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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평전

[ 양장 ]
장 코르미에 | 실천문학사 | 2000년 03월 15일 리뷰 총점8.1 정보 더 보기/감추기
내용
4점
편집/디자인
4.1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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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평전

품목정보

품목정보
출간일 2000년 03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667쪽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39203822
ISBN10 8939203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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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저자 소개 (1명)

장 코르미에는 "체 게바라" 를 통하여 세상에 알려진 작가이다. 그는 체 게바라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 자서전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특히 그가 1995년 출판한 「체 게바라」의 자서전은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오랜 시간 세계 각국을 휩쓸었으며, 장 코르미에에게 "체 게바라" 전문가라는 인정을 받도록 만들었다. 장 코르미에의 글이 선풍적인 인기를 끈 데에는 오랜... 장 코르미에는 "체 게바라" 를 통하여 세상에 알려진 작가이다. 그는 체 게바라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 자서전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특히 그가 1995년 출판한 「체 게바라」의 자서전은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오랜 시간 세계 각국을 휩쓸었으며, 장 코르미에에게 "체 게바라" 전문가라는 인정을 받도록 만들었다.

장 코르미에의 글이 선풍적인 인기를 끈 데에는 오랜 기간 동안의 조사를 통한 체 게바라에 대한 신선했던 자료와 새로운 시각일 것이다. 그 동안의 체 게바라가 혁명의 영웅이며 완벽한 인간이었다면, 장 코르미에가 추적하고 그려낸 체 게바라는 누군가의 아들이며, 누군가의 아버지이며, 누군가의 친구이며 혁명가였다.

장 코르미에는 1981년 남미를 여행하다가 체의 아버지, 에르네스토 린치를 만난 것을 계기로 체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체의 아버지 뿐만이 아니라 10년에 걸쳐 가족, 친구, 지인 등 체가 관계했던 많은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하여 그의 모습들을 복원해나갔다. 또한 체의 편지글이나 잡문들까지 모두 모은 그의 노력은 이전까지 표면적으로만 그려졌던 체의 모습을 보다 현실적인 영웅으로 우리에게 다가서게 했다.
저자 : 장 코르미에
장 코르미에는 일간 <파리지앵>의 전문기자로서 체 게바라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한 전문가로인정을 받아왔다. 1981년부터 그는 게바라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집대성한 이 책은 프랑스에서 출간되자마자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켰고, 세계 각국에서 번역 출간되어 큰반향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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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리뷰

00/5/1 이상구(flypaper@yes24.com)
"그런 게 어디 있어? 그저 부러움의 대상일 뿐이지." 나른하고도 평온한 오후, 루 리드가 부르는 「퍼펙트 데이」의 가사가 어울려야 할 한적한 한 때. 선문답에 파묻혀 시간은 흐른다. "존경하는 인물이 있어?", "그런 게 있다면 무척이나 행복할 것 같지 않아?" 사치스러운 대화들. 몇 번인가 체 게바라를 얘기한다. 그냥 체 게바라를. 우연의 음악인 것처럼, 그 때 맞춤하고 그의 평전이 출간된다.

표지가 시원한 책. 두꺼워서 한 손에 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익숙하지 않기에 더욱 더 욕심이 나는 문고판. 새 운동화를 신고 스타트 라인에 선 느낌이랄까? 이래저래 멋진 표지의 새 책을 만나면 긴장이 된다. 애들은 말이다.

일상을 지배하는 소소한 법칙. '기대는 가능한 적게 가질 것!'. 하지만 역시 잘 되지 않는다. 선험적인 한계에 묶이고 마는 우리네 삶. 표지가 갖는 흡인력에 비해 내용은 다소 메마른 감이 있다. 단숨에 읽었다고 말하긴 좀 어렵다. 기자 출신이어서 그런지 문체도 무척 건조하고,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데 반해 내적 연관성이 부족한 듯한 느낌이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캐릭터도 그다지 생동감이 느껴지는 편은 아니다. 소설이 아닌데, 라고 하면 더 이상 할말은 없다. 그러나 평전의 캐릭터들이 더 다이내믹해질 수도 있는, 아니 그렇게 생생하게 살아 움직일 수는 없을까? 요컨대 집중력을 돋굴 무언가는 좀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논평이 극도로 절제된 이 책의 미덕은, 독자들에게 체 게바라의 삶과 영혼의 행적을 상상하는 수고로움을 지워주는 데 있다. 내러티브의 역할을 자처하며 행간에 개입할 필요는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여하튼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 단순히 연대기를 좇아 쉬엄쉬엄 걷다 지치면 그만이다.

아르헨티나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어렸을 적부터 심한 천식으로 고생을 했다. 그래서 체 게바라의 식구들은 체의 천식이 악화되지 않을 만한 곳을 찾아 늘 이사를 다녀야 했다. 심한 천식 발작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 죽음은 그렇게 늘 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식이 없었다면, 어쩌면 다르게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언제든지 죽을 수도 있다는 것, 그 하루가 마지막 날인 것처럼 적극적으로 사는 한편 역시 적극적으로 체념을 배워야 하는 삶. 죽음은 항상 체의 자유로운 영혼과 교감하고 있었다.

죽은 모습이 끔찍하게도 예수를 닮았었다는 체 게바라는 평생 오히려 돈키호테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그는 의사 자격 시험을 앞두고 사촌형인 알베르토와 중남미 대륙을 여러 달 여행한다. 아마도 그 여행이 체에게 남미대륙의 혁명에 대한 예감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다시 돌아온 체는 이제 아르헨티나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혁명의 기운이 느껴지는 어느 곳이든 돈키호테가 되어 떠돌아다니게 된다. 동행할 산쵸는 없고, 로시난테의 역할은 천식약이 대신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먼길이지만 아무런 망설임 없이 힘든 노정을 자청한다.

새삼스럽지만 프랑스 68혁명은 67년 10월 9일 전세계에 긴급 타전된 한 줄의 뉴스가 기폭제가 된 것이다. "게바라 죽다". 68혁명의 전과정을 통틀어 모든 혁명의 전위들을 들뜨게 한 그 이름은 이웃 나라 체코에 '프라하의 봄'으로 파열된다. 소설가가 일단 자신의 작품을 손에서 놓아 보내면 더 이상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는 법. 말을 아껴야 하는 것은 그네들의 숙명이고, 독자들의 간절한 소망이다. 체 게바라는 죽는 순간 하나의 기념비적인 텍스트가 되어 죽음이라는 새 노새를 타고 전 세계를 항해하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도착한 68혁명이라는 시공간은 이제 체 게바라적인 체념의 아우라로 남아 있다.

권태는 땀을 요구했건만... 역사상 세계가 진정한 의미로 가장 세계적이었던 그 시기에 우리는 그 열기를 등지고 외로 서 있었다. 참 특이하다고 밖에 말하지 못할 연구대상이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축에 속한 내가 그렇다는 괜한 자괴감일 뿐이겠지만, 지금 현재 이곳에서 이렇게까지 체 게바라를 향유할 수 있다는 건 한 동시대성을 놓쳐버린 탓에 오히려 운 좋게도 그 부채의식에서 자유로워진 이유는 아닐지. 꿈과 희망을 놓쳐 버린 그네들에게 그 한 순간은 더 이상 과거의 소금기 어린 땀일 수 없다. 우리는 아이러니에 쫓기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권력을 잡은 혁명가가 몇 있다. 레닌이 그랬고 마오가 그랬고, 동부 유럽의 몇몇 사람들이 그랬다. 하지만 죽는 순간에도 혁명가였던 사람은 없었다. 체 게바라는 쿠바 국립은행의 행장 사무실을 택하는 대신 볼리비아 아마존 정글 속 게릴라로 되돌아갔다. '카리브 해의 위기가 야기한 슬프고도 빛나는 시간들'을 지속시키기 위해.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은 아무래도 맞는 말이다. 자신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오롯이 견뎌내야 다른 사람의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죽을 때도 함께 할 신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돈키호테적인 신념. 극단적으로, 처연할 정도로 단순한. 게바라의 게릴라 동료였던 벤 벨라는 이렇게 말한다.

"체는 혁명운동을 한 차원 높였습니다. 강하고 신선한 바람 같았지요. 그에게는 뭔가 다른 어떤 것, 완전한 단순함이 있었습니다. 그건 의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인간에게서 발산되는 것입니다."

밥그릇을 채워주진 않겠지만, 또 다른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신념은 필요하다. 팔랑 팔랑 가볍게, 날아갈 듯이 부유하며 살려고 해도 그걸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 부당한 것이라고는 생각해도, 그것이 불가능한 꿈을 내용으로 하고 있을수록 더욱 더 그렇다. 자의식은 강하지만 의지가 박약하다면 심플한 인생을 꿈꿀 수 없다. 자신의 불행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고, 남이 바꿔주기만을 바라는 사람들, 나의 비루한 예민함에 물릴 때에, 그런 때에 평전을 읽는다. 체 게바라를 읽기 시작할 때도 그런 때였다. 어떤 강력한 리얼리티 같은 것이 필요했다. 가능한 것은 불확실한 형태로 나타나며, 불가능한 것은 늘 확실한 모습을 띠고 나타나는 현실을 똑바로 보고, 거기에서 신념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을 보며 위안 받고 또한 고무 받아야만 했다.

지금 저자를 횡행하는 체 게바라 '현상'이, 가방 속에 담겨져 남아메리카 밀림 어딘가에 묻혀 있을 그의 시신을 꺼내어 척박한 상업주의의 칼날로 다시 그를 난자하는 것이라 해도 늘 있어왔던 일, 담담하게 앉아 있기로 한다. 굶어서 가벼워질 수 있다는데, 몇 끼 식사 정도는 건너뛸 수 있어야 한다. 그건 의지박약한, 살아 남은 자를 위한 슬픔의 몫일 뿐이니까.

그저 '오랫동안 전설에 가려져 있던 인간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가 선구자를 찾는 젊은이들에게 다소 의식적으로 불려나와 이제 우리 곁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생각하면 위악적인 제스쳐가 되는 것일까? 그보다 예전에 보았던 「하이프」라는 시애틀 그런지에 대한 다큐멘터리 이야기. 기타리스트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소파에 널부러져 하던 말. "펑크는 영원할 거예요. 애들(KIDS)이 있는 한은." 체 게바라 '대박'에 대해 한가하게 고개를 갸우뚱거려보다가 문득 생각난 얘기다.

"그저 일상의 균형을 단단히 하기 위해 자신을 보완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체는 절대로 자신을 보완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분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에 있는 부드러움과 강함은 잘 섞여서 너그러움이라는 하나의 돌이 되었다." 아찔한 숭배성 발언이지만, 이런 구절을 읽으면 이기주의의 환상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철든 생각도 하게 되고, 뭐 그렇다는 얘기다.

체 게바라의 신념과 체념을 가슴에 묻고 뚜벅뚜벅 걸어가야겠다는 의지가 솟았다면 낯뜨거운 고백이 될까? 하지만 성숙한 사람일수록 삶 속에서 몸으로 말을 한다. 어렵겠지만 현실에 지배당하지 않고자 한다면 그런 순수한 스텝을 몸

책 속으로

--- 본문 중에서
--- p539.
--- p. 507
--- p.534
머리말 중에서
--- p.645-646
--- p.664
--- p.655-656
--- p.390
--- 옮긴이의 말 중에서

출판사 리뷰

1928년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의 한 중류 가정에서 태어난 체 게바라(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는 20대 초반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의학을 공부한 엘리트였다. 하지만 두 번에 걸친 남미여행을 통해 가난한 민중들의 삶의 지켜본 게바라는 빈곤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혁명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이 세계의 모순을 먼저 치료하는 것이 더 본질적인 문제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1953년 과테말라로 간 그는 과테말라의 진보정당이 미국이 지원한 쿠데타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미국이 진보적 정부를 반대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멕시코로 간 게바라는 1956년 7월 카스트로 형제를 만나면서 구체적인 쿠바혁명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 해 11월 쿠바에 상륙,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을 중심으로 게릴라 활동을 벌이며 혁명군을 모은다. 1958년 산타클라라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승기를 잡은 카스트로와 게바라는 1959년 1월 결국 수도 아바나에 입성한다. 그 뒤 게바라는 쿠바 정부에서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 등을 역임했고, 공산권과 제3세계를 돌며 모든 종류의 제국주의, 식민지주의에 반대하는 외교활동을 벌인다. 이때부터 검은 베레모와 구겨진 군복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그러나 1965년 4월 쿠바에서의 2인자 자리를 버리고 당시 내전중이던 아프리카 콩고로 가 콩고혁명을 위해 노력했다. 1년 뒤 게바라는 볼리비아로 숨어들어갔다. 볼리비아는 남미 5개국과 접경을 이루는 요충지로서 이곳에서의 활동이 혁명의 불씨를 전남미로 확산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볼리비아 정부군을 지원하는 한편 CIA 요원을 파견, 게바라를 체포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고, 결국 게바라는 1967년 10월 8일 체포된 뒤 처형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아르헨티나 의사 출신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독재에 대항하기 위해 전세계 전장을 뛰어다닌 체 게바라는 1960년대 저항운동의 상징이었다. 검은 베레모에 아무렇게나 기른 긴 머리칼, 덥수룩한 턱수염, 그리고 열정적인 눈빛, 굳게 다문 그의 입술은 진보적인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여 있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성공시킨 뒤 쿠바의 2인자 자리를 박차고 아프리카 콩고와 남미 볼리비아 등지에서 게릴라 활동을 계속하다 전장에서 숨진 게바라. 이 열정적 투사에 대해 당시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우리 세기에서 가장 성숙한 인간'이라고 평했다. 쿠바를 '해방'시킨 뒤 국립은행 총재 등의 고위직에 있으면서도 사탕수수밭에서 노동을 하던 게바라의 모습은 가난한 민중들에게 성자로 추앙받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체 게바라 열기는 그의 활동영역이 아니었던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도 식지 않고 있다. '단지 그의 정치적인 입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시의 '시대정신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 인간'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라는 수많은 회고담 속에서 잘 드러나듯 좀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세계인들의 가슴속에 체 게바라는 언제나 살아 있다. 쿠바의 한 지도급 인사는 '세월이 흐를수록 체와 같은 사람을 찾아보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60년대라는 시대상과 그 시대를 불꽃같이 살다간 게바라와 같은 인물을 다시 기대할 수 없는 이상 게바라는 앞으로도 '이상을 꿈꾸는 인간의 대표'로 남을 것이다.

'죽은 게바라가 산 독재자를 물리친다'라는 말이 있다.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처형된 지 30여 년이 된 현재 그가 추진했던 혁명은 아직 미완일 뿐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게바라의 죽음이 그 자체로서 남미 등 많은 지역의 반독재투쟁의 지표로 오늘날까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게바라의 후예들'은 그가 직접 활동했던 아프리카 콩고와 남미 볼리비아는 물론 멕시코, 미얀마 등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활동하고 있다.

장 코르미에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전기작가이다. 그 동안 그는 체 게바라에 대한 많은 저술을 써왔고, 체 게바라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한 전문가로 인정을 받아왔다. 게바라에 관한 자료들을 집대성한 이 책은 프랑스에서 출간되자마자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켰고, 세계 각국에서 번역 출간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책에서 그는 체 게바라에 대해 남겨진 모든 자료들을 일갈해서 엮어놓고 있다. 체의 아버지를 비롯해 체가 살아 생전 관계했던 모든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생생한 그의 모습을 전하고 있으며, 그가 남겨놓은 편지글이나 잡문들 거의 대부분이 이 책에 실려 있다.

그 동안 체 게바라에 대한 책은 수십 종이 출간되었으나, 67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더 이상의 체에 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을 만큼 체의 생애와 사상을 집대성해 놓은 이 책이야말로 '체 게바라' 전기의 최종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추천평

제1장

천식을 앓는 아이

1928년 6월 14일, 이폴리토 이리고옌 대통령이 통치하던 시절에 아르헨티나에서는 후일 '체'라고 불리게 될 에르네스토 게바라가 태어났다. 애초부터 정착된 삶과는 거리가 먼 운명을 타고난 것일까. 만삭인 셀리아 데 라 세르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아이를 낳기 위해 남편과 서둘러 파라나 강을 내려가는 배편에 올라탔다. 그런데 로사리오데라페쯤에서 예정보다 빨리 첫 진통이 찾아왔다. 기겁을 한 세르나 부부는 허둥지둥 배에서 내려 가까운 곳에 사는 친척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하여 에르네스토는 아버지와 같은 이름으로 이 세상과 첫 대면을 하게 되었다.

에르네스토의 집안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내력을 갖고 있었다. 골드 러시 무렵 금광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떠났던 할아버지는 아일랜드와 바스크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이었다. 1871년, 그의 할머니 알베르티나 우갈데는 황열병에 걸려 스무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이렇듯 바스크―아일랜드라는 유난히 고집 세고 개성 강한 두 핏줄이 그 유서 깊은 집안 출신의 아이에게 흐르고 있었다.

게바라 가족은 로사리오에 터전을 잡지 않았다. 아이가 어느정도 여행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자 그들은 다시 대서양으로 향하는 강을 따라 여행을 시작했다. 게바라 부부는 학생 시절의 추억이 숨쉬고 있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잠시 들렀다가 카라과타이 강 어귀에 있는 한 항구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어린 에르네스토가 말을 배운 곳은 여기였다. 토목기사 자격증을 갖고 있던 아버지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는 태고적의 신비를 간직한 원시림 지역으로 파라과이와 인접한 알토파라냐 개발현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 마테(파라과이의 차 : 역자)를 심기도 하고 간단한 항해를 위해 조선소 건설에도 참여했다. 에르네스토는 드넓은 정원 한 귀퉁이 아버지가 손수 지은 집에 드리워진 커다란 소나무 그늘 아래서 첫 걸음마를 뗐다. 1929년 12월 31일, 어머니의 이름을 이어받게 되는 여동생 셀리아가 태어나면서 에르네스토 가족은 네 명으로 늘어났다.

1930년 5월 어느 날 오전, '테테'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에르네스토의 두 번째 생일을 얼마 남지 않았던 그날, 셀리아는 아들을 데리고 근처 강으로 수영을 하러 갔다. 그런데 물에서 나온 아이가 심하게 몸을 떨었다. 남아메리카 지역의 심한 기온차가 아이에게는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그날 밤 내내 아이는 기침을 멈추지 않았고 의사는 갓난아기 때 로사리오에서 앓았던 폐혈종과 관련시키며 폐렴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아이의 천식 때문에 게바라 가족은 좀더 나은 기후를 찾아 짐을 꾸릴 수밖에 없었다. 알토파라냐의 습한 기후는 아이의 천식을 더욱 악화시켰고 게바라 부부는 결국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그들은 부스타만테가에 있는 아파트 6층을 세냈다. 그러나 여기서도 아이의 건강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또다시 짐을 꾸린 가족은 이번에는 아주 건조한 기후를 찾아 안데스 산맥의 전방지역을 찾았다. 코르도바에 도착하자 비로소 아이가 제대로 숨을 쉬는 것 같아서 게바라 가족은 코르도바 인근의 아르게요에 짐을 풀었다. 그러나 얼마안 가 그 온화한 공기도 천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바라 가족이 짐 꾸리기와 짐 풀기를 거듭하고 있던 1930년 9월 26일 아르헨티나에서는 우리부루(Uriburu)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라그루타 호텔에서 떠나온 게바라 가족이 치카스 산악지방의 알타가르시아에 도착하자 어린 천식환자는 약간이나마 기력을 찾는 것 같았다. 그러자 그의 부모들은 여기에 자리를 잡아야겠다고 결정하고 산자락에 세워진 카를로스펠레그리니라는 마을에 집 한 채를 얻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세웠던 유서 깊은 도시 알타가르시아에는 인디오 밀집구역인 레둑시오네스(reducciones)가 많았다. 어느 날, 에르네스토는 길거리에서 사귄 한 친구의 집에 놀러갔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친구는 부모와 다섯 형제자매들과 함께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한 칸짜리 오두막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겨울에는 신문지나 넝마조각을 덮고 잔다고 했다. 어린 에르네스토는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따지듯이 그 사실을 말했다.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오간 최초의 '정치적' 대화였다.

아버지 에르네스토는 아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그렇단다. 가난은 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에 대항하여 싸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권위적인 정권은 인디오들이 스스로 개혁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가능성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설령 그들이 파업을 일으킨다 해도 즉각 혹독한 탄압과 투옥으로 이어졌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호화로운 시에라스 호텔의 골프장을 지저분하게 만들어서 몇 푼이나마 더 받아내는 것이었다. 그건 큰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게라도 행동에 옮기는 이들에게는 대단한 일이었다.

에르네스토의 생일케이크에 여덟 개의 초가 꽂히던 1936년, 그 해 들어 사람들은 부쩍 스페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했다. 또래들과 다름없이 개구쟁이 소년이었던 에르네스토는 다른 아이들이 도둑과 경찰로 편을 갈라놀 때 공화파와 프랑코파로 편을 갈라 전쟁놀이를 했다. 그때 마누엘­베를라노 학교에 입학을 앞두고 있던 에르네스토는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들을 암송하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1937년, 에르네스토의 아버지는 스페인 공화군을 지지하는 후원회를 조직했다. 소년 에르네스토 또한 자기네 집을 '민중의 집'으로 바꿔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집은 동네에서 '비베 코모 키에라스(vive como quieras: 원하는 대로 지내는 곳)'로 불리게 되었는데, 소년 에르네스토가 먹여주고 재워주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데려오는 굶주린 친구들이나 광부의 아이들, 호텔 노동자들의 아이들로 들끓었다. 다행히도 집이 꽤나 넓고 집세 또한 비싸지 않았던지라 동네의 어느 집보다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 되었다. 무엇에 씌었는지는 모르지만 게바라 가족은 그런 생활에서 특별한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집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었다.

이렇듯 '어린 체'는 일찌감치 인디오 친구들과 나누며 사는 법을 배우며 자라고 있었다. 두 번에 걸쳐 찾아왔던 심한 천식 발작 때문에 할 수 없이 학교를 쉬어야 했던 기간 동안 그는 프랑스 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어머니가 빌려주신 책을 비롯하여 아버지의 서재에서 가져온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어느새 그는 소포클레스부터 로빈슨 크루소, 프로이트, 그리고 삼총사까지 닥치는 대로 섭렵한 게걸스러운 독서광이 되었다.

1939년, 바다 저편에서 끔찍한 전운이 감돌고 있던 그 해, 에르네스토 자신도 처음으로 '부당함'이라는 쓰디쓴 경험을 맛보았다. 그는 동생 로베르토―게바라 가족은 여섯 식구로 불어나 있었다. 에르네스토, 셀리아에 이어 1932년 5월 18일에 로베르토가 태어났고 1934년 1월 28일에 안나 마리아가 태어났기 때문이다―와 함께 몇 푼의 용돈이라도 벌어보겠다며 풀란이라는 사람이 갖고 있는 포도농장에서 수확하는 일을 하게 해달라고 아버지께 부탁했다. 2월은 여름방학 기간이었으므로 어머니는 진작에 허락했고 아버지 또한 나름의 생각이 있어 이 일을 허락했다. '나는 자식들을 가르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에게 한 사람으로서 제 몫을 할 기회를 주는 것이라 생각했다'라고 후일 그는 『나의 아들, 체(Mi hijo, Che)』라는 책에서 쓴적이 있다. 그러나 두 형제는 에르네스토의 천식이 심해지는 바람에 나흘 만에 집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정말 치사한 사람이에요.'

에르네스토는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천식이 심해져서 아무래도 일을 계속하기가 힘들 것 같아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얘길 했
제1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프롤로그

보름이 가까워지던 어느 겨울 밤, 파리에 머물고 있던 나는 일 년 내내 문 닫는 법이 없던 앙시엔 코메디가에 있는 한 빵가게로 빵을 사러 가고 있었다. 무엇에 홀린 듯 '갈증의 계곡'에 인접한, 생 제르맹의 밤거리 사람들이 미시시피 강이라고 이름 붙인 개천 건너편으로 정처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재즈가락만이 사회의 낙오자들을 깨우는 버드랜드 뒷골목. 이 시간은 그들도 빵을 찾아나설 때였다.

그때 카네트가와 프린세스가가 만나는 모퉁이, 생 제르맹과 성 쉴피스 성당 사이에 있는 한 건물 벽에서 열렬한 지지자들이 '전사 그리스도'라고 이름 붙여놓은 십자가를 안고 있는 그림을 보았다. 그림 속의 인물은 바로 체 게바라였다.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그곳에 웅크리고 있던 한 남자가 어둠속에서 은둔하고 있는 설교자처럼 말했다.

'그는 다시 돌아올 겁니다.'

감격에 겨운 눈빛을 하고 있다.

'제아무리 어두컴컴한 밤일지라도 그는 저 하늘의 별로 늘 떠 있어요. 진정한 목자, '체'라는 이름의 별로.'

잠자리로 돌아온 나는 빵을 몇 조각 먹다가 그 꿈을 계속 꾸기 위해 잠이 들었다.

그 아득한 꿈 같은 경험이 있고나서 몇 년이 지난 1981년 9월, 나는 아바나로 갔다. 함께 갔던 유럽 기자 친구들과 떨어져 나는 발라데로로 향했다. 뒤퐁 골프장이 펼쳐져 있는 해안가에는 열대의 태양에 까맣게 그을린 소련 우주비행사들이 스윙연습을 하고 있었다. 체 게바라의 사진을 많이 찍었던 알베르토 코르다와 동행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었다. 그는 크리스찬 디오르의 모델로서 1960년대 말, 파리에서 벌어졌던 학생운동 때 나와 함께 동참했던 위대한 '여전사' 노르카의 전남편이기도 했다. 전광석화처럼 예리한 시선을 가졌던 코르다는 결코 금전과 타협하지 않았다. 어떠한 상업적 유혹에도 굴복한 적이 없었던 이 통 큰 사내는 자기만이 인정하는 대장을 기록으로 남겨두기 위해 늘 준비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심한 갈증과 싸우고 있을 때도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쿠바의 대장처럼 술을 마시지 않고도 포도주에 기분좋게 취한 것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그는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나는 그가 1959년부터 1968년까지 피델 카스트로의 공식 사진사로 세계 각지를 동행하며 겪었던 각종 고생담을 들었다. 그는 헤밍웨이가 한창 바다낚시로 이름을 날릴 때 피델과 체가 함께 고기를 낚던 당시의 정황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동안 같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들 사이에는 모종의 암묵적인 공모감이 싹트고 있었다.

만조가 되어 한꺼번에 들어온 배들로 어수선한 낡은 선창에서 코르다는 나에게 에르네스토 게바라의 아버지를 만나보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였다. 그는 말레콘 해변을 따라가다가 혁명의 주역들과 그 인척들이 모여 살고 있다는 미라마르가로 들어섰다. 우리는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에서 모델로 삼았다던 그레고리오 푸엔테스 노인과 함께 그 집을 찾았다. 아들이 친근하게 '비에호'(노인네 : 역자)라고 불렀던 모습대로 아버지 에르네스토는 테라스에 있는 흔들의자에 평온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약간의 럼과, 탄산수와 약초가 담긴 컵을 쉼 없이 흔들면서 그는 마치 아들이 여전히 살아 있는 듯 생생하고 현란한 말투로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한 집안의 가족사를 손에 잡힐 듯이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거의 네 시간이 넘는 긴 이야기 속에서 게바라 노인은 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혁명의 불길을 다시 지피기 위해 또 다른 체들이 머지않아 나타나리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인식시키려고 하는 듯했다.

사람을 끄는 이 낭만적 기질의 노인과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헤어졌는데, 1987년 9월, 유명한 코미디언 피에르 리샤르와 체의 흔적을 찾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그를 찾았을 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 두 사람의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우리의 작품 〈위대한 저편(Grand Ailleurs)〉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데 나는 그 작은 프로그램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체의 딸인 일다와 체와 형제 같은 우정을 나눴던 알베르토 그라나도를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사랑과 우정으로 빚은 소중한 생명을 잉태시키듯 우리의 이 책은 '엘 체'라고 불렸던, 따뜻한 마음이 깃든 강철 같은 영혼을 가진 한 거인을 기리는 우리 세 사람의 마음이 탄생시킨 결과물이다.

--- 아바나와 파리를 오가며
서문

1년여 전부터 뒤쫓던 볼리비아군에게 생포된 체 게바라는 1967년 10월 9일, 볼리비아의 차코라는 마을에 있는 라이게라(La Higuera)라는 조그만 학교에서 서른아홉의 나이로 사살되었다.

덥수룩한 수염에 비쩍 마른 그의 모습은 그 옛날 십자가에서 생을 마감한 또 다른 '체(ch)' 즉 예수 그리스도와 끔찍하리만치 닮은 모습이었다. 그 둘 다 평등을 위해 투쟁한 박애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체 게바라가 선택했던 길은 팔레스티나의 유태인 예수가 걸었던 평화로운 노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바티스타 정권을 몰아낸 뒤 1956년 말, 멕시코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저는 예수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 저는 힘이 닿는 한 모든 무기를 동원하여 싸울 겁니다. 저들이 나를 십자가에 매달아두게도 하지 않을 것이며 어머니가 바라시는 방식대로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때 체의 나이는 스물여덟이었다. 신을 믿지 않았던 그는 오직 인간만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였다. 그것이 비록 이루어질 수 없는 유토피아를 쫓는 것이라 해도 그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노력하는 강인한 정신과 용기를 갖고 있었다.

체가 죽은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 동시대인들의 마음속에 신화로 떠돌고 있던 그는 아직도 여전히 신선하게 다가오고 있다. 가치가 전복되고 기계가 중심이 되어버린 파편화된 세계속에 사는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그는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체는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뜨거운 ……. 그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 뜨거운 심장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의 두 강대국, 미국과 소련의 비밀경찰들은 이 영원한 돈키호테의 분신이자 우리 시대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피를 안데스의 산맥에 뿌리도록 만들었다.

사실 최근 수년 간 체 게바라를 다룬 이 책에 큰 관심을 보인 편집자는 거의 없었다.

'세상에, 제정신인가? 공산주의가 몰락한 이 마당에 누가 체 게바라에게 관심을 둔단 말인가……!'

내가 이 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다. 그런데 로쉐 출판사의 편집진은 체 게바라라는 나무를 새롭게 재인식시키려는 이 시도에 용감하게 도전하였다. 그것은 그의 생애의 본질을 다루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하기 어려운 폭넓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 담긴 이 책에서 내가 특히 강조하려고 했던 것은 그의 온화한 인간성이었다. 사실 이 책을 탈고하기까지는 거의 8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지난 시절의 좌파들은―'체 게바라'에 대한 생각을 보존하고 싶은 아르헨티나의 전사들과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제외하곤―그 주제가 자기들로부터 이탈되는 걸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딱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Emesto Guevara de La Serna)' 대장이 여전히 그들의 열정에 불을 당기고 있다는 걸 역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기독교도들이 '전사 그리스도'로까지 부르는 그의 재조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지금 프랑스를 비롯한 세계 각지의 예술가와 화가, 조각가, 사진작가들은 루브르 광장에서 출발하는 자유의 행진을 계획중이다. 그것은 전세계 사람들이 함께 체가 던졌던 질문을 생각해 보고 답해 보려는 시도이다. 그의 질문은 분화가 가속화되는 지금 이 사회에서 그 무엇보다도 절실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 장 코르미에 에이에라기벨
그가 2학년이 되던 1948년, 그의 가족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다시 돌아와 아라오즈가 2180번지에 자리를 잡았다. 총명한 학생이었던 에르네스토는 당시 알레르기학의 세계적 권위자였던 살바도를 피사니 박사에게 인정받아 그의 연구실에서 연구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기회가 주어지느라 그랬던지 곧바로 실무를 경험할 일이 생겼다. 이미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알베르토가 자신이 일하고 있던 코르도바 북쪽에 있는 산프란시스 코데차나르 나병원에서 방학 동안 일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해 왔던 것이다. 세상 두려울 것 없이 혈기왕성했던 스무살의 청년 에르네스토는 수도로부터 무려 8백5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던 그곳으로 가겠다며 당장 자신의 전동자전거에 올라탔다. 그가 꾸린 짐은 갈아입을 옷가지와 간디의 숭배자였던 네루의 『인도의 발견』이라는 책 한 권이 전부였다.

목적지에 가기까지 그는 여태껏 겪지 못했던 많은 만남을 경험하였다. 어느 날인가 그는 수확하는 농부를 거들어주고 난뒤 녹초가 되어, 들판에서 자고 있던 떠돌이 행색의 어떤 사내곁에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에르네스토가 잠시 자전거 타이어를 갈아 끼우고 있을 때 그 사내도 잠에서 깨어나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얘기 끝에 사내는 자기가 이발사였으며 당장에 시범을 보여주겠노라고 했다. 역시 행색이 말이 아니었던 에르네스토로서도 특별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사내는 호주머니에서 녹슨 가위를 꺼내더니 에르네스토의 머리를 깎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사내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한귀퉁이가 깨져나간 거울을 들이밀며 보라고 했을 때 에르네스토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결국 그의 가운데 가마는 오간 데 없어지고 듬성듬성 머리가 잘려나가도록 놔두는 수밖에 없었다.

알베르토는 에르네스토가 나병원에 도착한 당시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고 했다.

'그가 '황소뿔'로 만든 핸들을 잡은 채 병원 문앞에 멈춰섰을 때 나는 도대체 누군가 싶었어요. 챙 모자 아래로 겨우 보일까 말까 한 얼굴에 그나마 커다란 검은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었으니 말이지요. 그 정체불명의 사내가 얼굴을 드러내자 비로소 나는 놀라 소리 질렀죠. 세상에, 펠라오!'

펠라오, 즉 펠레는 당시 에르네스토의 또 다른 별명이었다. 알베르토는 키가 작았던 까닭에 '페티소'로 불렸다.

에르네스토는 산프란시스코데차나르에서 알베르토가가 일하는 모습을 보며 실제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간혹 느껴지는 병원 종사자들과 환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알베르토는 이런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때 에르네스토는 등 부위를 나병균에 침식당했던 어떤 예쁜 여자 환자에게 반했었나 봐요. 종종 그녀 얘기를 꺼냈던걸 보면 말이죠. 그런데 그녀 역시 에르네스토에게 반한 모양이어서 병원 근무가 끝난 뒤에 내가 에르네스토를 위해 베푼 파티에 참석시켜 달라고 내게 간청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나는 에르네스토에게 알리지 않고 딱 잘라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한 술 더 떠 에르네스토의 눈앞에서 그녀가 진짜 환자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그 예쁜 인디오 소녀에게 뜨거운 물 테스트를 실시했어요. 나병환자는 감염 부위에 아무런 감각을 느낄 수 없다고 알려져 있었으니까요. 실제로 그녀는 아무런 감각을 느끼지 못했으니 진짜 환자라는 사실이 입증된 셈이었죠. 하지만 에르네스토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나에게 달려들 듯 따지더군요. 아직도 그가 나에게 한 얘기가 귀에 선연합니다.

'형은 변했어, 그렇게 잔인해질 수가 있다니…….'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어요. 비록 내가 한 행동이 정당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떠나서 내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죠.'

정신없이 보낸 방학이 끝날 즈음 에르네스토는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왔다. 그 여름의 긴 여행은 에르네스토의 가슴속에 이른바 '아르헨티나 기층민중들'의 일상적 삶의 모습들과 진을 들이키고 밤새도록 모닥불 옆에서 치나들과 춤을 추는 가우초들의 모습을 선명히 각인시켰다.

에르네스토는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번잡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당시의 아르헨티나는 대량의 밀과 옥수수를 미국과 유럽으로 수출하면서 번영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후안과 에바 페론 부부 역시 그들의 인생에서 절정기를 맞고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라틴 아메리카의 어느 도시보다도 유럽적인 냄새를 진하게 풍기는 도시였다. 카바레의 불빛은 꺼질 줄 몰랐고 카를로스 가르델이 부른 탱고와 쿠바에서 건너온 맘보 같은 카리브 해의 음악들이 늘상 울려퍼지고 있었다. 도시의 거주자들인 '포르테뇨'들―어쨌든 비교적 여유있는 계층인―에게 이 시기는 상상이 현실로 되어가는 유토피아나 다름없었다.

에르네스토라고 이런 북새통과 완전히 동떨어진 생활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부르주아지의 아들이라는 안락한 생활에 빠져들지만은 않았다. 그는 여러 계층의 친구들을 사귀고 있었다. 그는 도시 변두리 벌판에 다닥다닥 지어진 바라크에서 살고 있는 두 명의 떠돌이와도 만나고 있었다. 종종 그는 대학의 친구들과 바에서 토론을 하다가도 홀로 빠져나와 자전거를 타고 자기가 '유목민'이라 불렀던 그들을 찾아가 함께 소시지 등을 구워먹으며 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는 부모가 주머니에 찔러주는 용돈도 받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스스로 벌기를 원했으므로 도서관 사서부터 펌프 담당 선원, 혹은 구두를 팔거나 의무요원으로 해상 상인들의 배에 승선하여 남쪽으로는 파타고니아와 화전지역까지, 북쪽으로는 안틸레스 해의 쿠라사오와 트리니다드까지도 가보았다. 그는 여전히 반은 호기심으로, 반은 자신에 대한 시험으로 각종 스포츠에 매달렸다. 펜싱과 권투, 그리고 바스크 지방의 민속경기인 펠로타까지……. 이런 다양한 경험이 바탕이 되어 그는 후일 쿠바의 시에라마에스트라 한복판에 있는 험한 강에서 접영 솜씨를 펼쳐 보임으로써 게릴라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의 왕성한 독서열은 식을 줄 몰랐다. 천식으로 쉽사리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면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으며 밤을 하얗게 지새우곤 했다. 그 습관은 시에라마 에스트라에서 게릴라 생활을 할 때에도 계속되어 다른 게릴라들이 단잠에 곯아떨어진 한밤중에 그는 책을 읽느라 밤을 지새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천식은 체 게바라의 운명과 떼어놓을 수 없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지나치다 싶을 만큼의 과도한 활동성과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 세 배로 농축하여 살았던 날들, 그리고 그가 럭비 경기장에서 몸을 구를 때조차도 그를 떠나지 않았던 고통들을 모조리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한편으로는 질병이 이유가 됐을 수도―매 순간이 마지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누구보다도 꽉 찬 시간을 살았다.

1951년도 저물어갈 무렵, 그는 기말시험에 통과했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피사니 교수조차도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으로 그를 꼽을 정도였다. 그러나 당장에는 전혀 다른 계획이 에르네스토의 머리 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에르네스토와 알베르토는 거대한 여행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산프란시스코데차나르까지의 긴 여행 이후 두 사람은 자주 그 계획을 상의하면서도 한편으론 많이 망설였다. 알베르토는 당시를 이렇게 얘기한다.

'비록 우리는 아르헨티나인이었지만 우리 조상들의 문명의 터전이랄 수 있는 유럽을 먼저 떠올렸습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 혁명의 발상지인 프랑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선 우리의 모국이랄 수 있는 스페인도 가보고 싶었죠. 그리고 파라오와 피라미드의 나라인 이집트도요. 아마 몇 주일을 꼬박 고민했을 겁니다. 하지만 에르네스토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대륙이 가장 큰 의미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인으로서 우리의 뿌리를 찾아 떠나자,
--- 실천문학사 『체 게바라 평전』35-61쪽 내용을 옮겨 실었습니다
1943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게바라 가족은 코르도바로 이사하기 위해 다시 짐을 꾸렸다. 아버지가 코르도바에 있는 건축사무소에 자리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 해에 에르네스토의 바로 아래 누이인 셀리아는 여자중학교에 입학했고 에르네스토는 서민층 아이들이 주로 다니던 데안 푸네스 국립중학으로 옮겼다.

칠레가 288번지에 있던 그 집에서 에르네스토의 막내동생 후안 마르딘이 5월 18일에 태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집 역시 전과 다름없이 '민중의 집'이 되어갔다. 아버지가 '미세리아(miseria, 가난 또는 빈곤이라는 뜻:역자)'라고 불렀던 이웃 동네 아이들이나, 지진으로 동네 전체가 쑥밭이 되어버려 오갈 데 없게 된 아이들이 묵을 곳을 찾아 그의 집에 몰려들었다. 이 시기에 에르네스토는 이모부이면서 좌파적 사상이 담긴 시를 많이 쓴 코르도바 이투르부르의 시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시를 직접 에르네스토에게 낭송해 주는가 하면 아르헨티나의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애기해 주곤 했다.

비록 천식이 종종 발병하기는 했지만 에르네스토 소년은 무럭무럭 자라갔다. 그는 동생 로베르토와 함께 테니스와 골프를 쳤으며 체스에도 푹 빠져들었다. 그가 그라나도 집안의 삼형제들과 친해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들은 토마스, 그레고리오, 그리고 알베르토였는데 누구보다도 당시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던 사람은 학생 시위를 이끈 혐의로 감옥에도 갔다온 전력이 있었던 여섯 살 위의 알베르토였다. 그라나도 형제들은 당시 영국에서 건너온 지 얼마 안 된 럭비라는 낯선 운동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을 따라 리오프리메로에서 열린 럭비시합에 다녀온 에르네스토는 알베르토에게 자기도 럭비를 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알베르토는 양볼이 핼쑥하고 호리호리한 이 소년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럭비를 하고 싶다고? 미안한 얘기지만 넌 첫 번째 태클이 들어오는 순간 두 동강 나고 말 걸…….'

그러나 에르네스토의 불 같은 시선을 되받은 알베르토는 일단 테스트를 해보는 것만은 승낙했다. 그는 에르네스토에게 헬멧을 빌려준 뒤 의자 두 개를 놓고 양쪽 등받이 위에 막대기를 걸쳐놓은 뒤 그 위를 그르듯 뛰어 넘어보라 했다.

'두 번, 다섯 번, 열 번, 그는 가볍게 장대를 뛰어 넘었어요. 어찌나 쉬지 않고 열심히 해대는지 내가 나서서 말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죠.'

그날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 알베르토 그라나도는 아바나의 미라마르 구에 있는 자신의 집 테라스에서 럼주가 든 잔을 홀짝거리며 마치 바로 엊그제 일어났던 일인 양 그 일을 회상하고 있었다. 알베르토는 나중에 유명한 생물학자가 되었으며 젊은 시절의 친구인 에르네스토를 따라 쿠바에 정착했다. 그 또한 나름의 방식대로 기아와 빈곤과 싸워온 사람이었다. 그는 우유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젖소를 개량하는 데 성공했다. 알베르토는 '체'가 되기 이전의 에르네스토 게바라의 젊은 날의 모습을 어느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보아온 사람이었다.

에르네스토는 마침내 럭비화를 신을 수 있었다. 그는 럭비선수로서 자신의 예명을 푸리분도 데 라 세르나(Furibundo de la Serna)의 줄임말인 푸세르(Fuser)라 지었다. 비록 그는 돌진하는 형은 아니었지만 공격적인 태클에는 명수여서 얼마 안 가 믿음직한 '옆날개'로서의 제 몫을 다 하게 되었다. 에르네스토보다는 더 동분서주했던 알베르토는 '미알(Mi Alberto:나의 알베르토의 줄임말)'이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불렸다. 에르네스토는 여전히 갑작스런 천식 때문에 운동장에 나설 수 없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가 호흡곤란을 겪을 때마다 친구나 식구들 중 누군가는 호흡보조기를 들고 뛰어올 채비를 해야 했다. 어느 날인가는 에르네스토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보다 못한 부모들은 그가 선수로 뛰고 있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SIC(산 이시도르 클럽)―그의 아버지가 창립 멤버 중의 하나였던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럭비 클럽―를 탈퇴하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에르네스토는 부모 몰래 2부 리그의 아탈라예 클럽에 등록하여 여전히 운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겸손과 복종, 무엇보다 강한 용기를 요구하는 스포츠인 럭비는 뒤마의 『삼총사』에서 나오는 '모두를 위한 하나, 하나를 위한 모두'라는 구절처럼 명예를 존중하는 에르네스토의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기질과도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알베르토의 회상에 따르면 에르네스토는 당시 럭비 이외에 다른 운동에도 관심을 보였던 듯하다.

'그는 이십여 미터 아래로 무시무시한 급류가 흐르는 나무다리 난간 위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며 균형을 잡곤 했었죠.'

이 얘기를 하며 알베르토는 당시 신문에 실린 기사들과 여남은 장 정도 되는 사진들을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그 중에는 팀 동료들과 함께 찍은 럭비 헬멧을 쓴 소년의 모습도 있었고, 40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아찔한 협곡 사이를 이어주고 있는 좁다란 파이프 위를 걸어가는 모습도 있었다. 그가 럭비 선수로서 얼마나 훌륭한 자질을 갖고 있었는지는 사진만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언젠가 그는 아버지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럭비는 그에게 있어 가장 힘든 순간이었던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의 그 혹독한 싸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그는 으레 후반전 중간쯤이면 운동장을 나왔다. 그럴 때마다 그는 팀 동료들에게 멘도사 포도주나 아니면 이상하게도 정신력을 북돋아 주었던 마테차가 담긴 병을 남겨주곤 했다. 그는 평생을 통해 알코올을 가까이 한 적이 없었다.

1946년에 후안 페론이 권좌에 올랐다. 그때 열여덟 살이었던 에르네스토는 데안 푸네스 대학에 합격해 놓고 있었다. 그는 토목분야를 전공할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약간의 돈을 벌기 위해 이런저런 일거리를 찾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와 친구 토마스에게 교량과 도로를 건설하는 회사인 비알리다드 코르 도베사의 지방 사무소에 '재료 분석' 업무 두 자리를 알선해 주었다. 사실 에르네스토나 토마스 모두 횡령과 독직이 난무하는 그런 세계라면 이미 전에도 겪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듬해인 1947년, 새해 벽두에 에르네스토는 식구들에게 깜짝 놀랄 결심을 알렸다. 천식 때문에 고통받았던 자신의 처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후두암으로 고통받다 돌아가신 할머니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의사가 된다면 주변 사람에게는 그보다 다행스러운 일이 없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올라온 새내기 의대생은 닥치는 대로 자신의 에네르기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럭비, 축구, 수영은 그가 특히 열을 올렸던 운동이었고 제1회 유니버시아드 대회가 열릴 무렵에는 체스 선수권 대회와 장대높이뛰기 선수권 대회에도 참여했다. 그러면서도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아 그 해 기말시험 세 과목을 전부 통과했다. 게다가 당시 유고 콘돌레오등을 비롯하여 뜻이 맞는 친구 몇 명과 함께 《태클》이라는 제목으로 럭비 전문잡지를 펴내기도 했다.

'어느 날 저녁이었어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아직도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콘돌레오는 당시에 있었던 일화를 소개해 주었다.

'우리가 다음 호 작업을 한창 진행하고 있었는데 글쎄 경찰들이 우리 아파트에 밀어닥친 거예요. 우리가 공산당 팜플렛을 만드는 줄 알았던 거죠!'

에르네스토는 '찬조(chancho : 아기 돼지)' 또는 '창조(chanzo)'라는 필명을 장난스레 사용했다. 엄숙함을 거부한 이런 익살은 그의 삶에서 매순간 드러나곤 하던 재치를 보여주는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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