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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개의 달 시화집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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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개의 달 시화집 봄

[ 양장 ]
윤동주, 백석, 정지용, 김영랑, 박인환 저 외 34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저녁달고양이 | 2021년 03월 20일 리뷰 총점9.1 정보 더 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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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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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1년 03월 20일
판형 양장 도서 제본방식 안내
쪽수, 무게, 크기 280쪽 | 414g | 146*195*19mm
ISBN13 9791189217099
ISBN10 1189217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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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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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39명)

일제강점기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일제 강점기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노래한 민족시인. 우리 것이 탄압받던 시기에 우리말과 우리글로 시를 썼다. 윤동주는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 실을 가슴 아파하는 철인이었다. 그의 사상은 짧은 시 속에 반영되어 있다.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윤영석과... 일제강점기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일제 강점기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노래한 민족시인. 우리 것이 탄압받던 시기에 우리말과 우리글로 시를 썼다. 윤동주는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 실을 가슴 아파하는 철인이었다. 그의 사상은 짧은 시 속에 반영되어 있다.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윤영석과 김룡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윤동주는 청춘 시인이다. 절친한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의 시 ‘동주야’에 의하면 아직 새파란 젊은이로 기억되고 있었다. 한글을 구사하면서 작품을 발표한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만주 용정과 경성 신촌 일대에서 문학청년들과 몸을 부대끼며 시를 썼기에 청춘의 고뇌가 담겨 있다. 1925년(9세) 4월 4일, 명동 소학교에 입학했다. 1927년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 [새 명동]을 발간했다. 1931년(15세)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16세)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1934년(18세) 12월 24일, 「삶과 죽음」, 「초한대」, 「내일은 없다」 등 3편의 시 작품을 썼고 이는 오늘 날 찾을 수 있는 윤동주 최초의 작품이다. 1935년(19세)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로 편입했다. 같은 해 평양 숭실중학교 문예지 [숭실활천]에서 시 ‘공상’이 인쇄화되었다. 1936년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여 숭실학교를 자퇴하고 [카톨릭 소년]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를, 1937년 [카톨릭 소년]에 동시 「오줌싸개 지도」, 「무얼 먹고 사나」, 「거짓부리」를 발표했다. 1938년(22세)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문과에 입학했고 1939년 조선일보에 「유언」, 「아우의 인상화」, [소년(少年)]지에 「산울림」을 발표하였다. 처음 윤동주 시들은 노트에 봉인된 채, 인쇄되지도 않았고 신문 지면에 발표되지 않았다. 그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지고 난 후 동문들이 그의 노트에 있던 시를 모아 정음사에서 출판한다. 유해가 안치된 지 3년 후, 그러니까 1948년, 조선은 대한민국으로 국호가 바뀌어 혼란한 시기에 청춘 시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광복 후에 정병욱과 윤일주에 의하여 다른 유고와 함께「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만주 북간도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에 「달을 쏘다」, 「자화상」, 「쉽게 씌어진 시」를 발표하였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6개월 후에 교토 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하였다.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복역 중이던 1945년 2월 16일 광복을 여섯 달 앞두고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로 타계하였다.
저 : 백석 (BAEK SEOK,白石,白奭,백기행)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본명 백기행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식교육을 받았다. 필명은 백석(白石)과 백석(白奭)이 있었는데 주로 백석(白石)을 많이 사용하였다.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좋아하여 그의 이름 중 석을 택해서 썼다. 오산고보 재학 중 백석은 부친을 닮아 성격이 차분했으며 친...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본명 백기행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식교육을 받았다. 필명은 백석(白石)과 백석(白奭)이 있었는데 주로 백석(白石)을 많이 사용하였다.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좋아하여 그의 이름 중 석을 택해서 썼다. 오산고보 재학 중 백석은 부친을 닮아 성격이 차분했으며 친구가 없었다. 1936년 시집 ‘사슴’을 경성문화 인쇄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찍었다. 윤동주는 백석 시집을 구할 수 없어 노트에 시를 필사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해방 전 천재 시인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오산소학교, 오산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오산고보 졸업 후, 조선일보가 후원하는 춘해장학회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학과에 입학하였다. 김소월을 동경하면서 시인의 꿈을 키웠으며,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1934년에 귀국하여 8·15 광복이 될 때까지 [조선일보],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영어교사로, [여성사], [왕문사] 등에서 근무하며 시작 활동을 했다. 1935년 [조광] 창간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시작 활동 외에도 많은 외서들을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였으며 같은 해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하였다. 1939년 [여성]지 편집 주간 일을 사직하고 고향인 평북 지역을 여행하였다. 1940년 만주의 신징(지금의 장춘)으로 가서 3월부터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 말단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창씨개명의 압박이 계속되자 6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1942년 만주의 안둥 세관에서 일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신의주를 거쳐 고향인 정주로 돌아왔다.

1946년 북조선예술총동맹이 결성된 후 1947년 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 분과위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 번역에 매진했다. 1949년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신문]의 편집위원으로 위촉되었고 [아동문학]과 [조쏘문화] 편집위원을 맡으며 안정적인 창작활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57년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를 간행하였으나 1958년 ‘붉은 편지 사건’ 이후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면서 이후 창작과 번역 등 대부분의 문학적 활동을 중단했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국영협동조합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으면서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고 농촌 체험을 담은 시들을 발표했으나, 1962년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창작 활동을 접었다. 1996년까지 삼수군 관평리에서 농사를 짓다가 사망했다는 내용이 드러났지만 정확한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수용하여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 백석은 일제 강점기에도 모국어를 지키고자 하였다. 시집으로 『사슴』(1936)이 있으며, 대표 작품으로 「여우난골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이 있다. 북한에서 나즘 히크메트의 시 외에도 푸슈킨, 레르몬토프, 이사콥스키, 니콜라이 티호노프, 드미트리 굴리아 등의 시를 옮겼다. 1936년에 펴낸 시집 『사슴』에 그의 시 대부분이 실려 있으며 수록된 시 「통영」, 「적막강산」, 「북방」 등 백석의 대표작들은 실향 의식을 바탕으로 서민들의 삶을 토속적인 언어로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한국의 대표 모더니즘 시인으로 평가받는 백석의 시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1902년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에서 태어났다. 옥천보통공립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일본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22년 고교생 때 첫 작품 풍랑몽을 발표하며 데뷔했다. 시문학, 구인회 등의 문학 동인과 가톨릭 청년, 문장 등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휘문고보 교원을 거쳐 해방 후에는 이화여전교수, 경향신문주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시 납북되어 사망했다고 알려졌... 1902년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에서 태어났다. 옥천보통공립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일본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22년 고교생 때 첫 작품 풍랑몽을 발표하며 데뷔했다. 시문학, 구인회 등의 문학 동인과 가톨릭 청년, 문장 등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휘문고보 교원을 거쳐 해방 후에는 이화여전교수, 경향신문주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시 납북되어 사망했다고 알려졌으나, 전쟁으로 인해 폭사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아직까지 정확한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1926년 일본 유학중 「카페 프란스」 등 9편의 시를 발표하고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1933년 9인회를 결성하고 [가톨릭청년]의 편집고문을 맡아 다수의 시와 산문을 발표하였으며, 시인 이상을 문단에 등단시키기도 하였다. 1935년 첫 시집인 『정지용 시집』을 출간하였으며, 1939년 [문장]의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이한직, 박남수 등을 등단시켰다. 1950년 한국전쟁이 뒤에 납북되어 사망하였다.

섬세하고 독특한 언어를 구사, 생생하고 선명한 대상 묘사에 특유의 빛을 발하는 시인 정지용. 한국현대시의 신경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이상을 비롯하여 조지훈, 박목월 등과 같은 청록파 시인들을 등장시키기도한 시인이었다. 1902년 음력 5월 15일 충북 옥천읍에서 좀 떨어진 구읍의 청석교 바로 옆 촌가에서 한약상을 경영하던 영일 정씨 태국(泰國)을 아버지로 하동정씨 미하(美河)를 어머니로 탄생한 그는 그 당시 풍습에 따라 12살 때(1913) 동갑의 부인 송재숙과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 처가에서 결혼하였다. 이 부인 사이에 3남 1녀가 태어났으며, 그 가운데 차남과 3남은 6.25사변중에 행방불명 되었고, 현재 장남 구관과 장녀 구원만 생존해 있다.

그는 휘문고보 재학 시절 [서광] 창간호에 소설 「삼인」을 발표하였으며, 일본 유학시절에느 대표작의 하나인 「향수」를 썼다. 1930년에 시문학 동인으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전개하였고, 구인회를 결성하기도 하였으며 문장지의 추천위원으로 활동했다. 해방이 되서는 경향신문의 주간으로 일하고, 이화여대와 서울대에 출강하여 시론, 수필, 평문을 발표하였다.
저 : 김영랑 (영랑令郞, 윤식)
시인, 본명은 김윤식이며 아호는 영랑(令郞)이다. 1903년 전라남도 강진에서 태어났다.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보통고등학교를 거쳐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 영문학과에서 수학했다. 그 후 1930년 3월 창간한 [시문학]을 중심으로 박용철, 정지용, 정인보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변영로, 김현구, 신석정, 허보 등 여러 시인과 더불어 아호인 영랑(令郞)으로 활동했다. 19... 시인, 본명은 김윤식이며 아호는 영랑(令郞)이다. 1903년 전라남도 강진에서 태어났다.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보통고등학교를 거쳐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 영문학과에서 수학했다. 그 후 1930년 3월 창간한 [시문학]을 중심으로 박용철, 정지용, 정인보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변영로, 김현구, 신석정, 허보 등 여러 시인과 더불어 아호인 영랑(令郞)으로 활동했다.

1935년에 첫 번째 시집인 『영랑시집』을 시문학사에서 간행했다. 『영랑시집』에는 총 53편의 시가 실려 있으며, 각각의 시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의 제목을 쓰지 않고 일련번호를 붙여 시집에 실었다. 이후 김영랑은 1949년에 중앙문화사에서 『영랑시집』을 출간했다.

김영랑은 조국 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및 삭발령을 거부했으며, 광복 후 신생 정부에 참여해 당시 중앙행정부인 공보처의 출판국장으로 일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유탄을 맞아 부상을 당해 9월 서울에 위치한 자택에서 4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현재 묘지는 서울 망우리에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사랑은 깊으기 푸른 하늘」 등 한국적 정서가 담긴 서정시를 많이 발표했다. 대표 시집으로 『영랑 시집』, 『영랑 시선』 등이 있다.
저 : 박인환 (Park In-hwan,朴寅煥,)
1926년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에서 출생했다. 인제공립보통학교 입학, 서울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 경기공립중학교 자퇴하고 한성중학교에 다니다 명신중학교 4학년에 편입, 평양 의학 전문학교를 다니다가 8·15 광복을 맞으면서 학업을 중단, 종로 2가 낙원동 입구에 서점 ‘마리서사(茉莉書舍)’를 개업했다.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시부가 주최한 ‘예술의 밤’에 참여하여 시 「단층」(... 1926년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에서 출생했다. 인제공립보통학교 입학, 서울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 경기공립중학교 자퇴하고 한성중학교에 다니다 명신중학교 4학년에 편입, 평양 의학 전문학교를 다니다가 8·15 광복을 맞으면서 학업을 중단, 종로 2가 낙원동 입구에 서점 ‘마리서사(茉莉書舍)’를 개업했다.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시부가 주최한 ‘예술의 밤’에 참여하여 시 「단층」(斷層)을 낭독하고, 이를 예술의 밤 낭독시집인 『순수시선』(1946)에 발표함으로써 등단했다. 1948년 김경린, 김경희, 김병욱, 임호권과 『신시론』 발간했다. 1949년 김경린, 김수영, 임호권, 양병식과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발간했으며, 동인그룹 김경린, 김규동, 김차영, 이봉래, 조향 등과 ‘후반기’를 발족하여 활동하였다. 「거리」「남품」「지하실」 등을 발표하는 한편 「아메리카 영화시론」을 비롯한 많은 영화평을 썼고, 1949년엔 김경린, 김수영 등과 함께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여 본격적인 모더니즘의 기수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50년 [경향신문] 입사 후 6·25 동란이 일어나자, 9·28 수복 때까지 지하생활을 하다가 가족과 함께 대구로 피난, 부산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했다. 1952년 존 스타인벡의 기행문 『소련의 내막』 번역해서 간행하였으며, 6월 16일「주간국제」의 ‘후반기 동인 문예’ 특집에 평론 발표했다. 1954년 유두연, 이봉래, 허백년, 김규동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 발족하였다. 1955년 시작품 『목마와 숙녀』(시작), 『박인환 시선집』, 『선시집』을 간행하였고 그 다음 해인 1956년에 시작품 「세월이 가면」 이진섭 작곡으로 널리 불리다 3월 20일 오후 9시 심장마비로 31세 젊은 나이에 자택에서 타계해 3월 22일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59년 3주기를 맞아 윌러 캐더의 장편소설 『이별』 번역해서 간행되었으며, 그가 사망한지 20년 후인 1976년에 시집 『목마와 숙녀』가 간행되었다.
혼란한 정국과 전쟁 등의 당대 상황에서 적지 않은 총 173편의 작품을 남기고 타계한 박인환 시인은, 암울한 시대의 절망과 실존적 허무를 피에로의 몸짓으로 대변한 당대의 정신적 제왕이자 모더니즘, 리얼리즘, 실존주의의 시세계를 구축하며 전후 문단의 지평을 넓힌 기린아였다. 전쟁의 충격에 함몰되지 않고 시인다운 세계 인식을 가지려 노력하며 자신이 살아가는 황폐한 시대를 새로운 시 형식으로 반영한 그의 작품들은 우리에게 미학과 역사성이 결합하는 접점을 확인시켜 준다.
저 : 김소월 (金素月, 김정식)
1902년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에 있는 외가에서 부친 김성도와 모친 장경숙의 장자로 출생한다. 본명은 김정식이다. 태어난 지 백일 후부터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의 본가에서 자란다. 1904년 부친 김성도가 당시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를 하던 일본 목도꾼에게 폭행을 당한 이후 정신 이상 증세에 시달린다.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할아버지의 손에서 컸는데, 이 무렵 시인의 길로 가도록 영향을 준 숙모 계희영을 ... 1902년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에 있는 외가에서 부친 김성도와 모친 장경숙의 장자로 출생한다. 본명은 김정식이다. 태어난 지 백일 후부터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의 본가에서 자란다. 1904년 부친 김성도가 당시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를 하던 일본 목도꾼에게 폭행을 당한 이후 정신 이상 증세에 시달린다.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할아버지의 손에서 컸는데, 이 무렵 시인의 길로 가도록 영향을 준 숙모 계희영을 만났다. 1915년 평안북도 곽산의 4년제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김억과 사제관계를 맺게 되고 한시, 민요시, 서구시 등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다. 후에 경성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1923년 졸업했다. 이후 일본 도쿄 상과대학교에 입학 후 귀국했을 시점에 시인 나도향과 만나 친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별과 그리움을 주제로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을 노래하는 시를 썼다. 김소월은 자신의 문학적 스승인 김억의 격려를 받아 그의 지도 아래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920년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등 5편을 소월(素月)이라는 필명으로 동인지 『창조』 5호에 처음으로 시 「그리워」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오산학교를 다니는 동안 김소월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21년 [동아일보]에 「봄밤」, 「풀 따기」 등을 발표했다. 1922년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를 개벽지에 발표하였으며, 1925년에 시론 「시혼(詩魂)」을 발표하고, 같은 해 7월호에 떠나는 님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을 발표하여 크게 각광받았다. 이는 시인이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으로 기록된다. 그 밖에 1923년 『깊고 깊은 언약』 『접동새』 1924년 『밭고랑 위에서』 『생과 사』 1926년 『봄』 『저녁』 『첫눈』 1934년 『제이, 엠, 에스』 『고향』 등을 발표했다.

1923년 도쿄상업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9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중퇴하고 귀국했다. 김소월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돕다가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어 1926년평안북도 구성군 남시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개설하고서 이도 실패하자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기도 했다. 예민한 성격이었던 김소월은 이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류머티즘을 앓으며 친척들에게도 대접을 받지 못하는 등 고생하다가 1934년 12월 24일 만 32세의 나이로 평안북도 곽산에서 아편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39년 스승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素月詩抄)』가 발간된다. 1977년 [문학사상] 11월호에 미발표 소월 자필 유고시 40여 편이 발굴, 게재된다.
한국의 시인. 황해도 장연 출생이다. 진명학교(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녀는 이화여전 재학때인 1932년에 시 「밤의 찬미」, 「포구의 밤」 등을 발표하였다. 그후 「눈 오는 밤」, 「망향」 등 주로 애틋한 향수를 노래한 시들을 발표했다. 널리 애송된 그의 대표작 「사슴」으로 인해 '사슴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독신으로 살았던 그의 시에는 주로 개인적인 고독과 슬... 한국의 시인. 황해도 장연 출생이다. 진명학교(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녀는 이화여전 재학때인 1932년에 시 「밤의 찬미」, 「포구의 밤」 등을 발표하였다. 그후 「눈 오는 밤」, 「망향」 등 주로 애틋한 향수를 노래한 시들을 발표했다. 널리 애송된 그의 대표작 「사슴」으로 인해 '사슴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독신으로 살았던 그의 시에는 주로 개인적인 고독과 슬픔의 정서가 부드럽게 표현되고 있으며, 전통 문화와 농촌의 정서가 어우러진 소박한 서정성, 현실에 초연한 비정치성이 특징이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중에 쓴 작품 중에는 「군신송」 등 전쟁을 찬양하고 전사자들을 칭송하는 선동적이고 정치적인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1957년 12월 10일 유명을 달리 하였다.
시인, 영문학자, 대학 교수, 수필가, 번역문학가이다. 신문학 초창기에 등장한 신시의 선구자로서, 압축된 시구 속에 서정과 상징을 담은 기교를 보였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18년 [청춘]에 영시 「코스모스(Cosmos)」를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천재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부드럽고 정서적이어서 시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작품 기저에는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한 의도도 깔려 있었다. 대표작... 시인, 영문학자, 대학 교수, 수필가, 번역문학가이다. 신문학 초창기에 등장한 신시의 선구자로서, 압축된 시구 속에 서정과 상징을 담은 기교를 보였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18년 [청춘]에 영시 「코스모스(Cosmos)」를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천재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부드럽고 정서적이어서 시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작품 기저에는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한 의도도 깔려 있었다. 대표작으로 「논개」가 있다.
1934년 [시학] 동인의 한 사람으로 문단에 등장했다. 초기에는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파의 한 사람으로 시를 썼으나 곧 암흑과 불안, 절망을 노래하는 퇴폐적 시풍을 띠게 되었고 풍자적인 시를 썼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전통적정서에 대한 애착과 탐구를 시에 표현했다. 1934년 [시학] 동인의 한 사람으로 문단에 등장했다. 초기에는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파의 한 사람으로 시를 썼으나 곧 암흑과 불안, 절망을 노래하는 퇴폐적 시풍을 띠게 되었고 풍자적인 시를 썼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전통적정서에 대한 애착과 탐구를 시에 표현했다.
시인. 1937년 6월에 창간된 시 동인지 [시인춘추(詩人春秋)]와 1938년 6월 창간된 [맥]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시집의 자서(自序)에서 “인생이 예술을 낳는다.”는 자신의 문학관을 피력하였는데, 이는 바로 이해문의 시적 기조가 되기도 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자연스런 유로(流露), 곧 감상과 낭만성이 이해문의 시적 특색이다. 시인. 1937년 6월에 창간된 시 동인지 [시인춘추(詩人春秋)]와 1938년 6월 창간된 [맥]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시집의 자서(自序)에서 “인생이 예술을 낳는다.”는 자신의 문학관을 피력하였는데, 이는 바로 이해문의 시적 기조가 되기도 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자연스런 유로(流露), 곧 감상과 낭만성이 이해문의 시적 특색이다.
저 : 이상화 (상화尙火, 무량無量, 상화想華, 백아白啞)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역사를 바로 꿰뚫어보는 가운데 치열한 시대 정신과 따뜻한 휴머니즘 정신을 아름다운 예술 혼으로 승화시킨 민족 시인이자 저항 시인. 1901년 4월 5일(음력) 대구시 중구 서문로 2가 1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한문 수학 후 상경하여 중앙학교에 입학, 1918년 3월 25일에 수료하고, 그 해 7월 서문로 집을 나서 강원도 일대를 방랑하다 1919년 대구에서 3·1운동 ...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역사를 바로 꿰뚫어보는 가운데 치열한 시대 정신과 따뜻한 휴머니즘 정신을 아름다운 예술 혼으로 승화시킨 민족 시인이자 저항 시인.

1901년 4월 5일(음력) 대구시 중구 서문로 2가 1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한문 수학 후 상경하여 중앙학교에 입학, 1918년 3월 25일에 수료하고, 그 해 7월 서문로 집을 나서 강원도 일대를 방랑하다 1919년 대구에서 3·1운동 거사 모임에 참석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서울 냉동 박태원의 하숙으로 피신하였다. 1922년 현진건의 소개로 월탄 박종화와 만나 [백조(白潮)] 동인으로 문단에 참여하기 시작, 창간호에 시「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등을 발표하였다. 이후 도일하여 아테네 프랑세에 입학, 1923년 3월 아테네 프랑세를 수료하였으나, 9월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에서 본 일본인의 조선인 학살에 분노하여 귀국했다. 가회동 이른바 취운정(翠雲亭)에 머물면서 시 「나의 침실로」를 [백조] 3호에 발표, 1925년엔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다음해인 1926년, [개벽] 70호에 그의 대표작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했지만 이 시의 게재로 [개벽]지는 판매 금치 처분을 당했다. 작품활동 초기에는 탐미적 경향의 시를 썼으나 이 시기를 고비로 식민치하의 민족 현실을 바탕으로 한 저항 정신과 향토적 세계를 노래하였다. 이후 심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창작의 끈을 놓지 않다가, 1943년 4월 25일 오전 8시 45분, 계산동 2가 84번지 고택에서 부인과 세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숙환으로 운명하였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지 5년째 되는 1948년에, 해방 후 최초의 시비가 달성공원에 건립되었다.
저 : 노자영 (盧子泳, 춘성春城)
시인 · 수필가. 호는 춘성(春城). 1898년 평남(황해도 송화군 상리면 양지리)에서 출생하였으며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한성도서주식회사(漢城圖書株式會社)에 입사했으며, 1925년경 일본으로 넘어가서 니혼대학[日本大學]에서 수학하였으나 폐 질환으로 학업을 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해 병상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서울]·[학생]지의 기자로 있으면서 감상문 등을 발표했으며, 19... 시인 · 수필가. 호는 춘성(春城). 1898년 평남(황해도 송화군 상리면 양지리)에서 출생하였으며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한성도서주식회사(漢城圖書株式會社)에 입사했으며, 1925년경 일본으로 넘어가서 니혼대학[日本大學]에서 수학하였으나 폐 질환으로 학업을 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해 병상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서울]·[학생]지의 기자로 있으면서 감상문 등을 발표했으며, 1934년 문예지 [신인문학(新人文學)]을 발간하였으나 자본 부족으로 중단, 1935년 조선일보사 출판부에 입사하여 [조광(朝光)]지의 편집을 맡았고, 1938년 기자 생활 청산 후 '청조사(靑鳥社)'를 직접 경영하기 시작했다.

1919년 8월 [매일신보]에 「월하(月下)의 몽(夢)」이, 그 해 11월에 「파몽(破夢)」·「낙목(落木)」 등이 시부분에서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장미촌], 1922년 [백조] 창간 동인으로 가담하여 [백조] 창간호에 시 「객(客)」·「하늘의 향연(饗宴)」·「이별한 후에」를 발표했고, [백조] 2호에 「우연애형(牛涎愛兄)에게」라는 수필을, 1923년 소설 「반항(反抗)」을 발표했다. 1924년 첫 시집 『처녀(處女)의 화환(花環)』, 1928년 제2시집 『내 혼(魂)이 불탈 때』, 1938년 제3시집 『백공작(白孔雀)』 등을 간행하였다. 1940년 10월 6일 41세 나이에 갑작스런 발병으로 사망했다.
세속적인 것을 싫어하여 고독하게 살다가 1929년 11월 대구 자택에서 음독, 자살하였다. 이장희의 전 시편에 나타난 시적 특색은 섬세한 감각과 시각적 이미지, 그리고 계절의 변화에 따른 시적 소재의 선택에 있다. 대표작 「봄은 고양이로다」는 다분히 보들레르와 같은 발상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고양이’라는 한 사물이 예리한 감각으로 조형되어 생생한 감각미를 보이고 있다. 1920년대 초반의 시단은 퇴폐주의·낭... 세속적인 것을 싫어하여 고독하게 살다가 1929년 11월 대구 자택에서 음독, 자살하였다. 이장희의 전 시편에 나타난 시적 특색은 섬세한 감각과 시각적 이미지, 그리고 계절의 변화에 따른 시적 소재의 선택에 있다. 대표작 「봄은 고양이로다」는 다분히 보들레르와 같은 발상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고양이’라는 한 사물이 예리한 감각으로 조형되어 생생한 감각미를 보이고 있다. 1920년대 초반의 시단은 퇴폐주의·낭만주의·자연주의·상징주의 등 서구 문예사조에 온통 휩싸여 퇴폐성이나 감상성이 지나치게 노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섬세한 감각과 이미지의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뒤를 이어 활동한 정지용(鄭芝溶)과 함께 한국시사에서 새로운 시적 경지를 개척하였다.
저 : 허민 (許民, 허종許宗, 허창호許昌瑚, 민民)
허민의 시는 자유시를 중심으로 시조, 민요시, 동요, 노랫말에다 성가, 합창극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갈래에 걸쳐 있다. 본명 허종(許宗), 필명 허창호(許昌瑚), 민(民)이다. 경상남도 사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시의 제재는 산·마을·바다·강·호롱불·주막·물귀신·산신령 등 자연과 민속에 속하며, 주제는 막연한 소년기 정서에서부터 농촌을 중심으로 민족 현실에 대한 다채로운 깨달음과 질병(폐결핵)에 맞서 싸우는 한 개인... 허민의 시는 자유시를 중심으로 시조, 민요시, 동요, 노랫말에다 성가, 합창극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갈래에 걸쳐 있다. 본명 허종(許宗), 필명 허창호(許昌瑚), 민(民)이다. 경상남도 사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시의 제재는 산·마을·바다·강·호롱불·주막·물귀신·산신령 등 자연과 민속에 속하며, 주제는 막연한 소년기 정서에서부터 농촌을 중심으로 민족 현실에 대한 다채로운 깨달음과 질병(폐결핵)에 맞서 싸우는 한 개인의 실존적 고독 등을 표현하고 있다. 「율화촌」, 「해수도」, 「아픈 다리」 등을 저술했다. 1937년 [동아일보] 진주지국 기자로 일하였으며, 지병인 폐결핵을 앓다가 1943년 봄 2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의 소설 『구룡산』으로 문단에 진출하여 민족 현실과 산촌의 궁핍한 삶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특히 민담, 전설을 잘 활용했다. 단편 『어산금(魚山琴)』은 '이태준' 작가의 추천으로 문예잡지에 게재되었고, 예술가 소설로 장신정신이 담겨있다. 또한 허민의 당대 시대를 반영한 문체가 그대로 들어나는데 경남 지역어를 풍부한 사투리가 그대로 담겨있는 것이 특징이다. 시적 자연 묘사가 두드러지고 있다.

허민은 이른 나이에 세상과 이별하여 많은 작품의 시, 경수필, 소설(아동문학) 등이 묻혀 있다가 사후 32년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1940년대 암흑기 우리 민족문학사의 한 자리를 메울 수 있는 윤동주와 쌍벽을 이루는 소설과 시인으로서 미발표 유작시 2백여 편이지만, 유작 소설만도 대부분은 6·25 때 소실됐으며 어려운 시대에 한글로만 작품을 썼다.
박용철은 1930년대 사재를 털어 문예잡지 『시문학』 3권(1930), 『문예월간』 4권(1931), 『문학』 3권(1934) 등 도합 10권을 간행하였다. 또한 문학활동에 전념하면서도 그가 주재하던 시문학사에서 1935년 『정지용시집』과 『영랑시집』을 간행하였지만, 정작 자신의 작품집은 내지 못하였다. 『시문학』 창간호에 「떠나가는 배」·「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싸늘한 이마」·「비내리는 날」 등을 발표하면서... 박용철은 1930년대 사재를 털어 문예잡지 『시문학』 3권(1930), 『문예월간』 4권(1931), 『문학』 3권(1934) 등 도합 10권을 간행하였다. 또한 문학활동에 전념하면서도 그가 주재하던 시문학사에서 1935년 『정지용시집』과 『영랑시집』을 간행하였지만, 정작 자신의 작품집은 내지 못하였다. 『시문학』 창간호에 「떠나가는 배」·「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싸늘한 이마」·「비내리는 날」 등을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시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시문학』·『문예월간』·『문학』 및 기타 잡지에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또한 발표되지 않고 유고로 전하여진 작품도 상당수에 달한다. 자신이 주축이 된 시문학 동인활동과 ‘해외문학파’,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참여하여 연극공연을 위한 몇 편의 희곡(입센 원작 『인형의 집』, 그리고 「바보」, 「베니스 상인」, 「말 안 하는 시악시」, 「사랑의 기적」… 등)을 번역 및 창작하였으며 직접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방대한 번역시 등을 통해 해외문학을 국내에 소개하는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은 한국 근현대문학사에서 큰 의의라 하겠다. 또한 『삼천리문학』에 실린 박용철의 대표적인 평론인 「시적 변용에 대해서」(1938)는 지금도 널리 읽혀지는 시작(詩作) 이론이다. 이 시론을 통하여 1930년대 초반 『시문학』이 기틀을 잡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1930년대 중반부터는 모더니즘과 기교주의 논쟁에서도 순수파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시인. 1898년 개성출생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와서 이화학당유치사범과 협성여자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시작(詩作)은 1927년경부터 시작하여 많은 작품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했다. 기독교계에서 운영하는 잡지 《청년(靑年)》에 시를 발표하면서부터 등단했다. 그녀의 시는 서정시, 시조, 동시로 구성되며 조국과 자연, 동심을 망라하는 시를 썼다. 신앙을 바탕으로 섬세한 내면세계를 담백하고 담담하게 표현하... 시인. 1898년 개성출생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와서 이화학당유치사범과 협성여자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시작(詩作)은 1927년경부터 시작하여 많은 작품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했다. 기독교계에서 운영하는 잡지 《청년(靑年)》에 시를 발표하면서부터 등단했다. 그녀의 시는 서정시, 시조, 동시로 구성되며 조국과 자연, 동심을 망라하는 시를 썼다. 신앙을 바탕으로 섬세한 내면세계를 담백하고 담담하게 표현하는 시를 씀으로써 선구자적 소임을 다한 여류시인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저 : 오일도 (낙안, 오희병, 일도)
예술지상주의의 꽃을 피게 한 순수시 전문잡지 [시원]을 창간하여 한국현대시의 발전에 커다란 이정표를 남긴 시인. 경상북도 영양 출생, 본관은 낙안(樂安), 본명은 오희병(吳熙秉), 아호는 일도이다. 아버지는 오익휴(吳益休), 어머니는 의흥 박씨(義興朴氏)이다. 예술지상주의의 꽃을 피게 한 순수시 전문잡지 [시원]을 창간하여 한국현대시의 발전에 커다란 이정표를 남긴 시인. 경상북도 영양 출생, 본관은 낙안(樂安), 본명은 오희병(吳熙秉), 아호는 일도이다. 아버지는 오익휴(吳益休), 어머니는 의흥 박씨(義興朴氏)이다.
저 : 한용운 (韓龍雲, 만해, 한유천)
승려·시인·독립운동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에서 몰락한 양반 출신의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이며, 용운은 법명, 호적상이름이자 본명은 한정옥이다. 6세 향리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9세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 『통감』『서경』 등을 통달하여 총명한 어린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풍습이 그러함에 따라 14세 향리에서 천안 전씨全氏 전정숙과 일찍 혼인하였으... 승려·시인·독립운동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에서 몰락한 양반 출신의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이며, 용운은 법명, 호적상이름이자 본명은 한정옥이다. 6세 향리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9세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 『통감』『서경』 등을 통달하여 총명한 어린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풍습이 그러함에 따라 14세 향리에서 천안 전씨全氏 전정숙과 일찍 혼인하였으나, 집을 나가 떠돌고 출가하기를 반복했다. 가출하여서는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고, 고향 홍성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불교서적을 탐독했다. 21세에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였고, 이때를 전후해서 세계여행을 계획하였다.

1894년 동학군에 가담하여 투쟁하다 실패했다.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은거, 수년 간 불경을 공부하는 한편 근대적 교양서적을 읽어 서양의 근대사상을 접했다. 1904년(26세) 설악산 백담사에 들어가 불목하니 노릇을 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27세 백담사에서 김연곡사金蓮谷師에게서 득도. 백담사에서 전영제사全泳濟師에 의하여 수계受戒. 백담사에서 이학암사李鶴庵師에게 『기신론』, 『능엄경』, 『원각경』 등을 수료. 29세 강원도 건봉사에서 수선안거(최초의 禪수업)를 성취하였다.

30세 강원도 유점사에서 서월화사徐月華師에게 『화엄경』을 수학하였고 4월, 일본의 시모노세키, 교토, 도쿄, 닛고 등지를 주유하며 신문물을 시찰하였다. 도쿄 조동종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 철학을 청강하였으며, 10월, 건봉사 이학암사에서 『반야경』과 『화엄경』을 수료하였다. 31세에 강원도 표훈사 불교 강사에 취임하였고 1910년(32세)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 1911년(33세) 박한·진진웅·김종래·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한일불교동맹 조약 체결을 분쇄하였다. 1913년(35세) 불교강연회 총재에 취임하였고 『조선불교유신론』을 불교서관에서 발행하였다.

1914년(36세) 『불교대전』을 범어사에서 발행하고 1917년(39세) 『정선강의 채근담』을 신문관에서 발행하였고 항일 투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12월 3일 밤 10시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의정돈석擬情頓釋이 되어 진리를 깨치고, 오도송을 남겼다. 1918년 청년계몽운동지 [유심]지를 창간했다. 1919년(41세) 3.1운동을 주도,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하고 공약삼장을 첨가하였다. 1923(45세)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지원하였고,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지원하는 강연을 하였다.1924년 불교청년회 회장, 총재를 역임하였다.

1925년(47세) 오세암에서 『님의 침묵』을 탈고하엿다. 1927년(49세) 1월 신간회를 발기하였으며, 5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에 뽑혔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민중대회를 개최하였다. 1931년(53세) 월간 [불교]지를 인수하였고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었으며, 1932년(53세) 조선불교 대표인물 투표에서 최고득점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한용운 422표, 방한암 18표, 박한영 13표, 김태흡 8표, 이혼성 6표, 백용성 4표, 송종헌 3표, 백성욱 3표, 3표 이하는 생략. 불교지 93호에 발표됨). 1933(54세) 유숙원씨와 재혼하였고, 이때를 전후하여 『유마힐소설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벽산 스님이 집터를 기증하고, 몇 분의 성금으로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지었으며, 이때 총독부 돌집을 마주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짓도록 하였다.

1940년(62세) 『불교』지 2월호에 『유마힐소설경』 연재를 시작하였고, 1943년(65세) 조선인 학병의 출정을 반대하였다. 1944년(66세) 6.29 심우장에서 영양실조로 입적하였으며 유해는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한용운은 불자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민중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등 사회 참여가 활발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3·1운동에 가담하고 독립선언서를 공개하여 낭독하는 등의 활동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는데, 기존의 시조 형식을 깬 산문시 형태를 취했으며, 향토적 정서가 묻어나는 언어와 서민적인 시어 활용으로 민중정신을 반영했다. 독립을 향한 열망, 자연 등을 ‘님’으로 표현했고,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화법으로 검열을 피하기도 했다.
서울시 종로구 야주개(현 당주동)에서 미곡상과 어물전을 경영하던 방경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일제 식민치하 사람 대접을 못 받던 불쌍하고 학대받던 조선 어린이를 위해 그는 수많은 선구적 사업을 몸소 개척하며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사에 잊을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 1921년 5월 1일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고 1922년 처음 어린이날을 선포한 데 이어, 이듬 해 1923년 제1회 어린이날을 전국 규모로 개최... 서울시 종로구 야주개(현 당주동)에서 미곡상과 어물전을 경영하던 방경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일제 식민치하 사람 대접을 못 받던 불쌍하고 학대받던 조선 어린이를 위해 그는 수많은 선구적 사업을 몸소 개척하며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사에 잊을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

1921년 5월 1일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고 1922년 처음 어린이날을 선포한 데 이어, 이듬 해 1923년 제1회 어린이날을 전국 규모로 개최함으로써 ‘어린이날’을 확대 정착시켰다. 1923년 3월 순문예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고, 같은 해 5월 1일 일본 동경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문제 연구 단체인 〈색동회〉를 창립하였다. 1919년 3.1 독립운동 이후 어린이 문제의 연구와 사명을 진지하게 각성하고 동요, 동화, 동화극, 아동자유화, 세계아동예술전람회 등 우리나라 어린이 문학과 예술 방면의 성장과 부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방정환의 어린이운동은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과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공훈으로 방정환은 2017년 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국가 보훈처)로 선정되었다. 생전에 남긴 유일한 책은 세계명작동화집 『사랑의 선물』(1922, 개벽사)이며, 그밖에 동요 「귀뚜라미 소리」, 「눈」, 동화 「호랑이 형님」, 「사월 그믐날밤」, 소년소설 「만년샤쓰」, 소년탐정소설 「칠칠단의 비밀」 등 어린이를 위해 뛰어난 문학을 많이 남겼다.
저 : 김억 (金億, 희권熙權, 안서岸曙)
1896년 본관 경주, 음력 10월 30일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 관섭리 1798번지에서 아버지 김기범金基範과 어머니 김준金俊 사이에서 태어났다. 안서는 이곳에서 10대의 중반까지 살다가 오산학교에 진학하면서 거주지를 옮겼다고 전한다. 본명은 희권熙權인데 후에 ‘억億’으로 개명, 아호는 안서岸曙. 1910년대 후반 낭만주의 성향의 [폐허]와 [창조]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창조(創造)], [폐허(廢墟)], ... 1896년 본관 경주, 음력 10월 30일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 관섭리 1798번지에서 아버지 김기범金基範과 어머니 김준金俊 사이에서 태어났다. 안서는 이곳에서 10대의 중반까지 살다가 오산학교에 진학하면서 거주지를 옮겼다고 전한다. 본명은 희권熙權인데 후에 ‘억億’으로 개명, 아호는 안서岸曙.

1910년대 후반 낭만주의 성향의 [폐허]와 [창조]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창조(創造)], [폐허(廢墟)], [영대(靈臺)], [개벽(開闢)], [조선문단(朝鮮文壇)],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시·역시(譯詩)·평론·수필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한편, 에스페란토의 연구에서도 선편(先鞭)을 잡고 그 보급을 위하여 강습소를 열기도 하였으며, 『개벽』에 「에스페란토 자습실」을 연재하여, 뒤에 간행된 『에스페란토 단기강좌(Esperanto Kurso Ramida)』라는 한국어로 된 최초의 에스페란토 입문서가 되었다.

또한, 김소월(金素月)의 스승으로서 김소월을 민요시인으로 길러냈고, 자신도 뒤에 민요조의 시를 주로 많이 썼다. 김억은 1924년에는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입사 당시까지 낯설었던 해외 문학 이론을 처음 소개함과 동시에 개인의 정감을 자유롭게 노래하는 한국 자유시의 지평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된다. 서구의 상징시를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하여 1920년대 초반 상징시풍이 문단에 정착하는 계기를 열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는 한시의 번역이나 민요 발굴 등 전통적인 정서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을 돌렸다.

1930년대 말에는 김포몽(金浦夢)이라는 예명으로 대중가요 작사 활동도 벌였다. 작사가가 된 것은 생활고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생소한 예명을 사용한 이유는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서 문단에서의 지위가 남달랐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작사한 노래 가운데 선우일선의 「꽃을 잡고」는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사한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의 「아아 야마모토 원수」(1943) 등 친일 시를 발표했다. 친일 저작물 수는 시 4편을 포함하여 총 6편이 밝혀져 있다. 국민총력조선연맹과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보국회 간부를 지내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고, 북한으로 간 유력 인사들이 1956년 평양에서 결성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을 지낸 뒤로 행적이 불분명하다. 1958년 평북 철산군의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되었다는 설이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월북 작가들과 함께 언급이 금기시되다가 1988년 해금 조치 이후 다시 조명을 받았다.

저서로는 『기탄자리』, 『해파리의 노래』, 『오뇌의 무도』(개정판), 『신월』, 『잃어진 진주』, 『원정』, 『금모래』, 『봄의 노래』, 『안서시집』, 『사상만필』, 『모범서한문』, 『망우초』, 『소월시초』, 『안서시초』, 『동심초』, 『꽃다발』, 『지나명시선 백낙천집』, 『애국백인일수』, (일본단가 번역), 『야광주』, 『먼동이 틀 제』, 『금잔디』, 『민요시집』, 『옥잠화』 등이 있다.
호는 포석(抱石). 조선에서 태어난 소비에트 연방의 작가이다. 1923년에 희곡 「파사」를 발표하고, 1924년에는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출판했다. 이 시기의 희곡이나 시는 종교적 신비주의·낭만주의의 색채가 짙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활동 초기에 관념적인 시를 지었으나 1925년 8월 카프에 창립위원으로 참가하면서 자전적 단편소설인 「땅 속으로」 발표를 기점으로 혁명적 투쟁을 그리는 작가로 변모했다. ... 호는 포석(抱石). 조선에서 태어난 소비에트 연방의 작가이다. 1923년에 희곡 「파사」를 발표하고, 1924년에는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출판했다. 이 시기의 희곡이나 시는 종교적 신비주의·낭만주의의 색채가 짙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활동 초기에 관념적인 시를 지었으나 1925년 8월 카프에 창립위원으로 참가하면서 자전적 단편소설인 「땅 속으로」 발표를 기점으로 혁명적 투쟁을 그리는 작가로 변모했다.

1927년 [조선지광]에 발표한 대표작 「낙동강」은 카프 문학사에 있어 신경향파 소설로부터 목적의식기의 소설로 방향 전환을 이룩한 걸작으로 평가되었으며, 특히 김기진은 「낙동강」을 “1920년 이후 조선 대중의 거짓 없는 인생 기록이자 획시대적인 작품”으로, 조명희를 “제2기에 선편을 던진 작가”라 평했다.

조명희는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1928년 소련으로 망명하였는데, 망명 이후에도 하바롭스크 등지에서 시와 소설을 집필하는 한편 농민청년학교 교사와 조선사범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며 고려인 후학을 양성했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 지방으로 이주되었으며, 1938년 예조프의 ‘대숙청’ 당시 KGB에 의해 일본 간첩으로 몰려 4월 15일에 사형언도 받고 5월 11일 소비에트 연방 하바로브스크에서 총살당했다. 사후 약 20년이 지나 흐루쇼프 정권 때 소련작가연맹회원으로 복권되었다.
이병각은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가 해체된 시기인 1935∼36년부터 평론, 산문, 시에 이르는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작품활동을 하였지만, 요절하여, 그 활동 기간은 카프 해소 이후 10여 년뿐이다. 현실도피적인 성향인 데다 후두결핵으로 문단활동도 활발하게 하지 못하였다. 그는 병든 몸으로 직접 한지에다 모필로 시집을 묶었는데, 그 첫 장에는 ‘가장 괴로운 시대에 나를 나허주신 어머님게... 이병각은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가 해체된 시기인 1935∼36년부터 평론, 산문, 시에 이르는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작품활동을 하였지만, 요절하여, 그 활동 기간은 카프 해소 이후 10여 년뿐이다. 현실도피적인 성향인 데다 후두결핵으로 문단활동도 활발하게 하지 못하였다. 그는 병든 몸으로 직접 한지에다 모필로 시집을 묶었는데, 그 첫 장에는 ‘가장 괴로운 시대에 나를 나허주신 어머님게 드리노라’(1940년 2월)라고 쓰여 있다.
저 : 이상 (李箱, 김해경金海卿)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으로, 1910년 8월 20일에 태어났다.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현재 서울대학교) 재학 중 학생 회람지 [난파선]의 편집을 주도하면서 시를 발표했고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1929년 조선총독부의 건축기수가 되어 근무하던 중 12월에 건축학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도안 현상 모집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된다. 1928년 졸업 앨범에서 평생 동안 필명이 되는 이상(李箱)이라는 이름을 처음...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으로, 1910년 8월 20일에 태어났다.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현재 서울대학교) 재학 중 학생 회람지 [난파선]의 편집을 주도하면서 시를 발표했고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1929년 조선총독부의 건축기수가 되어 근무하던 중 12월에 건축학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도안 현상 모집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된다. 1928년 졸업 앨범에서 평생 동안 필명이 되는 이상(李箱)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는 1930년 [조선]에 첫 소설 『12월 12일』 연재를 시작하며 등단했다. 이후 『이상한 가역반응』 『파편의 경치』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내며 활발한 문학 활동을 펼친다.

1934년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를 연재했는데, 난해하고 파괴적인 형식에 독자들의 항의를 받고 연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오감도 작가의 말」은 연재 중단 후 쓰여 해당 잡지에는 발표되지 않았다. 1936년「날개」를 발표하여 큰 화제를 일으켰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날개」는 이상의 대표 소설이다. 이듬해는 1937년 2월 사상불온 혐의로 일본 경찰에 유치되었고, 같은 해 4월 17일 도쿄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사망하였다.

현대시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시인이며, 1930년대에 있었던 20년대의 사실주의, 자연주의에 반발한 모더니즘 운동의 기수였다. 그는 건축가로 일하다가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전위적이고 해체적인 글쓰기로 한국의 모더니즘 문학사를 개척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겉으로는 서울 중인 계층 출신으로 총독부 기사였던 평범한 사람이지만, 20세부터 죽을 때까지 폐병으로 인한 각혈과 지속적인 자살충동 등 평생을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던 기이한 작가였다. 한국 역사상 가장 독창적인 시와 소설을 창작한 바탕에는 이런 공포가 늘 그의 삶에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910년에 태어나 1912년 아들이 없던 백부 김연필(金演弼)의 집에 장손으로 입양되었고, 백부의 교육열에 힘입어 신명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마쳤다. 손가락이 잘리고 빈궁하게 살았던 친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와 자신을 입양한 백부에 대한 증오심으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영민하여 학업 성적은 우수하였고,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질이 있어 학창시절, 직장시절 내내 그림에 꿈을 품고 열중하였다. 또한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의 유창한 일본어 실력이 있었고, 예술적 이상향으로 동경(도쿄)을 꼽았다고 한다. 스스로를 선각자이며, 천재, 모더니즘의 기수이자 전위예술의 선구자라고 자처했는데, 식민지 시대임에도 민족적인 자각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범세계적이고 현대적인 문명에 심취하였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는 한국 고유의 색채를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유럽이나 일본 문학계에 유행하던 모더니즘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실제 생활은 나태하고 난잡, 무기력했다고 전해지며,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잡지 [조선(朝鮮)]의 1930년 2월호부터 12월호까지 9회에 걸쳐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이기도 한 『12월12일(十二月十二日)』을 」이상」이라는 필명으로 연재하였고, 1931년 『이상한 가역반응』을 발표하며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BOITEUX·BOITEUSE』 『오감도』 등을 [조선과 건축]에 발표했고, 1932년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을 [조선]에 발표하면서 비구(比久)라는 익명을 사용했으며,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발표하였다. 이후 [구인회]에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고, 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다. 미친수작, 정신병자의 잡문이라는 혹평을 받아 결국 30회로 예정되어 있었던 분량을 15회로 수정하여 연재가 중단되었지만 열화와 같은 찬반양론을 일으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소설 『지팡이 역사』 수필 『혈서삼태』와 『산책의 가을』 등을 발표하였고, 1935년에는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연재되는 동안 삽화를 맡아 그리기도 하는 등 창작 활동은 계속하였다. 친구인 구본웅(具本雄)과는 신명(新明)학교 동기동창일때부터 각별히 친했으며, 대학입학시 그가 선물한 스케치박스(사구상)에서 필명인 이상이 나왔다는 설이 전해진다. 화가 구본웅이 인쇄소 창문사에 이상의 일자리를 주선하여 근무하면서 1936년, 구인회의 동인지인 [시와 소설]을 창간하고 편집해 발간하지만 1집만을 발간하고 그만둔다. 이후 [중앙]에 『지주회시』 [조광]에 『날개』 『동해』를 발표하였다.

백부에게서 유산을 물려받고 가족들과 함께 살았으나, 가족들의 무지와 가난에 곧 질려서 보름만에 나와버렸다. 1933년, 무질서한 생활로 폐병이 심해져 각혈까지 한 그는 총독부 기사직을 그만두고 구본웅과 함께 황해도 백천에서 요양 생활을 시작했다. 그 곳에서 그의 연인인 금홍을 만났다. 서울에 올라와서도 금홍을 못잊고 방황 하다가 제비 다방을 마련해 그녀를 마담자리에 앉혔다. 그는 금홍과의 만남 이후에도 여러 여급들과 사랑을 나누었는데, 이들을 무척 사랑하긴 했지만 그 행복이 오래간 적은 없었다. 다만 이들과의 관계에서 문학적 영감을 얻어 작품들을 집필하였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그는 금홍과 권순희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가면 『봉별기』, 『날개』, 『지주회시』 그리고 『종생기』등과 전문시 음화시, 문명 비평류의 수필 등을 산더미처럼 쏟아내었다. 이 수많은 작품들이 술에 절어있던 한밤 중에 쓰여졌다는 사실은 ‘천재 이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그러던 그는 이화여전 출신인 여류문인이자 친구 구본웅의 이복동생인 변동림(이상이 죽은 뒤 순화 김환기의 부인이 된 김향안 씨)과 결혼을 하였다. 그녀는 금홍과 달리 빈민굴에서 고생하는 그의 가족과 깊은 친분을 맺었다. 하지만 그녀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그녀는 카페의 여급으로 일하며 입에 풀칠을 하게 되었다. 건강악화와 어려운 경제적 여건 등, 국내에서의 비참한 현실과 마주친 이상은 도피하기 좋아하는 그의 성격탓인지, 가족과 아내를 남겨둔 채 1936년에 동경행을 선택했다. 동경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가난을 절절히 겪던 그는 『종생기』, 『환상기』, 『실락원』, 『실화』, 『동경』 등의 수많은 작품을 엮어냈고, 『봉별기』를 [여성]에 발표하였다.

그의 마지막 여자인 변동림은 『동해』 『단발』 구필 『행복』 『종생기』의 『선』 『실화』의 『연』 등에서 지금까지 살아 숨쉬고 있다.이듬해 2월, 극도로 악화된 건강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이상은 1937년 불량선인(사상불온) 혐의로 운 나쁘게도 일본 경찰에게 검거되어 옥살이를 치렀다. 건강이 악화되어 거의 시체나 다름없게 된 그는 보석을 허가받아 평소 동경제대의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항상 여자와 문학에 빠져 살던 이상은 결국 날지 못한 채 변동림이 구해온 레몬의 향기를 맡으며 짧은 생을 마감했다. 유해는 화장하여, 경성으로 돌아왔으며, 같은 해에 숨진 김유정과 합동영결식을 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었으나, 후에 유실되었다. 20세기 한국문학사에 내장된 최고의 형이상학적 스캔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집이 출간되기도 하였다.
저 : 권태응 (權泰應, 동천(洞泉))
호는 동천(洞泉). 1918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7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했다. 1939년 ‘독서회 사건’으로 일경에 검거되어 1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폐결핵 3기의 몸으로 귀국하여 요양생활을 하며 1944년 초부터 시조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동시 쓰기에 몰두하여 작고하기 전까지 『송아지』 『하늘과 바다』 『우리 시골』 『어린 나무꾼』 『물동우... 호는 동천(洞泉). 1918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7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했다. 1939년 ‘독서회 사건’으로 일경에 검거되어 1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폐결핵 3기의 몸으로 귀국하여 요양생활을 하며 1944년 초부터 시조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동시 쓰기에 몰두하여 작고하기 전까지 『송아지』 『하늘과 바다』 『우리 시골』 『어린 나무꾼』 『물동우』 『우리 동무』 『작품』 『동요와 또』 『산골 마을』 등 아홉 권의 육필 동시집을 손수 엮었다. 1947년 잡지 『주간 소학생』 45호에 동요 「어린 고기들」을 발표했고, 이듬해 동요집 『감자꽃』(글벗집)을 출간했다. 1951년 전쟁 통에 병세가 악화되어 34세 나이로 별세했다. 1968년 충주 탄금대 공원에 「감자꽃」 노래비가 세워졌고, 1995년 동시선집 『감자꽃』(창작과비평사)이 간행되었다. 1997년부터 충주에서 시인을 기리는 문학제가 열리고 있으며, 2005년 정부에서는 독립유공자로서의 공훈을 인정하여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시인·영문학자·교육자. 일본 릿쿄대학에서 수학했다. 귀국 후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1930년 경부터 『동아일보』 등에 시를 게재했고, 에드거 앨런 포의 「애너벨리」(『신생(新生)』27, 1931.1), 키츠(J. Keats)의 「희람고옹부(希臘古甕賦)」(『신생』 31, 1931.5) 등의 외국문학을 번역·소개했다. 1933년부터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 교수로 근무하면서, 1938년 「남으로 창을 내겠... 시인·영문학자·교육자. 일본 릿쿄대학에서 수학했다. 귀국 후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1930년 경부터 『동아일보』 등에 시를 게재했고, 에드거 앨런 포의 「애너벨리」(『신생(新生)』27, 1931.1), 키츠(J. Keats)의 「희람고옹부(希臘古甕賦)」(『신생』 31, 1931.5) 등의 외국문학을 번역·소개했다. 1933년부터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 교수로 근무하면서, 1938년 「남으로 창을 내겠오」를 수록한 시집 『망향(望鄕)』을 출판했다.
19세기와 20세기의 문학적 감수성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 소설가.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작은 칼뱅주의 마을 애머스트에서 태어나 평생을 보냈으며, 평생 결혼하지 않다. 평생 살며 1800편의 시를 남겼다. 자신의 시를 직접 출판하거나 세상에 거의 공개하지 않았지만 소수의 친구와 가족, 지인들에게 보여주기를 좋아했다. 자연을 사랑했으며 동물, 식물, 계절의 변화에서 깊은 영감을 얻었다. 말년에는 은둔생활을 했으며 시... 19세기와 20세기의 문학적 감수성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 소설가.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작은 칼뱅주의 마을 애머스트에서 태어나 평생을 보냈으며, 평생 결혼하지 않다. 평생 살며 1800편의 시를 남겼다. 자신의 시를 직접 출판하거나 세상에 거의 공개하지 않았지만 소수의 친구와 가족, 지인들에게 보여주기를 좋아했다. 자연을 사랑했으며 동물, 식물, 계절의 변화에서 깊은 영감을 얻었다. 말년에는 은둔생활을 했으며 시작 활동을 했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매우 높은 지성을 표현하고 있으며 또한 뛰어난 유머 감각도 보여준다. 운율이나 문법에서 파격성이 있어서 19세기에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20세기에는 형이상학적인 시가 유행하면서 더불어 높은 평가를 받았다.

40여 편씩 시를 직접 필사하고 편집한 손제본 형태의 파시클fascicle 40권에 보관했고 더러는 편지봉투를 뜯어 그 안에 적어두기도 했다. 주변의 일상과 자연을 시에 담아 사랑, 죽음, 상실, 영원함, 아름다움, 글쓰기와 읽기의 즐거움을 노래한 시인은 당시 청교도의 엄숙함이나 가부장적 질서, 물질주의 생활양식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리듬과 형식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사유했다. 현재 독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미국 시인 가운데 한 명이며, 많은 후배 시인들과 비평가는 물론 음악가와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는 페미니스트 뮤즈이기도 하다.
일본의 방랑시인. 호후시 출신. 5.7.5의 정형시인 하이쿠(俳句)에 자유율을 도입한 일본의 천재시인이다. 그의 평생소원은 ‘진정한 나의 시를 창조하는 것’과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죽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이쿠 하나만을 쓰는 데 삶을 바쳤다. 겉으로는 무전걸식하는 탁발승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한량에 술고래에다 툭하면 기생집을 찾는 등 소란을 피우며 문필가 친구들에게 누를 끼쳤다. 그래도 인간적인 매력... 일본의 방랑시인. 호후시 출신. 5.7.5의 정형시인 하이쿠(俳句)에 자유율을 도입한 일본의 천재시인이다. 그의 평생소원은 ‘진정한 나의 시를 창조하는 것’과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죽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이쿠 하나만을 쓰는 데 삶을 바쳤다. 겉으로는 무전걸식하는 탁발승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한량에 술고래에다 툭하면 기생집을 찾는 등 소란을 피우며 문필가 친구들에게 누를 끼쳤다. 그래도 인간적인 매력이 많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산토카를 모델로 한 만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실제 주인공이다.
일본의 시인. 세이세이는 어렸을 때 시가를 배웠는데, 그 하이쿠는 마사오카 시키에게 상찬을 받았다. 도쿄에 올라와서 한때 하이쿠 전문 잡지인 [호토토기스(ホトトギス, 두견새)]의 편집에 종사했다. 오사카로 돌아온 후, 아사히 신문에 ‘아사히 하이단(朝日俳壇)’의 심사를 맡아 오사카 하이단의 기초를 다졌다. 초기에는 요사 부손에 심취했고 나중에는 바쇼에 심취해 연구하는 데 노력했다. 일본의 시인. 세이세이는 어렸을 때 시가를 배웠는데, 그 하이쿠는 마사오카 시키에게 상찬을 받았다. 도쿄에 올라와서 한때 하이쿠 전문 잡지인 [호토토기스(ホトトギス, 두견새)]의 편집에 종사했다. 오사카로 돌아온 후, 아사히 신문에 ‘아사히 하이단(朝日俳壇)’의 심사를 맡아 오사카 하이단의 기초를 다졌다. 초기에는 요사 부손에 심취했고 나중에는 바쇼에 심취해 연구하는 데 노력했다.
저 : 마사오카 시키 (Shiku Masaoka,まさおか しき,正岡 子規)
하이쿠시인, 수필가. 근대 하이쿠 예술을 집대성한 인물. 시키 혹은 호토토기스라 불리는 두견새는 목에서 피를 토하도록 운다는 중국설화 때문에 폐결핵을 상징하는 새가 됐다. 대학시절 폐결핵이 발병한 이래 줄곧 병상을 멀리 떠나지 못했던 그는 필명을 시키라 짓고 하이쿠 연구와 창작에 몰두했다. 그가 만든 하이쿠 잡지 『호토토기스』는 하이쿠시인을 위한 창작의 장이 됐고 시키와 평생의 벗이었던 소세키의 작품이 처음 발표... 하이쿠시인, 수필가. 근대 하이쿠 예술을 집대성한 인물. 시키 혹은 호토토기스라 불리는 두견새는 목에서 피를 토하도록 운다는 중국설화 때문에 폐결핵을 상징하는 새가 됐다. 대학시절 폐결핵이 발병한 이래 줄곧 병상을 멀리 떠나지 못했던 그는 필명을 시키라 짓고 하이쿠 연구와 창작에 몰두했다. 그가 만든 하이쿠 잡지 『호토토기스』는 하이쿠시인을 위한 창작의 장이 됐고 시키와 평생의 벗이었던 소세키의 작품이 처음 발표되기도 했다. 수필집 「병상육척」은 고통스런 일상을 위트 있고 아름다운 문체로 써낸 산문으로 이름이 높다.
여성 시인. 원래 이름은 ‘지요조(千代女)’이나 불교에 귀의했기 때문에 ‘지요니’라고 불린다. 나팔꽃 하이쿠로 친숙하다. 바쇼의 제자 시코가 어린 지요니의 재능을 발견하고 문단에 소개함으로써 이름이 알려졌다. 여성 시인. 원래 이름은 ‘지요조(千代女)’이나 불교에 귀의했기 때문에 ‘지요니’라고 불린다. 나팔꽃 하이쿠로 친숙하다. 바쇼의 제자 시코가 어린 지요니의 재능을 발견하고 문단에 소개함으로써 이름이 알려졌다.
저 : 마츠오 바쇼 (Basho Matsuo,まつお ばしょう,松尾 芭蕉,마쓰오 바쇼, 무네후사(宗房))
일본의 하이쿠 작가, 서민문화가 꽃을 피웠던 17세기 에도 막부 시대 대표 시인. 아명 긴사쿠(金作), 본명 무네후사(宗房). 호는 처음에 도세이(桃靑)였다가, 후에 바쇼로 했다. 일본 에도시대(1603∼1868) 전기에 이가의 우에노에서 태어나 하이쿠를 대성한 유명한 인물이다. 1644년 지금의 미에현 이가우에노에서 농민이나 다름없는 가난한 하급 무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바쇼는... 일본의 하이쿠 작가, 서민문화가 꽃을 피웠던 17세기 에도 막부 시대 대표 시인. 아명 긴사쿠(金作), 본명 무네후사(宗房). 호는 처음에 도세이(桃靑)였다가, 후에 바쇼로 했다. 일본 에도시대(1603∼1868) 전기에 이가의 우에노에서 태어나 하이쿠를 대성한 유명한 인물이다.

1644년 지금의 미에현 이가우에노에서 농민이나 다름없는 가난한 하급 무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바쇼는 하이쿠를 접하면서 시문에 관심을 지닌 무사나 문인들과 교유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1662년 무렵 기타무라키긴의 데이몬 하이카이(俳諧: 하이쿠, 렌쿠의 총칭)를 배우고 본명인 무네후사(宗房) 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1666년 요시타다가 죽자, 교토에 가서 고전을 배우고 1672년에 에도로 가서 담림 하이카이를 배웠다. 스물아홉 살에 고향을 떠나 당시 새로운 도읍지였던 에도에 정착하였고, 인생의 전기를 맞아 하이쿠를 읊고 가르치면서 세상에 나오기 시작했다. 1680년 에도의 후카가와의 바쇼암(芭蕉庵)에 살면서 호를 바쇼로 바꾸고 독특한 풍의 하이카이를 만들었다. 1684년에는 에도에서 고향인 이가를 오고가며 기행문과 하이카이집을 편찬하였다. 서른일곱 살 젊은 나이에 돌연 모든 것을 내던지고 암자에 은거하며 고전을 탐독한다. 마흔한 살에 그때까지 고전에서 얻은 감동을 하이쿠에도 담아내고자 방랑의 길에 나선다. 여행길에서 보고 느낀 것을 중심으로 소박한 서민들의 삶과 자연을 노래했으며, 최소한의 상징적인 언어와 여백으로 무한한 우주를 창조하였다. 1687년 가시마, 스마, 아카시, 1688년에는 사라시나, 1689년에는 호쿠리쿠를 여행하며 바쇼풍의 하이쿠를 완성하게 된다. 1694년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 “방랑에 병들어 꿈은 마른 들판을 헤매고 돈다.”라는 마지막 시를 남기고 오사카에서 객사했다.

그는 한적하고 고담한 경지에서 자연과 일체가 되어 읊는 하이쿠를 즐겨 지었다. 또한 변화하는 것 속에서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을 함께 읊는 '불역유행(不易流行)'을 근본이념으로 삼았다. 바쇼의 문학은 여정을 중시한 중세적인 상징미를 근세적인 서민성 속에 살린 것으로 평가 받으며, 지금도 많은 이들이 바쇼의 방랑 여정을 따라 그의 시를 음미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에즈라 파운드, 옥타비오 파스 및 비트 제너레이션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하이쿠의 예술성을 높인 공적을 인정받고 있다.
헤이안 시대의 승려 시인이며 와카 작가(歌人)이다. 속명은 사토 노리키요(佐藤義淸). 무사의 신분을 버리고 승려가 되어 일본을 노래했다. 그의 가문은 무사 집안으로 사이교 역시 천황이 거처하는 곳(황거)의 북면을 호위하는 무사였다. 하지만 그는 1140년에 돌연 출가하여 불법 수행과 더불어 일본의 전통 시가인 와카 수련에 힘썼다. 각지를 돌아다니며 많은 와카를 남겼는데, 『신고금와카집(新古今和歌集)』에는 그의 작... 헤이안 시대의 승려 시인이며 와카 작가(歌人)이다. 속명은 사토 노리키요(佐藤義淸). 무사의 신분을 버리고 승려가 되어 일본을 노래했다. 그의 가문은 무사 집안으로 사이교 역시 천황이 거처하는 곳(황거)의 북면을 호위하는 무사였다. 하지만 그는 1140년에 돌연 출가하여 불법 수행과 더불어 일본의 전통 시가인 와카 수련에 힘썼다. 각지를 돌아다니며 많은 와카를 남겼는데, 『신고금와카집(新古今和歌集)』에는 그의 작품 94편이 실려 있다. 와카(和歌)와 고시쓰(故?)에 능통하였던 사이교는 스토쿠 천황의 와카 상대를 맡기도 했으나, 호엔 6년(1140년) 23세로 출가해 엔기(円位)라 이름하였다가 뒤에 사이교(西行)로도 칭하였다. 승려로 은둔하게 된 뒤 사이교는 구라마 산 등, 히가시야마와 사가 근교에 초막을 짓고 살며 전에 일한 적 있는 다이켄몬인의 뇨보들과도 교류하였고, 요시노와 구마노, 무쓰, 사누키 등 일본 곳곳을 돌며 불도를 수행하거나 우타마쿠라(歌枕)를 찾기도 하고, 때로 와카를 지었다.
저 : 료칸 (大愚良寬,다이구 료칸)
에도 시대의 승려이자 시인. 무욕의 화신, 거지 성자로 불리는 일본의 시승이다. 시승이란 문학에 밝아, 특히 시 창작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 불교 승려를 지칭하는 말이다. “다섯 줌의 식량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라는 말이 뜻하듯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무욕과 무소유의 최고 경지를 몸으로 실천하며 살았다. 료칸은 살아가는 방도로 탁발, 곧 걸식유행(乞食遊行)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일본 곳곳에 세워진 ... 에도 시대의 승려이자 시인. 무욕의 화신, 거지 성자로 불리는 일본의 시승이다. 시승이란 문학에 밝아, 특히 시 창작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 불교 승려를 지칭하는 말이다. “다섯 줌의 식량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라는 말이 뜻하듯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무욕과 무소유의 최고 경지를 몸으로 실천하며 살았다. 료칸은 살아가는 방도로 탁발, 곧 걸식유행(乞食遊行)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일본 곳곳에 세워진 그의 동상 역시 대개 탁발을 하는 형상이다. 료칸은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도 시를 써가며 내면의 행복을 유지하며 청빈을 실천했고, 그의 철학관은 시에 그대로 담겨 있다.
저 : 고바야시 잇사 (Issa Kobayash,こばやし いっさ,小林 一茶)
고바야시 잇사는 일본 에도 시대에 활약했던 하이카이시(俳諧師, 일본 고유의 시 형식인 하이카이, 즉 유머러스한 내용의 시를 짓던 사람)이다. 본명은 고바야시 미타로(小林?太?), 배호(俳?)를 잇사(一茶)라 하였다. 열다섯 살에 고향 시나노를 떠나 에도를 향해 유랑 길에 올랐다. 그 과정에서 소바야시 지쿠아로부터 하이쿠 등의 하이카이를 배웠다. 잇사가 서른아홉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계모와 유산을 놓... 고바야시 잇사는 일본 에도 시대에 활약했던 하이카이시(俳諧師, 일본 고유의 시 형식인 하이카이, 즉 유머러스한 내용의 시를 짓던 사람)이다. 본명은 고바야시 미타로(小林?太?), 배호(俳?)를 잇사(一茶)라 하였다. 열다섯 살에 고향 시나노를 떠나 에도를 향해 유랑 길에 올랐다. 그 과정에서 소바야시 지쿠아로부터 하이쿠 등의 하이카이를 배웠다. 잇사가 서른아홉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계모와 유산을 놓고 다투는 등 어려서부터 역경을 겪은 탓에 속어와 방언을 섞어 생활감정을 표현한 구절을 많이 남겼다.
30세 때 요사 부손에 입문했다. 입문 초기부터 두각을 나타내 부손을 보좌하여 일가를 묶어 냈다. 1779년에는 부손과 둘이서 오사카 · 셋츠 · 하리마 · 세토 우치 방면으로 음행의 여행에 나섰다. 온후한 성격으로 부손의 제자 모두와 친교를 가졌다. 부손 모음집을 편집하는 등 하이쿠의 중흥에 진력했다. 30세 때 요사 부손에 입문했다. 입문 초기부터 두각을 나타내 부손을 보좌하여 일가를 묶어 냈다. 1779년에는 부손과 둘이서 오사카 · 셋츠 · 하리마 · 세토 우치 방면으로 음행의 여행에 나섰다. 온후한 성격으로 부손의 제자 모두와 친교를 가졌다. 부손 모음집을 편집하는 등 하이쿠의 중흥에 진력했다.
헤이안 시대의 귀족. 시인. 아리와라노 나리히라는 825년 헤이제이 천황의 첫째 황자인 아보 친왕과 간무 천황의 딸인 이토 내친왕 사이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따라서 나리히라는 헤이제이 천황의 손자이자 간무 천황의 손자이기 때문에 천황 가문의 적통이었다. 그러나 구스코의 난에서 헤이제이 천황 세력이 패하면서 그의 후손들은 황위 계승과 멀어지고 황통은 사가 천황의 후손에게 이어졌다. 826년 사가 천황은 헤이제... 헤이안 시대의 귀족. 시인. 아리와라노 나리히라는 825년 헤이제이 천황의 첫째 황자인 아보 친왕과 간무 천황의 딸인 이토 내친왕 사이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따라서 나리히라는 헤이제이 천황의 손자이자 간무 천황의 손자이기 때문에 천황 가문의 적통이었다. 그러나 구스코의 난에서 헤이제이 천황 세력이 패하면서 그의 후손들은 황위 계승과 멀어지고 황통은 사가 천황의 후손에게 이어졌다. 826년 사가 천황은 헤이제이 천황의 후손들에게 아리와라노아소미(在原朝臣)라는 성을 내려 황족이었으나 신민의 신분으로 강하시켰다. 『삼대실록(三代實錄)』에 의하면 아리와라노 나리히라는 수려한 외모와 자유분방하고 정열적인 삶을 살며, 당시 관료에게 필요한 한문학보다는 사적인 연애 감정 등을 읊는 와카(和歌)에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한다. 『고금와카집(古今和歌集)』에 그가 읊은 와카 30수가 실려 있고, 이 작품의 가나(假名, 일본 고유의 글자)로 된 서문에는 그의 정열적 가풍에 대한 평이 실려 있다. 와카 명인으로서 6가선, 36가선 중 한 사람인 그는 설화집 『이세 모노가타리(伊勢物語)』의 주인공과 동일시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1848~1894.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1870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법관이 되기를 포기하고 레옹 보나(Leon Bonnat)의 스튜디오에서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1873년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했으며,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그림 그리기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는 사실주의 화풍을 공부하며 학문으로... 1848~1894.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1870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법관이 되기를 포기하고 레옹 보나(Leon Bonnat)의 스튜디오에서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1873년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했으며,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그림 그리기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는 사실주의 화풍을 공부하며 학문으로서 미술을 공부했지만 인상주의 화가들과 어울리며 그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75년 「마루를 깎는 사람들」을 살롱전에 출품했으나 너무 적나라한 현실감 때문에 심사위원들로부터 거부당했다. 그는 1876년 제2회 인상파 전시회에 이 작품을 출품하고,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인상파전에 참여하며, 전시를 기획하고 재정적인 지원을 했다. 그가 도움을 주었던 가난한 인상파 화가들은, 마네, 모네, 르느와르, 피사로, 드가, 세잔 등이었다.

그가 소장하고 있던 67점의 인상파 작품을 사후에 프랑스국립미술관에 기증했으나 ‘주제넘은 기증’에 당황하여 수용 여부를 놓고 한바탕 논란이 있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 논란을 계기로 인상파 화가들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카유보트는 고전적인 규범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파리의 모습을 주제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길 위의 풍경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커다란 도로, 광장, 다리, 그리고 그 위를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으며 19세기 새롭게 변화하는 파리의 풍경을 재현했다.

그의 작품은 치밀한 화면 구성과 화면을 구성하는 각 요소들 간의 균형, 독특한 구도, 대담한 원근법의 사용 등을 특징으로 한다. 그리고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과는 다르게 남성이 작품의 주제로 부상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창가의 남자(A Young Man at His Window)」(1875), 「마루를 깎는 사람들(The Floor Scrapers)」(1875), 「유럽 다리(The Pont du Europe)」(1876), 「비 오는 파리 거리(Paris Street, Rainy Day)」(1877), 「눈 쌓인 지붕(Rooftops Under Snow)」(1878), 「자화상(Self-portrait)」(1892) 등이 있다.
1879~1940. 스위스 화가이다. 국적은 독일이다. 현대 추상회화의 시조. 베른 근처 뮌헨부흐제 출생. 어려서부터 회화와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바이올린 연주에 뛰어났다. 스물한 살에 회화를 선택한 후에도 W. R. 바그너와 R. 슈트라우스, W. A. 모차르트의 곡들에 심취하여 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98~1901년 독일의 뮌헨에서 세기 말의 화가 F. 슈투크에게 사사하기도 하였다. ... 1879~1940. 스위스 화가이다. 국적은 독일이다. 현대 추상회화의 시조. 베른 근처 뮌헨부흐제 출생. 어려서부터 회화와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바이올린 연주에 뛰어났다. 스물한 살에 회화를 선택한 후에도 W. R. 바그너와 R. 슈트라우스, W. A. 모차르트의 곡들에 심취하여 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98~1901년 독일의 뮌헨에서 세기 말의 화가 F. 슈투크에게 사사하기도 하였다.

1911년 칸딘스키, F. 마르크, A. 마케와 사귀고, 이듬해 1912년의 ‘청기사’ 제2회전에 참가하였으나 1914년 튀니스 여행을 계기로 색채에 눈을 떠 새로운 창조세계로 들어갔다. 동료 화가들인 루이 무아예와 아우구스트 마케와 함께 아프리카 튀니지로 여행을 떠났던 클레는 여행 중에 느낀 감상을 “색채와 나는 하나가 되었다. 나는 화가다.”라고 표현했다. 그의 작품은 구상적인 미술양식과 추상적인 미술양식 모두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어느 특정 미술 사조에 속한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클레는 작품에서 엄격한 입방체와 점묘법, 그리고 자유로운 드로잉을 실험했으며, 그가 접했던 모든 미술 사조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특히 음악에 대한 관심은 그의 미술작품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빨강의 푸가」(1921)와 「A장조 풍경」(1930) 같은 많은 작품들은 음악적인 구조로 정돈되어 있는데, 마치 악보 위에 음표들을 배열하듯이 색채도 정확히 배열되어 있다.

저술로는 바우하우스에서 강의한 내용을 모은 『조형사고(造形思考, Das bildnerische Denken)』(1956), 『일기(Tagebucher)』(1957)가 있으며, 작품수장집은 스위스의 베른미술관 내 클레 재단에 약 3,000점이 소장되어 있다. 대표작으로는 「새의 섬」, 「항구」, 「정원 속의 인물」, 「죽음과 불」 등이다.
그림 : 차일드 하삼 (Frederick Childe Hassam)
1859~1935. 미국의 인상주의 화가. 미국의 도시와 해안을 주로 그렸다. 3,000점이 넘는 그림, 유화, 수채화, 에칭, 석판화 등을 제작했으며 20세기 초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미술품 및 공동품을 많이 소장한 성공한 사업가이며, 어머니는 미국의 소설가 너새니엘 호손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관심이 있었고 드로잉과 수채화에 뛰어났으나 그의 부모는 초... 1859~1935. 미국의 인상주의 화가. 미국의 도시와 해안을 주로 그렸다. 3,000점이 넘는 그림, 유화, 수채화, 에칭, 석판화 등을 제작했으며 20세기 초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미술품 및 공동품을 많이 소장한 성공한 사업가이며, 어머니는 미국의 소설가 너새니엘 호손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관심이 있었고 드로잉과 수채화에 뛰어났으나 그의 부모는 초기에 그의 재능에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나무조각가로 일했으며 1879년경부터 초기 유화를 만들기 시작했으나 선호하는 장르는 수채화였고 대부분 풍경화였다. 1883년 보스톤의 윌리엄스 에버렛 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서 수채화를 전시했다. 다음 해, 그의 친구들의 권유로 중간이름 없이, ‘차일드 하삼(Childe Hassam)으로 활동했다. 또한 서명에는 항상 초승달 모양의 상징을 추가했는데, 그 의미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1886년 프랑스의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구상적 드로잉과 회화를 공부했으며, 인상주의를 미국 미술계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80년대 중반, 하삼은 도시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보스턴 커먼의 황혼(Boston Common at Twilight)」(1885)은 그의 첫 번째 작품이었다. 미국의 미술평론가들의 반응은 냉담했으나 그는 크게 성공했고, 파리에서 생활하며 프랑스 예술가들과 교류하였다. 파리 뿐만 아니라 유럽 여러 나라, 칠레 등을 여행하며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

미국 인상주의의 선도적 역할을 했지만, 신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로 전환될 때 뒤늦게 인상주의에 합류했다. 후기 작품 중에 가장 독특하고 유명한 작품으로는 ‘깃발 시리즈(Flag Series)’로 알려진 30여 점의 그림이 있다. 1916년 뉴욕 5번가에서 열린 미국의 세계1차대전 참전 퍼레이드에서 영감을 얻어 연작을 만들었다. 그중 「빗속의 거리」는, 2009년 재선에 성공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집무실을 재정비하면서 걸어놓아 화제가 되었다. 1920년대부터 에드워드 호퍼나 로버트 헨리 같은 사실주의파에 합류하기도 했다.

1960년대 미국에서 인상주의 화풍이 부활하기 전까지, 하삼은 ‘비운의 버려진 천재’로 남았으나, 1970년대에 프랑스의 인상주의 작품들이 천문학적인 가격으로 거래되자, 하삼과 미국의 인상주의학파들은 다시 인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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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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