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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 로즈 - 첼로 소나타 & 협주곡 녹음 전집 (Leonard Rose - The Complete Concerto and Sonata Recordings)

1949~1974년 미국 컬럼비아 레코드 녹음집

Heitor Villa-Lobos, Ernest Bloch, Camille Saint-Saens, Ludwig van Beethoven, Cesar Franck 작곡 외 35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Sony Classical | 2018년 05월 22일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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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 로즈 - 첼로 소나타 & 협주곡 녹음 전집 (Leonard Rose - The Complete Concerto and Sonata Recordings)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8년 05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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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소개

아티스트 소개 (40명)

작곡 : Heitor Villa-Lobos (에이토르 빌라 로보스)
브라질의 작곡가. 1887년 3월 5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스페인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도서관 사서이자 아마추어 작곡가인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웠다. 1899년 아버지가 죽은 뒤 카페와 영화관에서 첼로 연주를 했다. 1905년에 브라질 북동부를 여행하면서 민속 음악을 수집했다. 이 여행에 대해 알려진 것은 별로 없어, 북동부에서 식인종을 만났을 때의 모험을 회고한 것은 믿기 어렵다. 그 후에 리우데자네이루... 브라질의 작곡가. 1887년 3월 5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스페인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도서관 사서이자 아마추어 작곡가인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웠다. 1899년 아버지가 죽은 뒤 카페와 영화관에서 첼로 연주를 했다.

1905년에 브라질 북동부를 여행하면서 민속 음악을 수집했다. 이 여행에 대해 알려진 것은 별로 없어, 북동부에서 식인종을 만났을 때의 모험을 회고한 것은 믿기 어렵다. 그 후에 리우데자네이루의 국립 음악원에서 공부했지만 빌라로부스의 작품은 너무 독창적이었다. 몇 년 후에 빌라로부스 자신이 한 말을 빌리자면 그의 음악은 “폭포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대학은 거기에 한 발을 내미는 순간 최악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었다.

1912년 아마존 우림 지역에 갔다 온 것을 마지막으로 리우데자네이루로 돌아와서 정착했다. 1915년 11월 13일에 첫 작품 발표회를 가졌다. 그의 재능은 인정받아 1923년에 정부지원금을 받아 파리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1930년에 돌아와서는 음악을 가르쳤다.

빌라로부스의 음악 교육 역시 훌륭한 업적이다. 당시 세대의 브라질 사람들을 위한 음악 교수법을 고안해 냈는데, 브라질의 음악문화와 그들의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다. 민족음악을 접목시켜서 학생들을 위한 대편성 합창곡을 썼다. 빌라로부스가 죽은 지 40년이 지났지만 그의 교수법은 삼바 음악과 MTV에 영향을 받는 브라질의 지금 세대에게도 공감을 받고 있다.

1944년부터는 미국 전역을 돌며 지휘 활동을 하고, 미국 오케스트라에서 위촉된 작품과 영화음악을 작곡했다. 1959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생을 마감했다.
작곡 : Ernest Bloch (에르네스트 블로흐)
파리 출생. 7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뛰어난 음악적 재능은 흔히 모차르트의 유년시절과 비교되었다. 1846년 10세 때 데뷔하고, 12세 때 파리음악원에 입학하여 오르간과 작곡을 배웠다. 1853~1877년 마들렌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근무하면서는, 오르간 ·피아노 연주의 명수, 즉흥연주의 대가로 이름을 떨쳤다. 또 1861∼1865년에는 에콜 니데르메이에르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교수하였는데, A.메사제, G... 파리 출생. 7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뛰어난 음악적 재능은 흔히 모차르트의 유년시절과 비교되었다. 1846년 10세 때 데뷔하고, 12세 때 파리음악원에 입학하여 오르간과 작곡을 배웠다. 1853~1877년 마들렌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근무하면서는, 오르간 ·피아노 연주의 명수, 즉흥연주의 대가로 이름을 떨쳤다. 또 1861∼1865년에는 에콜 니데르메이에르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교수하였는데, A.메사제, G.포레 등은 이 시기의 제자들이다.

1871년 유지들과 파리에서 '국민음악협회'를 결성하고 유력한 멤버로서 프랑스음악계에 교향악운동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작곡가로서는 1852년과 1864년에 로마대상에 낙선하여 그 이후 1880년경까지는 별로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국민음악협회, C.라무뢰 등의 오케스트라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작품에는 '삼손과 델릴라 Samson et Dalila'(1877)를 비롯한 13편의 오페라, 교향곡 4, 피아노협주곡 3, 그 밖에 피아노곡을 비롯한 많은 기악곡이 있다. 작품은 모두 고전적인 단정함, 세련된 관현악법에 의한 화려한 표현이 특징이다.

자신의 말에 따르면 '사과나무가 사과를 맺듯이 운명처럼 작품을 썼다.' 고 하는 카미유 생상스('생상'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많은데, 작곡가의 후손이 밝힌 바에 따르면 '생상스'로 부르는 게 맞다고 한다).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즉흥 연주의 대가였고 리스트로부터는 '세계 최고의 오르간 주자'라는 찬사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작가이자 뛰어난 화가이기도 했으며 자연과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베를리오즈는 약간 비꼬는 투로 '생상스는 모든 분야에 뛰어나지만 미경험(未經驗)에 대해서만은 부족하다.'라고 말하기도 했지만(그러나 '오늘날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하나'라고 극찬한 적도 있다), 그의 왕성한 탐구심과 근면함(그는 죽기 바로 전날까지도 작곡을 했다)은 여러 장르에 걸쳐 많은 걸작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된 것도 사실이다.
작곡 : Ludwig van Beethoven (루드비히 판 베토벤)
1770년 12월 17일 세례 ~ 1827년 3월 26일)은 독일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된 이후 거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았다. 감기와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57세로 생을 마친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에 활동한 주요 음악가이며, 작곡가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음악의 성인(聖人)" 또는 "악성"(樂聖)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가장 잘 ... 1770년 12월 17일 세례 ~ 1827년 3월 26일)은 독일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된 이후 거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았다. 감기와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57세로 생을 마친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에 활동한 주요 음악가이며, 작곡가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음악의 성인(聖人)" 또는 "악성"(樂聖)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교향곡 9번》, 《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등이 있다.

베토벤의 조부는 21세의 나이에 브라반트 오스트리아 공국(현재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의 메헬렌 마을에서 본으로 이주한 귀족 출신의 음악가로, 손자와 동명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12-1773)이었다. 루트비히는 쾰른 선제후국, 클레멘스 아우구스트의 궁정에서 베이스 가수로 고용되었고, 결국 1761년에 카펠마이스터가 되었으며 본에서 저명한 음악가가 되었다. 그의 생애 말기에 그가 위임한 초상화는 그의 음악적 유산의 부적으로 그의 손자의 방에 남아 있었다. 루트비히에게는 같은 음악 기관에서 테너로 일하면서 그의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키보드와 바이올린 레슨을 한 외아들 요한(Johann van Beethoven, 1740-1792)이 있었다.

요한은 1767년에 마리아 막달레나 케베리히(Maria Magdalena Keverich, 1746-1787)와 결혼했다. 그녀는 트리어 대주교 궁정의 수석 요리사였던 하인리히 케베리히(Johann Heinrich Keverich, 1701-1759)의 딸이었다. 베토벤은 현재 본, 본가세 20번지의 베토벤 하우스 박물관에 해당하는 건물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생년월일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1770년 12월 17일에 성 레미기우스 가톨릭 교구에서의 그의 세례 기록은 존속하고 있다. 당시 이 지역의 관습은 출생 후 24시간 이내에 세례를 행하는 것이었다. 그의 생년월일이 12월 16일이라는 합의(베토벤 자신이 동의 한 바 있음)가 있지만, 이에 대한 문서로 된 증거는 없다.

요한 판 베토벤에게서 태어난 일곱 자녀 중 두 번째로 태어난 루트비히와 두 명의 남동생 만이 유아기에서 살아 남았다. 첫째 동생인 카스파 안톤 카를 베토벤(Kaspar Anton Karl van Beethoven, 1774-1815)은 형과 같이 작곡가가 되려고 했지만 일찍 포기하고 세무서원이 되었다. 피아노를 웬만큼 치기는 하였지만 별다른 재능이 없었기에 형의 비서 역할을 맡으며 출판을 도왔다. 하지만 나중에 형의 평판이 높아지자 형의 작품을 처분해서 한 몫 보려는 생각으로 형이 출판을 꺼려했던 초기의 습작들을 팔아치우는 등 여러가지로 형을 괴롭혔다. 카스파의 아들도 삼촌인 베토벤에게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막내동생인 니콜라우스 요한(Nikolaus Johann van Beethoven, 1776-1848) 역시 베토벤에게 골치 아픈 존재였다. 형의 도움으로 약제사가 된 그는 상당한 돈을 모은 후 형에게 빌려주고는 그것을 미끼로 형의 작품을 마음대로 처분했다. 품행이 단정치 못한 여인과 결혼할 때에도 형의 반대를 꺾고 결혼한 뒤부터는 더 멀어졌다. 사업수완이 좋아서 제법 재산을 모았으나 베토벤이 어려운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결코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베토벤의 첫 번째 음악 교사는 그의 아버지 요한이었다. 흔히 요한은 가혹한 선생이며 어린 베토벤을 "건반 악기 앞에 세워놓았고 아이는 대개 울고 있었다"고 회자되는데, 이는 그만큼 엄격한 아버지의 행동 때문이었다. 그러나 음악학자이자 음악평론가인 조지 그로브(Sir George Grove, 1820-1900)의 그로브 음악과 음악인 사전에서는 요한의 그런 행동에 대한 확실한 기록 증거가 없다고 지적하며, "억측과 속설은 둘 다 늘어나는 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요한은 혹독했을지 모르지만 아들의 두드러진 재능을 인식하고 베토벤에 대한 음악 교육을 같은 궁정의 동료들을 포함한 다른 유능한 교사들에게 재빨리 양도했다. 베토벤은 후에 궁정 오르간 연주자인 질 판 덴 에덴(Gilles van den Eeden, 1708-1782), 건반 수업을 한 가족의 후원자인 토비아스 프리드리히 파이퍼(Tobias Friedrich Pfeiffer, 1751-1805), 바이올린과 비올라 연주를 지도한 그의 친척 프란츠 로반티니Franz Rovantini 그리고 바이올린 연주를 지도한 한 궁정의 악장인 프란츠 안톤 리스Franz Anton Ries 등 다른 지역 교사들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그의 수업료는 5년차에 시작되었다. 체제는 엄하고 철두철미해서 종종 그는 눈물을 흘렸다. 불면증 환자 파이퍼의 개입으로 젊은 베토벤이 침대에서 건반으로 끌려가는 비정기적인 심야 세션이 있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어린 나이에 분명했다. 요한은 이 지역에서의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성공을 알고(아들 볼프강, 딸 나넬과 함께) 1778년 3월의 첫 공개 연주회 포스터에 베토벤이 여섯 살(그는 일곱 살이었다)이라고 주장하며 아들을 "신동"으로 선전하려고 했다. 여하튼 베토벤이 피아노 연주 "신동"으로 불린 건 사실이며 그 후 개인 연주회를 포함하여 많은 소규모 공연이 이어졌다. 평소 수줍음이 많았던 베토벤은 음악이 자신감을 높여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780년 또는 1781년에 베토벤은 본에서 가장 중요한 스승인 크리스티안 고틀로브 네페(Christian Gottlob Neefe, 1748-1798)와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 켐니츠 출신의 작곡가로서 많은 재능을 갖고 있었던 네페는 베토벤의 능력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그에게 작곡을 가르쳤다; 1783년 3월 베토벤의 첫 번째 출판 작품인 피아노 변주곡, 《드레슬러의 행진곡 주제에 의한 아홉 개의 변주곡, WoO 63》이 등장했다. 베토벤은 곧 네페의 보조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처음에는 무급(1782년)으로 일했고, 그 다음에는 궁정 예배당의 유급(1784년)의 직원으로 일했다. 그의 첫 세 개의 피아노 소나타, WoO 47은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Maximilian Friedrich von Konigsegg-Rothenfels, 1708-1784)에게 헌정되었기 때문에 때때로 Kurfurst ("선제후")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1783년에 출판되었다.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은 모차르트와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에 인정받았는데, 이 세 개의 소나타는 작곡가로서의 재능은 물론 그의 대담성을 일찌감치 엿볼 수 있게 한다. 같은 해에 베토벤에 대한 최초의 인쇄된 언급이 Magazin der Musik ("음악잡지")에 실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 11살 소년으로 가장 유망한 재능있는 소년이다. 그는 피아노를 매우 능숙하게 연주하고, 파워풀하게 연주하며, 책을 아주 잘 읽는다... 그가 연주하는 가장 중요한 작품은 스승 네페가 손에 쥐여준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이다 ..."

본의 선제후로서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의 후계자는 막시밀리안 프란츠(Maximilian Franz Xaver Joseph Johann Anton de Paula Wenzel, 1756-1801)였다. 그는 베토벤에게 약간의 지원을 하며 1784년 그를 두번째 궁정 오르간 연주자로 영구 임명하였고, 1792년 빈 방문을 위해 돈을 지불했다. 베토벤은 또한 궁정 예배당에서 하프시코디스트와 비올리스트로서 일했다.

베토벤은 몇 년 동안 그의 인생에서 중요해진 몇몇 사람들에게 소개되었다. 그는 교양 있는 폰 브로우닝von Breuning 가문을 자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독일 문학과 고전 문학을 접하였고 몇몇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으며 미망인이 된 폰 브로우닝로부터 어머니와 같은 우정을 제공받았다.

여기서 그는 그의 평생의 친구가 되었고 폰 브로우닝의 딸들 중 한 명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던 젊은 의대생 프란츠 게르하르트 베겔러(Franz Gerhard Wegeler, 1765-1848)를 만났다. 폰 브로이닝의 가족 환경은 알코올 의존증 환자인 아버지의 통제가 점점 심해지는 그의 가정 생활에 대안을 제시해 주었다. 폰 브로이닝 가문의 또 다른 단골은 페르디난드 폰 발트슈타인(Ferdinand von Waldstein, 1762-1823) 백작이었는데, 그는 베토벤의 본 시대 동안 친구이자 재정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발트슈타인은 1791년에 베토벤의 무대를 위한 첫 번째 작품인 발레 음악, 《기사 발레를 위한 음악, WoO 1》을 의뢰했다.

하이든, 발트슈타인의 도움으로 베토벤은 빈 귀족들의 살롱에서 연주자와 즉흥 연주자로서의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의 친구 니콜라우스 짐로크는 디터스도르프를 주제로 한 일련의 피아노 변주곡, WoO 66(디터스도르프의 오페라 《빨간 모자》 중 아리아 "옛날 한 노인이" 주제에 의한 열세 개의 변주곡 A 장조)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793년까지 그는 빈에서 피아노 거장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그는 작품의 최종적인 모습이 더 큰 영향을 미치도록 작품 출판을 보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첫 번째 빈 연주회는 1795년 3월이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그의 피아노 협주곡 중 하나를 연주했다. 이 공연 직후, 그는 Op.를 부여한 첫 번째 작품(세 개의 피아노 삼중주 1-3번, Op. 1)의 출판을 위해 편곡 작업을 했다. 이 작품들은 그의 후원자인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헌정되었고, 재정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베토벤의 수익은 1년 동안 그의 생활비를 충당하기에 거의 충분했다.

1796년 베토벤은 1789년의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처럼 중부 유럽의 문화 중심지를 순회하였다. 여정에는 모차르트의 연주여행에도 동행했던 리히노브스키 공작도 함께 하였다. 베토벤은 프라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베를린을 방문하였으며 작곡과 연주회 활동으로 환영받았다. 여행 중 그는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는데, 리히노브스키 가문의 인맥 덕분에 그는 도시에 오기도 전에 이미 명성이 높았다. 베를린에서는 첼로 소나타 1?2번, Op. 5를 작곡하여 첼로를 연주하는 음악 애호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에게 헌정하였다. 그것들은 첼로와 피아노의 서로 다른 성격을 잘 고려하고 있으며 비르투오소 첼로와 피아노 파트를 잘 결합한 것으로 유명하다. 왕은 베토벤에게 금화가 가득 든 코담뱃갑을 주었는데, 베토벤은 연주 여행으로 "많은 돈"을 벌었음을 알게 되었다. 1796년 7월 베토벤은 빈으로 돌아왔고 그해 11월 다시 여행을 떠났는데, 북쪽이 아닌 동쪽으로 가서 프레스부르크(오늘날의 브라티슬라바)와 페슈트로 갔다. 프레스부르크에서 그는 친구 안드레아스 슈트라이허(Johann Andreas Streicher, 1761-1833)가 보낸 피아노로 연주하였는데, 이를 놓고 그가 농담하기를 "나에게는 너무 좋다 ... 왜냐하면 이 피아노는 나만의 음색을 낼 수 있는 자유를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베토벤은 1797년에 거의 빈에서 체재하였는데, 그에게는 여름과 가을마다 심각한 질병(아마 티푸스)에 시달렸으나, 작곡(작곡 부탁을 받는 일이 많아졌다)과 연주를 계속하였다. 이 시기에(1795년일 수도 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청력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1798년 다시 프라하로 여행할 때, 청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결국 연주 여행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1799년 베토벤은 모차르트의 전 후원자인 라이문트 베츨라어 남작의 집에서 악명높은 피아노 "결투"에 참가, 거장 요제프 뵐플(Joseph Johann Baptist Wolfl, 1773-1812)에 대항하여 승리했다; 그리고 이듬해 모리츠 폰 프리스(Moritz Christian Johann Reichsgraf von Fries, 1777-1826) 백작의 살롱에서 다니엘 슈타이벨트(Daniel Gottlieb Steibelt, 1765-1823)를 상대로 비슷한 승리를 거두었다. 1799년 출판된 베토벤의 여덟번째 피아노 소나타 "비창", Op. 13은 음악학자 배리 쿠퍼(Barry Cooper, 1949?)에 의해 "성격의 강인함, 감정의 깊이, 독창성의 수준, 동기와 음조의 창의력 면에서 그의 이전 어느 작품들 보다도 능가하고 있다"고 묘사되었다.

1813년, 베토벤은 영국 피아니스트 찰스 네이트(Charles Neate, 1806-1879)에게 1798년 경 한 가수와의 다툼으로 인한 발작이 원인이 되어 청력 상실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그의 청력은 점진적으로 감소하면서 심각한 형태의 이명(耳鳴) 때문에 더욱 방해를 받았다. 일찍이 1801년에 그는 프란츠 베겔러(Franz Gerhard Wegeler, 1765-1848)와 또 다른 친구인 카를 아멘다(Carl Friedrich Amenda, 1771-1836)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증상과 그것들이 직업적, 사회적 환경 모두에서 일으킨 어려움들을 기술했다(그러나 그의 가까운 친구들 중 일부는 이미 문제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원인은 아마 귀경화증이었을 것이며, 아마도 청각 신경의 퇴화를 동반했을 것이다.

베토벤은 주치의의 충고에 따라 1802년 4월부터 10월까지 빈의 바로 외곽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하일리겐슈타트로 이주하여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현재의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로 알려진 문서를 썼는데, 이 문서는 그의 형제들에게 보내는 편지로서 그의 청각 장애로 인한 자살에 대한 생각과, 그의 예술을 통해 계속해서 살겠다는 결심을 기록하고 있다. 이 편지는 결코 보내지지 않았으며 그가 죽은 후 그의 서류에서 발견되었다. 베겔러와 아멘다에게 보낸 편지들은 그다지 절망적이지 않았다; 그 편지들 속에서 베토벤은 또한 그 시기에 진행 중이던 그의 직업적, 재정적 성공에 대해서 언급했고, 베겔러에게 말했다 시피 "운명의 멱살을 잡으십시오. 그것은 확실히 나를 완전히 짓밟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그의 결단에 대해서 언급했다. 1806년 베토벤은 자신의 음악 스케치 중 하나에서 "당신의 귀먹음이 더 이상 비밀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 예술에서 조차."라고 언급했다.

베토벤의 청력 손실은 그가 음악을 작곡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그의 삶의 이러한 단계에서 중요한 수입원인 연주회에서의 연주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것은 또한 그의 사회적 탈퇴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체르니는 베토벤이 1812년까지도 여전히 언어와 음악을 정상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베토벤은 결코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지는 않았다. 말년에도 그는 여전히 낮은 음색과 갑작스러운 큰 소리를 구별할 수 있었다.

베토벤이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빈으로 돌아온 것은 음악적 양식의 변화로 표시되었으며, 현재는 대규모로 작곡된 많은 창작품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중기 또는 "영웅적" 시기의 시작으로 지정되는 경우가 많다. 카를 체르니에 따르면 베토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까지 해 온 작업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길을 택할 것이다." 이 새로운 양식을 사용한 초기 주요 작품은 1803-04년에 작곡된 교향곡 3번 "영웅"이다. 나폴레옹의 경력을 바탕으로 한 교향곡을 만들고자 하는 아이디어는 1798년에 베르나도트 백작(칼 14세 요한)에 의해 베토벤에게 제안이 되었을 수 있다. 영웅적 혁명 지도자의 이상에 동조하는 베토벤은 원래 교향곡에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을 부여했지만 1804년에 나폴레옹이 자신을 "황제"라고 선언한 것에 환멸을 느꼈고 원고의 제목 페이지에서 나폴레옹의 이름을 긁어내었다. 교향곡은 1806년에 "위대한 사람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된Sinfonia eroica, composta per festeggiare il sovvenire d'un grand'uomo"이라는 부제와 현재의 제목인 "영웅 교향곡"으로 출판된다. "영웅"은 이전 교향곡보다 더 길고 더 거대했다. 1805년 초에 초연되었을 때 그것은 엇갈린 반응을 받았다. 어떤 청취자들은 그 길이에 반대하거나 그 구조를 오해했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걸작으로 보았다.

다른 중기의 작품들은, 베토벤이 물려받은 음악 언어와 같은 극적인 방식으로 확장된다. 라주모프스키 현악 사중주, 그리고 발트슈타인과 열정 피아노 소나타는 교향곡 3번 등의 영웅적인 정신을 공유한다. 이 시기의 다른 작품으로는 4번부터 8번까지의 교향곡과 오라토리오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 오페라 피델리오, 그리고 바이올린 협주곡 등이 있다. 1810년에 작가이자 작곡가인 E. T. A 호프만의 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 ("일반음악신문")에서의 영향력 있는 리뷰에서 베토벤은 "낭만주의 음악"의 작곡가 세 명 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칭송되었다; 호프만은 베토벤의 교향곡 5번에 관하여 드라마틱한 필치로 '깊은 밤의 장막을 뚫어내는 것'에 비유하면서, "이를 통해 우리는 열정과 함성을 모두 쏟아낼 수 있고, 꿋꿋이 살아남아 영혼의 파수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 천재의 광상곡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내적인 것과 연관성이 있고, 심중하고 친절하게 듣는 이들을 끝없는 정신세계로 끌어들인다"라며 칭찬했다. 이 기간 동안 베토벤의 수입은 자신의 작품 출판, 그것들의 공연, 그리고 출판 전 독점 기간 동안 후원자들에게 그들이 의뢰한 개인 공연과 작품의 사본을 제공했던 것으로부터 나왔다. 로브코비츠 공작과 리히노브스키 공작을 포함한 그의 초기 후원자들 중 일부는 그에게 작품을 의뢰하고 출판된 작품을 구매하는 것 외에도 연간 급여를 제공했다. 아마도 그의 가장 중요한 귀족 후원자는 1803년, 또는 1804년에 그와 함께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한 황제 레오폴드 2세의 막내 아들인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대공일 것이다. 그들은 친구가되었고 그들의 만남은 1824년까지 계속되었다. 베토벤은 루돌프에게 14개의 작곡을 바쳤다. 여기에는 대공 삼중주, Op. 97 (1811년) 및 장엄미사, Op. 123 (1823년)도 포함된다.

안 데르 빈 극장에서의 그의 지위는 1804년 초에 극장이 경영을 변경하면서 종료되었고, 친구인 스테판 폰 브로우닝(Stephan von Breuning, 1774-1827)과 함께 일시적으로 빈의 교외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레오노레(그의 오페라 원제)에 대한 작업이 잠시 주춤해졌다. 오스트리아의 검열관에 의해 다시 연기되었고, 마침내 1805년 11월에 현재의 피델리오라는 호칭으로 프랑스의 도시 점령으로 거의 비어 있던 집들에서 초연되었다. 이 피델리오 판은 재정적인 실패일 뿐만 아니라 중대한 실패작이기도 하였고, 베토벤은 그것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계속해서 인정을 받았다. 1807년에 음악가 겸 출판인인 무치오 클레멘티(Muzio Filippo Vincenzo Francesco Saverio Clementi, 1752-1832)가 영국에서 그의 작품을 출판할 권리를 확보했고, 하이든의 전 후원자 에스테르하지 왕자는 아내의 명일을 위해 미사곡(미사곡 다장조, Op. 86)을 의뢰했다.

1811년 봄, 베토벤은 두통과 고열을 겪으며 중병에 걸렸다. 그의 주치의 요한 말파티(Johann Baptist Malfatti von Monteregio, 1775-1859)는 테플리츠(현 체코의 테플리체) 온천에서 치료제를 복용할 것을 권유했다. 테플리츠에서 그는 코체부의 극에 사용할 서곡을 포함한 부수 음악 2개-슈테판왕, Op. 117과 아테네의 폐허, Op. 113을 썼다. 다음 해에도 테플리츠를 다시 방문하라는 조언을 받은 베토벤은 그곳에서 괴테를 만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는 다양한 귀족, 군주들과 함께 재능있는 작가 베티나 브렌타노도 있었다. 이러한 만남을 추진한 것은 바로 베티나였다. 베티나는 베토벤과 괴테, 모두를 존경하고 있었다. 얼마후 괴테는 카를 프리드리히 젤터(Carl Friedrich Zelter, 1758-1832)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그(베토벤)의 재능은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성격입니다. 그가 세상을 혐오스럽게 여기는 것이 전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그러한 그의 태도는 자신이나 타인을 더 이상 즐겁게 하지 못합니다." 베토벤은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출판사에 "괴테는 시인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궁정의 분위기를 좋아합니다."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 후에 그는 괴테의 한 쌍의 시를 기반으로 1815년에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조용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 Op. 112를 작곡하게 된다. 이것은 1822년에 시인에게 헌정되며 출판되었고, 베토벤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젊었을 때 이미 소중히 여겼던 유일한 불멸의 괴테를 위해 간직하고 있던, 감탄과 사랑과 존경이 지속되었습니다." 음악적 취향과 같은 괴테의 사회적 태도는 보다 형식적인 시대에 형성되었다. 스물 한 살 후배인 베토벤에게 있어서 진정한 귀족은 예술가 뿐이었다. 20년 후 베티나가 보고한 것 처럼, 신화에 대한 그의 환멸은 거리에서 왕족을 만났을 때 괴테의 행동에 의해 결정되었다. 베토벤이 괴테에게 말했다. "귀족들도 우리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길을 양보할 것이니 계속 걸으십시오." 그러나 괴테는 길가로 비켜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했다. 베토벤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들의 행렬을 바로 통과했다. 그리고 괴테를 기다리며 베토벤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존경하고 당신의 작품을 존경하기 때문에 당신을 기다렸지만 당신은 그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존경심을 보였습니다."

1812년, 그가 테플리츠에 있는 동안 그는 그의 "불멸의 연인"에게 10 페이지 분량의 러브레터를 썼는데, 그는 이 편지를 그 수취인에게 보내지 않았다. 음악학자 메이너드 솔로몬이 의도한 수신자가 안토니 브렌타노(Antonie Brentano, 1780-1869)인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된 수신자의 신원은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 모든 것들은 베토벤이 빈에서의 첫 10년 동안 가능한 소울메이트로 여겨져 왔다. 귀차르디(Julie Guicciardi, 1784-1856)는 베토벤과 바람을 피웠지만 그에게 진지한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고 1803년 11월에 갈렌베르크 백작과 결혼했다(베토벤은 후대의 비서 겸 전기작가인 안톤 쉰들러에게 "(귀차르디가) 나를 찾았고 울었지만, 나는 그녀를 경멸했다"고 주장했다. 요제피네(Josephine Brunsvik or Countess Josephine Deym, 1779-1821)는 베토벤이 그녀로 인해 열병을 앓고 있을 때에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귀족, 그리고 부유한 귀족과 결혼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설득으로 노인 백작 요제프 다임(Joseph von Deym, 1752-1804)과 결혼했다. 요제프 다임은 1804년에 사망했다. 베토벤은 그녀의 집을 방문하기 시작했고 열정적인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요제피네가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지만, 그녀가 부다페스트로 이주한 후에도 계속해서 그녀에게 말을 걸어, 마침내 1807년에 그녀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내가 당신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듯 여전히 나타나길 바라주셔서 감사합니다." 말파티(Therese Malfatti von Rohrenbach zu Dezza, 1792-1851)는 베토벤의 주치의의 조카딸로 1810년에 그녀에게 청혼했었다. 그는 40세, 그녀는 19세였다. 그 제안은 거절당했다. 그녀는 이제 피아노 바가텔 엘리제를 위하여, WoO 59의 수령자로 기억된다.

823년에는 세 개의 주목할 만한 작품이 완성되었다. 이 작품들은 모두 몇 년 동안 베토벤을 점령하고 있던 것들로서 장엄미사, 교향곡 9번, 디아벨리 변주곡이 바로 그것들이다. 베토벤은 마침내 완성된 미사곡 사본을 3월 19일(대공이 대주교로 취임한 지 1년이 지난 때)에 루돌프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그는 작품의 원고를 독일과 유럽의 여러 법원에 각각 50 듀카트로 수익성 있게 판매 할 수 있다는 개념을 세웠기 때문에 출판이나 공연을 서두르지 않았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소수 중 한 명은 베토벤에게 무거운 금메달을 보냈던 프랑스의 루이 13세였다. 교향곡과 변주곡은 나머지 베토벤 작업 연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디아벨리는 두 작품을 모두 출판하기를 원했지만 미사곡의 잠재적 인상은 슐레진저와 피터스를 포함한 다른 많은 출판사들이 베토벤에게 로비를 하게 했다. 그리고 결국 쇼트(Schott Music)에 의해 획득되었다.

베토벤은 건강이 나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갈리친을 위해 현악 사중주를 쓰기 시작했다. 이것들 중 첫 번째의 사중주 12번 E♭ 장조, Op. 127은 1825년 3월에 슈판치히 사중주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1825년 4월, 사중주 A 단조 15번, Op. 132를 쓰다가 갑작스런 병에 걸렸다. 바덴에서 회복하면서 그는 "건강을 회복한 자가 신에게 감사하는 신성한 노래, 리디안 선법을 따름"이라고 불리는 느린 악장을 착수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완성된 것은 사중주 13번 B♭ 장조, Op. 130이었다. 6악장에서 마지막 대위법의 악장은 1826년 3월의 초연에서 연주자와 관객 모두에게 매우 어려운 것으로 증명되었다. 베토벤은 출판사 아르타리아에 의해 추가 요금을 받으며 새로운 피날레를 쓰고 마지막 악장을 별도의 작품(대푸가, Op. 133)으로 발행하도록 설득되었다. 베토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이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사중주 14번 C# 단조, Op. 131이며 베토벤은 이것을 가장 완벽한 단일 작품으로 평가했다.

베토벤과 그의 조카 카를과의 관계는 계속해서 격렬했다. 베토벤이 그에게 보낸 편지는 요구가 지나쳤고 꾸짖는 방식이었다. 8월 베토벤의 뜻에 반하여 어머니를 다시 만난 카를은 자살을 시도했다. 그는 살아 남았고 퇴원 후 베토벤과 그의 삼촌 요한과 함께 그나이젠도르프로 요양하러 갔다. 그곳에 있는 동안 베토벤은 추가로 사중주(F 장조 16번, Op. 135)를 완료하여 슐레진저에게 보냈다. 베토벤은 마지막 악장에서 도입부의 느린 화음 아래에 "Muss es sein?"("그래야만 하는가?")라는 문구를 붙였다; 그 응답의 문구는 이 악장의 더 빠른 제1주제 위에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라고 적혀 있다. 악장 전체는 제목처럼 "어려운 결정"("Der schwer gefasste Entschluss")을 향하고 있다. 11월에 베토벤은 최종 작품인 사중주 13번 B♭ 장조, Op. 130의 대체 피날레를 완성했다. 이때 베토벤은 이미 병이 들어 우울해 있었다; 그는 요한과 다투기 시작했고, 요한은 그의 아내보다 우선권으로 카를을 상속자로 삼았다고 주장했다.

베토벤은 종종 30세 무렵부터 질병에 시달렸다. 설사, 복통, 산통, 열병, 또는 염증과 같은 다양한 증상에 대한 설명이 있다. 한편으로는 급성 질환이 원인으로 간주 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 이상의 만성 질환이 주요 원인으로 명명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납 중독, 브루셀라증 및 잦은 음주 등이 의심되고 있다. 현재까지는 베토벤의 건강 문제가 한 가지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여러 가지 다른 원인으로 인한 것인지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베토벤의 전기 작가들은 예술가가 값비싼 사탕 수수 설탕 대신 납 설탕으로 달게 했던 값싼 화이트 와인을 정기적으로 마셨다고 언급했다. 베토벤의 뼈와 머리카락에는 거의 측정되지 않은 농도의 납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질병의 빈도와 강도가 증가했다. 1821년 여름, 심한 황달이 간경변을 예고했다. 베토벤은 목욕과 란트 체류에 대한 불만에서 구제를 구했고, 1826년 9월 29일 그의 조카와 함께 그나익센도르프에 있는 그의 형제 요한의 집으로 옮겨 석달동안 머물렀다. 12월 초, 춥고 습한 날씨에 열린 차를 타고 빈으로 돌아오는 여행에서 베토벤은 폐렴에 걸렸다. 회복 직후 다리와 복부의 수분 저류 및 황달과 함께 심각한 간경변 증상이 나타나 베토벤은 더 이상 병상을 떠날 수 없었다. 카를은 12월 동안 베토벤의 침대 옆에 머물렀다. 하지만, 다음 해 1월 초에 이흘라바에 입대하기 위해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베토벤에게 편지를 썼다ː "사랑하는 아버지... 나는 만족하며 살고 있으면서도, 당신과 헤어지게 된 것 만은 후회합니다." 하지만 카를은 삼촌을 다시 보지 못했다. 카를이 떠난 직후 베토벤은 그의 조카를 유일한 상속자로 만드는 유언장을 썼다.

1월 말에는 베토벤의 병 치료를 위해 말파티 박사가 참석했다. 그의 치료는 주로 알코올에 집중되었다. 베토벤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소식이 퍼지자 디아벨리, 슈판치히, 리히노프스키, 쉰들러, 훔멜과 그의 제자 페르디난트 힐러를 포함한 많은 오랜 친구들이 방문했다. 런던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에서 온 백 파운드, 쇼츠에서 온 값비싼 와인을 포함하여 많은 조공과 선물도 보내졌다. 이 시기 동안 베토벤은 때때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는 용감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의 완전히 병상에 누워 있었다. 3월 24일, 그는 쉰들러와 다른 사람들에게 "박수를 쳐주게, 친구들, 희극은 끝났네."라고 말했다. 그날 늦게, 쇼트에서 온 와인이 도착했을 때, 그는 속삭였다. "애석하군, 너무 늦었네."

여러 의사들에 의한 몇 차례의 천공과 실패한 치료 시도 끝에 베토벤은 1827년 3월 26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의사는 안드레아스 이그나츠 바브루흐였다. 베토벤의 임종시, 안젤름 휘텐브렌너와 요한나 판 베토벤 만이 참석했다. 바르부흐에 따르면, 오후 5시 경에 번개와 천둥 소리가 들렸다ː "베토벤은 눈을 뜨고 오른손을 들어 주먹을 쥐고 몇 초 동안 올려다 보았다.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고, 심장박동도 뛰지 않았다." 많은 방문객이 임종을 보러왔다.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 일부는 휘텐브렌너와 힐러에 의해 보관되었다. 부검 결과 베토벤은 과도한 알코올 섭취와 청각 및 기타 관련 신경의 상당한 확장으로 인해 심각한 간 손상을 입었다.

3월 29일 배링 지역 공동 묘지의 매장은 빈 인구의 큰 공감으로 이루어졌다. 약 2만명이 장례 행렬에 참여했다. 프란츠 그릴파르처가 쓴 장례식 연설은 배우 하인리히 안쉬츠가 연설했다. 불과 1년 후 베토벤을 따라 무덤까지 가야했던 프란츠 슈베르트는 훔멜, 체르니, 그릴파르처, 마이세더, 슈판치히, 카스텔리, 베른하르트, 피링거, 하슬링거, 뵘, 슈트라이허, 슈타이너, 홀츠, 볼프마이어, 링케와 함께 36명의 성화 운반자 중 한 명으로서 그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했다.

베토벤의 시신은 두 번 발굴되었다. 1863년에 뼈를 측정하고 두개골을 촬영했다. 1888년에 그의 유골은 다시 대중적인 지지를 받으며 빈 중앙묘지의 명예 묘역으로 옮겨졌다.
작곡 : Cesar Franck (세자르 프랑크)
벨기에 출신의 프랑스 작곡가이자 오르간 연주자이다. 프랑크는 벨기에 리에주의 독일계 벨기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피아노 연주자가 되기를 바랐고, 리에주에 있는 음악원에 보냈다.리에주 음악원에서 배움을 시작해 1835년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 피아노에서 《푸가와 그 밖의 것》 등으로 1등상을 받는 등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나 부친으로 인해 일단 벨기에로 돌아온 뒤 1844년에 재차 파리로 ... 벨기에 출신의 프랑스 작곡가이자 오르간 연주자이다.

프랑크는 벨기에 리에주의 독일계 벨기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피아노 연주자가 되기를 바랐고, 리에주에 있는 음악원에 보냈다.리에주 음악원에서 배움을 시작해 1835년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 피아노에서 《푸가와 그 밖의 것》 등으로 1등상을 받는 등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나 부친으로 인해 일단 벨기에로 돌아온 뒤 1844년에 재차 파리로 나와 정주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파리는 오페라 만능의 추세에 있었으며 그는 1845년 이후 교회 오르가니스트의 길을 택하여 1858년에는 생 클로티드 성당의 주자가 되었다. 1872년에는 실력을 인정받아 파리 음악원의 오르간과 교수가 되었다. 그는 교회의 오르간석에 앉아 있으면서 당시 일반적으로 관심이 적었던 바흐, 베토벤을 연구하는 등 꾸준히 실력을 기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기간의 남모르는 그의 노력은 만년에 이르러 작곡가로서의 천분을 풍족한 결실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초기의 가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등은 아직 개성이 빈약하여 때로는 자칫하면 살롱풍의 요설(饒舌) 같은 위험을 범하기 쉬웠으며 그의 중기(中期)에는 미사곡, 오르간곡 외에 종교음악이 점차 충실함을 보이기 시작하였으나 프란츠 리스트 등 독일 낭만주의 음악의 영향에 바흐를 가미한 수법으로 충분한 확신을 엿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오라토리오 《속죄(贖罪)》(1861-1872)를 비롯한 만년의 여러 작품은 온갖 장르에서 리스트나 바그너의 반음계적 화성과 바흐에게 배운 폴리포니, 그리고 베토벤에게 배운 전개 내지는 변주를 개성의 내부에서 굳게 결부시키고 있다. 말하자면 중기(中期)에서 발견되었던 한 방향을 확실한 토대 위에 확립시키고 원숙해짐을 꾀하는 일에 성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경우 교향곡이나 실내악곡에는 순환형식의 이름으로 불리는 한 수법이 다악장 구성을 주제적 및 논리적으로 연결짓는 것으로서 예리하게 추구되고 있다. 이리하여 프랑크는 독일음악에서 많은 것을 배워 프랑스 19세기 후반의 순수기악 부흥에 큰 추진력이 되었다. 그리고 일반이 그에 대한 몰이해를 마침내 개선하려 하고 있었을 때 불행하게도 마차에 치여 가슴을 다친 것이 원인이 되어 병상에 누워 몇 해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사망 후 그를 따랐던 많은 사람들, 즉 앙리 뒤파르크, 뱅상 당디, 에르네스트 쇼송, 보르드, 알렉시스 드 카스티용, 알투르 코키알(1846-1910), 피엘 드 브레빌(1861-1949), 가브리엘 피에르네(1863-1937), 폴 피달르(1863-1931), 조제프 기 로파르(1864-1955), 기욤 르쾨(1870-1894) 등의 준재(俊才)들은 '프랑키스트'라고 하는 그룹을 스스로 형성하여 스승 프랑크의 정신을 지주로 삼아 프랑스 근대음악에서 큰 세력을 이룩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또한 댕디의 '스콜라'를 통하여 현대에 이르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교향곡 라단조 (1888)》,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적 변주곡 (1885)》, 《교향시》 3곡(1882, 1884, 1888), 《피아노 5중주》(1879),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1886)》, 《현악 4중주곡 D장조》(1889), 피아노 독주를 위한 《전주곡, 코랄과 푸가 (1884)》, 《전주곡-아리아와 피날레》(1887), 오르간을 위한 《3장》(1878), 오라토리오 《속죄》 《지복(至福)》(1879), 가곡 《녹턴(夜想曲)》(1884), 《행렬》(1888) 등이 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위대한 작품 중 하나는 《코랄 제3번 가단조 (1890)》이다. 프랑크는 1890년에 마차채에 찔리는 사고로 늑막염을 얻어 사망하여 파리의 몽파르나스 구역에 있는 몽파르나스 묘지에 안장되었다.
작곡 : Edvard Grieg (에드바르드 그리그,Edward Hagerup Grieg)
작곡 : Franz Schubert (프란츠 슈베르트)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독일어: Franz Peter Schubert, 1797년 1월 31일 ~ 1828년 11월 19일)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음악의 최고봉 중 한 사람이다. 관현악곡·교회 음악·실내악·피아노곡 등 명작이 많은데, 특히 리트(독일 가곡)에 뛰어난 작품이 많으며, 19세기 독일 리트 형식의 창시자이다. 여러 가지 의문점을 남긴 채 31세로 병사한 그는 가난과 타고난 병약함 등의 어려움에도 불...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독일어: Franz Peter Schubert, 1797년 1월 31일 ~ 1828년 11월 19일)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음악의 최고봉 중 한 사람이다. 관현악곡·교회 음악·실내악·피아노곡 등 명작이 많은데, 특히 리트(독일 가곡)에 뛰어난 작품이 많으며, 19세기 독일 리트 형식의 창시자이다. 여러 가지 의문점을 남긴 채 31세로 병사한 그는 가난과 타고난 병약함 등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600여 편의 가곡, 13편의 교향곡, 소나타, 오페라 등을 작곡했으며, 가곡의 왕이라고 불린다.

오스트리아 대공국 빈의 교외 리히텐탈에서 독일의 슐레지엔의 자작농 출신이자 초등학교 교장인 아버지와 요리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음악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음악에 재능이 있는 슈베르트에게 5살부터 악기교육을 시켰고, 1년 뒤 그의 아버지의 학교에 입학한 슈베르트는 그때부터 공식적인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슈베르트에게 바이올린의 기초를 가르쳤으며, 그의 형 이그나츠는 슈베르트에게 피아노 교습을 시켰다. 7살부터 지역 교회의 합창단장인 미하엘 홀처로부터 교습을 받았다. 또한 가족 현악 4중주에서 형 이그나츠와 페르디난트는 바이올린을, 아버지는 첼로를, 자신은 비올라를 맡아 연주하기도 하였다. 슈베르트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으나 아버지가 음악을 가르친 이유는 단순히 취미였을 뿐, 슈베르트를 음악인으로 키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중에 어른이 된 슈베르트는 교사가 되길 바라는 아버지와 진로문제로 갈등을 겪게 되었다. 1804년 슈베르트는 살리에리의 지도를 받았으며 그 재능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1808년에는 궁정신학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고 그곳에서 모차르트의 서곡이나 교향곡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는 특히 모차르트를 좋아하고 베토벤을 존경하였다. 13세 때 변성기로 인해 궁정학교 수업을 그만두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군복무를 일정기간의 교사근무로 대신하는 대체복무제를 허용하고 있었으므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 1814년부터 아버지가 근무하는 초등학교에서 조교사로 일했다. 이때부터 작곡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 해에 바 장조의 미사곡(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장례미사에 사용하는 음악)을 작곡하였는데, 이 곡의 독창을 부른 테레제 그로브는 슈베르트의 첫번째 애인이었다. 하지만 둘 사이의 사랑은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결실을 보지 못하고, 테레제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였다.

1815년 18세 때에 그의 재능을 아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수백 곡의 가곡을 썼으며,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마왕》, 《휴식 없는 사랑》, 《들장미》 등의 명작도 이 해에 작곡되었다. 그가 지은 가곡 중 일부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책으로 편집되었다. 1816년 슈파운이 소개한 시인 친구 프란츠 폰 쇼버의 권유로 친구 집에 머물며 작곡에 몰두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방랑생활이 시작되며, 죽는 날까지 그를 괴롭힌 매독 또한 이 시기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1817년 당시 최고의 성악가이자 25세 연상인 요한 미하엘 포글을 만났다. 1818년에는 가곡 《죽음과 소녀》, 《송어》를 작곡하였으며 에스테르하지 공작 집안의 두 딸의 가정교사가 되어 한여름을 첼리즈에서 보냈다. 이듬해에 포글과 함께 북오스트리아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였는데, 그의 음악이 포글에 의해 처음으로 공개 연주되어 호평을 받았다. 이 좋은 벗의 도움으로 그의 명성은 차츰 높아지고, 오스트리아에 있는 그의 친구들을 중심으로 Schubertiads 라는 모임이 결성되었다. 1819년 라이바흐 사범학교의 교사가 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친의 학교에 머물면서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다. 가곡 《방랑자》나 《교향곡 제5번》 등이 이때의 작품이다. 1823년에는 《방랑자의 환상곡》, 《로자문데》 등을 발표했고 그 해 여름, 친구의 집에서 읽은 뮐러의 시에 감동하여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를 작곡하였다. 1824년, 다시 에스테르하지 가의 음악 교사가 되어 전원 생활을 즐기며 《현악 4중주곡》을 작곡하였다. 이듬해 다시 포글과 서부 오스트리아로 여행하였는데, 이때 《아베 마리아》를 작곡하였다. 1827년 30세가 되자 자신의 인생이 겨울을 맞았음을 아는 듯 《겨울 여행》을 작곡하였다. 1828년 3월 자작 연주회를 열어 성공을 거둔 뒤 교향곡 9번인 《대교향곡》을 완성하였으며, 그가 죽은 뒤 출판된 《백조의 노래》에 수록된 가곡의 대부분이 그 해 8월에 완성되었다.

슈베르트는 한때 베토벤과 만난 적이 있었다. 평소에 베토벤을 존경해왔던 슈베르트는 그를 만나고자 했지만 자신의 소심한 성격 탓에 쉽사리 만날 용기를 가지지 못했다. 게다가 베토벤의 청력상실을 비롯한 합병증으로 만난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만날 기회를 더더욱 가지지 못했다. 그러다 지인들의 권유로 슈베르트가 용기를 내어 1827년 3월 19일, 베토벤 집에 방문하여 만나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어렵게 만난 두 사람이 불과 2 km 정도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에게 인사하는 한편 자신이 작곡한 악보를 보여준다. 베토벤은 슈베르트로부터 받은 그의 악보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이렇게 늦게 만난 것에 대해 후회를 했고 슈베르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네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내 명은 이제 다 되었네. 슈베르트, 자네는 분명 세상에 빛낼 수 있는 훌륭한 음악가가 될 것이네. 그러니 부디 용기를 잃지 말게…"

이러한 베토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합병증으로 인해 힘이 들어 보였고 말할 때마다 계속되는 기침으로 슈베르트는 자신이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괴로울 지경이었다. 그 후 베토벤은 청력상실로 듣지 못하는 탓에 슈베르트에게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적으라고 했지만 슈베르트는 자신이 존경하는 음악가의 병이 든 처참한 모습을 보고 소심한 성격때문에 일찍 만나지 못한 자괴감과 후회감에 빠져 괴로운 나머지 인사말도 없이 그대로 방을 뛰쳐나가고 말았다. 베토벤이 죽기 일주일 전의 일이었고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1주일 뒤인 3월 26일, 베토벤이 죽자 그의 장례에 참여하였다.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1년 뒤인 1828년, 그는 자신이 대위법이 부족한 것을 스스로 깨닫고 다시 공부하다가(키즐러에게) 11월 17일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얻어 몸져 누웠다. 그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어 기억력이 감퇴하여 술에 취한 사람처럼 몸을 비틀거리는데다 허깨비가 보이며 혼잣말을 하는 등 정신이상의 증세를 보이다가 이틀 뒤인 11월 19일에 31세의 젊은 나이로 빈에서 요절하고 말았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유해를 교회에 묻으려 했으나 당시 그를 돌보던 둘째 형 이그나츠가 평소에 존경하던 베토벤의 옆에 묻어주자고 제안을 해 빈 중앙 묘지의 베토벤 무덤 옆에 나란히 묻혔다. 슈베르트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았는데 식중독으로 사망했다는 설, 장티푸스로 사망했다는 설과 매독의 악화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으며 현재는 매독으로 인한 사망이 신빙성을 얻고 있다.[주해 1] 별세한 해에 만들어진 최후의 가곡 14곡을 모은 것이 《백조의 노래》이다.

슈베르트는 그 짧은 일생에 수많은 가곡과 기악곡, 교향곡 등을 작곡하였으나,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한 것은 가곡이다. 690곡에 이르는 가곡들이 모두 훌륭하다는 평을 듣지만, 특히 《겨울 여행》이나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 《백조의 노래》 등이 특히 뛰어난 작품이며, 자유로운 표현력을 지니는 멜로디의 아름다움, 그리고 화성의 미묘한 변화 등 낭만주의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교향곡에서는 제8번의 《미완성》이 특히 유명하나, 제9번 《대교향곡》의 아름다움도 잊어서는 안된다. 피아노곡에서는 《마왕》, 《방랑자 환상곡》, 《스케르초》, 《악흥(樂興)의 한때》 등이 알려져 있고, 실내악곡에도 《죽음과 소녀》나 《송어》 등 걸작이 많다. 그 밖에 오페라·음악극의 작품도 있으며, 가곡을 비롯하여 교향곡·실내악·피아노곡 등 1,200여 곡의 많은 작품을 남겼다.
작곡 : Luigi Boccherini (루이지 보케리니,Luigi Rodolfo Boccherini)
이탈리아의 고전파 작곡가, 첼로 연주자. 이탈리아의 고전파 작곡가, 첼로 연주자.
작곡 : Giuseppe Sammartini (주세페 삼마르티니,Giuseppe Baldassare Sammartini)
후기 바로크~초기 고전주의 시대의 이탈리아 작곡가, 오보에 연주자 후기 바로크~초기 고전주의 시대의 이탈리아 작곡가, 오보에 연주자
작곡 : Johannes Brahms (요하네스 브람스)
요하네스 브람스(독일어: Johannes Brahms, 문화어: 요한네스 브람스, 1833년 5월 7일 ~ 1897년 4월 3일)는 독일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첼리스트,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이다. 함부르크 출생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주로 음악가 생활을 했으며, 당대 낭만주의 음악의 선도적 존재였다. 일생동안 그는 높은 인기와 영향력을 가졌으며, 19세기 지휘자 한스 폰 뷜로에 따르면 그를 요한 제바스티안 바... 요하네스 브람스(독일어: Johannes Brahms, 문화어: 요한네스 브람스, 1833년 5월 7일 ~ 1897년 4월 3일)는 독일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첼리스트,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이다. 함부르크 출생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주로 음악가 생활을 했으며, 당대 낭만주의 음악의 선도적 존재였다. 일생동안 그는 높은 인기와 영향력을 가졌으며, 19세기 지휘자 한스 폰 뷜로에 따르면 그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더불어 "3B"로 칭하기도 했다고 한다.

브람스는 여러 피아노곡, 실내악, 교향악, 성악, 합창곡을 작곡했다. 피아니스트로서 그는 여러 자신의 작품을 초연했으며, 비르투오조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하임과 함께 당대의 뛰어난 연주자였다. 브람스의 여러 작품은 현대 음악회에서도 자주 연주되는 레퍼토리이다. 완고한 완벽주의자였던 그는 수많은 자신의 작품을 없애거나 출판하지 않기도 했다.

브람스는 전통주의자이자 혁신자였다. 구조나 작곡 기법면에서 그는 바로크와 고전파 음악에 굳게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는 대위법의 대가였다. 이런 구조와 함께 그는 화성과 음색에 대한 대담하고도 새로운 시도로 당대 조성 음악의 개념을 바꾸어놓았다. 그의 업적과 기예는 아르놀트 쇤베르크에서 에드워드 엘가에 이르기까지 후대 여러 음악가들의 찬탄의 대상이었다. 브람스의 작품은 결국 조성을 버리게 되는 아르놀트 쇤베르크 등 한 세대의 음악가군의 시작점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

브람스의 작품은 독일 낭만파 중에서 비교적 보수적인 경향을 갖고 있다. 그의 작품은 고전파적인 양식 위에 서서, 중후하고 북독일적인 맛을 지니며, 또한 아름다운 서정성도 갖고 있다. 그가 작곡한 4개의 교향곡은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걸작으로 그 중에서 교향곡 1번은 베토벤의 제9에 이어지는 제10교향곡이라고 할 만큼 베토벤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쌓아올린 뛰어난 작품이다. 바이올린 협주곡도 놀랄 만한 완성도에서 베토벤의 곡 다음에 놓일 만한 가치가 있다. 피아노 음악에서도 피아니스틱한 화려한 기교를 배격하고 중후한 작품을 작곡하였다.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은, 피아노가 관현악과 밀접히 결합되어 있는 데에 특색이 있다. 독주곡에서는 <파가니니 변주곡>(1863), <헨델 변주곡> 등이 뛰어났고, 연탄용(連彈用)인 <헝가리 무곡>은 특히 유명하다. 실내악에도 특필할 만한 작품이 많은데, <클라리넷 5중주곡>이 많이 연주되고 있다. <대학 축전 서곡>, <비극적 서곡>도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성악곡을 작곡하는데 있어서도 뛰어난 수완을 보였다. 200여 곡의 가곡과, 중후하고 교묘한 화성은 다소 가까이하기 어렵지만, <알토 랩소디> 등 깊은 슬픔을 담은 명작이 많다. 그리고 마지막엔 심각한 종교적인 작품 <독일 레퀴엠>(1866-1869)을 들 수 있다. 그의 암담하고 우울한 깊이가, 여기에서는 다듬어진 아름다움 속에 정화(淨化)되고, 모든 사람을 감명시키는 숭고함에 이르고 있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세레나데, 교향곡 네 곡, 피아노 협주곡 두 곡, 바이올린 협주곡 한 곡, 바이올린과 첼로 이중 협주곡 한 곡, 관현악 서곡(대학축전 서곡, 비극적 서곡) 등 수많은 관현악 작품을 남겼다.

그의 합창 대작 독일 레퀴엠은 전례상의 장송 미사(Missa pro defunctis)의 내용이 아니라 브람스가 루터 성서에서 고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품은 그의 일생에서 세 번에 걸쳐 작곡되었다. 2악장의 초기 판본은 로베르트 슈만이 자살한 지 얼마 안된 1854년에 작곡한 것으로, 나중에 피아노 협주곡 1번에 쓰였다. 레퀴엠의 대부분은 1865년 어머니가 죽은 뒤에 작곡하였다. 5악장은 1868년 공식 초연 이후에 덧붙인 것으로, 작품은 1869년에 출판하였다.

브람스의 변주곡 작품으로는 슈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 헨델 주제에 따른 변주곡과 푸가, 파가니니 변주곡(둘 다 피아노 독주), 그리고 하이든 주제에 따른 변주곡(피아노 연탄곡과 관현악용 두 판본)이 있다. 교향곡 4번의 마지막 악장은 형식적으로 파사칼리아이다.

그의 실내악곡으로는 현악 4중주 세 곡, 현악 5중주 두 곡, 현악 6중주 두 곡, 클라리넷 5중주, 클라리넷 3중주, 호른 3중주, 피아노 5중주, 피아노 4중주 세 곡, 피아노 3중주 네 곡(4번은 작품번호가 없다)이 있다. 그는 피아노가 반주하는 독주 소나타도 많이 썼는데, 바이올린 소나타 세 곡, 첼로 소나타 두 곡, 클라리넷 소나타 두 곡(이 두곡은 본인이 비올라 소나타로 편곡하였다)이 있다. 또 피아노 독주곡으로는 초기의 피아노 소나타와 발라드에서 나중의 소품 모음집 등 다양하다. 브람스는 가곡(Lied)에서도 중요한 작곡가로서 200곡이 넘는 가곡을 썼다. 그가 죽기 직전에 쓴 오르간 합창 전주곡(chorale preludes) Op.122는 오르간 주자의 중요한 연주곡목이기도 하다.

브람스는 음악에서 특정한 묘사나 이야기를 배제하는 절대 음악의 신봉자였으며, 오페라와 교향시를 전혀 쓰지 않았다.

브람스는 흔히 크고 복잡한 음악 구성을 보이는 진지한 음악가란 평을 받고 있지만, 브람스 생전에 유명해져 상업적으로 성공한 일부 작품 중에는 대중의 기호에 맞게 당대의 번성하던 음악 시장에 적합한 곡도 있다. 20세기 미국의 영향력 있는 비평가 B.H. 하긴은 브람스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를 거부하고 자신의 여러 녹음 음악 안내서에서 브람스는 그러한 작품에서 인기를 얻었지만, 규모가 더 크고 진지한 음악에서는 그에 미치지 못했다고 주장하였다. 브람스가 쓴 이런 류의 가벼운 곡으로는 춤곡집(헝가리 춤곡 왈츠 Op.39 피아노 연탄곡, 성악 4중창과 피아노의 "사랑의 노래 왈츠"(Liebeslieder Waltzes)), 몇몇 성악 작품("자장가Wiegenlied" Op.49 4번이 유명하다. 1868년 출판.) 등이 있다. 브람스의 '자장가'는 친구 베르타 파버의 아들이 태어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썼다.

브람스는 자신의 작품에 고전파의 형식과 질서를 담아내어 당대 여러 화려한 음악과 대조된다. 그리하여 브람스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들은 신독일 악파의 표제 음악과 대비하여 그를 전통 형식과 "순수 음악"의 대가로 보았다.

브람스는 베토벤을 숭상하였다. 그의 집에는 베토벤의 대리석 흉상이 그가 작곡하던 곳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그의 작품에서 일부 악절에서는 베토벤의 양식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브람스 교향곡 1번의 4악장 주요 주제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의 피날레 주제와 닮았으며, 브람스 본인도 그러한 유사성에 대해 아무리 멍청이(jeder Esel)라도 이 점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독일 레퀴엠은 어느 정도는 1865년 어머니의 죽음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한편으로 1854년에 작곡을 시작하다가 슈만이 자살을 시도한 뒤 포기한 어느 교향곡 초고에서 내용을 가져온 것이기도 하다. 그는 한때 "슈만의" 레퀴엠을 쓰기도 하였다. 그가 포기한 이 교향곡 작품의 첫 악장은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첫 악장으로 쓰였다.

브람스는 고전파 작곡가인 모차르트와 하이든도 좋아하였다. 그는 이들 작품의 친필 악보나 첫 판을 수집하였으며, 편집하기도 하였다. 또 브람스는 조반니 가브리엘리, 요한 아돌프 하세, 하인리히 쉬츠 그리고 특히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등 고전파 이전 작곡가의 음악도 연구하였다. 그의 친구로 탁월한 음악학자들도 있었는데, 프리드리히 크리산더와 함께 브람스는 프랑수아 쿠프랭의 작품 판본을 편집하기도 하였다. 그는 엄격한 대위법 기술에서 영감을 얻기 위해 옛 음악을 검토하였는데, 그의 작품 가운데 일부 주제는 바로크 음악에서 본뜬 것도 있다. 가령 브람스 첼로 소나타 1번의 푸가로 된 피날레는 바흐 작품 푸가의 기법을 참조하였으며, 브람스 교향곡 4번 4악장의 파사칼리아는 바흐의 칸타타 150번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젊은 브람스를 격려해준 슈만 등 초기 낭만파 음악가들도 브람스에 큰 영향을 주었다. 브람스는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슈만과 종종 만나기도 하였다. 1862~63년 빈에 체제할 적에 브람스는 특히 프란츠 슈베르트의 음악에 관심을 기울였다. 슈베르트의 영향은 이 시기 브람스의 작품인 피아노 4중주 Op.25와 Op.26, 그리고 슈베르트 현악 5중주와 대 2중주가 암시된 피아노 5중주에서 드러난다. 혹자는 브람스의 작품에서 쇼팽과 멘델스존의 영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여기기도 하지만, 이들이 브람스에 영향을 주었다는증거는 거의 없다. (가령 브람스의 스케르초 Op.4는 쇼팽 스케르초 B-flat단조, 그리고 브람스 피아노 소나타 3번 F단조 Op.5는 멘델스존 피아노 3중주 C단조를 암시한다는 식이다.)

베토벤처럼 브람스도 자연을 좋아하여, 자주 빈 근처의 숲에서 산책을 했다고 한다. 그는 주머니에 사탕을 넣어둬 아이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성인 브람스는 종종 무뚝뚝하거나 냉소적이었고, 때론 다른 사람들을 멀리하기도 했다. 그의 제자 구스타프 예너는 "브람스가 불평쟁이 평판을 듣는데는 이유가 있다. 또 그를 매력적으로 보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는 빈의 그가 좋아하는 "붉은 고슴도치" 술집에 날마다 드나드는 것처럼 빈의 언론이 보도한 예상할만한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언론에서는 그가 등짐을 지고 걷는 모습을 그가 붉은 고슴도치 술집으로 걸어가는 캐리커처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친구로 남은 사람들은 그에게 충실했으며, 브람스도 이들에게 성실하고 관대하게 대했다.

브람스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매우 다른 유형의 작곡가였지만, 그와 평생지기였다. 그는 1897년 죽음을 앞두고 빈의 빈 극장에서 초연하는 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 이성의 여신(Die Gottin der Vernunft)에 가려고 하기도 했다. 아마 브람스가 슈트라우스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슈트라우스의 푸른 도나우 왈츠를 쓰는데 무언가 도움을 주겠다고 쓴 글일 것이다. 브람스가 슈트라우스와 안면을 트게 되었을 때, 슈트라우스의 아내 아델레(Adele)가 브람스에게 팬이라며 사인을 부탁하자, 브람스는 "푸른 도나우" 왈츠의 음표 몇 개를 쓰고는, "슬프게도 (이건) 브람스의 작품이 아니다!"라고 썼다.

1860년대부터 그의 작품은 널리 팔려, 브람스는 재정적으로 크게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방 셋짜리 아파트에 하녀 한 명을 두며 검소한 생활을 좋아했다. 그는 친척들에게 많은 돈을 썼으며, 젊은 음악가들에게 이름을 숨기고 도와주기도 했다.

그는 극단적인 완벽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의 레메니나 바이올리니스트 페르디난트 다비트가 연주한 바 있는 바이올린 소나타 등 여러 초기의 작품들을 없애버렸으며, 1873년 첫 공식 현악4중주곡이 나오기 전에 20곡의 현악4중주곡을 없앴다고 이야기한 적도 있다. 수 년 동안 곡을 고친 끝에 그는 당초 D단조 교향곡으로 쓸 곡을 자신의 첫 피아노 협주곡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의 세밀함을 보여주는 다른 예로는 그의 교향곡 제1번인데, 이 곡은 약 1861년부터 1876년까지 거의 15년이 걸려서 쓴 곡이다. 이 곡을 몇번 연주한 뒤 브람스는 악보가 출판되기 전에 원래의 느린 악장을 없애고 새로 악장을 썼다.(원래의 느린 악장을 추측하여 복원한 판본을 로버트 파스칼이 출판한 바 있다) 브람스가 완벽주의자가 된 한 가지 이유로는 초기에 슈만이 그를 이르러 베토벤에 버금갈 음악가로 평가한 것 때문이기도 한데, 이 예언으로 브람스는 베토벤을 따라 잡을 수 있도록 매진하게 되었다. 슈만의 예언에 브람스는 거의 자신감을 얻지 못했으며, 아마 이 때문에 첫 교향곡 완성을 늦춘 것 같다. 그러나 클라라 슈만은 그 전부터 교향곡 1번이 그의 진짜 성격을 반영한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클라라는 초고에서 본 어둡고 맹렬한 1악장에 매료되었기 때문에, 활기찬 마지막 악장이 "너무 화려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클라라 슈만은 교향곡 2번을 인정하여 자신의 생각을 거두었는데,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자주 들을 수 있으며, 브람스의 밝은 작품이다. 하지만 당대의 다른 사람들은 1악장이 특히 어둡다고 생각했는데, 교향곡 2번을 19세기의 우수(melancholia) 감정과 연관지어 연구했던 라인홀트 브링크만가 출판한, 브람스가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빈첸츠 라히너(Vinzenz Lachner)에 보낸 편지에서 브람스는 자신의 성격에 우울한 면이 있으며, 1악장에서 그런 성격이 반영되었다고 쓴 바 있다.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 1810년에 독일 작센 주의 츠비카우 시에서 태어났다. 출판업을 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책을 가까이 했고, 음악 못지않게 문학에도 심취했다. 음악가가 되고 싶었던 슈만의 바람과는 달리 그의 부모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슈만은 이후 급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1828년에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한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마음...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 1810년에 독일 작센 주의 츠비카우 시에서 태어났다. 출판업을 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책을 가까이 했고, 음악 못지않게 문학에도 심취했다. 음악가가 되고 싶었던 슈만의 바람과는 달리 그의 부모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슈만은 이후 급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1828년에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한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피아노 공부를 이어가던 중 유명 피아노 교수 프리드리히 비크를 만나 그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는다. 그렇게 슈만은 열정적으로 음악에 빠져들었으나 혹독한 연습으로 손가락을 다쳐 결국 피아니스트의 꿈을 포기해야 했다.

이를 계기로 슈만은 작곡과 음악 평론의 길로 들어서는데, 어린 시절의 독서가 큰 자양분이 되었다. 1834년 동료들과 함께 음악 잡지인 <음악신보Neue Zeitschrift fur Musik>를 만들고, 10년간 편집장 역할을 하며 글을 썼다. 슈만은 이 잡지를 통해 베를리오즈, 쇼팽 등 무명의 뛰어난 음악가들을 소개하고 슈베르트, 멘델스존 등 작곡가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훌륭한 작품을 알리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이 책에 실린 슈만의 조언들은 그의 피아노 작품집 〈어린이를 위한 앨범Album fur die Jugend〉과 함께 발표하려고 쓴 것인데, Musikalische Haus-und Lebensregeln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글에서 어린이와 젊은 음악가들을 향한 슈만의 특별한 애정을 느낄 수 있으며, 15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큰 울림을 준다.

1840년 클라라 비이크와 결혼하였다. 그 후 수많은 가곡을 작곡하고 멘델스존의 라이프니츠 음악원에서 강사, 드레스덴 합창단의 지휘자가 되어 활약하였다. 그 뒤 정신 이상으로 라인 강에 투신 자살을 기도했다가 구조되었으나 2년 후 1856년, 46세에 현재 본으로 편입된 엔데니히의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가장 대표적인 낭만주의 작곡가라고 평가받는다. 시적이며 철학적인 그의 음악은 아주 낭만적이다. 그의 초기 음악에서 형식적인 고전주의의 틀을 깨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근대적 피아노 기술을 개척하고 개성 있는 피아노 소곡과 가곡을 남겼으며, 가곡에서는 가곡 못지 않게 피아노 반주부에 중요한 표현을 준 점이 획기적이다. 그의 아내인 클라라 슈만은 우수한 피아니스트로서 그의 좋은 협력자였다. 그의 작품으로는 <사육제>, <어린이 정경> 등의 피아노 곡과 <시인의 사랑>, <여인의 사랑과 생애> 등의 가곡집, 합창곡 <유랑의 무리>가 유명하고, 그 밖에 관현악곡·실내악곡·기악곡도 많다.
작곡 : Samuel Barber (사무엘 바버,Samuel Osborne Barber II)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출신의 낭만주의 작곡가이다.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작곡가들 중 하나로, "아마도 다른 미국의 작곡가 누구도 그렇게 이른시기부터 오래 지속되는 호평을 받은 적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퓰리처상 음악 부문을 오페라 'Vanessa'와 오케스트라곡 《현악을 위한 아다지오Adagio for Strings (1936)》로 두 번 수상했다. 신낭만주의로 분류되기도 한다. 커티스 음악원 재학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출신의 낭만주의 작곡가이다.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작곡가들 중 하나로, "아마도 다른 미국의 작곡가 누구도 그렇게 이른시기부터 오래 지속되는 호평을 받은 적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퓰리처상 음악 부문을 오페라 'Vanessa'와 오케스트라곡 《현악을 위한 아다지오Adagio for Strings (1936)》로 두 번 수상했다.

신낭만주의로 분류되기도 한다. 커티스 음악원 재학 중에 작곡한 가곡 《도버의 해변》은 영국시인 매슈 아널드의 시에 곡을 붙인 것으로 "이 밤의 바다는 고요하고 물결은 넘쳐 달은 밝은데 해협에 둥실 떠있네…"라고 낭만적인 서정을 노래한 아름다운 가곡이다. 일말의 애수를 품은 낭만적인 시정이 바버 음악의 특징이다. 《교향곡 1번》, 《현악을 위한 아다지오》, 《관현악을 위한 에세이 1, 2,3번》 등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브루노 발터, 아르투르 로진스키 등의 유명 지휘자의 눈에 들어 젊어서 일찍 악계에 등장하였다. 두 곡의 오페라를 남겼고, 모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위촉된 작품이다. 1966년 가을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링컨 센터의 새 극장으로 이사했을 때 바버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첫공연을 장식했다.
작곡 : Antonin Dvorak (안토닌 드보르작)
낭만주의 시대에 활동한 체코의 작곡가로, 관현악과 실내악에서 모국의 보헤미안적인 민속 음악적 작품성 풍색과 선율을 표현하였다.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에 의하여 확립된 체코 민족주의 음악을 세계적으로 만든 음악가이다. 드보르작은 오스트리아 제국 프라하(현재는 체코 공화국) 근처 넬라호제베스에서 태어나서, 생애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드보르작은 즈로니체에 있는 외삼촌과 리마 선생이 부친을 설득한 보람으로 ... 낭만주의 시대에 활동한 체코의 작곡가로, 관현악과 실내악에서 모국의 보헤미안적인 민속 음악적 작품성 풍색과 선율을 표현하였다.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에 의하여 확립된 체코 민족주의 음악을 세계적으로 만든 음악가이다.

드보르작은 오스트리아 제국 프라하(현재는 체코 공화국) 근처 넬라호제베스에서 태어나서, 생애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드보르작은 즈로니체에 있는 외삼촌과 리마 선생이 부친을 설득한 보람으로 1857년 16세에 프라하의 오르간학교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음악가가 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 프라하에서는 오르간 학교에서의 교육보다도 학우이며 훗날의 지휘자 칼레르 벤달과 친교를 맺고, 재학 중부터 오케스트라에 가담하여 바이올린을 켜서 수확을 올렸다. 특히 그 오케스트라가 당시 명성을 얻고 있던 바그너를 영입하고 있던 관계도 있어 드보르작은 퍽 오래도록 바그너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드보르작은 바그너식의 오페라나 음악극의 체코판을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바그너의 멜로디나, 특히 화성의 특징을 자기 나름대로 소화하여 받아들였다. 드보르작은 꽤 노력형이어서 학생시절부터 친척집에 기숙하면서 침식을 잊고 공부하였다.

졸업 후에는 프라하의 일류 호텔이나 레스토랑에 출연하고 있던 갈레루 코므자크 악단에 가담하여 비올라를 켜게 되었으나 1862년에 체코인을 위한 국민극장이 건설될 때까지의 임시극장이 개관되어 악단과 더불어 이 극장 전속 오케스트라의 핵심이 되어 약 10년간 근속하였다. 1866년부터 스메타나가 이 극장의 오페라 감독에 취임, 자작의 오페라 등을 지휘하게 되었으므로 바그너, 슈베르트나 베토벤의 영향과 함께 스메타나의 민족주의적인 음악사상이 그의 작품을 채색하게 되었다. 드보르작은 오케스트라 동료들로부터 작곡 같은 것을 해서 무엇하느냐고 핀잔을 받았으나 묵묵히 작곡을 하였으며 특히 1861년(20세 때)부터 실내악의 대곡(작품 1의 현악 5중주곡)을, 또 1865년부터 교향곡(제1과 제2를 이해에)을 작곡한 것은 당시의 슬라브계의 민족음악의 작곡가들이 스메타나를 비롯하여 대체로 이와 같은 순음악보다도 표제 음악이나 오페라에 끌려 있던 것과 대조적이어서 주목할 만하다. 드보르작의 이러한 순음악에 대한 열정은 죽기 약 9년 전인 1895년까지 계속된다. 후기 낭만적 음악의 화성조직이나 색채적인 오케스트라의 사용법이라든가 그러한 개개의 기법에 이끌렸어도 고전적인 음악형식을 저버리려고 하는 그 무렵의 작곡계의 일반적인 경향에는 반대였고 새로운 고전주의를 목표로 한 점에서 독일의 대작곡가 브람스의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어 사실 브람스에게는 매우 총애를 받아 드보르작의 작품이 1877년 이후 베를린의 지므로크 음악출판사를 통해 출판되었고, 체코 이외의 나라에서 연주하게 된 것도 브람스의 소개로 된 것이었다.

브람스를 비롯하여 지휘자이며 피아니스트인 한스 폰 뷜로, 지휘자인 한스 리히터, 당시 빈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평론가 한슬리크 등 독일,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음악인 지위를 얻게 된 것도 드보르작의 명성과 작품을 세계적으로 만드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독일,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1884년 말 영국에도 9번 방문하여 영국을 위해 <유령의 신부> 및 <교향곡 제7번 D단조>를 쓰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명예 음악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드보르작은 국제인으로서 사는 것을 바라지 않고 끝까지 체코인으로 살아갔다. 빈으로 이주하도록 재삼 권유된 것을 거절한 것도 그의 신념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빈 정부에 대해 독립투쟁을 밀고 있던 동포들을 버리고 자신만 빈에서 안일하게 생활을 한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1890년부터 프라하 음악원에서 작곡과 그 밖의 것을 가르치고 있었으나, 1892년의 51세 때 뉴욕의 국민음악원의 원장으로 초빙되었다.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 현악 4중주곡 <아메리카> 등 오늘날 가장 많이 연주되고 있는 드보르작의 작품이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에 작곡되었다. 그러나 1894년의 여름 휴가로 귀국(이 때 피아노 독주곡, 8개의 <유모레스크>를 작곡했다. 그 중에서 7번째 곡이 바이올린으로 편곡되어 유명해지자 다시 미국으로 가기가 싫어졌지만 일단 돌아가서 결국 다음해 봄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오래도록 미국에 머물러 있을 것을 바라는데도 불구하고 계약을 중도파기하고 귀국했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에는 슬라브풍의 음악에 흑인과 인디언의 멜로디를 조화하며 작곡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귀국 후 만년의 약 10년간은 일반 민족주의 음악의 작곡가와 같이 오페라와 교향시에 주력하여 <루살카>(1901 초연)와 같은 귀여운 오페라도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창작력이 그 정상에 달한 것은 이 이전, 특히 도미 직전인 수년간으로 추측된다. 피아노 3중주곡 <도무키>(1890-1891)가 그 좋은 한 예이듯이 종래의 독일류의 음악형식에 구속되지 않은, 슬라브인의 변화와 대조를 좋아하는 민족성에 한층 잘 맞는 새로운 형식적 질서를 낳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1901년엔 빈의 종신 상원의원으로 귀족이 되었고, 같은 해 프라하 음악원의 원장이 되기도 한, 독립 전의 체코의 문화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받은 뒤 1904년 뇌일혈로 사망, 국장으로 모셔졌다.

드보르작은 이른바 귀재형의 음악가는 아니며 굳이 말하자면 평범 속에 위대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평이 있다.
작곡 : Piotr I. Tchaikovsky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Piotr Ilyich Tchaikovsky / Peter Ilyich Tchaikovsky / Peter Iljitsch Tschaikowsky)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는 러시아 제국의 작곡가이며, '러시아의 위대한 작곡가'이자 '러시아 클래식 음악의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계획에 없던 음악가로서의 인생은, 갖은 역경과 시련을 거쳐 이제는 불멸의 명성을 남겨 주었다.1840년 5월 7일 ~ 1893년 11월 6일)는 낭만주의 시대의 러시아 제국의 작곡가, 지휘자이다. 백조의 호수와 호두까기 인형, 비창 교향곡의 작곡자이다. 그의 작품은 선율적 영감과...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는 러시아 제국의 작곡가이며, '러시아의 위대한 작곡가'이자 '러시아 클래식 음악의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계획에 없던 음악가로서의 인생은, 갖은 역경과 시련을 거쳐 이제는 불멸의 명성을 남겨 주었다.1840년 5월 7일 ~ 1893년 11월 6일)는 낭만주의 시대의 러시아 제국의 작곡가, 지휘자이다. 백조의 호수와 호두까기 인형, 비창 교향곡의 작곡자이다.

그의 작품은 선율적 영감과 관현악법에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1860년대에는 러시아의 민족주의 음악파인 러시아 5인조의 지도자 밀리 발라키레프와 교제하여 국민악파 음악의 영향을 받았으나 후반에는 낭만주의 경향의 곡을 작곡하였으며 베토벤, 슈베르트의 전통을 러시아로 확산시켰다. 말년에는 유럽 순회 공연을 다녀 성공하기도 했다.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은 고전 발레 음악 중 최고의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프랑스어: Frederic Francois Chopin, 문화어: 프리데리끄 프랑쑤아 쇼뺑, 1810년 3월 1일 ~ 1849년 10월 17일)은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작곡가이다. “피아노의 시인” 이란 별칭을 가진 쇼팽은 가장 위대한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가장 위대한 피아노곡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프레데리크 프랑수아는 그가 20세 때 폴란드를 떠나고 프랑스에서 살게 되었...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프랑스어: Frederic Francois Chopin, 문화어: 프리데리끄 프랑쑤아 쇼뺑, 1810년 3월 1일 ~ 1849년 10월 17일)은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작곡가이다. “피아노의 시인” 이란 별칭을 가진 쇼팽은 가장 위대한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가장 위대한 피아노곡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프레데리크 프랑수아는 그가 20세 때 폴란드를 떠나고 프랑스에서 살게 되었을 때 쓰던 프랑스어 이름이다. 원래 이름은 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 쇼펜(폴란드어: Fryderyk Franciszek Chopin, 문화어: 프리데리끄 프란찌쉐끄 쇼뺑)이다. ch는 폴란드어에서는 'h' 발음이 나지만, Chopin은 프랑스계 성씨이기 때문에 '쇼팽'이라고 발음한다. 폴란드어에서는 '쇼팽의'는 'Chopina'로 격변화하게 되는데, 이를 '쇼페나'라고 발음한다. 폴란드어에서는 'Szopen'(쇼펜)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쇼팽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세운 바르샤바 공국으로부터 서쪽으로 46km 정도 떨어져 있는 도시인 젤라조바볼라에서 태어났다. 교구의 세례 기록에는 그의 생일을 1810년 2월 22일로, 이름을 라틴어로 프리데리쿠스 프란치스쿠스(라틴어: Fridericus Franciscus)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폴란드어로 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가 된다. 그러나 쇼팽과 그의 가족들은 생일을 3월 1일로 기록하는데, 현재 학계에서는 이 날짜를 진짜 생일로 인정한다.

프리데리크 쇼팽의 아버지인 니콜라 쇼팽(영어:Nicolas Chopin)은 프랑스 로렌 출신으로, 16세가 되던 1787년에 폴란드로 이주해왔다. 니콜라는 폴란드의 귀족 자제들을 가르쳤고, 1806년에는 그가 가르쳤던 가문 중 하나인 스카르벡(Skarbek)의 가난한 친척인 테클라 유스티나 크리자노프스카(폴란드어: Tekla Justyna Krzyzanowska)와 결혼했다. 프리데리크 쇼팽은 부모가 결혼식을 올린 브로후프(Brochow)에 있는 교회에서 1810년 4월 23일, 부활주일에 세례를 받았다. 이 때 니콜라 쇼팽의 18살짜리 제자인 프리데리크 스카르벡을 대부로 삼았는데, 프리데리크라는 이름도 그에게서 따온 것이다. 프리데리크 쇼팽은 둘째이자 외아들로, 누나인 루드비카(Ludwika, 1807~1855), 여동생 이자벨라(Izabela, 1811~1881)와 에밀리아(Emilia, 1812~1827)가 있었다. 니콜라는 폴란드에 헌신했으며, 가정에서도 폴란드어를 주로 사용하게 했다.

프리데리크가 태어나고 6개월이 지난 1810년 10월, 니콜라가 바르샤바 고등학교 (대학 전단계 학교, 1804~1831에 존재했음)(영어:폴란드어: Liceum Warszawskie)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게 됨에 따라 바르샤바에 있는 작센 궁정(영어:Saxon Palace) 1층으로 이사한다. 니콜라는 거기서 플루트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어머니는 하숙집 소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었다. 프리데리크의 체격은 왜소했으며, 어린 시절에 병에 자주 걸렸다.

그의 누이인 루드비카는 피아노를 배웠는데 종종 자신의 동생 프레데리크에게 놀이처럼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다. 루드비카는 프레데리크의 재능을 눈치채었고, 결국 그들의 부모는 프레데리크가 공식적인 레슨을 받도록 한다. 공식적인 레슨을 처음 받게 된 것은 체코 음악가 보이치에흐 지브니(영어:폴란드어 Wojciech ?ywny)에게 1816년부터 1821년까지 교습을 받으면서 부터다. 누나 루드비카도 지브니에게 레슨을 받으며 프리데리크 등 남동생들과 가끔 듀엣을 하기도 했다. 쇼팽은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7살 무렵에는 공개 콘서트를 열기 시작했고, 사단조, 내림나장조의 두 폴로네이즈를 작곡했다. 1821년에는 내림가장조 폴로네이즈를 작곡해 지브니에게 헌정하는데, 그 원고는 아직까지 남아있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쇼팽 원고가 된다. 12세 때부터 엘스너에게 작곡 레슨을 받았으며 나중에 엘스너가 세운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들어가게 된다.

1817년 작센 궁전은 바르샤바의 러시아 총독에 의해 군사용으로 징발되었고, 바르샤바 강당은 오늘날 바르샤바 대학교의 총장 집무실인 카지미에슈 궁정(영어:Kazimierz Palace)에 다시 세워졌다. 쇼팽가는 카지미에슈 궁정에 인접한 건물로 이사한다다. 이 기간 동안, 프리데리크는 폴란드 입헌왕국의 통치자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에게 초대받아 그 아들과 종종 놀았는데, 거기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파블로비치 대공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했다. 율리안 우르신 니엠체비치(영어:Julian Ursyn Niemcewicz)는 그의 극적 에클로그 《우리들의 담론Nasze Przebiegi"(1818년)》에서 "꼬마 쇼팽"의 인기를 증언하고 있다.

1822년 스승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여 스스로 그만두었다.

이후 쇼팽은 바르샤바 콘소바토리의 교수이자 피아니스트인 빌헬름 뷔르펠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4세 때 바르샤바 중학교에 입학하여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연극에도 흥미를 가지고 희곡을 써서 공연하기도 하였다. 1826년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하였으며, 1829년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발표하고 빈에서 연주회를 열어 이름을 떨치자, 유럽 여러 나라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 그가 빈에 도착하였을 때 바르샤바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에게 조국을 위하여 싸우겠다는 편지를 보냈으나, 아버지로부터 조국을 위해 음악을 열심히 하는 길도 애국이라는 답장을 받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폴란드가 낳은 최초의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다.

1831년 파리에 도착하여 바르샤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혁명이라는 격정적인 연습곡을 작곡하였다. 1832년 파리에서 최초의 연주회를 열어 성공함으로써, 그 후 파리 사교계의 유명한 인물이 되었으나 그는 늘 조국과 친구와 가족을 걱정하며 고독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즉흥 연주에도 뛰어났으며, 침착한 성품으로 그의 전주곡이나 연습곡은 예술적 수준이 높은 곡들로 이루어져 있다.

1830년대 초중반의 파리는 작곡가를 위한 시기였다. 쇼팽이 유명한 작품들을 남긴 것이 이 때이다. 1838년경에 그는 파리 시민들에게 유명해졌다. 그의 친구로 프란츠 리스트, 빈첸초 벨리니, 외젠 들라크루아가 있었다. 쇼팽은 헥토르 베를리오즈와 로베르트 슈만과도 친했는데, 그들의 음악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작품을 헌정하기도 했다.

1836년에 쇼팽은 17살의 폴란드 소녀인 마리아 보진스카와 비밀 약혼을 했고 나중에 취소했다. 같은 해에, 마리 다굴 백작 부인이 연 파티에서 쇼팽은 소설가이자 애인인 조르주 상드를 만났다.

쇼팽과 상드의 연애관계는 183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다. 그들의 애정 관계는 9년간 지속되었고, 쇼팽의 건강 악화와 상드의 자녀들 문제로 헤어졌다.

쇼팽과 조르주 상드는 스페인 마요르카의 버려진 가톨릭교회 수도원인 발데모사수도원 근처의 오두막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1838년 ~ 1839년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가 닥쳤다. 쇼팽은 파리에서 먼 길을 거쳐 피아노를 가져와서 언덕에 있는 수도원으로 옮겨야만 했다. 쇼팽은 그 절박한 시간의 기분을 스물 네 개의 전주곡(작품번호 28)에 담았다. 그 작품의 대부분은 마요르카에서 쓰여진 것이다. 추위는 쇼팽의 건강과 폐병에 큰 타격을 주었고, 그와 조르주 상드의 관계가 불륜으로 의심받아 비난과 푸대접을 받았다. 결국 파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쇼팽은 그 일 이후로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1840년대에 쇼팽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와 상드는 노앙을 포함한 많은 곳으로 여행을 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1849년 쇼팽은 모든 작품을 완성하고 마주르카와 녹턴에만 전념했으며,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러시아의 폴란드 혁명진압으로 발생한 난민들을 위한 연주회에 참여하였다. 그의 마지막 곡은 마주르카 바 단조로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폴란드를 생각하면서 지은 민족주의적인 곡이다.

1849년 10월 17일 쇼팽은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폐결핵이지만 그의 친지가 부검한 결과가 이전 검진결과와 다르다는 점 때문에 낭포성 섬유증이나 폐기종 같은 다른 질병을 앓지 않았느냐는 주장도 있다.

로마 가톨릭 성 마들렌 교회에서 열리게 된 그의 장례식에는 그의 유언에 따라 모차르트의 레퀴엠 을 연주하기로 했다. 레퀴엠에는 여자 성악가의 역할이 크지만 마들렌 교회에서는 합창단에 여자 가수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마찰 때문에 장례식이 2주 동안 연기되었고, 결국 교회 측에서 쇼팽의 마지막 소원을 위해 양보했다. 쇼팽의 시신은 파리 Pere Lachaise에 안장되었다. 그의 심장은 누나 루드비카 옝제예비치(Ludwika Jedrzejewicz)가 전달 받아 폴란드로 가져간 뒤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에 있는 기념비 밑에 안치되었다.

21세기에 들어 보존된 그의 심장이 담긴 병을 열지 않고 관찰한 결과 심낭염으로 사망했다는 소견이 나왔다. 쇼팽이 앓았던 결핵은 심낭염의 일종인 결핵성 심낭염의 원인이다.

쇼팽은 필드가 창시한 살롱음악인 녹턴을 깊고 세련된 장르로 승화시켰으며, 일반적인 춤곡인 폴란드의 마주르카나 빈의 왈츠의 선율과 표현의 폭을 넓혔다. 또한 전주곡을 독립적인 장르로 만든 장본인이다.

쇼팽의 곡은 독특한 선율로 많은 대중들에게 공감을 만들어낸다. 그중에는 《혁명 연습곡》과 《강아지 왈츠》가 있다. 《장송 행진곡,전주곡 제 4번》은 지금까지도 슬픔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곡으로 쓰이고 있다. 《즉흥환상곡》 은 쇼팽 시절의 오페라 선율을 모방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반음계를 구사한 곡이다. 쇼팽은 노래하는 목소리의 아름다움을 재현하기 위해 피아노를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종종 자신이 도니제티와 빈첸초 벨리니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다.

쇼팽의 작품과 재능은 다른 작곡가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다. 슈만은 쇼팽의 선율을 따서 작곡한 그의 《사육제》를 쇼팽에게 헌정했다. 프란츠 리스트는 그의 《Harmonies Poetiques et Religieuses》 가운데 한 악장인 〈Funerailles〉를 쇼팽에게 헌정했고 그 때가 의미심장하게도 1849년 10월이었다. 그 곡의 중간 부분은 쇼팽의 유명한 폴로네이즈 53번의 옥타브 트리오를 연상케 한다.

전주곡과 연습곡을 포함한 많은 쇼팽의 곡들이 그만의 고유한 기교를 띠고 있다.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과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은 이 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서양 고전음악에서 쇼팽의 음악은 낭만주의 시대에 속한다. 하지만 쇼팽 자신은 낭만주의 조류에 관심이 없었거나 싫어했고 자기 자신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쇼팽의 작품을 전형적인 낭만주의 음악으로 보고있다.

약 200곡에 달하는 그의 작품들은 대다수가 피아노를 위한 것이였고 오로지 몇몇만이 다른 악기를 위한 곡이였다. 실내악에 관하여서는 바이올린보다 주로 첼로와 피아노에 대해 썼고, 이조차도 모두 네 곡 밖에 되지 않는다.

바르샤바에 살 때 쇼팽은 부흐홀츠의 피아노를 사용했다. 나중에 파리에서 사는 동안에는 플라이에에서 악기를 구입했습니다. 그는 플라이에(Pleyel et Cie)의 피아노를 '그 이상은 없다'는 뜻의 "비 플러스 울트라"로 평가한다. 리스트는 파리에서 쇼팽과 친구가되었고 쇼팽의 플라이에 피아노의 소리를 "수정과 물의 결합"으로 묘사한다. 런던에서 쇼팽은 "나는 3대의 피아노, 플라이에, 브로드우드 및 에라르드가 놓인 대형 응접실이 있다네" 라는 내용의 편지를 쓴다.

2018 년 폴 맥널티가 만든 쇼팽의 부흐홀츠 피아노는 폴란드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처음 공개되었으며 바르샤바 쇼팽 연구소에서 최초의 시대 악기 국제 쇼팽 콩쿠르에 사용되었다.
작곡 : Edouard Lalo (에두아르 랄로)
작곡 : Gabriel Faure (가브리엘 포레)
가브리엘 위르뱅 포레는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 피아니스트, 교사였다. 파리의 니데르마이어 음악학교에서 공부하고, 카미유 생상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교회의 오르간 연주도 하였다. 파리 음악원의 원장을 역임하였고, 제자로는 모리스 라벨 등 뛰어난 음악가가 많이 있다. 가브리엘 위르뱅 포레는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 피아니스트, 교사였다. 파리의 니데르마이어 음악학교에서 공부하고, 카미유 생상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교회의 오르간 연주도 하였다. 파리 음악원의 원장을 역임하였고, 제자로는 모리스 라벨 등 뛰어난 음악가가 많이 있다.
작곡 : Johann Sebastian Bach (요한 세바스찬 바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독일어: Johann Sebastian Bach, 1685년 3월 21일 ~ 1750년 7월 28일)는 독일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며, 개신교회의 교회 음악가이다. 교회 성기사와 오케스트라, 듀오 악기를 위한 종교적이거나 세속적인 음악을 창작했고, 그의 작품은 바로크 시대의 종말과 궁극적인 성숙을 동시에 가져왔다. 그는 바로크 시대의 최후에 위치하는 대가로서, 일반적인 작품은 독일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독일어: Johann Sebastian Bach, 1685년 3월 21일 ~ 1750년 7월 28일)는 독일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며, 개신교회의 교회 음악가이다.

교회 성기사와 오케스트라, 듀오 악기를 위한 종교적이거나 세속적인 음악을 창작했고, 그의 작품은 바로크 시대의 종말과 궁극적인 성숙을 동시에 가져왔다. 그는 바로크 시대의 최후에 위치하는 대가로서, 일반적인 작품은 독일음악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위에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양식을 채택하고 그것들을 융합하여 독자적 개성적인 음악을 창조하였다. 종교적 작품은 기존 구교 음악과 차별화하여 새로운 음악을 통해 개신교회 예배에 기여하고자 노력하였다.

바흐의 집안은 200년에 걸쳐서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한 일대 음악가계였다. 바흐 집안의 음악가들은 대대로 개신교회인 루터교회의 경건한 신자들이었고, 교회음악가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그들의 일에 강한 장인(匠人)적인 긍지를 품고 있었다. 이 '신앙'과 '장인기질(匠人氣質)'은 요한 제바스티안에게도 계승되어서, 마치 2개의 정선율(定旋律)과 같이 그의 일생을 관통하게 된다. 제바스티안 이전에도 17세기 초엽 이래 많은 유명한 작곡가를 배출했고, 일족의 중심지이었던 중부독일의 튀링겐 지방에서는 '바흐'가 '거리의 악사'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을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제바스티안의 큰할아버지 하인리히 바흐(1615-1692), 그 아들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42-1703)와 요한 미하엘 바흐(1648-94)는 음악사(史)에도 이름을 남긴 뛰어난 작곡가들이었다.

바흐는 사후 고전주의 음악사의 흐름에 밀려 완전히 잊혔으나 1802년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켈이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U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을 1802년에 발표함으로써 전 유럽적 바흐 광풍을 몰고 오게 하였으며 또한 사후 바흐에 대한 재평가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온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아주 훌륭한 곡을 많이 작곡 하였다.

바로크 음악에 있어서 바흐는 대위법 기술의 정수를 다한 사람이나, 그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당시에 이미 궁정문화에 침투했던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양식을 스스로 받아들여 칸타타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도 했다. 거기에는 그가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배운 여러 나라의 온갖 요소가 모두 투입되어 그만이 지닐 수 있는 최고로 천재적이게 융화되어 일치미를 이루고 있다. 콘티누오(통주저음)만으로 반주되거나 또는 여러 개의 악기로 반주되는 독창이나 중창에 의한 이탈리아식 다 카포 아리아, 오페라적인 아리오소와 레치타티보, 가장 초기의 가브리엘 형태에서 바흐 시대의 프랑스식 서곡에 이르기까지의 관현악 신포니아, 협주곡, 트럼펫의 팡파르, 풍요한 장식성을 지니고 성악성부에 얽혀드는 기악의 오블리가토 성부, 복합창형식, 때로는 성악에까지 적용되는 프랑스의 리드미컬한 춤곡, 이러한 것이 독일의 오랜 전통인 코랄과 결부되고 있다. 대체로 바흐만큼 코랄을 훌륭하게 활용하고 또 코랄을 창작의 중심으로 삼기에 정당함을 느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 나라 양식의 혼합은 기악 분야에서도 볼 수 있다. 프로베르거의 전통, 쿠프랭의 프랑스 모음곡형식, 쿠나우에 의하여 전해진 이탈리아의 소나타 다 카메라양식,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건반 텍스처(鍵盤書法), 푸가에 있어서도 클라비어 푸가는 이탈리아 협주양식의 영향을 나타내나 오르간 푸가는 북독일 오르간 악파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협주곡 분야에서는 끊임없이 비발디가 모범으로 숭앙되며, 가장 이탈리아의 특징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바흐의 작품은 매우 많은 여러 가지 양식을 포함하고, 또한 작곡한 분야도 넓으며 바흐 개인으로서도 시대에 따라 기술적, 내용적으로 현저하게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개인양식을 간단히 종합하기란 곤란하다고 하겠다.

바흐는 생전에도 동시대의 음악가였던 비발디나 텔레만과 같이 국제적 지명도를 가진 음악가는 아니었다. 사후에는 당시 음악가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작곡가로서는 완전히 잊혀진다. 바흐 생애 후반부에 이미 고전파 음악의 전조가 시작되었고 바흐 음악은 낡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바흐는 비발디나 헨델과 같이 음악가의 프리랜서화를 선도하는 인물도 아니었고 끝까지 교회 음악가로 남았다. 고전파 시대에 바흐는 고전파의 문을 연 아들들의 아버지로서 오히려 유명하였다. 유명인 중에는 모차르트가 바흐의 악보를 찾아서 탐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모차르트 음악에 가끔 훌륭한 푸가가 보이는 것이 바흐의 영향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베토벤 또한 바흐를 연구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영향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바흐를 극찬하는 말을 남겼다고하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아닌 아들 바흐에 대한 찬사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다.

그러나 1802년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켈이 사후 완전히 잊혔던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U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1802)를 발표함으로써 바흐에 대한 인식의 전환점을 제공하였다. 근대 인문학으로서의 음악사학의 발전은 낭만주의 시대에 이전 시대의 음악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고 이들의 작품을 출판,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바흐는 그 핵심 레파토리로 떠오른다. 바흐 생존 시기나 고전파 시대의 지명도와는 달리 낭만주의 시대에 바흐는 이전 시기 어떠한 음악가보다 높이 평가되기 시작하여 멘델스존 이후 음악가들 중 바흐를 연구하지 않은 작곡가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바흐에 대한 관심은 바흐가 많이 참고하고 편곡을 했던 다른 음악가들, 특히 비발디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켜서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바로크 음악의 부활을 이끌기도 하였다. 오늘 날에도 바흐는-그의 음악이 바로크 음악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바로크 시대 가장 유명한 음악가도 아니었지만-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추앙받고 있다.

서양 음악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바흐의 가문에서는 약 200년 동안에 걸쳐 저명한 음악가가 많이 나왔다.
노래 : Bidu Sayao (비두 사야오 )
노래 : Christopher Lynch (크리스토퍼 린치)
성악가 (테너) 성악가 (테너)
레너드 로즈는 미국의 유명한 첼리스트이자 '린 해럴'과 '요요 마'를 길러낸 교육자로도 유명하다. 레너드 로즈는 미국의 유명한 첼리스트이자 '린 해럴'과 '요요 마'를 길러낸 교육자로도 유명하다.
연주 : Mieczyslaw Horszowski (미예치슬라프 호르소프스키 )
피아노 연주자 피아노 연주자
바이올린 연주자 바이올린 연주자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연주 : Eugene Istomin (유진 이스토민)
피아노 연주자 피아노 연주자
연주 : Samuel Sanders (사무엘 샌더스 (피아노))
연주 : Glenn Gould (글렌 굴드,Glenn Herbert Gould)
글렌 허버트 굴드(영어: Glenn Herbert Gould, 1932년 9월 25일~1982년 10월 4일)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난 피아노 연주자이다. 12세에 토론토 왕립음악원 졸업 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함으로써 유럽 악단에도 데뷔하였다. 그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건반악기 음악에 대한 걸출한 해석자로서 유명하다. 글렌 굴드의 연주는 놀라운 기술적 능숙함과 함께... 글렌 허버트 굴드(영어: Glenn Herbert Gould, 1932년 9월 25일~1982년 10월 4일)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난 피아노 연주자이다. 12세에 토론토 왕립음악원 졸업 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함으로써 유럽 악단에도 데뷔하였다. 그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건반악기 음악에 대한 걸출한 해석자로서 유명하다. 글렌 굴드의 연주는 놀라운 기술적 능숙함과 함께 바흐 음악의 대위법적 텍스쳐를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으로 특징지어진다.

굴드는 대부분의 낭만주의 피아노를 거부했으며 사춘기 이후 리스트, 슈만, 쇼팽을 피했다. 그의 녹음 음반은 대부분 바흐로 채워져 있기는 했었지만, 베토벤, 모차르트, 하이든, 브람스, 전 바로크 시대 작곡가인 얀 피에테르존 스벨링크, 20세기 작곡가인 파울 힌데미트, 아르놀트 쇤베르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을 포함하여 가지각색의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굴드는 갖가지 기행으로도 유명했다. 비정통적인 음악 해석법, 악기를 연주할 때의 버릇에서부터 삶의 양상, 개인적 행동거지에 이르기까지 기인적인 면모를 보였다.

1964년, 그의 나이 31세 때 라이브 공연을 중단하고 스튜디오에서의 녹음과 다른 프로젝트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는 작가, 작곡자, 지휘자, 방송인이기도 했다. 그는 음악 잡지에 음악 이론을 논하며 그의 음악 철학을 나타내는 수많은 기고를 했다. 작곡자로서의 면모는 눈에 덜 띄는 편인데, 수는 적었고 많은 작품들이 미완성인 채 남겨졌다. 그의 나이 50이 넘었을 때 그는 피아노를 그만두고 지휘와 다른 프로젝트에 집중했다. 방송인으로서 굴드는 스튜디오 연주에 대한 텔레비전, 라디오 방송에서부터 라디오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활동을 했다.

글렌 굴드는 1932년 토론토 동쪽 변두리, 나무가 우거진 평화로운 동네의 견실한 중간계급 가정에서 태어났다. 글렌의 아버지 버트는 모피상으로, 젊은 시절에 바이올린을 연주한 적이 있었다. 어머니 플로렌스는 피아니스트이자 음악 교사였다. 또 두 사람 모두 노래를 잘했다.

음악 구조와 형식 이외의 외재적 요소를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태도가 강하다. 예를 들어, 음색에 관심이 없고 색채감을 특징으로 하는 음악을 경시하였고, 자신의 피아노 연주도 색채감을 연출하지 않았다.
악기의 특성과 음질에는 관심이 낮고, 오히려 구조적인 악곡은 악기를 가리지 않는 발상을 선전하고 특히 바흐의 건반 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이유를 논거로 들었다. 악곡의 가사와 표제성에도 무관심하고, 그들을 연주 해석 문제에서 고려 대상에 넣지 않았다.

명인기(名人技)는 음악의 구조와는 무관한 것으로, 그것을 피력하고 발휘하는 음악과 행위 자체를 싫어하였다.
연대기에 대한 반발이 있다. 즉, 예술 작품의 가치를 그 성립 연대에서 역사적으로 판단하는 견해와 작곡가의 창작 활동에 시대 구분을 실시하고 각 작품의 평가와 해석을 정하는 태도이다.

광범위하지만 매우 선택적 레퍼토리는 튜더 시대의 버지널 음악가들에서부터 생존하는 캐나다인까지이고 바흐와 쇤베르크를 중심으로 다루었지만 초기 낭만주의 음악은 부족하였다. 소수만 즐기고 지적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현대 음악 표현 양식을 옹호하였으며 조르주 비제, 에드바르 그리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및 장 시벨리우스와 같은 작곡가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지지하였다. 또한 편곡판으로 그 당시에는 드물었던 관현악과 오페라 곡 연주를 좋아하였다. 특히 바흐 공연에 20세기 중반의 '전성기 현대주의자' 접근 방식인 역동적이고 영향력 있는 예를 제시하였다.

독창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때로는 충격적인 음악 해석을 냈는데, 종종 극단적인 빠르기, 이상한 강약법에 더 묘한 악구도 썼다. 그는 피아노와 음악 해석에 대한 관습적인 발상을 무시함으로써 평생 논란에 휩싸였다. 아마도 선율의 음을 연결하지 않고 연주하는 분리된 분절법에 대한 선호가 그 예가 된다. 양식은 간결하고 정교하고 율동적으로 역동적이고 구조적으로 명백하고 집요하게 대위법적인 특징이 낭만적이라기보다 현대적이었지만 그 나름대로 여전히 서정적이고 심오한 표현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해석자로서 궁극의 낭만주의자이었던 만큼 연주 기법에 때로는 음표까지 자주 손을 댔다. 극한의 템포, 기발한 표현과 장식, 그리고 다른 해석적인 실험을 통하여 작품에 대한 신선한 시각을 추구하였다. 이들은 독창성에 대한 칭찬과 기행에 대한 비난을 받았다.

작곡가가 쓴 소리를 완전히 다 듣는다는 행위는 축음기와 레코드를 거치지 않는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음악의 세세한 부분까지 들을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것이고 그것을 청중에게도 요구하였음을 뜻한다. 즉 음악을 분석하여 정밀하게 해부하고 들을 수 있는 가능성을 레코드와 그 기술의 진보가 담당하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진정한 녹음 철학을 가진 고전 음악 연주자 중 굴지의 주창자가 되어 기사와 방송에서 열정적으로 변호하였고 컬럼비아/CBS에서 수십 개의 앨범을 연습하여 녹음 기술에 대한 실천적인 전문성을 개발하였다. 마이크 배치, 스플라이싱, 오버 더빙, 리버브 등의 기술 자체가 해석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많은 최종 해석 결정을 후반 제작 과정으로 연기할 수 있었다. 근본적으로 작곡가, 연주자 및 청취자의 전통적인 관계를 바꾸었다. 이미 가능한 기존 해석에서 완전히 일탈하지 않고, 예를 들어, 황제 협주곡의 또 다른 녹음을 만드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그의 실험적인 해석을 부분적으로 정당화하였다.

기사, 연주회 프로그램 내용, 그의 음반 20장 이상에 대한 속지 해설, 강연, 평론,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 및 유머와 같은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수십 가지의 주제를 발표하였다. '힌데미트 : 피아노 소나타' 음반에 작성한 속지 해설로 1973년 그래미상 클래식 부문 최우수 해설상을 수상하였다. 녹음과 대중 매체, 종종 친구인 마셜 매클루언과 의사소통을 하며 서로의 견해에 대하여 다작하였다. 전자 매체에 대한 저술은 관련성이 있으며 경우에 따라 예지력이 있었다. 라디오, 텔레비전 및 영화 제작을 위하여 작성한 대본에서 판단할 때, 그 결과로 인상 깊은 내용은 고르지 않고 자주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음악 및 기술 정보에 정통하고 대단히 독창적이며 도발적인 사상가로서 명성을 얻은 점이다.

"예술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바는 예술은 사람들 마음 속에 타오르는 내적 연소이며, 그것을 천박하게 드러내어 공공연하게 과시하는 일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술의 목적은, 신경을 흥분시키는 아드레날린을 순간적으로 분출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금씩 일생 동안 설레는 놀라움과 차분한 평온의 심적 상태를 구축하여 나가는 것이다."
하프 연주자 하프 연주자
플루트 연주자 플루트 연주자
지휘 : Dimitri Mitropoulos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지휘 : Bruno Walter (브루노 발터,Bruno Walter Schlesinger)
민주적이고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새로운 지휘자 상을 확립한 가장 존경받는 20세기 지휘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푸르트벵글러, 토스카니니, 클렘퍼러, 클라이버와 함께 ‘빅5’로 불렸다. 1876년 9월 15일 베를린의 중산층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피아노를 전공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8세에 슈테른 음악원에서 공부하고 어린 나이에 피아니스트로 데뷔한 뒤 1893년 9월 1일부터 쾰른에서 지휘자 생활을 시작해 ... 민주적이고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새로운 지휘자 상을 확립한 가장 존경받는 20세기 지휘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푸르트벵글러, 토스카니니, 클렘퍼러, 클라이버와 함께 ‘빅5’로 불렸다. 1876년 9월 15일 베를린의 중산층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피아노를 전공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8세에 슈테른 음악원에서 공부하고 어린 나이에 피아니스트로 데뷔한 뒤 1893년 9월 1일부터 쾰른에서 지휘자 생활을 시작해 17세에 처음 오페라 공연을 지휘했다. 이후 함부르크(이곳에서 구스타프 말러를 처음 만난다), 브레슬라우, 프레스부르크, 리가, 베를린 왕립 오페라에서 활동했다. 1901년에 말러의 부름을 받고 빈 궁정 오페라에서 함께 작업하며 평생 자이자 친구로 우정을 쌓았다. 말러의 〈대지의 노래〉(1911), 9번 교향곡(1912) 등 초연을 담당했고, 1912∼1922년까지 뮌헨 왕립오페라에서 총 음악감독으로 재직한 뒤 베를린 시립 오페라, 베를린 필하모니,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서 지휘했다. 1936년부터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병합될 때까지 빈 국립오페라 음악감독을 지냈다. 이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뉴욕 필하모닉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지휘했으며 종전 후 열렬히 환영받으며 유럽 무대에도 복귀했다. 만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거주하며 컬럼비아 심포니를 이끌고 명반들을 남겼다. 1962년 2월 17일 베벌리힐스에서 타계했다.
지휘 : Leonard Bernstein (레너드 번스타인)
레너드 번스타인은 1918년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모는 러시아 출신이며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이다. 어린시절부터 피아노 연주하기를 좋아했으며 음악적인 재능을 보였다. 하버드대학교에 진학하여 작곡을 전공했고, 1937년 모더니즘 음악의 대가였던 디미트리 미트로폴로스(Dimitri Mitropolous)를 만나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또한 하버드의 미학교수였던 데이비드 프롤(David Pral... 레너드 번스타인은 1918년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모는 러시아 출신이며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이다. 어린시절부터 피아노 연주하기를 좋아했으며 음악적인 재능을 보였다. 하버드대학교에 진학하여 작곡을 전공했고, 1937년 모더니즘 음악의 대가였던 디미트리 미트로폴로스(Dimitri Mitropolous)를 만나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또한 하버드의 미학교수였던 데이비드 프롤(David Prall)로 부터 예술을 이해하고 음악을 표현하는데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39년 그의 졸업논문은 '인종적 요소가 미국 음악에 끼친 영향'이라는 주제로 썼다.

졸업 후에는 F.라이너, S.쿠세비츠키에게 지휘법을, 톰프슨에게 관현악법을 배웠다. 1943년 뉴욕필하모니 음악감독이었던 아서 로진스키(Arthur rodzinski)의 인정을 받아 뉴욕필하모닉의 보조지휘자가 되었다. 그해 11월 14일 뉴욕필하모니의 지휘자 브루노 발터(Bruno Walter)가 급환으로 지휘를 못하게 되자, 그의 대신 뉴욕필하모니의 지휘를 맡았고 CBS방송을 통해 전국에 중계되었다. 번스타인은 이 한번의 기회로 유명세를 탔고 이름을 떨치게되었다. 1944년 피츠버그 교향악단을 지휘하였고 자신의 첫 교향곡 《예레미야 심포니 Jeremiah Symphony》을 연주했다.

당시 유럽에서 일어난 2차세계대전은 러시아로 확전되었고 히틀러가 저지런 대량학살 소식이 미국 전해졌다. 부모가 러시아 출신인 번스타인은 러시아 난민을 돕자는 자선행사에 자주 초대되어 나갔으며 카네기홀 등에서 자선 연주회를 열었다. 번스타인은 음악뿐만아니라 정치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디트로이트를 중심으로 진보당 창당에 관여하였고 진보적 단체의 단결을 주장했다. 이때부터 그는 FBI의 조사를 받았으며 그의 정치적 성향은 공산주의로 분류되었다. 그는 CBS 방송국 출입이 금지되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그의 음악과 공연은 취소되었다. 번스타인은 정치적인 성향 때문에 급격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마침내 미국의 유력지인 라이프 지에 50명의 대표적인 좌파 블랙리스트로 번스타인이 소개되었고 뉴욕필하모니 지위자 명단에서도 제외되었다.

1953년 7월 미국 국무부는 번스타인의 여권 갱신을 거부하였고 항상 FBI의 감시를 받으며 고립되었다가 자신의 활동과 신념을 부정하는 진술서에 서명하고 나서야 여권을 받아 유럽으로 갈 수 있었다. 그해 8월에 이탈리아로 건너가 연주활동을 하였는데 음악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표면적으로 보수적 성향의 미국인임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 결과 컬럼비아 영화사의 승인을 얻어내 《워터프론트 Waterfront》(1954)라는 영화음악 제작을 맡을 수 있었다. 그후 포드 자동차의 의뢰를 받아 연주회를 열었고 CBS를 통해 방송되었다. 번스타인은 다시 뉴욕 필하모니로 복귀하게 되었으며 미국에서 지휘자로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1957년 뉴욕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 이듬해 음악감독으로 취임하였고 그가 연주하는 음악회는 최대의 흥행을 보증하게 되었다. 번스타인은 뮤지컬《웨스트사이드 스토리 West Side Story》(1957)의 음악을 담당하면서 가장 미국적인 뮤지컬의 창작하였다는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진보적인 성향이 보수로 전향한 것은 아니었으며 미국내 민권투쟁과 인종차별 등 사회적인 문제에 적극 참여하였다. 1964년 번스타인은 미국에서 일어난 흑인민권운동에 가담하여 마틴 루터 킹 목사(Martin Luther King)와 함께 앨라바마에서 열린 셀마 대행진에 참가하였다. 번스타인은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닉슨 행정부가 일으킨 베트남 전쟁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종전을 주장하였고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하였다. 이 시기에 자신의 사회사상을 표현한 교향곡《카디시 Kaddish》(1963)와《치체스터 시편 Chichester Psalms》(1965)을 발표하였다. 미국의 보수파인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자 미국내 진보세력의 몰락을 우려하였고 보수파가 추진하는 핵무기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이상과 다르게 변모하는 미국사회의 모습으로 번스타인은 상실감으로 실의에 빠져들었다. 20세기 미국을 표현하는 오페라를 구상하였으나 끝내 작곡을 완성하지 못했다. 1985년 세계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영국, 일본, 그리스, 헝가리 등지에서 연주했으며 이후에는 주로 유럽을 무대로 연주활동을 했다. 1990년 10월 14일 사망했다.
오케스트라 : New York Philharmonic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Philharmonic-Symphony Society of New York, w York Philharmonic Orchestra, New York Philharmonic-Symphony Orchestra / Philharmonic Symphony Orchestra o)
오케스트라 : Philadelphia Orchestra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 : Cleveland Orchestra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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