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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가을바람은 그냥 붑니다

윤동주, 백석, 정지용, 김소월, 노천명 저 외 13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저녁달고양이 | 2018년 09월 15일 리뷰 총점9.9 정보 더 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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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가을바람은 그냥 붑니다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09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112쪽 | 124g | 110*170*20mm
ISBN13 9791196324384
ISBN10 1196324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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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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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8명)

일제강점기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일제 강점기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노래한 민족시인. 우리 것이 탄압받던 시기에 우리말과 우리글로 시를 썼다. 윤동주는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 실을 가슴 아파하는 철인이었다. 그의 사상은 짧은 시 속에 반영되어 있다.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윤영석과... 일제강점기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일제 강점기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노래한 민족시인. 우리 것이 탄압받던 시기에 우리말과 우리글로 시를 썼다. 윤동주는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 실을 가슴 아파하는 철인이었다. 그의 사상은 짧은 시 속에 반영되어 있다.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윤영석과 김룡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윤동주는 청춘 시인이다. 절친한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의 시 ‘동주야’에 의하면 아직 새파란 젊은이로 기억되고 있었다. 한글을 구사하면서 작품을 발표한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만주 용정과 경성 신촌 일대에서 문학청년들과 몸을 부대끼며 시를 썼기에 청춘의 고뇌가 담겨 있다. 1925년(9세) 4월 4일, 명동 소학교에 입학했다. 1927년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 [새 명동]을 발간했다. 1931년(15세)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16세)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1934년(18세) 12월 24일, 「삶과 죽음」, 「초한대」, 「내일은 없다」 등 3편의 시 작품을 썼고 이는 오늘 날 찾을 수 있는 윤동주 최초의 작품이다. 1935년(19세)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로 편입했다. 같은 해 평양 숭실중학교 문예지 [숭실활천]에서 시 ‘공상’이 인쇄화되었다. 1936년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여 숭실학교를 자퇴하고 [카톨릭 소년]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를, 1937년 [카톨릭 소년]에 동시 「오줌싸개 지도」, 「무얼 먹고 사나」, 「거짓부리」를 발표했다. 1938년(22세)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문과에 입학했고 1939년 조선일보에 「유언」, 「아우의 인상화」, [소년(少年)]지에 「산울림」을 발표하였다. 처음 윤동주 시들은 노트에 봉인된 채, 인쇄되지도 않았고 신문 지면에 발표되지 않았다. 그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지고 난 후 동문들이 그의 노트에 있던 시를 모아 정음사에서 출판한다. 유해가 안치된 지 3년 후, 그러니까 1948년, 조선은 대한민국으로 국호가 바뀌어 혼란한 시기에 청춘 시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광복 후에 정병욱과 윤일주에 의하여 다른 유고와 함께「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만주 북간도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에 「달을 쏘다」, 「자화상」, 「쉽게 씌어진 시」를 발표하였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6개월 후에 교토 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하였다.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복역 중이던 1945년 2월 16일 광복을 여섯 달 앞두고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로 타계하였다.
저 : 백석 (BAEK SEOK,白石,白奭,백기행)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본명 백기행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식교육을 받았다. 필명은 백석(白石)과 백석(白奭)이 있었는데 주로 백석(白石)을 많이 사용하였다.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좋아하여 그의 이름 중 석을 택해서 썼다. 오산고보 재학 중 백석은 부친을 닮아 성격이 차분했으며 친...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본명 백기행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식교육을 받았다. 필명은 백석(白石)과 백석(白奭)이 있었는데 주로 백석(白石)을 많이 사용하였다.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좋아하여 그의 이름 중 석을 택해서 썼다. 오산고보 재학 중 백석은 부친을 닮아 성격이 차분했으며 친구가 없었다. 1936년 시집 ‘사슴’을 경성문화 인쇄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찍었다. 윤동주는 백석 시집을 구할 수 없어 노트에 시를 필사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해방 전 천재 시인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오산소학교, 오산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오산고보 졸업 후, 조선일보가 후원하는 춘해장학회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학과에 입학하였다. 김소월을 동경하면서 시인의 꿈을 키웠으며,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1934년에 귀국하여 8·15 광복이 될 때까지 [조선일보],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영어교사로, [여성사], [왕문사] 등에서 근무하며 시작 활동을 했다. 1935년 [조광] 창간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시작 활동 외에도 많은 외서들을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였으며 같은 해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하였다. 1939년 [여성]지 편집 주간 일을 사직하고 고향인 평북 지역을 여행하였다. 1940년 만주의 신징(지금의 장춘)으로 가서 3월부터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 말단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창씨개명의 압박이 계속되자 6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1942년 만주의 안둥 세관에서 일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신의주를 거쳐 고향인 정주로 돌아왔다.

1946년 북조선예술총동맹이 결성된 후 1947년 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 분과위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 번역에 매진했다. 1949년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신문]의 편집위원으로 위촉되었고 [아동문학]과 [조쏘문화] 편집위원을 맡으며 안정적인 창작활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57년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를 간행하였으나 1958년 ‘붉은 편지 사건’ 이후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면서 이후 창작과 번역 등 대부분의 문학적 활동을 중단했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국영협동조합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으면서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고 농촌 체험을 담은 시들을 발표했으나, 1962년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창작 활동을 접었다. 1996년까지 삼수군 관평리에서 농사를 짓다가 사망했다는 내용이 드러났지만 정확한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수용하여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 백석은 일제 강점기에도 모국어를 지키고자 하였다. 시집으로 『사슴』(1936)이 있으며, 대표 작품으로 「여우난골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이 있다. 북한에서 나즘 히크메트의 시 외에도 푸슈킨, 레르몬토프, 이사콥스키, 니콜라이 티호노프, 드미트리 굴리아 등의 시를 옮겼다. 1936년에 펴낸 시집 『사슴』에 그의 시 대부분이 실려 있으며 수록된 시 「통영」, 「적막강산」, 「북방」 등 백석의 대표작들은 실향 의식을 바탕으로 서민들의 삶을 토속적인 언어로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한국의 대표 모더니즘 시인으로 평가받는 백석의 시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1902년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에서 태어났다. 옥천보통공립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일본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22년 고교생 때 첫 작품 풍랑몽을 발표하며 데뷔했다. 시문학, 구인회 등의 문학 동인과 가톨릭 청년, 문장 등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휘문고보 교원을 거쳐 해방 후에는 이화여전교수, 경향신문주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시 납북되어 사망했다고 알려졌... 1902년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에서 태어났다. 옥천보통공립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일본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22년 고교생 때 첫 작품 풍랑몽을 발표하며 데뷔했다. 시문학, 구인회 등의 문학 동인과 가톨릭 청년, 문장 등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휘문고보 교원을 거쳐 해방 후에는 이화여전교수, 경향신문주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시 납북되어 사망했다고 알려졌으나, 전쟁으로 인해 폭사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아직까지 정확한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1926년 일본 유학중 「카페 프란스」 등 9편의 시를 발표하고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1933년 9인회를 결성하고 [가톨릭청년]의 편집고문을 맡아 다수의 시와 산문을 발표하였으며, 시인 이상을 문단에 등단시키기도 하였다. 1935년 첫 시집인 『정지용 시집』을 출간하였으며, 1939년 [문장]의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이한직, 박남수 등을 등단시켰다. 1950년 한국전쟁이 뒤에 납북되어 사망하였다.

섬세하고 독특한 언어를 구사, 생생하고 선명한 대상 묘사에 특유의 빛을 발하는 시인 정지용. 한국현대시의 신경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이상을 비롯하여 조지훈, 박목월 등과 같은 청록파 시인들을 등장시키기도한 시인이었다. 1902년 음력 5월 15일 충북 옥천읍에서 좀 떨어진 구읍의 청석교 바로 옆 촌가에서 한약상을 경영하던 영일 정씨 태국(泰國)을 아버지로 하동정씨 미하(美河)를 어머니로 탄생한 그는 그 당시 풍습에 따라 12살 때(1913) 동갑의 부인 송재숙과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 처가에서 결혼하였다. 이 부인 사이에 3남 1녀가 태어났으며, 그 가운데 차남과 3남은 6.25사변중에 행방불명 되었고, 현재 장남 구관과 장녀 구원만 생존해 있다.

그는 휘문고보 재학 시절 [서광] 창간호에 소설 「삼인」을 발표하였으며, 일본 유학시절에느 대표작의 하나인 「향수」를 썼다. 1930년에 시문학 동인으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전개하였고, 구인회를 결성하기도 하였으며 문장지의 추천위원으로 활동했다. 해방이 되서는 경향신문의 주간으로 일하고, 이화여대와 서울대에 출강하여 시론, 수필, 평문을 발표하였다.
저 : 김소월 (金素月, 김정식)
1902년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에 있는 외가에서 부친 김성도와 모친 장경숙의 장자로 출생한다. 본명은 김정식이다. 태어난 지 백일 후부터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의 본가에서 자란다. 1904년 부친 김성도가 당시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를 하던 일본 목도꾼에게 폭행을 당한 이후 정신 이상 증세에 시달린다.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할아버지의 손에서 컸는데, 이 무렵 시인의 길로 가도록 영향을 준 숙모 계희영을 ... 1902년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에 있는 외가에서 부친 김성도와 모친 장경숙의 장자로 출생한다. 본명은 김정식이다. 태어난 지 백일 후부터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의 본가에서 자란다. 1904년 부친 김성도가 당시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를 하던 일본 목도꾼에게 폭행을 당한 이후 정신 이상 증세에 시달린다.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할아버지의 손에서 컸는데, 이 무렵 시인의 길로 가도록 영향을 준 숙모 계희영을 만났다. 1915년 평안북도 곽산의 4년제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김억과 사제관계를 맺게 되고 한시, 민요시, 서구시 등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다. 후에 경성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1923년 졸업했다. 이후 일본 도쿄 상과대학교에 입학 후 귀국했을 시점에 시인 나도향과 만나 친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별과 그리움을 주제로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을 노래하는 시를 썼다. 김소월은 자신의 문학적 스승인 김억의 격려를 받아 그의 지도 아래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920년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등 5편을 소월(素月)이라는 필명으로 동인지 『창조』 5호에 처음으로 시 「그리워」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오산학교를 다니는 동안 김소월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21년 [동아일보]에 「봄밤」, 「풀 따기」 등을 발표했다. 1922년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를 개벽지에 발표하였으며, 1925년에 시론 「시혼(詩魂)」을 발표하고, 같은 해 7월호에 떠나는 님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을 발표하여 크게 각광받았다. 이는 시인이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으로 기록된다. 그 밖에 1923년 『깊고 깊은 언약』 『접동새』 1924년 『밭고랑 위에서』 『생과 사』 1926년 『봄』 『저녁』 『첫눈』 1934년 『제이, 엠, 에스』 『고향』 등을 발표했다.

1923년 도쿄상업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9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중퇴하고 귀국했다. 김소월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돕다가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어 1926년평안북도 구성군 남시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개설하고서 이도 실패하자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기도 했다. 예민한 성격이었던 김소월은 이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류머티즘을 앓으며 친척들에게도 대접을 받지 못하는 등 고생하다가 1934년 12월 24일 만 32세의 나이로 평안북도 곽산에서 아편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39년 스승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素月詩抄)』가 발간된다. 1977년 [문학사상] 11월호에 미발표 소월 자필 유고시 40여 편이 발굴, 게재된다.
한국의 시인. 황해도 장연 출생이다. 진명학교(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녀는 이화여전 재학때인 1932년에 시 「밤의 찬미」, 「포구의 밤」 등을 발표하였다. 그후 「눈 오는 밤」, 「망향」 등 주로 애틋한 향수를 노래한 시들을 발표했다. 널리 애송된 그의 대표작 「사슴」으로 인해 '사슴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독신으로 살았던 그의 시에는 주로 개인적인 고독과 슬... 한국의 시인. 황해도 장연 출생이다. 진명학교(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녀는 이화여전 재학때인 1932년에 시 「밤의 찬미」, 「포구의 밤」 등을 발표하였다. 그후 「눈 오는 밤」, 「망향」 등 주로 애틋한 향수를 노래한 시들을 발표했다. 널리 애송된 그의 대표작 「사슴」으로 인해 '사슴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독신으로 살았던 그의 시에는 주로 개인적인 고독과 슬픔의 정서가 부드럽게 표현되고 있으며, 전통 문화와 농촌의 정서가 어우러진 소박한 서정성, 현실에 초연한 비정치성이 특징이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중에 쓴 작품 중에는 「군신송」 등 전쟁을 찬양하고 전사자들을 칭송하는 선동적이고 정치적인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1957년 12월 10일 유명을 달리 하였다.
저 : 김영랑 (영랑令郞, 윤식)
시인, 본명은 김윤식이며 아호는 영랑(令郞)이다. 1903년 전라남도 강진에서 태어났다.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보통고등학교를 거쳐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 영문학과에서 수학했다. 그 후 1930년 3월 창간한 [시문학]을 중심으로 박용철, 정지용, 정인보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변영로, 김현구, 신석정, 허보 등 여러 시인과 더불어 아호인 영랑(令郞)으로 활동했다. 19... 시인, 본명은 김윤식이며 아호는 영랑(令郞)이다. 1903년 전라남도 강진에서 태어났다.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보통고등학교를 거쳐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 영문학과에서 수학했다. 그 후 1930년 3월 창간한 [시문학]을 중심으로 박용철, 정지용, 정인보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변영로, 김현구, 신석정, 허보 등 여러 시인과 더불어 아호인 영랑(令郞)으로 활동했다.

1935년에 첫 번째 시집인 『영랑시집』을 시문학사에서 간행했다. 『영랑시집』에는 총 53편의 시가 실려 있으며, 각각의 시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의 제목을 쓰지 않고 일련번호를 붙여 시집에 실었다. 이후 김영랑은 1949년에 중앙문화사에서 『영랑시집』을 출간했다.

김영랑은 조국 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및 삭발령을 거부했으며, 광복 후 신생 정부에 참여해 당시 중앙행정부인 공보처의 출판국장으로 일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유탄을 맞아 부상을 당해 9월 서울에 위치한 자택에서 4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현재 묘지는 서울 망우리에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사랑은 깊으기 푸른 하늘」 등 한국적 정서가 담긴 서정시를 많이 발표했다. 대표 시집으로 『영랑 시집』, 『영랑 시선』 등이 있다.
세속적인 것을 싫어하여 고독하게 살다가 1929년 11월 대구 자택에서 음독, 자살하였다. 이장희의 전 시편에 나타난 시적 특색은 섬세한 감각과 시각적 이미지, 그리고 계절의 변화에 따른 시적 소재의 선택에 있다. 대표작 「봄은 고양이로다」는 다분히 보들레르와 같은 발상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고양이’라는 한 사물이 예리한 감각으로 조형되어 생생한 감각미를 보이고 있다. 1920년대 초반의 시단은 퇴폐주의·낭... 세속적인 것을 싫어하여 고독하게 살다가 1929년 11월 대구 자택에서 음독, 자살하였다. 이장희의 전 시편에 나타난 시적 특색은 섬세한 감각과 시각적 이미지, 그리고 계절의 변화에 따른 시적 소재의 선택에 있다. 대표작 「봄은 고양이로다」는 다분히 보들레르와 같은 발상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고양이’라는 한 사물이 예리한 감각으로 조형되어 생생한 감각미를 보이고 있다. 1920년대 초반의 시단은 퇴폐주의·낭만주의·자연주의·상징주의 등 서구 문예사조에 온통 휩싸여 퇴폐성이나 감상성이 지나치게 노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섬세한 감각과 이미지의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뒤를 이어 활동한 정지용(鄭芝溶)과 함께 한국시사에서 새로운 시적 경지를 개척하였다.
박용철은 1930년대 사재를 털어 문예잡지 『시문학』 3권(1930), 『문예월간』 4권(1931), 『문학』 3권(1934) 등 도합 10권을 간행하였다. 또한 문학활동에 전념하면서도 그가 주재하던 시문학사에서 1935년 『정지용시집』과 『영랑시집』을 간행하였지만, 정작 자신의 작품집은 내지 못하였다. 『시문학』 창간호에 「떠나가는 배」·「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싸늘한 이마」·「비내리는 날」 등을 발표하면서... 박용철은 1930년대 사재를 털어 문예잡지 『시문학』 3권(1930), 『문예월간』 4권(1931), 『문학』 3권(1934) 등 도합 10권을 간행하였다. 또한 문학활동에 전념하면서도 그가 주재하던 시문학사에서 1935년 『정지용시집』과 『영랑시집』을 간행하였지만, 정작 자신의 작품집은 내지 못하였다. 『시문학』 창간호에 「떠나가는 배」·「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싸늘한 이마」·「비내리는 날」 등을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시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시문학』·『문예월간』·『문학』 및 기타 잡지에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또한 발표되지 않고 유고로 전하여진 작품도 상당수에 달한다. 자신이 주축이 된 시문학 동인활동과 ‘해외문학파’,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참여하여 연극공연을 위한 몇 편의 희곡(입센 원작 『인형의 집』, 그리고 「바보」, 「베니스 상인」, 「말 안 하는 시악시」, 「사랑의 기적」… 등)을 번역 및 창작하였으며 직접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방대한 번역시 등을 통해 해외문학을 국내에 소개하는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은 한국 근현대문학사에서 큰 의의라 하겠다. 또한 『삼천리문학』에 실린 박용철의 대표적인 평론인 「시적 변용에 대해서」(1938)는 지금도 널리 읽혀지는 시작(詩作) 이론이다. 이 시론을 통하여 1930년대 초반 『시문학』이 기틀을 잡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1930년대 중반부터는 모더니즘과 기교주의 논쟁에서도 순수파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이병각은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가 해체된 시기인 1935∼36년부터 평론, 산문, 시에 이르는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작품활동을 하였지만, 요절하여, 그 활동 기간은 카프 해소 이후 10여 년뿐이다. 현실도피적인 성향인 데다 후두결핵으로 문단활동도 활발하게 하지 못하였다. 그는 병든 몸으로 직접 한지에다 모필로 시집을 묶었는데, 그 첫 장에는 ‘가장 괴로운 시대에 나를 나허주신 어머님게... 이병각은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가 해체된 시기인 1935∼36년부터 평론, 산문, 시에 이르는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작품활동을 하였지만, 요절하여, 그 활동 기간은 카프 해소 이후 10여 년뿐이다. 현실도피적인 성향인 데다 후두결핵으로 문단활동도 활발하게 하지 못하였다. 그는 병든 몸으로 직접 한지에다 모필로 시집을 묶었는데, 그 첫 장에는 ‘가장 괴로운 시대에 나를 나허주신 어머님게 드리노라’(1940년 2월)라고 쓰여 있다.
1906년 4월 20일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부친을 여읜 뒤 모친의 재혼으로 장연(長淵)으로 이주했다. 1920년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했으나, 동맹 휴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퇴학 처분을 받아 경성부 동덕여학교 4학년에 편입해 약 1년간 수학했다. 1924년 양주동 등이 참여한 잡지 [금성]에 ‘강가마’라는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했고, 같은 해 9월 고향으로 돌아가 무산 아동을 위한 흥풍야학교를 개설... 1906년 4월 20일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부친을 여읜 뒤 모친의 재혼으로 장연(長淵)으로 이주했다. 1920년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했으나, 동맹 휴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퇴학 처분을 받아 경성부 동덕여학교 4학년에 편입해 약 1년간 수학했다. 1924년 양주동 등이 참여한 잡지 [금성]에 ‘강가마’라는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했고, 같은 해 9월 고향으로 돌아가 무산 아동을 위한 흥풍야학교를 개설해 학생과 농민을 지도했다. 그 뒤 신간회와 여성 단체인 근우회 활동에도 가담했다. 1931년 장하일과 결혼하고 간도에 이주해 살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한때 [조선일보] 간도지국장을 역임했으나, 건강 악화로 1942년 남편과 함께 간도에서 귀국해 요양하던 중 작고했다. 1931년 단편 소설 『파금(破琴)』으로 문단에 데뷔했고, 장편 소설 『어머니와 딸』을 발표함으로써 작가로 인정을 받았다.

어려운 살림살이와 병고, 그 리고 중앙 문단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준열한 작가 정신으로 식민지 한국의 빈궁 문제를 작품화하는 데 힘쓴 작가이다. 작가 강경애의 문제의식이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인간 문제』와 「지하촌」을 비롯해 「원고료 이백 원」, 「소금」, 「어둠」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다.

날카로운 안목으로 제국주의와 계급, 젠더 문제를 치밀하게 다룬 작가이자 언론인, 여성 운동가. 가난과 불우한 가족, 중앙 문단과 멀리 떨어진 지방살이이라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근대 최고의 작품들을 발표했다.
시인. 문학평론가. 시뿐 아니라 참신한 평론가로서 주목을 받았으나 문학에 대한 열망으로 지나치게 몸을 혹사하여 26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달리했다. 1953년의 평론 「윤동주의 정신적 소묘(精神的素描)」는 윤동주 시에 대한 최초의 연구로 평가된다. 시인. 문학평론가. 시뿐 아니라 참신한 평론가로서 주목을 받았으나 문학에 대한 열망으로 지나치게 몸을 혹사하여 26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달리했다. 1953년의 평론 「윤동주의 정신적 소묘(精神的素描)」는 윤동주 시에 대한 최초의 연구로 평가된다.
저 : 허민 (許民, 허종許宗, 허창호許昌瑚, 민民)
허민의 시는 자유시를 중심으로 시조, 민요시, 동요, 노랫말에다 성가, 합창극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갈래에 걸쳐 있다. 본명 허종(許宗), 필명 허창호(許昌瑚), 민(民)이다. 경상남도 사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시의 제재는 산·마을·바다·강·호롱불·주막·물귀신·산신령 등 자연과 민속에 속하며, 주제는 막연한 소년기 정서에서부터 농촌을 중심으로 민족 현실에 대한 다채로운 깨달음과 질병(폐결핵)에 맞서 싸우는 한 개인... 허민의 시는 자유시를 중심으로 시조, 민요시, 동요, 노랫말에다 성가, 합창극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갈래에 걸쳐 있다. 본명 허종(許宗), 필명 허창호(許昌瑚), 민(民)이다. 경상남도 사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시의 제재는 산·마을·바다·강·호롱불·주막·물귀신·산신령 등 자연과 민속에 속하며, 주제는 막연한 소년기 정서에서부터 농촌을 중심으로 민족 현실에 대한 다채로운 깨달음과 질병(폐결핵)에 맞서 싸우는 한 개인의 실존적 고독 등을 표현하고 있다. 「율화촌」, 「해수도」, 「아픈 다리」 등을 저술했다. 1937년 [동아일보] 진주지국 기자로 일하였으며, 지병인 폐결핵을 앓다가 1943년 봄 2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의 소설 『구룡산』으로 문단에 진출하여 민족 현실과 산촌의 궁핍한 삶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특히 민담, 전설을 잘 활용했다. 단편 『어산금(魚山琴)』은 '이태준' 작가의 추천으로 문예잡지에 게재되었고, 예술가 소설로 장신정신이 담겨있다. 또한 허민의 당대 시대를 반영한 문체가 그대로 들어나는데 경남 지역어를 풍부한 사투리가 그대로 담겨있는 것이 특징이다. 시적 자연 묘사가 두드러지고 있다.

허민은 이른 나이에 세상과 이별하여 많은 작품의 시, 경수필, 소설(아동문학) 등이 묻혀 있다가 사후 32년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1940년대 암흑기 우리 민족문학사의 한 자리를 메울 수 있는 윤동주와 쌍벽을 이루는 소설과 시인으로서 미발표 유작시 2백여 편이지만, 유작 소설만도 대부분은 6·25 때 소실됐으며 어려운 시대에 한글로만 작품을 썼다.
20세기의 위대한 시인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작가. 『두이노의 비가』, 『말테의 수기』 등 문학사에 남을 걸작을 내놓았다. 10대 초반이던 발튀스의 재능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화가의 길을 권했으며, 이후로도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875년 프라하에서 미숙아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르네 카를 빌헬름 요한 요제프 마리아 릴케다. 부친은 군인이었으나 병으로 퇴역하여 철도회사에 근무하였다. 릴케의 어머니는 ... 20세기의 위대한 시인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작가. 『두이노의 비가』, 『말테의 수기』 등 문학사에 남을 걸작을 내놓았다. 10대 초반이던 발튀스의 재능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화가의 길을 권했으며, 이후로도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875년 프라하에서 미숙아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르네 카를 빌헬름 요한 요제프 마리아 릴케다. 부친은 군인이었으나 병으로 퇴역하여 철도회사에 근무하였다. 릴케의 어머니는 릴케의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르네Rene라 짓고, 여섯 살까지 딸처럼 키웠다. 양친은 성격의 차이로 해서 릴케가 9세 때 헤어지고 말았다. 열한 살에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지만 적응하지 못한다. 이후 로베르트 무질의 첫 장편『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의 배경이 되는 육군고등사관학교로 옮기나 결국 자퇴한다. 1895년 프라하대학에 입학하고서 1896년 뮌헨으로 대학을 옮기는데, 뮌헨에서 릴케는 운명의 여인 루 살로메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평생 시인으로 살겠다고 결심한다.

살로메의 권유로 르네를 독일식 이름인 라이너로 바꿔 필명으로 사용한다. 1901년 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와 만나 결혼한다. 그녀가 로댕의 제자였으므로 그 자신도 로댕을 만나게 되어 예술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02년 파리에서 로댕을 만나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삼는다. 클라라와 헤어진 릴케는 로마에 머무르며『말테의 수기』를 완성하였으며, 이후 1911년에 마리 폰 투른 운트 탁시스-호엔로에 후작 부인의 호의로 두이노 성에서 겨울을 보낸다. 이곳에서 바로 전 세계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될 릴케 만년의 대작이며 10년이 걸려 완성할『두이노 비가』의 집필을 시작한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릴케는 스위스의 뮈조트 성에 머무는데, 이곳에서 그는 폴 발레리 등과 교유하며 여생을 보낸다. 발레리의 작품을 독어로 번역하고 또 직접 프랑스어로 시를 쓰던 시인은 1926년 백혈병으로 스위스의 발몽 요양소에서 죽는다.
1868년 피레네산맥 인근의 투르네에서 출생하였으며, 성장하며 보들레르의 시 작품에 매료되어 문학에 빠져든 것 외에 식물학과 곤충학에도 흥미를 보였다. 1888년 대학 입학시험에 불합격하고 그해 아버지가 심장병으로 급사하자 심한 충격을 받고 정서적 불안 상태를 겪었다. 1889년에는 소송 대리인 사무소에서 수습 생활을 하였으나 법률 공부에 싫증을 느끼고 전원생활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심각한 신경쇠약 증세... 1868년 피레네산맥 인근의 투르네에서 출생하였으며, 성장하며 보들레르의 시 작품에 매료되어 문학에 빠져든 것 외에 식물학과 곤충학에도 흥미를 보였다. 1888년 대학 입학시험에 불합격하고 그해 아버지가 심장병으로 급사하자 심한 충격을 받고 정서적 불안 상태를 겪었다. 1889년에는 소송 대리인 사무소에서 수습 생활을 하였으나 법률 공부에 싫증을 느끼고 전원생활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심각한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1890년 누나의 결혼 이후 어머니와 생활하며, 이해부터 강도 높은 시작(詩作)에 돌입한다. 1905년에는 시인 폴 클로델의 인도로 천주교에 입교하고, 1907년에는 지네트 고도르프(Ginette Goedorp)와 결혼했다.

1917년 프랑스 아카데미 문학 대상을, 1936년 프랑스 아카데미의 오말 상을 수상하였다. 1922년의 레종 도뇌르 훈장 수여는 거절하였다. 『시편』, 『시인의 탄생』, 『새벽 삼종기도에서 저녁 삼종기도까지』, 『앵초(櫻草)의 비탄』, 『삶의 승리』, 『하늘 속의 빈터』, 『기독교 농경시』, 『묘비명』, 소설 『클라라 델뵈즈, 혹은 한 옛 아가씨 이야기』, 평론집 『시 강의』 등을 출간하였다. 그 외에도 평생에 걸쳐 멈춤 없는 창작 활동을 하며 당시의 프랑스 시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38년 아스파랑에서 사망하였다.
저 : 무라사키 시키부 (Murasaki Shikibu,むらさき しきぶ,紫式部,이즈미 시키부)
헤이안(平安) 시대 중기에 활약한 여류작가로, 일본의 가장 위대한 문학작품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완전한 장편소설로 일컫는 『겐지 이야기』(源氏物語)의 저자다. 여관으로서의 이름은 후지 시키부(藤式部)이며 작가로서의 이름은 무라사키 시키부다. 진짜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몇몇 연구자들은 그녀의 본명이 후지와라 다카코였으리라 짐작하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무라사키'는 『겐지 이야기』의 등장인물 이름인 ... 헤이안(平安) 시대 중기에 활약한 여류작가로, 일본의 가장 위대한 문학작품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완전한 장편소설로 일컫는 『겐지 이야기』(源氏物語)의 저자다. 여관으로서의 이름은 후지 시키부(藤式部)이며 작가로서의 이름은 무라사키 시키부다. 진짜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몇몇 연구자들은 그녀의 본명이 후지와라 다카코였으리라 짐작하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무라사키'는 『겐지 이야기』의 등장인물 이름인 무라사키노 우에(紫の上)에서, 시키부는 아버지의 관직명에서 딴 것으로 전해진다.

서기 973년경 지금의 교토(京都)에서 후지와라 북가(北家) 계열의 하급귀족이자 한학자인 후지와라노 다메토키와, 후지와라 다메노부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두 살 때 생모와 사별하고 아버지 다메토키의 훈도를 받으며 자랐다. 남편이 지방의 태수로 임명될 경우 보통 부부가 헤어져 살면서 어머니가 아이를 키우던 헤이안 시대에서는 예외적인 경우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의 재능과 총명함을 알아보고, 여느 남자들처럼 한문 교육을 받게 했다. 『무라사키시키부 일기(紫式部日記)』에 따르면, 아버지가 아들 노부노리(惟規)에게 한학을 가르칠 때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무라사키시키부가 항상 먼저 해독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무라사키시키부의 뛰어난 재능과 지식은 훗날 『겐지 모노가타리』 창작의 밑거름이 되었다.

998년 당시로서는 만혼인 29세(998)에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아들이 있는 사촌인 후지와라노 노부타카와 결혼했다. 당시 노부타카는 45세였으며, 무라사키 시키부와 비슷한 나이의 아들이 있었다. 999년, 노부타카와의 사이에서 카타코(賢子)라는 딸을 얻었으나 결혼 생활은 사실상 얼마 안가 파국을 맞았고, 1001년 남편인 노부타카는 병으로 사망했다. 이후부터 홀로 어린 딸을 키우며 소설과 일기를 쓰는 일에 몰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무렵부터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적인 결혼 생활을 『겐지 모노가타리』 속에서 실현하려고 했다. 그녀는 당시의 권세가였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1005년경 이치조(986∼1011) 천황의 중궁인 아키코(彰子, 미치나가의 딸)의 뇨보(女房, 궁중에서 시중을 드는 궁녀)로 입궐했으며, 황후 데이시의 뇨보인 세이 쇼나곤과 라이벌로 대립하며 여러 편의 와카와 소설을 남긴다. 1013년 가을까지는 궐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이후로는 행적 불명이며, 1014년 정도에 사망했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당시의 궁중생활은 '히카루 겐지'를 주인공으로 한, 『겐지 이야기』를 집필하는데 많은 모티브를 제공하고 있다. 『겐지 이야기』는 당시의 궁정생활을 묘사하고 이상화한 것으로 이른바 헤이안조(朝) 미의식(美意識)을 선명하게 표현하였는데, 지극히 세련되고 우아한 귀족들로 이루어진 독특한 사회의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다. 주로 궁정귀족의 영화와 유미적(唯美的) 연애생활에 대한 찬미로 채워졌는데, 그 외에도 당시 중·하층 귀족계급 사이에서 서서히 제고되기 시작하였던 불교의 정토흔구(淨土欣求) 사상이 잘 나타나 있고, 연애와 도심(道心)의 상극의 묘사가 돋보인다. 히카루가 가장 사랑했던 여자인 무라사키노우에는 자신을 원형으로 한 인물로 그 당시 중류층에 머물러있었던 신분적 한계나 모자란 사랑 등 자신의 심경을 대변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겐지 이야기』의 집필시기를 무라사키 시키부의 남편인 후지와라노 노부타카(藤原宣孝)가 죽은 1001년부터 그녀가 궁정에서 시녀로 일하기 시작한 1005년까지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길고 복잡한 작품을 쓰는 데는 훨씬 더 오랜 세월이 걸려 1010년 무렵에도 끝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많다. 또, 히카루 겐지가 죽은 뒤의 이야기는 다른 작가가 썼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이 책을 현대어로 옮긴 세토우치 자쿠초는 무라사키 시키부가 오랜 세월을 두고 이 소설을 완성했을 것이란 설을 내세우고 있다.

이후 1010년경에는 『무라사키시키부 일기(紫式部日記)』, 1013년경에는 가집 『무라사키시키부집(紫式部集)』 등을 편찬하였고, 그 외에 『고슈이 와카집[後拾遺和歌集]』을 비롯한 『칙선집(勅選集)』에 60수 가까운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가마쿠라(鎌倉) 초기에 나온 이야기 평론집 『무묘조시(無名草子)』에는 '『겐지 이야기』가 쓰인 것은 부처님의 영험이며, 범부가 흉내 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겐지 이야기』는 작자 무라사키시키부의 와카(和歌) 및 한시문에 대한 조예와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 그리고 이야기에 대한 독자들의 요구 등이 삼위일체가 되어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00년 밀레니엄을 기념하여 새로 발행된 일본 화폐 2000엔 권의 뒷면에는 『겐지 이야기』 청귀뚜라미 권의 그림과 작자의 초상이 실리기도 했으며, 아서 웨일리가 번역한 『겐지의 이야기 The Tale of Genji』 (1935)는 영국 문학의 고전으로 남아있다.
저 : 오시마 료타 (大島蓼太,요시카와)
에도 시대의 하이쿠 시인. 본성은 요시카와. 마츠오 바쇼를 존경하여, 바쇼의 회귀를 주장하고 그 연구를 잇기 위해, 문하생을 3,000명 이상 양성했다. 마쓰오 부쇼 문학을 번창시키는 데 부손보다 더 큰 역할을 했다. 에도 시대의 하이쿠 시인. 본성은 요시카와. 마츠오 바쇼를 존경하여, 바쇼의 회귀를 주장하고 그 연구를 잇기 위해, 문하생을 3,000명 이상 양성했다. 마쓰오 부쇼 문학을 번창시키는 데 부손보다 더 큰 역할을 했다.
에도 시대의 하이쿠 시인으로, 1673~1681년에 아버지의 소개로 마츠오 바쇼의 문하에 들어가 시를 배웠다. 초문십철(蕉門十哲)이라 불리는 바쇼의 열 명의 제자 중 첫 번째 제자이다. 바쇼와 달리 술을 좋아했고 작풍은 화려했다. 구어체풍의 멋진 바람을 일으켰다. 에도 시대의 하이쿠 시인으로, 1673~1681년에 아버지의 소개로 마츠오 바쇼의 문하에 들어가 시를 배웠다. 초문십철(蕉門十哲)이라 불리는 바쇼의 열 명의 제자 중 첫 번째 제자이다. 바쇼와 달리 술을 좋아했고 작풍은 화려했다. 구어체풍의 멋진 바람을 일으켰다.
덴마크계 프랑스인의 인상주의 화가다. 가장 훌륭한 근대 풍경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며, 감정은 섬세하고, 초기 농원의 연작 또한 아름다운 매력이 있다. 서인도제도의 세인트토머스 섬 출생. 1855년 화가를 지망하여 파리로 나왔으며, 같은 해 만국박람회의 미술전에서 코로의 작품에 감명받아 그로부터 풍경화에 전념하였고, 수수하고 담담한 전원의 모습을 주로 작품에 담았다. 피사로는 폴 세잔과 폴 고갱에게 큰 영향을 미쳤... 덴마크계 프랑스인의 인상주의 화가다. 가장 훌륭한 근대 풍경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며, 감정은 섬세하고, 초기 농원의 연작 또한 아름다운 매력이 있다. 서인도제도의 세인트토머스 섬 출생. 1855년 화가를 지망하여 파리로 나왔으며, 같은 해 만국박람회의 미술전에서 코로의 작품에 감명받아 그로부터 풍경화에 전념하였고, 수수하고 담담한 전원의 모습을 주로 작품에 담았다. 피사로는 폴 세잔과 폴 고갱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 두 화가는 활동 말기에 피사로가 그들의 ‘스승’이었다고 고백했다. 한편, 피사로는 조르주 쇠라와 폴 시냐크의 점묘법 같은 다른 화가들의 아이디어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 1874년에 시작된 인상파그룹전(展)에 참가한 이래 매회 계속하여 출품함으로써 인상파의 최연장자가 되었다. 말년에 피사로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명성을 얻게 되는 것을 목격했고,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은 피사로를 존경했으며, 피사로는 인상주의 화가들 사이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붉은 지붕〉, 〈사과를 줍는 여인들〉, 〈몽마르트르의 거리〉, 〈테아트르 프랑세즈광장〉, 〈브뤼헤이 다리〉, 〈자화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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