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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21년 12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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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28쪽 | 510g | 137*197*29mm |
ISBN13 | 9788934980186 |
ISBN10 | 89349801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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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사람에게 느끼는 공포와 환멸
온다 리쿠의 <유지니아>를 덮고 나서 ‘공포’와 ‘환멸’이라는 두 단어가 떠올랐다. 평소 작가의 명성이 주는 거대함에 발맞추지 못하고 작품을 적게 읽은 터라 이 책에 대한 기대와 설렘은 남달랐다.
지방 K시의 명문 집안 아오사와가 사람들이 3대의 생일파티에서 독이 든 주스와 술을 마시고 몰살당한다. 살아남은 사람은 가까스로 생명을 건진 가정부와 앞을 못 보는 그 집안의 손녀딸 뿐.
벌써 이 기가 막힌 설정이 독자들에게 한없는 미스터리의 세계에 뛰어들 준비운동을 하게 한다. 범인은 누구이며 동기는 무엇일까. 비밀을 발견하는 숨막히는 놀라움에 대비하도록 근육을 키우게 된다.
보통의 범죄 소설에서처럼 범인의 자백, 명백한 동기, 체포, 죄의 응징, 사건의 해결 등과 같은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기에 이 책을 ‘모호함을 싫어하는 독자들’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인간의 복잡한 심리와 기억의 불완전함이 삶과 만나 세상 속에 그림을 그려가는 풍경을 ‘지켜보기’를 좋아한다면, 이 작품은 손꼽힐 만한 명작으로 가슴에 남을 것이다. 여러 인물이 교차되며 인터뷰되는 방식, 때때로 등장하는 3인칭 시점의 이야기, 신문기사나 파일에서 발췌한 보고서 양식의 정보들. 이 책의 다양한 서술방식은 범인과 동기에 대한 초점을 모으는 끊임없는 ‘잘 짜인’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앞 못보는 소녀를 둘러싼 미스터리는 각자의 다양한 심정과 시선으로 작품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천천히 스며드는 공포를 맛보게 한다. 그 공포는 독자의 가슴에 전염되어 ‘보고 있는’ 사람의 ‘보이는’ 사람에 대한 의심과 환멸을 키운다.
이 책에서 ‘보고 있는’ 사람은 <잊혀진 축제>를 쓴 마키와 그의 오빠들, 유능한 경찰과 가정부의 딸, 그밖에 K시의 사람들과 인터뷰어, 그리고 독자들이다.
하지만 ‘보이는’ 사람, 즉 액자 속 주연은 히사코와 노란 우비의 청년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히사코를 보는 다양한 시선과 기억들은 한결같이 공포에 차 있으며, 어린 시절엔 동경이었을지라도 나중에 이르러선 환멸의 느낌으로 변환된다. 특히 작품의 마지막에 정체를 드러낸 인터뷰어가 앞을 보게 된 히사코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다그칠 때 그녀에 대한 혐오와 환멸은 일종의 허무함마저 끌어올린다.
내가 가졌던 그런 이미지들은 틀렸나. 모두가 황홀하게 이야기하는 그녀가 정말 눈앞에 있는 여자와 동일 인물인가.
눈앞에 있는 이 빈약한 중년 여자와.
나는 흘깃 그녀를 보았다.
환멸, 환멸을 느낀 사람은 나다.(367P)
모호함과 막연함의 분위기가 이 작품 서사의 분위기를 이루고 있지만 이 작품의 범인과 범행 동기는 사실 작품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 ‘소녀가 오랜 세월 꿈꾸고 갈망하던 세계와는 너무나도 다른’ 아오사와가 대저택의 분주한 분위기. 아침에 일어나면 귀에 들어오는 ‘잔소리와 불평, 아첨과 추종, 노골적인 현실 이야기, 책략, 음모, 기도 소리, 저속한 음악, 교성’. 소녀는 이 모든 것에 부르르 치를 떨며 오직 ‘혼자가 되는 것’을 꿈꾼다. 조용한 시간 속에 충만한, 세계의 진정한 음악을 듣는 것.
그녀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몇 번씩 되풀이해온 말을 마음에 새긴다.
나는 누구보다도 강하고 똑똑해져야 한다. 누구보다 교활하고 사악해져야 한다. 이 세상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강함이 필요하다.(387P)
이 대목과 더불어 제목 ‘유지니아’의 뜻이 밝혀지는 13장의 바닷가 장면을 읽을 때 어느 누가 소용돌이치는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소녀가 청년을 끌어들여 ‘아무도 모르는 꿈나라, 세계가 사라지고 영원의 정적으로 가득 찬, 둘만의 나라’를 세우고자 한 신념이 수많은 이들에게 죽음의 절망과 잊지 못할 상처를 남긴 근원이었던 것이다.
단지 희생자라 할 수 있는 청년의 불안한 정신 세계와, 그가 구하려 한 질문과 대답만은 독자들에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녹아내리지 않은 잔여물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두려움의 전조들
여러 가지 의문들이 풀리지 않는 비밀처럼 잔상을 남기는 이 작품이, 사실 독자들에게 강렬한 공포의 체험을 던져주는 원인은 따로 있다. 바로 읽는 이의 마음에 두려움의 전조(前兆)를 불러오는 기가 막힌 묘사들이다.
가정부의 딸이 회상하는 황혼녘 그네에서 히사코의 미소, 사건의 날 경찰이 내려놓은 찻잔에 비쳐 보이는 문자 ‘여고(女苦)’, 마키의 큰오빠가 생일잔치에 가기 전 책가방의 열쇠에 생긴 이상한 징조, 하늘이 무너질 듯 쏟아지는 캄캄한 비와 바람, 사람의 숨을 눌어붙게 만드는 습기, 여관의 천장에 드리운 검은 아메바 모양의 얼룩, 어두운 옛 가옥에서 마키가 보았던 하얀 누에고치의 이미지, 히사코의 엄마가 죄를 고백하는 파란 방에서 어린 히사코에게 어떻게 했을지.
이러한 기가 막힌 묘사와 장치들은 과연 온다 리쿠가 스릴러의 여왕임을 확인하게 한다.
무엇보다 가장 최고의 두려움의 전조는, 적어도 내게는 마키라는 인물이 가진 묘한 성향이었다. <잊혀진 축제>를 쓴 마키는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이 돼보고 싶다’는 욕망, 모방 심리를 가지고 있는데, 남에게 독을 먹이는 기분이 어떤 건지 느껴보고 싶었다며 스튜를 먹은 가족들에게 말하는 대목에서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마키가 일생 되어보고 싶었던 존재는 바로 히사코. 어린 히사코의 곁에서 나란히 파란 방을 들여다 보는 장면, 성대모사에 재능을 가진 마키가 그 누구의 인격으로도 변할 수 있었다는 가능성은 이 책에서 다양한 해석을 끄집어내려는 독자들의 심장에 두려움의 바늘을 꽂는다.
하지만 그 두려움의 끝에서, 인간의 악의와 비뚤어진 신념이 비극으로 파생되는 장면들을 목격한 독자들은 거꾸로 선의와 올바른 믿음이 얼마나 건강하고 안전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이 주는 엄숙한 사명과 소중한 책임들이 어떤 형태를 띠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이 한 권의 책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족같은 감상을 덧붙이자면, 이 작품이 주는 강렬한 색채 대비는 작품의 문학성을 한도 초과의 상태까지 끌어올린 주역이었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파란 방과 하얀 백일홍, 파란 바다와 하얀 허무의 세계, 노란 우비와 검은 야구 모자, 이런 색채의 묘사가 주는 마법은 온다 리쿠가 부리는 언어의 즐거움을 유효기간 없이 소비할 수 있다는 소소한 기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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