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는 신라 하면 경주를 연상하고 불국사와 석굴암, 첨성대와 에밀레종 등의 많은 문화유산들을 통해 너무나 이 나라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유적들은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엄청난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 실체는 이제서야 비로소 규명되고 있는 중이다. 일례로 첨성대의 구조와 상징성은 아직도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신라는 이러한 세계적인 문화유산만을 만들어낸 나라가 아니고, 우리 역사상 최초로 통일을 이룩하여 한국민족과 민족문화의 큰 틀을 잡아준 저력을 지닌 고대왕국이기도 하다. <br/> <br/>박혁거세의 즉위(BC 57)에서 통일신라 경덕왕의 투항에 이르기까지(AD 935) 신라의 역사는 정확히 992년, 거의 천년에 가깝지만 이 책은 박혁거세에서 진덕여왕에 이르는 성골 왕들이 재위하던 삼국통일 이전까지의 시기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저자가 [책머리에]에서 밝히고 있듯 이 시기는 신라가 영토의 확장과 제도의 정비 등 대내외적으로 가장 극적인 발전을 이룩한 때임과 동시에, 전통적인 문화를 바탕으로 불교에 더해 유교까지 받아들여 소박하면서도 신비로운 문화를 꽃피운 시대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가장 신라다운 신라'라고 할 수 있는, 우리 고대사의 원형을 간직한 시기인 것이다. <br/> <br/>신라의 역사는 고구려사나 백제사처럼 외부에서 유입된 많은 정치세력들간의 정복과 피정복이 교차하는 박진감 넘치는 과정은 아니지만, 한반도의 한 지방을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이 점진적인 성장을 통해 고대국가를 이루고 다른 국가들과 경쟁하여 그들을 극복해가는 단계적인 발전과정을 밟음으로써, 우리 고대사의 전과정을 낱낱이 보여주는 모델로서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한 부족의 족장에서 시작해 거서간·이사금·마립간의 단계를 거쳐 국왕으로 나아간 그 지배자의 명칭이 보여주듯 이 나라는 전형적인 고대국가의 성립과 발전과정을 거쳐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한 것이다. <br/> <br/>이 책에서 다루는 성골 왕들의 재위기는 화백제도와 골품제를 근간으로 사회적 안정을 다졌고 화랑도가 성행하여 국왕을 중심으로 한 충성과 단결이 강조되었으며, 불교의 왕즉불(王卽佛)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여 왕실의 신성성이 한없이 드높여졌다. 저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기초로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각종 금석문과 유적·유물들을 적극적으로 분석하고 유기적으로 종합하여 중고기 신라의 역사를 개관함과 동시에 새로운 해석들을 통해 우리 고대사의 숨겨진 면모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사실과 식견에 근거한 역사적 상상력을 한껏 펼치는 한편 최근의 연구성과를 적극 이용하고 저자의 미발표 견해까지 제시해 최대한의 정보와 이해체계를 전하고자 하였다. <br/> <br/>신라 왕실 일족이 석가모니의 종족과 같은 계보를 지녔다는 진종설(眞種說)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가운데 자신의 후사가 석가모니가 될 것을 염원했던 진평왕의 첫딸(선덕여왕) 출생으로 인한 실망과 좌절, 여왕의 재위를 문제시하는 사회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선덕여왕을 모델로 조상된 듯한 감실 석불의 한국적 아름다움, 우리 고래의 우주관에서 연유하여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을 연결하는 우주우물로서 설계된 첨성대의 상징성, 진지왕의 유복자로 태어나 성골 왕들 이후 신라 중대 왕실을 열어간 비형(鼻荊)의 숨겨진 실체에 얽힌 이야기 등은 우리 고대사의 생생한 일면들을 전해줄 것이다. <br/> <br/>이 책은 중고기 성골 왕실을 이루는 여덟 왕들을 각기 독립된 장으로 나누어 다루었으며, 진덕여왕을 끝으로 성골왕통이 단절된 이후 신라 중대 무열왕계를 열어 신라사를 이어가는 데 초석이 된 비형랑의 실체를 밝히는 데 한 장을 할애하였다. 그간 [도화녀 비형랑] 설화를 통해 전해져 이야기 속에만 등장하는 인물이었던 비형이 실상은 진지왕과 진골 출신 후궁 도화녀 사이에서 태어난 유복자로서 김춘추의 아버지인 용춘(龍春, 일명 龍樹)임을 설화의 재해석과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한 추정을 통해 밝혀냄으로써, 신라사의 유기적 연관성을 성공적으로 규명하고 있다.

1장 박·석·김의 나라는 박혁거세·석탈해·김알지 세 사람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신라의 시조들에 대한 설화를 재해석하고 이들 3성씨계간의 권력다툼과 성장과정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고대 신라사회의 모습은 아들과 딸이 동일한 상속권을 가지며 결혼한 뒤에도 부모--자식간의 친소관계에 따라 성의 구분 없이 함께 사는 이상적인 사회의 일면을 지닌 한편, 순수한 혈족을 보존하기 위해 왕실 내에서는 고모·이모·친사촌·외사촌 누이와도 혼인이 가능한, 오늘날과는 판이하고 신기한 면모도 지니고 있다. 거서간과 이사금의 시기를 거쳐 김씨계 마립간이 최종적으로 득세하면서 이후 신라 성골 왕실은 일부의 예외를 빼고는 대체로 김씨계로 이어지게 된다.

2장 노련한 지증왕은 조선조 수양대군과 단종의 경우처럼 조카를 폐위시키고 등장한 나이 많은 지증왕이 펼쳤던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통치를 보여준다. 순장을 폐지하고 신라 최초로 우경(牛耕)을 보급했으며 '신라'라는 국호를 제정하고 '국왕'의 칭호를 사용하는 등 국가의 가장 기초적인 틀을 잡은 이 노련한 왕은 또한 상복법(喪服法)을 제정하여 일상의 예의범절에까지 국가의 영향력을 확대했으며 주·군·현 등 지방행정체제를 정비하고 우산국을 신라 영토에 편입하였다.

3장 거룩한 법흥대왕에서는 울진 봉평비문을 새롭게 해석하여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온 율령의 실재 여부를 규명하고 아울러 신라의 피정복지 지배정책이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노인법(奴人法)이라는 법질서에 따른 체계적인 것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왕에 대하여 피정복지 주민들을 노인(노비)이라 인식하여 마련된 이 법체계는 이후 진흥왕대에 이르면 신민(피정복지 주민)과 구민(원래 영토 내의 주민)은 동등한 백성이라는 생각을 근거로 한 피점령지역 주민을 다스리는 전사법(佃舍法)이라는 법체계로 발전함으로써 신라의 역사의식이 크게 진보했음을 입증해주는 좋은 근거가 된다. 이 비문을 세운 계기가 된 사건에 대해서도 이것이 기존의 해석처럼 '반란'이 아니고 실화(혹은 방화)로 인한 대화재와 복구작업이었음을 보이고 있다. 법흥왕대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차돈의 순교와 불교의 공인과정 역시 설화의 재해석을 통해 상세히 재구성된다.

4장 짧고 굵게 산 영웅 진흥태왕은 신라 중고기에서 가장 극적인 발전을 이룩하고 통일의 기반을 닦았으며 엄청나게 영토를 확장하고 안으로 신라사회를 이끌어갈 이데올로기를 정비한 우리 고대사의 영웅 진흥왕의 면모를 구석구석 살피고 있다. 마모와 낙자(落字)로 해석되지 않았던 천전리 서석(書石)의 원명(原銘)과 추명(追銘)을 비롯해 경주 명활산성비와 각종 진흥왕 순수비를 재해석하였고, 신라 왕실이 주도하여 지은 최초의 절인 흥륜사(興輪寺)의 창건과정과 국가 공인 종교로서 불교의 역할, 신라 왕실이 자신들의 신성성을 드높이고 신라사회를 하나로 묶어줄 이데올로기로서 제시한 전륜성왕의식과 그것의 의의, 화랑도의 사상적 기반과 재정비과정 등을 살폈다.

5장 못다 핀 채 스러져간 진지왕에서 다루는 이 왕의 삶은 짧은 재위와 정치세력들간의 알력에 따른 폐위로 매우 간소하게 그려지지만 그는 이후 9장에서 보게 될 중요한 인물, 신라 중대 왕실의 초석이 된 비형랑(용춘)의 아버지로서, 스스로는 의도하지 않았으나 신라사를 이어가는 데 보이지 않는 끈이 되었다.

6장 하늘이 준 옥대를 찬 진평왕은 진종설 이데올로기의 정점에 서서 장차 자신의 아이를 석가모니의 탄생구도 속에 자리매김했던 진평왕이 덕만공주(선덕여왕)을 낳고 겪은 실망과 좌절을 흥미롭게 그리고 있다. 진평왕대는 한편으로 중국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유교를 비롯한 한학지식을 습득하려는 열기가 팽배하고 유명한 원광법사가 세속오계를 통해 가속화되는 삼국간 경쟁구도 속에서 신라 청소년층을 일체화할 정신적 지침을 제시한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신라사회의 전 지식층은 새로운 학문과 지식을 익혀 새시대를 열어가려는 열망을 불태웠으며 화랑도를 중심으로 뭉친 청소년들은 국왕에 충성을 맹세하며 고구려와 백제가 가해오는 대외적 압력을 물리치고자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서 미래의 주역 김춘추와 김유신이 자라고 있었고, 진평왕 말년 공주를 후계자로 세우려는 중신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바야흐로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 등장하였다.

7장 향기가 나는 선덕여왕은 여왕의 통치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과 회의 속에 주변국가들의 군사적 압력을 물리치고자 애썼던 여왕의 생애를 그리면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선덕왕 지기삼사] 등의 설화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여왕의 재위를 문제시하는 사회 안팎의 분위기를 잠재우고 부처의 돌보심을 입어 권위를 높이고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황룡사 9층탑과 감실 석불의 조성에 얽힌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롭기 그지없다. 특히 진평왕 말년에서 선덕여왕 재위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감실 석불이 실제 신라인의 얼굴, 나아가 선덕여왕을 모델로 삼아 만들어졌을 듯하다는 저자의 주장은 사실을 근거로 한 탄탄한 역사적 상상력의 힘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또한 이 장의 진수이자 이 책의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 가운데 하나인 첨성대의 상징성을 규명하는 대목은 많은 연구자들과 독자들의 관심을 끌 것이다. 진평왕 연간부터 선덕여왕대에 이르는 왕실 불교의 사상적 기반이 우리 고래의 하늘신〔天神〕과 불교식 천신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제석신앙임을 밝히고 이에 따라 인간세상과 하늘세상을 연결하는 수미산 정상의 도리천을 형상화한 것이 첨성대이며, 첨성대는 이 두 세계를 연결해주는 신단수(神檀樹)와 같은 우주목(세계목)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랍기 그지없는 새로운 해석이다. 또한 그 구체적인 형상이 우물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김유신의 집터에 남아 전하는 재매정의 구조와 대비하여 실증함으로써 '현세와 신의 세계를 연결하는 우주우물로서의 첨성대' 주장을 충실히 뒷받침하고 있다. 그간 학계 안팎에서 첨성대의 기본 기능과 구조, 그 상징성을 두고 어지러이 지속되어온 논란들을 하나하나 검토하면서 그 한계와 의의를 살펴 종합한 이 결론은 세간의 커다란 관심을 모을 것이라 확신한다.

8장의 마지막 성골 진덕여왕은 선덕여왕에 이은 두번째 여왕이자 신라 성골 왕실의 마지막 인물인 진덕여왕의 재위를 그렸다. 태어나면서부터 한번도 의심해보지 않았던 자신의 혈통에 대한 자부심과 신성함에 대한 확고한 믿음 속에서 성골의 종말조차 담담히 받아들였고, 후사를 이으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은 채 진종설의 정점에서 삶을 마감한 이 여왕은 자신의 재위기 동안에 본격적으로 당나라의 복제와 문물을 수입하고 연호까지 사용함으로써 이후 우리 역사의 기나긴 대(對) 중국지향적 사대외교의 단초를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