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석
국내작가
1943 ~
1943년 8월 22일 경상북도 영천 호당리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1966년 제대를 하고 사회에 나온 그의 목표는 은행에 입사하는 것. 그러나 중학교 중퇴인 학력과 카투사 경리경력이 전부인 그에게 은행의 문은 높기만 했다. 당시 은행은 대학 졸업장을 가진 이들과 명문 상고 출신이나 들어갈 수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그는 우여곡절 끝에 학력의 벽을 뚫고 1969년 한국외환은행에 임시직으로 입사하였다.
처음에는 대졸 직원을 보조하는 역할이 전부였다. 주로 현금을 만지는 업무인 탓에 간혹 5달러나 10달러짜리 위폐를 찾아내기도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훗날 위폐감별의 1인자가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게 한 장 두 장, 위폐를 감별해낸 것을 인연으로 자연스럽게 위폐감식의 길에 들어선 그는 위폐의 사진을 마이크로렌즈로 찍어 환등기에 일일이 비춰보며 화폐 연구에 몰두했다.
그의 존재감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1년에 발생한 '미화 200만 불 사건'에 의해서이다. 그는 미국 FRB에서 수입한 200만 불이 모조리 위폐임을 밝혀내면서 매스컴에 크게 주목받았다. 그 사건으로 그는 우리나라의 외화감식 수준을 해외에 알리는 것은 물론 청백 봉사상을 수상하며 조금씩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1999년 제2건국 범국민 추진위원회가 추진한 금융 분야의 신지식인으로 선정되어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의 표창을 받았고, 미국 FBI 및 USSS(미 국토방위청 산하 비밀수사국) 위조지폐 정보교환 요원으로 위촉되어 세계를 넘나들며 활동하였다.
위폐감식 분야의 1인자로 우뚝 선 그가 외화 100달러를 감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25초, 물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서박사', '서도사'에서 '위조지폐 감별의 달인'이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40년 외길 인생을 걸어온 그의 성공 비결은 타고난 감각보다 부단한 노력이었다. 그는 정년을 넘긴 지금도 일인자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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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서태석의 진짜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