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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6년 10월 3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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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기기 | 크레마 /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 /아이폰 /아이패드 /안드로이드폰 /안드로이드패드 /전자책단말기(저사양 기기 사용 불가) /PC(Mac) |
파일/용량 | EPUB(DRM) | 11.85MB 파일/용량 안내 |
ISBN13 | 9788956057897 |
2024년 09월 09일 ~ 2024년 10월 10일
뉴욕타임즈 21세기 최고의 책 100대 도서 『파친코』, 『채식주의자』 선정
2024년 07월 15일 ~ 2024년 10월 18일
2023년 02월 09일 ~ 2024년 12월 31일
상시
170명의 예스24 회원이 평가한 평균별점
이 책은 테드창의 여러 단편이 묶인 책인데, 여기에는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대한 리뷰만 쓰고자 한다.
영화 "컨텍트"를 먼저 보았고, 유튜브에서 물리학자 김상욱교수와 영화평론가 이동진님의 대담까지 다 보고 책을 읽은 터라, 책을 읽는 내내 아쉬웠다. 책에 묘사된 내용들을 영화에서 내가 본 장면들과 어느 정도 맞는지 나도 모르게 매칭을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즉 활자를 읽으면서 내가 펼칠 수 있었을 상상의 영역이 닫힌 셈. 책을 먼저 읽고, 나의 상상이 영화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비교해보는 재미가 훨씬 더 컸을 것 같다.
너무 많은 정보를 이미 다 알고 읽어서 사실 소설 끝 부분에서도 외계 체경이 마지막 소통 후 유유히 떠날 때 "아, 이렇게 그냥 끝나는구나"... 영화보다 싱겁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 속에서는 헵타포드가 지구에 온 이유를 "무기를 주다" 라고 하자, 인간의 언어 속 "무기"로 해석한 중국, 러시아를 비롯한 국가들은 이들을 위협으로 간주하고 전쟁 채비를 하며 갈등과 긴장국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책은 영화에서 이해하지 못한 물리적 이론이나 철학을 글로써, 영화는 글만으로 상상이 잘 안되는 외계인의 형체와 헵타포드의 원형적 언어를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시각적으로 나타내주며 상호 보완적 역할을 해, 작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줄거리를 떠나 나에게는 아래의 세 가지 메시지가 가장 크게 다가왔다.
첫째, 서로 다른 언어와 세계관을 가진 존재와의 소통
다른 인종, 다른 언어를 쓰는 집단끼리는 물론이요, 같은 언어를 쓰는 동족끼리도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하고, 소통이 단절되는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외계인과의 소통이라니?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고 서로의 언어와 사고체계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한다는 전제 자체가 매우 충격적이었다. 과학적으로 정말 가능한 일인지, 그저 판타지로 봐야할 지 모르겠지만, 작품 내에서는 어쨌든 마음을 열고 소통하는 것이 가능했다. 너무 이질적인 존재끼리도 대화를 시도해야 하고, 노력이 통할 경우 모두가 윈윈하는 평화로운 관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인간 관계에서도, 국가 간 관계에서도, 남북관계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Non zero sum game 평화, 공생
양쪽의 관계에서 대립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협력을 통해 공생해라.
위의 '소통'의 중요성과 맥이 닿아있다.
인간세계(각국 정부, 국방부 조사단 등)는 외계인을 잠재적 '적'으로 인식한다. 지구의 정보가 역으로 이용당할까 그쪽 정보를 빼내오되, 이쪽 정보는 최소한으로 주고 싶어한다. 그들이 우리를 공격하면 그들에게는 '이익', 인류에게는 '손실'이기에 이것은 제로섬 게임이다. 인간의 언어체계 속에서 '다른 존재' = '적'이라는 사고는 당연한 인식이다.
하지만 헵타포드의 메시지는 "여럿이 하나로 화합해라.. 우린 인류를 돕는다. 3000년 뒤 우린 인류의 도움이 필요하다..." 책에는 없지만, 영화 속에 나오는 메시지인데, 이것이 어리석은 인간에게 이 작품이 던지는 핵심 메시지인 것 같았다. 미래를 보는 헵타포드는 먼 훗날 인간이 자신들을 도울 날이 오게 되니, 서로 반목하고 전쟁하며 인류를 파멸로 이끌지 말고, 화합하고 상생해라, 그래야 너희가 우리를 도울 날이 온다. 그에 화답하듯, 헵타포드의 세계관을 터득한 루이즈는 미래를 기억하는 자신의 무기를 활용하면서 중국의 대령을 마음을 바꾸어 전쟁을 막는다.
책에서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고, 헵타포드의 언어를 분석하면서 서서히 외계인의 통찰력을 갖게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셋째, 페르마의 원리 -운명론적 미래, 수행적 언어
이 원리는 사실 책에 아주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보통, 뉴턴의 고전물리적 세계관에서처럼, 공기 중의 빛이 수면을 만났을때, 굴절률 차이로 빛의 방향이 바뀐다고 생각이 된다면, 인과적 관점으로 바라본 것이고, 빛이 출발할 때 이미 자신의 목표지점을 정확히 알고 최단 시간의 경로를 택한 것이라고 본다면 이것은 목적론적 관점으로 본 것이다. 전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선형적 시간의 흐름 속에서 A-B-C가 순차적, 연쇄적으로 결과에 이른 것이고, 후자는 A-B-C 가 동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책과 영화에서 헵타포드는 후자, 목적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 시간은 과거-현재-미래가 인과적, 선형적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언어처럼 둥글고, 그렇기에 시간과 끝이 없이 동시적이며 하나이다.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하나로 인식하기에, 우리 언어로 말하자면 미래까지 이미 다 알고 있는 존재인 것. 따라서 그들은 인간과 싸울 생각이나, 지구를 더 알고자 하는 호기심도 없다, 왜? 다 아니까. 그저 우리에게 또 다른 차원(?)의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고, 그들의 능력을 심어주고자 할 뿐. 그래서 그들은 평화적이다. 이들과 소통하면서 언어학자 루이즈 또한 미래를 보게 된다. 여기서는 미래를 '기억'한다고 표현한다. 그녀에게는 헵타포드 분석팀에서 함께 일한 물리학자 게리(책)/이안(영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생길 것이고, 그녀는 영화에서는 12살에 희귀병으로, 책에서는 25살에 등산하다 죽게 된다.
언어학자 루이즈는 헵타포드와 만나면서 자기 딸이 죽는다는 미래를 알게 되는데도 그 물리학자와 결혼하고 딸을 낳는다.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운명인가?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어 인간의 의지가 개입될 여지는 없는가? 결론적으로 딸은 죽게 될 것이기에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다고 봐야겠다.
우리가 보기에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미래가 있다는 건, 굉장히 비관적이거나 허무주의적으로 들린다. 그런데 테드 창은 이렇게 말한다. "헵타포드의 의식 양태를 특이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행위가 역사상의 사건과 일치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의 동기 또한 역사의 목적과 일치하는 것이다 (...) 동시적 의식의 맥락에서 보면 자유나 강제는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우리는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삶을 사는 것이고, 미래를 이미 아는 헵타포드의 원형적 세계관에서는 '자유의지''선택' 등의 단어는 의미가 없다, 미래를 안다는 사실은 아무것도 변화시키기 않는다. 미래를 현실화하기 위해 현재를 수행할 뿐.
무엇이 맞다고 말하지 않는다. 언어가 다르듯, 세계관이 다른 것이다.
"페르마의 빛처럼 모든 물리적 시간은 완전 상이한 두 방식 (인과론적 - 목적론적)으로 분석될 수 있는 하나의 언술이다" 라고 한 것처럼, 영화에서는 미래를 앎에도 그 선택을 주인공이 '자유의지'로 한 것 처럼 묘사돼 있고, 책에서는 미래를 '수행'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
"미래를 아는 경험이 일종의 절박감을, 자기 자신이 하게 될 행동을 정확히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불러일으킨다면?" (루이즈)
책 안에서의 이 비유들이 이런 맥락에서 의미있게 다가온다.
The rabbit is ready to eat.
이 문장은 두가지로 다 해석 가능하다.
1) 토끼(고기)가 먹을 거리로 준비되어 있다. (인간이 토끼를 먹는다)
2) 토끼는 먹을 준비가 되어 있다. (토끼에게 먹이를 줄 것이므로, 토끼는 먹을 준비가 되어있다)
노파로도 보이고, 동시에 젊은 여인으로도 보이는 착시 그림
어렵지만, 내가 내리는 결론은,
"페르마의 빛" 처럼 위의 예시들은 우리 언어체계 속에서는 맥락과 관점에 따라 모두 양가적 해석이 가능하다. 두 관점 모두 타당하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헵타포드처럼 과거~미래까지 시간을 동시에 한번에 경험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맞는다라는 미래는 결정되어 있다. 그 미래를 알면서, 죽음까지의 과정을 의미있게 살려고 노력한다. 죽는다는 미래를 의식할수록 현재가 소중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래서 루이즈도 딸이 어린나이에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아이와의 시간들이 얼마나 큰 행복을 줄 지 알기에 기꺼이 운명을 따랐을 것이다. "나는 환희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고통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라고 했지만 '환희'가 클 것을 알았을 것이다.
누군가는 매 순간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으로 자기 운명을 만들어 간다고 생각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어짜피 죽을텐데, 뭐하러 열심히 사나, 그냥 팔자대로 흘러가는대로 살지..라고 할 것이다. 인과론적이든, 목적론적이든 각자가 받아들이는 관점으로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전자가 의미있지 않은가.
쓰면서 더 어렵고 무엇을 이해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읽어봐야겠다.
운명이란 신의 질문이다
드라마 <도깨비>에 유덕화(육성재)에 빙의된 신을 통해 작가 김은숙은 ‘신의 의지’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의 계획 같기도 실수 같기도 한가? 신은 그저 질문하는 자일 뿐. 운명은 내가 던지는 질문이다. 답은 그대들이 찾아라.
상식에 의하면 운명이란 정해진 것입니다. 설령 예정된 운명을 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바꿀 수 없습니다. 운명이란 자고로 그렇게 강고해야 운명이라 불릴 자격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드라마 <도깨비>에서 유덕화의 몸을 빌린 신의 말은 이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운명이란 질문의 형태라는 것. 물음표를 달고 있는 운명과 이미 정해진 것으로서의 운명이 과연 양립할 수 있을까요
루이스(에이미 아담스)는 이안(제레미 레너)을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딸아이를 낳을 것입니다. 이것이 통상 우리가 알고 있는 운명의 어법입니다. 그런데, 김은숙이 그린 신은 운명을 질문이라고 규정합니다. 이안은 루이스를 만나 사랑을 할 것인가? 그리고 그들은 결혼하여 딸아이를 낳을 것인가? 그에 대한 답을 인간의 몫으로 남겨두었다고 하네요. 어쩌면 우리는 그 인간의 몫을 자유의지라고 부르는 것인 지도 모릅니다.
자유의지의 존재는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정하고 우리의 과거를 분석해 보면 왠지 우리의 삶에 우연이란 없어 보입니다. 특히 어떤 사건이든 주의를 기울여 집중해 보면 설령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범위를 넘어 인과의 맞물림이 지배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심증이 있습니다. 예컨대 띄엄띄엄 보자면 평범해 보이는 우연들의 겹침도 ‘각성한’ 당사자에게는 그녀와의 사랑을 마땅한 것으로 만드는 필연인 것만 같습니다.
달리 생각해 볼 여지도 있습니다. 우리의 인지 능력, 혹은 분석 능력은 지금까지의 삶을 온전히 인과적으로 해석할 능력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럴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면 과거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인과성이 선명할 뿐만 아니라 당연히 그 결과로써 미래를 확신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나를 무한히 분석하면 그리고 내가 만난 그 누군가도 무한히 분석하면 이 만남도 예측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으로는 무한히 분석할 수 없죠. 그러니까 경험에 기대게 된다는 거에요.
- 이정우.『주름, 갈래, 울림』. p.135
라이프니츠의 관점에 기대면 이 세상이 정말 원인과 결과가 지배하는 세상임을 인간은 알 수가 없습니다. 명백히 알 수가 없는 것을 토대로 우주가 정말 원인과 결과에 의해 결정된 세계이며 더구나 ‘예정조화’의 섭리가 구현되어 가고 있다고 믿는 것은 도리 없이 ‘형이상학’, 혹은 ‘하나 마나한 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미래를 보는 루이스가 있습니다. 미래를 보지 못했던 그녀가 미래를 볼 수 있게 된 까닭이 제법 논리적으로 설명되고 있지만, 결국 그것은 ‘신내림’의 일종이 아닐까요? 적어도 그녀가 보게 된 미래의 경위를 우리의 분석적이고 공간적인 언어로 환원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녀의 체험과 체득을 신비하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눈여겨 볼 점 중 하나는 루이스가 미래를 보게 되는 토대가 인간적 관점에서의 ‘무한 분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통찰이며 직관입니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만 않으면 오히려 매끄럽게 쓸 수 있는 수준에까지 도달했다.
- 테드 창.「네 인생의 이야기」. p.202
미래를 알게 되었을 때, 더구나 그 미래에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 그것을 바꾸려고 하는 것은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응당한 도전일 것입니다. 그럴 때 그는 결정론자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유의지와 실천에 의해 미래는 바뀔 것이므로 미래를 바꾸려는 순간 그는 결코 미래를 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유의지의 존재는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는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의지란 의식의 본질적인 일부인 것이다.
- 테드 창. p.210
다행히 우리가 아는 영매, 무녀는 인과율에 지배되는 존재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들은 어떤 특이점들을 직관합니다. 달리 말하면 인과성이라는 논리적인 서식은 순차적인 시간을 요구하므로 시간을 초월하는 직관이나 통찰의 속성과는 부합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통찰하는 자는 결정론자가 아니라 운명론자라고 해야 좀 더 그럴 듯해 보입니다.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운명이란 인간의 힘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 운명을 향해 가는 여정에 각고의 노력이 투입된다고 해도 예정되어 있는 운명, 혹은 결정적인 큰 운명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예컨대, 루이스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아무리 딸의 죽음을 바꾸기 위해 노력을 하더라도 딸의 죽음을 가져오는 사건이 운명이라면 그것은 바뀌지 않습니다.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는 자신의 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아들을 버리지만 신탁은 어김없이 실현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탁들은 미리 예언되지만 결국 바뀌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타임 리프를 소재로 하는 대개의 창작물들은 이러한 운명론적 서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인과적 해석과 목적론적 해석이 양립하는
테드 창의 소설, 그리고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는 그 운명의 구조에 대해 고찰합니다. 테드 창이 주목한 것은 언어의 구조입니다. 시간 순서대로 선형적으로 나열되는 언어는 우리의 사고와 습관을 규정합니다. 앞서는 것이 뒤의 것을 배출하는 사건들의 연쇄적인 나열들은 원인과 결과로서 인과성의 사슬을 형성합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의식하는 시간의 구조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외계에서 온 헵타포드들은 인류의 자명한 시간 의식에 의문을 던집니다. 정말 자연에 존재하는 시간의 구조는 선형적이며 그에 따라 사건들은 인과적인 것일까요? 만약 시간이라는 것이 의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며 또한 사건들의 선형성과 인과성 자체가 언어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비선형적이고 비인과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들에게 시간 역시 공간과 마찬가지로 통째로 인식될 수 있지는 않을까요
각각의 블록은 몇 년 동안의 기억에 해당됐다. 이것들은 순서대로거나 연속적으로 도착하지 않았지만, 곧 오십 년에 걸친 세월의 기억을 형성했다. 이것은 내가 ‘헵타포드 B’로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언어를 숙지하고 있는 기간이며, 플래퍼와 래즈베리와의 인터뷰로 시작해서 나의 죽음으로 끝난다. … 이따금 ‘헵타포드 B’가 진정한 우위를 점하면서 일별의 순간이 올 때, 나는 과거와 미래를 한꺼번에 경험한다.
- 테드 창. p.223
과거와 미래를 한꺼번에 경험하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또 어떻게 가능할까요? 소설도 영화도 헵타포드들의 언어 축조에 공을 들이고 있으며, 특히 영화에서는 원형 구조에 일시에 배치되는 ‘헵타포드 B’의 패턴을 통해 선형성이 파괴되는 언어의 이미지를 환상적으로 구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묘사된 언어의 특성보다는 소설에 나오는 ‘페르마의 원리’와 목적론적 관점이 비유적으로 이해하기는 좀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작용’이나 적분에 의해 정의되는 다른 것들처럼 헵타포드들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물리적 속성들은 일정한 시간이 경과해야만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목적론적인 사건 해석으로 이어진다. 사건을 일정 기간에 걸쳐 바라봄으로써 만족시켜야 할 조건, 최소화나 최대화라는 목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처음과 가장 마지막의 상태를 알아야 한다. 원인이 시작되기 전에 결과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테드 창. p.207
광원을 출발한 빛은 어떻게 알고 최소 시간이 되는 경로를 찾아 공기와 물의 경계면을 통과해 가는 걸까요? 흔히들 빛의 속도로 달리게 되면 상대적으로 시간은 무한히 길어진다고 하는데, 혹시 헵타포드처럼 ‘광자photon’에겐 시작과 끝이라는 시각은 분절되지 않고 동시적인 것은 아닐까요? 물리학에서 인과적 설명을 벗어나는 것은 최소시간의 원리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왜 물질과 에너지가 에너지 보존이나 엔트로피의 법칙을 만족하도록 운동하고 변화되는 지 알 수 없습니다. 고립계에서 어떤 물질의 운동은 열역학 1법칙과 2법칙을 만족하도록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우리는 ‘목적론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만약 돌이 땅 위로 떨어지는 까닭을 우주 안에서 자신의 절대위치로 회귀하려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 역시 목적론적 관점입니다. 어떤 계 혹은 물질에 내재되어 있는 속성, 혹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러한 행태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재미있게도 물리에서는 합심하여 ‘반물리학적’이라고 조롱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인데 얼핏 보아도 ‘하나 마나한 말’로 들립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낙하하는 물체의 높이 감소와 속력의 증가가 에너지 보존에 부합되도록 변화된다는 물리학적 답변이 딱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논법과 구조상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어떤 계에 내재되어 있는 에너지 보존이라는 속성을 실현하기 위하여 물체는 그러한 행태를 보이는 것이니까요.
양자역학에서는 조금 색다른 해석을 내 놓습니다. 광원을 출발한 광자들은 ‘확률’로써 행동합니다. A점에서 B점으로 가는 임의의 경로를 선택하여 소요 시간을 계산하고 그 시간이 걸리는 경로에 대하여 확률을 계산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B점에 도달할 확률이 높은 경로들의 광자만이 B점의 밝기에 더 큰 영향을 줄 것이고, 계산을 해 보면 그 경로들은 ‘최소 시간의 원리’를 만족하는 경로에 밀집해 있습니다. 페르마의 최소 시간의 원리와 좀 다른 점은 그 빛이 오직 최소 시간이 되는 단 하나의 경로만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빛이 최소 시간을 만족할 ‘목적으로’ 단 하나의 경로를 따라 미리 알고 이동한다는 목적론적 시각은 조금 비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양자들의 양자역학적 거동 또한 목적론적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양자인 빛은 확률파동적 거동이라는 속성을 부여받고 그에 부합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루이스는 물리적 사건이 인과적으로도 목적론적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을 빗대어 “모든 언어적 사건은 정보의 전달과 계획의 현실화하라는 측면에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보의 전달은 순차적이고 인과적이지만, 동시에 이미 예정된 미래를 현실화하는 목적론적 속성도 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언어에 목적론적인 속성이 있다고 한다면 순전히 목적론적인 언어 체계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언어는 유동적 실재를 고착화하는 공간 표상의 산물이다.
시작과 끝이 동일시되고 하나의 발화가 행위가 되며 한 순간을 통해 전체가 체득되는 순간은 득도한 사람들이 경험하는 신비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화가들의 그림은 어떨까요? 아닌게 아니라 영화가 묘사하는 ‘헵타포드 B’는 한 장의 수묵화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림은 보편적인 의사소통 수단으로는 적절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의사소통을 위한 언어는 공유할 수 있는 규칙을 가져야 하고 공유할 수 있는 규칙은 요소들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이어야 하며 따라서 규칙으로 규정되는 요소들은 분절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어는 ‘공간표상’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 아닐까요
공간 표상은 실제적 삶과 행동의 필요성에서 유리한다. 행동의 요구는 실재적 지속의 직관과는 상반되는 것으로서 지성이 자아의 본래적 모습을 소외시키는 과정에서 실현된다. 자아는 의식의 표층과 심층에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내적 상태 즉 심층자아가 상호 침투하는 흐름이며 자유의 본래적 모습을 표현한다면 사회적 삶과 관계하는 표층자아는 소통의 필요성에 의해 내적 상태를 양화하고 언어로 표현한다. 언어는 유동적 실재를 고착화하는 공간 표상의 산물이다. 질적 변화를 본성으로 하는 의식 상태는 고정되는 순간 변질과 왜곡을 겪는다. 따라서 언어는 실재를 충만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황수영. 『베르그손-지속과 생명의 형이상학』. p.48
에컨대, 우리가 슬픔이란 느낌을 가질 때 과연 그 감정을 크다, 작다는 표현으로 대체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예지적이긴 하지만 루이스에게 딸의 죽음이 주는 슬픔은 말 그대로 지금의 나에게 침투하는 흐름, 즉 스며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정한 경계를 가진 언어로 고정할 수 없습니다. 시간을 따라 스며드는 유동적인 슬픔을, 고통을 정량화된 좌표에 질감을 없애고 분절적인 수학적 위치로 나타낼 수 있을까요
공간은 수의 형성을 가능케 하는 장이다. 시간 속에서 단위들을 연속적으로 더함으로써 수를 형성하고자 해도 시간은 이렇게 더해진 단위들을 묶는 원리가 될 수 없다.
황수영. p.40
우리의 의식 속에 지속되는 시간이 공간적으로 표상된 것이 언어라고 하면, 시간의 본질을 왜곡하지 않고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희망이자 가상의 언어가 ‘햅타포드 B’일 법합니다. 역설적이게도 비언어적인 언어인 셈이죠.
그런데, 이 비언어적 언어의 심상은 공간 표상인 언어에서 기원하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햅타 포드 B’를 체득하면서 루이스는 앞으로 자신에게 일어날 ‘사건들’을 모두 알게 됩니다. 사건들은 어떤 특이점을 형성하죠. 결혼, 출산, 이혼, 딸의 죽음 등등, 그것들은 하나의 사건으로 다른 사건들과 분절되면서 공간적인 형태로 표상됩니다. 그것들은 계열을 이루며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어져 있으며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이처럼 시간의 공간 표상은 필연적으로 결정론적 시각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이러한 사건들은 그야말로 무한히 많습니다. 가령 루이스의 결혼과 출산 사이, 아니 눈을 마주하고 키스에 이르는 그 짧은 사이에도 사건들은 무한합니다. 그것을 모두 다 안다는 것은 결국 무한히 아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보통 공간 표상인 언어가 세계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고 한다면 소설과 영화가 그리고 있는 이 비언어적 언어는 다만 세계를 무한히 담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건들을 무한히 나눈다는 것과 그것들을 일시에 인지한다는 것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비유하자면 미분을 하면서 동시에 적분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헵타포드의 관점으로 바꾸면 그들에겐 어쩌면 미래의 어떤 사건들을 모두 알고 있다는 인지적 능력 따윈 없는 것이 아닐까요? 비언어적 언어에 시간에 대한 인간적 관념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떤 사건을 안다는 인지적 관념 역시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헵타포드 B’를 일부 체득한 루이스는 어떤 느낌일까요
나는 처음부터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에 상응하는 경로를 골랐어. 하지만 지금 나는 환희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아니면 고통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테드 창. p.230
저는 도리어 루이스가 환희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는지 고통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해 봅니다. ‘헵타포드 B’를 체득하게 되면 시간의 공간 표상은 사라지고 언어로 포착되지 않은 의식의 흐름만이 남게 되지 않을까요? “내적 환희, 슬픔, 미적 감정, 정열” 등과 같은 ‘심적 상태’가 분절 없이 뒤엉켜 연속되는 통째의 흐름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우디의 성당 앞에서 순간 얼어붙은 채 눈물을 흘리는 어떤 관광객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혹은 오래 전 『다다를 수 없는 나라』를 읽고 도서관을 나와 걸었던 짧은 밤길 속에서의 제 모습도 떠올려 봅니다. 어쩌면 우리는 누구나 ‘헵타포드 B’를 체득한 것과 같은 순간들을 일상에서 체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다만, 그 순간들이 너무 찰나이고 또한 너무 드물게 일어나기 때문에, 아니 점점 더 드문드문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모르고 있거나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영화를 보기 전에 책을 읽기로 결정한 건 잘한 결정이었다. 대개 영화가 아주 재미있으면, 책으로 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데, 최근 이 작품집의 <네 인생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영화 <컨택트>가, 원작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작에서 표현하지 못한 시각적 요소를 충분히 만족시켜 주고, 또 영화에서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원작의 철학적 혹은 과학적 사고를 원작에서 읽을 수 있어서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준다.
영화의 내용이 방대한 편이라 장편 소설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이 책에는 <네 인생의 이야기>를 비롯한 8개의 단편이 약 440쪽 분량에 걸쳐 쓰여있다. 몇 쪽 안되는 아주 짧은 단편 소설을 포함하기 때문에 대부분은 50쪽에서 100쪽 사이 중편 정도의 길이이다. 특히 영화화된 <네 인생의 이야기>의 경우 100쪽 가까이 되기 때문에 테드 창의 명성을 생각해봤을 때 아마도 **** 출판사였다면 단권으로 하나씩 냈을 거 같다. (그런 점에서 마이너 출판사에서 나온 점이 다행이다)
바벨론의 탑
테드 창이 처음으로 발표하면서 동시에 역대 최연소 네뷸러상 수상이라는 영예를 얻은 작품이다. 그런 명성에 걸맞게 처음에 읽었을 때는 이게 지금 무슨 소리인가, 어디인가, 어느 시대인가를 궁금하게 하는 배경에서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상상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바빌론의 탑을 쌓고 있는 풍경이 과학적 상상력과 만나 이루어내는 이야기는 읽으면서 느낀 문학적 지적 신선함이라는 말 이외에 달리 설명할 말이 없으나, 독자를 함께 한도 끝도 없는 상상력의 세계로 이끈다는 점 역시 부인할 수가 없다.
바빌론의 탑을 쌓는데 왜 광부들이 주인공일까. 이것이 바로 상상력의 문제다. 도시 전체는 축제의 분위기 속에 듬뿍 젖어 있다. 탑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는데 한달 반 가량 걸리는데, 그 탑을 오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탑을 쌓기 위해 수레에 벽돌을 싣고 올라가기 때문에 넉 달이 걸린다. 구리를 파던 엘람의 광부들은 그 구리를 사가던 도시 바빌론에 처음 왔으며, 그들은 광부로서 온 것이다. 파기 위해 올라가는 것이 그들의 임무다. 하늘의 천장을 파고 들어갈 광부들. 하늘을 뚫으면 무엇이 나타날까. 짜자자잔 기대하시라
이해
이런 이야기는 영화로도 본 듯한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이야기이지만, 소설로 읽었을 때에 접하는 지적인 구라는 그 어떤 영화로도 설명 불가능할 것이다. 사고로 극심한 뇌손상을 입은 환자에게 호르몬 K 요법은 손상된 뉴런을 대량으로 재생시키면서 두뇌 활동이 지나치게 활발해지는 '부작용'을 입게 된다. 고로 결과는 평범했던 사람이 천재가 된다는 것. 여기까지 보면 그럴 듯한 상상력이고 보던 듯한 스토리인데, 그 천재가 사고하는 방식 자체가 천재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방식이라는 것.
영으로 나누면
수학자 르네는 1+1=2 가 아니라 무한한 다른 답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수학적으로 증명해낸다. 줄곧 믿어왔던 이론이 통째로 부정되고 새로운 이론이 나오면 모든 증거가 새 이론 쪽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황은 우리가 알고 있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는데, 르네는 그게 아니라 주장한다. 남편은 어떤 방법이로든 수학적 이론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1=2라는 자가 당착에 빠진 그녀를 위해 무언가를 돕기 원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추구해왔던 모순되지 않고 논리 정현한 수학이라는 세계가 난센스라는 사실에 절망한다.
손가락으로 1 더하기 1을 해보면 언제나 2가 나오지만, 종이 위라면 난 무한한 수의 해답을 써넣을 수 있어. 그것들 모두가 똑같이 유효하고, 바꿔 말해서 모두 똑같이 무효한 거야. 난 당신이 본 중 가장 질서정연한 정리定理를 쓸 수 있지만, 그건 난센스 방정식 이상의 아무 의미도 없어.” 르네는 쓰디쓴 웃음을 웃었다. “실증주의자들은 수학이 동의반복이라고 주장하곤 했지. 그들의 말은 모두 틀렸어. 수학은 자가당착이야.
네 인생의 이야기
이야기의 시작은 아직 태어나지 않을 자신의 딸에게 전하는 엄마의 목소리다. "오늘밤의 이야기, 너를 잉태했던 이 밤의 이야기를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단다. 하지만 그런 얘기는 네가 너의 아이를 가질 준비가 되었을 때나 할 수 있는 얘기이고 우리는 결국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하겠지" 딸에게 하는 이 문장에는 미래 시제와 과거 시제가 섞여 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에 대한 어떤 소망과 또 그 소망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엄마다. 언어는 생각하는 방식을 결정한다라고 하는 이론이 맞다 하더라도, 그 생각하는 방식이란 게 미래를 보는 방식이라고 한다면 납득할 수 있을까.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은 축복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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