 사건과 기억을 서서히 밝혀나가는 추리 방식의 구성에 있다. 아름다운 문장들과 저자의 해박한 지식, 그리고 섬세한 인물 묘사도 독자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렇듯 소설은 주제를 형상화하기 위한 다양한 서술 전략(다양한 텍스트의 인용에서 비롯되는 하이퍼텍스추얼리티, 사실과 허구의 혼재, 다중적(多衆的)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다양한 설정과 다성적(多聲的)인 표현,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공존하는 방식 등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영화와는 다른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오랫동안 소설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기다려온 독자들은, 이 소설이 왜 위대한 문학작품으로 널리 읽히는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