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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의 대전략

[ 양장 ]
노태우 | 조선뉴스프레스 | 2011년 08월 11일 리뷰 총점9.0 정보 더 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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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출간일 2011년 08월 11일
쪽수, 무게, 크기 560쪽 | 975g | 160*240*35mm
ISBN13 9788991491724
ISBN10 899149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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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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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1932년 12월 4일 대구광역시 출생. 육군사관학교 졸업, 조지워싱턴대학교 법학 명예박사,, 모스크바대학교 정치학 명예박사. 육군 보병 소대장, 제8대 수도경비 사령관, 제41대 내무부 장관, 제12대 민주정의당 국회의원, 제2대 민주정의당 총재, 제1대 민주자유당 총재 등을 거쳐 제13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아시아협회 올해의 정치인상, 프랑스 대훈장, 독일 대훈장, 영국 대훈장 수상. 1932년 12월 4일 대구광역시 출생. 육군사관학교 졸업, 조지워싱턴대학교 법학 명예박사,, 모스크바대학교 정치학 명예박사. 육군 보병 소대장, 제8대 수도경비 사령관, 제41대 내무부 장관, 제12대 민주정의당 국회의원, 제2대 민주정의당 총재, 제1대 민주자유당 총재 등을 거쳐 제13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아시아협회 올해의 정치인상, 프랑스 대훈장, 독일 대훈장, 영국 대훈장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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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제23장 민주화와 자율화의 전면적 확산

-“언론은 장악될 수 없다”

“언론은 장악할 수도 없고 장악하려고 시도해서도 안 된다”는 6·29선언 제5항만큼 내가 명심(銘心)했던 말도 없을 것이다. 언론인들과 야당에 대해서 최대의 자유를 준 것은 나였고 그들로부터 가장 혹독한 비판을 받은 것도 나였다. 나도 인간인 만큼 때때로 울컥하는 마음이 생기곤 했으나 “언론은 장악할 수도 없고 장악하려고 시도해서도 안 된다”는 약속을 떠올리면서 나를 다스렸다. 언론의 자유와 자율을 보장하면 그에 따른 책임과 신중함이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릴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5년 안에 그런 좋은 일이 일어날 순 없었다. 민주화는 장구한 시간이 걸리는 과정임을 새삼 깨닫고 나의 성급함을 반성했다. 경제가 발전하고 제도가 바뀌는 것보다 인간이 바뀌는 것은 더 더디다.
나는 언론자유가 민주화의 견인차(牽引車)라고 생각했다. 언론자유는 모든 자유를 자유케 하는 자유의 어머니라고 한다. 내 재임기간 중 언론의 자유는 획기적으로 신장되었다.

-기본권의 보장
나는 민주주의를 요구한 민주투사가 아니고 민주화를 약속하고 이를 실천한 사람이다. 한국에서 민주화의 핵심적 의미는 언론자유와 기본적 인권의 보장이었다. 국민의 기본권은 선언적이어선 안 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개개인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다. 민주사회에선 한 사람의 자유라도 억울하게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 대(大)를 위하여 소(小)가 희생되어서도 안 된다. 한국은 반(反)인권적인 공산주의 세력과 대결하면서 자유민주체제를 키우고 지켜가야 하는 2중의 고민을 안았다. 반공(反共)을 위하여 자유를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분명 존재하였다. 6·29선언은 그런 단서(但書)도 폐기하고 선진국 수준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개발연대의 논리와 획을 그은 것이다. 나는 제13대 대통령 취임사에서도 이 점을 강조했다.

제24장 전환기의 經濟, 도전과 응전

-북방정책으로 열린 한국 경제의 活路

소련 측에 제공한 경협자금에 대해 말이 많지만 실제로는 14억5000만 달러밖에 가지 않았다. 국제교역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한국은 북방외교를 통해 수교한 중국과 동구권에서만 흑자를 보고 다른 지역에서는 적자(赤子)를 보고 있다. 결론적으로 소련에―그것도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으로―빌려 준 차관은 이미 그 이상의 수익을 우리에게 안겨 주고 있다.
소련 및 중국과의 수교는 경제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외교·국방 등 모든 면에서 한국의 위상(位相)과 한국인의 삶을 바꿔놓았다. 6공은 민주화와 공산권 붕괴라는 도전(挑戰)에 대해서 경제의 자율화와 북방정책이란 응전(應戰)을 했다. 그 승부의 결과는 대승(大勝)이었다.

-경제正義와 민주화의 代價

6공화국을 출범시킨 나의 앞에는 ‘민주화’라는 절대적인 과제가 놓여 있었다. 정치적 민주화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경제가 어떤 영향을 받게 될지에 대해서는 딱 부러지게 단언할 수 없었지만 적잖은 문제가 야기될 것이라는 점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1987년 6·29선언 이후 민주화에 대한 욕구는 경제 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6공화국은 민주화 요구를 수용해 가면서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실천해야 하는 운명을 안고 있었다.
‘경제정의(經濟正義)’는 6공화국 초기부터 강조되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18년과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7년의 성장위주 과정 속에서 우리나라의 분배구조는 이른바 ‘가진 이들’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었다. 6·29선언과 동시에 터져 나온 노동자들의 요구에 부응(副應)하다 보니 누구라도 경제정의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절을 만난 것이다.
기업인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나는 당시 노동계(勞動界)의 요구가 우리 경제를 크게 손상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억압을 토대로 경제발전이 이루어지다가 갑작스럽게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임금상승률도 우리가 선진국을 지향(志向)하는 입장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렇게 무리한 것은 아니었다. 싱가포르·대만 등 경쟁국들과 비교해도 크게 오른 것은 아니었다.

-경제 전환기의 논리

정책의 비중이 민주주의와 경제정의(經濟正義)로 갈 수밖에 없고 가진 이들 쪽에 서 있는 한편이 어느 정도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성장일변도를 달릴 때처럼 노동자들만의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이 과정에서 경쟁력이 다소 떨어졌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대가(代價)였다. 경제의 효율만을 따지는 사람들은 그것이 민주주의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여겨 민주화에 따른 코스트(Cost: 비용)를 계산하지 않으려 했다.

-純外債는 반으로 줄다

5공이 끝나는 시점인 1987년 224억 달러였던 우리나라 순(純)외채가 6공이 끝나는 시점인 1992년에는 110억 달러로 절반으로 줄었다. 1987년 3200달러이던 1인당 국민총소득은 7200달러로 늘어나고 무역 규모도 이 기간 거의 두 배로 증대되었음에도 총 외채규모는 5년 전과 비슷한 428억 달러 수준이었던 것이다.

제25장 구조개혁과 200만호 건설

-무노동 무임금

나는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에 대해서는 받아들이되 ‘무노동 무임금’ 원칙은 고수하라고 지시했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이 원칙을 비판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비판 자체가 난센스라고 생각한다. 세계의 노동운동사를 보거나 미국·유럽·일본 등 어느 나라를 보아도 파업하고 월급 받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었다.
기본으로 돌아가 이야기하면, 노사관계는 계약이다. 노(勞)는 사(使)에게 근로를 제공하고, 사(使)는 노(勞)에게 근로의 대가로 임금을 제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勞)가 사(使)에게 노동을 제공하지 않는데 사(使)가 노(勞)에 임금을 준다는 것은 노사(勞使)관계의 기본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제26장 KTX, 영종도 공항, 서해안 고속도로

-外換위기가 6공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김영삼 정부가 외환(外換)위기로 국가를 부도 위기에까지 몰리게 한 것을 두고 그 원인을 6공화국에 돌리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부당성은 수치를 비교해 보면 간단하게 밝혀진다.
6공 말의 총외채는 430억 달러, 순외채(純外債)는 100억 달러 내외였다. 그것이 김영삼 정부에 들어가 네 배 가까이 늘었다. 외환위기가 발생했을 때의 총외채는 1600억 달러 가까이 되었는데 나중에 기업들 것까지 합쳐 보니 2000억 달러에 이르렀다.
6공은 경제기반을 견고하게 다진다고 해서 외채(外債) 규모를 줄이는 등 재정(財政)을 건전 상태로 만들고 물가도 다음 정부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임기 말인 1992년에는 인상 요인을 최대한 흡수해 넘겨 주었다. 내 임기 5년간 재정적자는 단 한 번도 없었다.
1988~1991년에 물가가 크게 오른 것은 과거에 오르지 못했던 전력(電力)요금 등의 공공요금을 많이 풀어 주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 들어 경제가 엉망이 된 것은 기본적으로 금융산업을 방만하게 관리했기 때문이다. 기업들의 부채가 5년 동안 4~5배나 늘어난 데서 알 수 있듯이 무턱대고 돈을 풀어 기업들이 멋대로 자금을 관리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결정적인 잘못이었다. 1991년에 정부는 재벌기업들에 대해서도 핵심업종 3개 이외에는 대출 자체를 중단시켰는데, 김영삼 정부는 경제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를 규제로만 생각해 풀어버림으로써 방만을 자초했던 것이다.

제27장 法질서 확립

-良心囚는 없었다!

극좌파들을 잡아들인 데 대해 사상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반발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이나 머릿속에 있는 사상을 문제 삼아 처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사상이 밖으로 표출되는 과정에서 범법(犯法) 행위로 나타났기 때문에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선을 넘어서는 상황에서 공권력을 동원한 것이다. 제6공화국에선 양심만으로 처벌받은 사람은 없었다. 양심수(良心囚)는 없었다는 뜻이다.

제28장 轉換期의 교육정책

-全敎組 不法化

교원들이 노동 3권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관념상 수용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교원들의 노조 활동은 학생의 학습권을 침해하며 학생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점에서 학부모들의 비판이 높았다. 더욱이 이른바 ‘참교육’이라는 민중교육론에 입각한 좌경적이고 계급투쟁적인 교육개혁운동은 노동권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으로 교원노조 결성의 목적이 될 수 없으며, 우리 정치·사회적 여건에 비추어 허용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자 많은 국민들의 여론이었다.
1987년 말 1만2000명에 달했던 교원노조(敎員勞組) 가입 교원수는 정부당국 및 학교 행정가들의 탈퇴 설득과 병행한 중징계방침 천명으로 1989년 말까지 1524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탈퇴했다. 미탈퇴 교원들은 1990년 초기까지 전원 징계 해직함으로써 교원노조는 조직이 와해되었다. 정부는 교원노조에 반대하는 학부모들의 모임에 대하여는 그 활동을 지원했으며, 시·도별 교육정상화 촉구 학부모대회가 12개 교육위원회에서 15회 개최되어 1만 9380명의 학부모들이 참석했다.
김영삼(金泳三) 정부는 해직 교사들을 복직시켜주었고, 김대중(金大中) 정부는 전교조를 합법화했다. 노무현(盧武鉉) 정부는 전교조의 친북반미(親北反美) 교육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 국민들이 이에 불만을 품고 여러 모로 대응하고 있다. 내가 세운 원칙이 엄격하게 적용되었더라면 불필요한 국론(國論)의 소모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제30장 언론자유의 보장

-언론자유의 피해자

율곡사업 역시 잘못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이 의혹을 제기해 놓기만 하고 매듭을 짓지 않는 바람에 아직도 비리(非理)가 있는 양 오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 일과 관련해서는 언론뿐만 아니라 이회창(李會昌) 당시 감사원장 역시 당당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조사 결과 잘못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을 의식해서인지 흐지부지 넘어가고 말았기 때문이다.

제32장 靑瓦臺 생활

-평범한 주부였는데…

그럼 여자다움이란 무엇인가. 첫째는 모양이나 행동이 예쁘고 아름답게 보여야 한다. 둘째는 나서지 않고 겸손해야 한다. 셋째는 말이 적어야 한다. 넷째는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일게 하는 태도를 갖춘 여성이라야 한다.
여자들끼리는 잘난 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첫째, 남의 앞장을 서지 마시오.
둘째, 몸치장을 수수하게 하시오.
셋째, 말을 적게 하시오.
넷째, 어떤 일이 있어도 화를 내지 마시오.
아내는 내 당부를 듣고는 “평소에도 그렇게 하려고 애쓰던 덕목(德目)들이므로 문제될 게 없으나, 대중 앞에 나서면 사람들을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고 그저 가슴이 마구 떨리기만 하니 큰 일”이라고 했다.

-內助의 원칙
하지만 대통령 부인에 대해서는 대통령처럼 명시된 조문이 거의 없었다. 제대로 확립된 관례가 없어 대통령 부인의 바람직한 역할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아가 적절한 원칙도 세워야 했다.
당사자인 아내는 훨씬 더 신경이 쓰였겠지만 원칙을 정하는 데는 대통령인 내 뜻이 가장 중요했다. 나는 이 사안이 매우 미묘하다고 생각했는데 전임자에게 물어보기도 어렵고 해서 나름대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정했다.
첫째, 대통령 부인은 남편으로서의 대통령을 내조(內助)하는 것이지 별도의 독립된 기능은 갖지 않는다.
둘째, 별도 직책을 갖지 않는다.
셋째, 대통령과 분리된 별도의 공식 행사를 주최하지 않는다.
넷째, 공적(公的) 사항이 아닌, 대통령이 필요로 하는 일만 내조(內助)한다.
다섯째, 관저생활을 총괄한다.

-아내의 싫은 소리

나는 저녁이 되면 심신(心身)이 피곤해져 이야기하고 싶은 의욕이 나질 않았다. 아내가 “오늘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었나요? 제게 참고가 되는 이야기를 해 주세요”하면 나는 “오늘 별일 없었소. 이야기할 거리도 없어요”하고 대답하기 일쑤였다. 아내가 하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지 않고 건성으로 흘려버리곤 했다.
내 경우에는 어떤 이야기건 진지하게 듣기 때문에 장관이나 비서관들이 듣기 싫은 보고도 서슴없이 하곤 했다. 신문에서도 언론자유를 만끽하고 있었으므로 비판할 것은 모두 거리낌 없이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내에게만은 예외였다. ‘영부인은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는 말이 있지만 아내가 싫은 소리를 하면 가만히 듣지를 못했다. 저녁이 되면 아내는 어디서 들었는지 싫은 얘기를 내게 전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내 태도는 달라졌다.
나는 외부의 어떤 사람에게도 싫은 소리를 한다고 짜증을 내본 적이 없으나 집사람이 싫은 소리를 하면 짜증을 냈다.
“여보, 그런 좋지 않은 소리는 보고도 받고 신문에서도 보았소. 하루 종일 좋지 않은 것만 보고 들으니 머리가 터질 것 같소. 당신이나마 좋은 소리로 나를 위로해 줄 수 없겠소?”
그러면 아내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청와대 생활이란 게 이렇게 고달픈 것인가 하고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이따금 가까운 친지들을 불러 술을 마시며 풀어 버리곤 했다. 하지만 아내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모든 고달픔과 스트레스를 혼자 삭여야 했다.
다행인 것은 처제(妻弟·금진호 전 장관 부인)가 성격이 부드럽고 원만한 데다가 재덕(才德)을 겸비해 언니인 아내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아마 처제가 없었다면 대통령 부인으로서 안게 되는 스트레스를 이겨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제33장 통일을 위한 遠交近攻

-‘개방=통일’이 나의 신념

나는 전쟁을 통하지 않고 북한을 개방시킬 수만 있다면 통일은 자연스럽게 이뤄진다고 믿었다. 어떤 공산주의 국가이건 개방되면 변하게 마련 아닌가. ‘개방=통일’이라는 것이 내가 추진한 대북(對北)전략의 기본 개념이었다.

-公式채널, 幕後채널

나는 두 사람의 역할을 나누었는데,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외교·안보 사항은 김 수석이 관장하고, 특사를 보내거나 비밀접촉을 해야 하는 비공식적인 일들은 박 장관에게 시켰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인다면, 김 수석은 북방정책의 종합참모로서 나와 함께 북방외교의 큰 그림을 그렸다는 점이다. 따라서 김 수석은 박 보좌관의 역할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후에 어떤 기사에는 북한과 동구권은 박 보좌관이 맡고, 그 외의 서방외교는 김 수석이 한 것으로 적고 있는데, 지역을 기준으로 구분하지는 않았다. 다만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가 안 되어 있었으므로 김 수석보다는 박 ?관이 나서서 비밀리에 접촉을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생긴 오해이다. 북방외교의 시험대가 된 헝가리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박 장관이 수십 차례 비밀 회담을 한 끝에 그로스 공산당 서기장을 만나 수교에 합의한 것이다.
여기서 한마디 덧붙이면 북방정책 과정에서 자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실제로는 김 수석과 박 장관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그 일에 관여한 경우가 많았다.

제34장 한국-헝가리 修交

-東歐의 문이 열리다

보름 후인 (1988년) 8월26일 한국과 헝가리는 대사급 상주대표부 개설 협정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이때 우리가 보안을 유지하느라 이 사실을 공식발표 48시간 전에야 미국 측에 통보해 주었는데 이 때문에 미국 측은 섭섭해했다. 이 일이 과장되어 미국 측이 나의 북방외교를 못마땅해 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그 후 미국 측은 나의 북방외교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제35장 東歐 민주화 혁명의 현장에서

-올림픽과 민주화가 외교 자산

북방외교를 뒷받침한 두 기둥은 서울올림픽의 성공과 한국의 민주화였다. 서울올림픽은 또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과격하게 치닫지 않게 한 제동장치였다. 민주화 운동 세력이나 정부 측이나, 서울올림픽을 기필코 성공시켜야 한다는 공감대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일념이 민주화 운동 측에는 폭력적으로 흐르지 않게 했고, 정부 측에 대해서도 군대 동원과 같은 비상수단을 쓰지 않도록 했다.

-브란트가 전해 준 고르바초프의 곤경

브란트: 그런데 각하께서 민주화를 말씀하시니까 생각나는데, 서독 출발 전에 예술인 몇 사람이 찾아와서 한국의 어느 화가가 보안법관계로 연루되어 있다면서, 선처를 당부해 달라는 말을 했는데, 국무총리하고 만날 약속이 되어 있으니, 그때 그 부탁을 드려도 될는지요?
나: 그렇게 하세요.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오늘 한국에서 단순히 정치적 신념이나 이념 때문에 법의 제재를 가하는 경우는 없다는 점입니다. 확실히는 몰라도 말씀 들으신 그 화가란 사람도 그 작품이 폭력행위 현장에서 이용됐든지, 혹은 폭력행위를 유발하는 데 이용됐든지 하여, 법률 위반이 됐을 것입니다.

-수많은 접촉

한국과 소련이 수교하기까지는 여러 채널을 통해 수많은 접촉이 있었다. 우리 쪽에서는 김종휘 외교안보수석과 박철언 정책보좌관이 이끄는 두 파트에서 일을 나눠 했다. 두 사람이 역할을 놓고 다투었다는 말이 있지만,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 자신에게 부여된 일만 하면 되니까 그럴 소지가 있을 수 없었다.
초기에는 박 보좌관이 도쿄 주재 잡지사 기자로 위장한 소련 정보부(KGB) 요원을 주로 접촉했고, 김 수석이 관여하게 된 것은 어느 정도 관계가 깊어졌을 때부터였다. 내가 지시를 내리고 그에 대한 결과를 보고받으면 김종휘 수석에게 정리를 시켰다. 김 수석은 그것을 기초로 구상하고 전반적인 계획을 세우곤 했다.

-密使 도브리닌

회담이 있기 두 주일 전인 그해 5월 하순에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외교수석보좌관인 아나톨리 도브리닌 전 주미대사를 한국에 보내 비밀리에 나를 만나게 했다.
그는 이 같은 고르바초프의 결정이 당이나 군부, 외무부의 반대 속에 비밀리에 내려졌으므로 어떤 루트를 통해서건 확인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만약 한국 측이 이를 어기고 확인하려고 들면 적잖은 파문이 일어나고 그렇게 될 경우 고르바초프는 부인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희대의 사기극?

그래서 도브리닌이 전하는 고르바초프의 메시지 하나만을 믿고 한소(韓蘇) 정상회담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우리 측은 즉시 소련 측과 접촉해 블라디보스토크를 제의했는데 소련 측이 도브리닌을 보내 샌프란시스코가 더 좋겠다고 회답해 온 것이다.

-화 난 셰바르드나제의 선물

코뮈니케의 원안에는 양국 수교일이 ‘1991년 1월1일’로 적혀 있던 것을 셰바르드나제가 양국 외무장관 회담 현장에서 펜으로 ‘1990년 9월30일’로 고쳐 쓴 것이다.
셰바르드나제는 이 일이 있기 얼마 전 북한 평양을 방문해 김영남(金永南) 외교부장 등을 만나 한국과의 수교 결정을 통보했다가 북한 당국자들로부터 협박에 가까운 무례(無禮)를 당해 감정이 무척 상해 있었다고 한다.

-韓蘇수교의 성과

숫자로 정확하게 계산할 수는 없지만 소련이 북한에 수출하는 석유가격을 공산권 특별가격에서 국제시세로 올림으로써 발생하는 추가 부담이 북한의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비행기·로켓 등 고도정밀무기의 지원 삭감이 우리 한국의 국방비를 절감해 주는 효과 등은 엄청난 것이다. 비행기 값만 하더라도 얼마나 되겠는가? 경협(經協) 이후 북한에 대한 소련의 전투기 공급은 즉각 중단되었다. 북한에 대한 무역특혜를 철폐하고 현금지불을 요구했다.
그 이후 소련에서는 미그 29기보다 최신형인 수호이 전투기를 쾺한에 보내기로 했다가 이를 중단했다. 기름과 최신무기의 공급도 거의 중단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내 퇴임 이후 한국 정부가 한-러 관계를 소원하게 만든 점이다. 어렵게 수교를 했는데 러시아가 고개를 돌리지 않게 했어야 했다. 러시아에 지원한 경협자금의 상환문제가 한국과 러시아 관계에 장애물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확고한 생각이다.
한국이 소련에 제공한 14억7000만 달러의 경협자금은 분명 큰돈이지만 그 돈의 상환이 지연된다 해도 우리와 러시아의 관계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서라도 돈독히 유지되도록 해야 했다. 극동 시베리아 쪽의 보고(寶庫)를 눈으로 한 번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인류가 고마워해야 할 사람
고르바초프는 머리가 영민하고 순발력이 있었으며 지혜로운 안목을 지닌 지도자였다. 무엇보다도 착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었기에 동구권에서 공산당 정권이 밀려나도 소련 군대를 보내지 않았으며 소련의 민주화 운동을 무력(武力)으로 막지 않았을 것이다. 러시아 혁명은 인류의 비극이었으나 소련 및 동구 공산체제가 무너질 때 피를 거의 흘리지 않은 공은 거의 전적으로 고르바초프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문제는 그가 경제를 너무 몰랐다는 점이다. 그는 정치개혁을 하게 되면 경제발전도 저절로 따라올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정치개혁을 하면서도 공산주의를 포기하지 않음으로 혼란을 가중시켰다. 만약 그가 시장경제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만 가졌더라도 소련 경제가 그렇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약점을 뒤늦게 깨달은 것 같았다.

-韓人동포들의 집단이주 문제

나는 정상회담 내내 옐친으로부터 오로지 러시아의 이익만을 추구하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옐친 대통령과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韓人) 동포들의 집단이주 문제를 상의했다. 30만 명을 헤아리는 러시아 내 우리 동포들은 원래 연해주에 있다가 스탈린의 명령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해 흩어져 버린 상태였다. 따라서 그들을 연해주의 한 지역으로 끌어 모으자는 것이 나의 기본 구상이었다.

-미국의 적극 협조

미국이 내게 북방외교에 신중을 기할 것을 충고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미국은 나의 정책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믿고 지원해 주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회담을 성사시키는 데 미국은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

제37장 北京으로 가는 길

-金宗輝-朴哲彦이 큰 역할

소련과의 수교과정에서처럼 중국과의 관계개선 과정에서도 내가 직접 일을 시킨 사람은 김종휘(金宗輝) 외교안보수석과 박철언(朴哲彦) 장관뿐이었다. 공식적인 채널은 김 수석이 담당했다. 박 장관은 비공식 라인이었는데 헝가리와의 수교 때와 북한과의 비밀접촉 때 활약했다.
그런데 중국과의 수교 과정에서 자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자칭 ‘특사’(特使)들이 상당히 많았다. “덩샤오핑(鄧小平)을 만나 친서를 전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나는 중국을 상대하면서 청와대 수석이나 보좌관 이외의 사람을 통해 친서(親書)를 보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친서를 작성할 때도 어떤 경우건 김종휘 수석의 손을 거치게 했다. “노 대통령이 취임한 지 8일 만에 중국 태생의 한의사 한 사람을 중국에 비공식 특사로 보냈다”는 이야기도 와전(訛傳)된 것이다.

-天安門 사태 비난에 부시와 대처 설득

1989년 6월4일 중국 베이징에서 천안문(天安門) 사태가 발생했다.
나는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슐츠 국무장관, 영국의 대처 총리 등 여러 사람들과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다. 그들은 인권문제라는 차원에서 상당히 강경한 입장이었는데, 당시 미(美) 의회도 그런 분위기였다. 나는 그들에게 중국의 역사와 문화·국민성 등을 설명하고 중국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

제38장 韓中수교의 幕前幕後

-“중국은 각하의 품안으로 걸어 들어올 것입니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을 할 때에도 나는 적극적으로 중국을 지원했다.
그 해 10월17일 슐츠 전 미 국무장관이 나를 찾아왔다.
“제가 보기에 한국이 중국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중국이 한국을 필요로 하는 것이 더 큰 것 같으며 대(對)북한 관계도 각하의 뜻대로 풀려 가고 있기 때문에 중국이 결국은 각하의 품안으로 걸어들어 오는 날이 올 것입니다.”

-대만과 중국 사이의 선택

한중 수교는 중국 측이 먼저 제의한 것이다. 우리가 오래 전부터 간절히 바라던 것을 중국 측이 제의해 왔는데 받아들이지 않거나 늦출 이유가 없었다.

-중국 지도자들 속에 녹아 있는 역사의 무게

나는 10여 년간 중국 지도자들을 만나면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은 모가 나지 않고 화합을 잘 이루며, 과학기술에 대퇇 지식과 능력이 몸에 배어 있고, 국제적인 감각이 풍부한 사람들이 지도자군(群)을 형성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중국 지도자들 가운데는 과학기술계 출신이 많아서인지 선진화(先進化)에 중점을 두고 이런 사람들을 지도자로 키우는 경향이 뚜렷해 보였다.

제39장 남북대화시대의 開幕

-“한국의 양해 없이 북한과 상대하지 말라”

건국 이래 우리가 줄곧 지켜온 대북(對北)정책은 ‘남·북한 문제는 남북한이 해결한다’는 당사자 해결 원칙이었다. 나는 미국·일본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정상들을 만날 때마다 “남북관계, 통일문제는 우리가 해결한다. 미국과 일본은 남북대화에 유리한 여건만 조성해 달라”고 누누이 당부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우리를 제쳐놓고 북한과 직접 협상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내가 취임한 이후 우방(友邦) 가운데 어느 나라, 어느 누구도 우리를 제쳐놓고 북한과 직접 협상하지 않았다. 북한이 제안한 남한·북한·미국의 3자회담이 성사되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 원칙은 김영삼(金泳三) 정부 이후 무너지고 말았다.
제6공화국 시절에는 남북기본합의서뿐만 아니라 비핵화(非核化)공동선언까지 우리가 직접 주도했다. 그런데 다음 정부에 들어가 핵협상에서 우리는 빠지고 미국과 북한이 직접 만나게 된 것이다. 미국은 협상 과정에서 한국과 협의하기는커녕 단독으로 회담을 해놓고 몇 십억 달러에 이르는 청구서만 내밀었다.
내 재임 중에도 북한은 우리를 제외시키고 미국과 직접 협상하려 했다.
이 기간 중 단 한 차례 미북(美北) 고위급회담이 있었는데 캔터 미 국무부 차관과 김용순(金容淳) 대남(對南)담당 비서의 회담이었다.
1991년 가을 미국은 캔터 차관과 북한 외교부 강석주(姜錫柱) 부부장의 회담을 갖고 싶다는 뜻을 우리 측 김종휘(金宗輝) 수석에게 타진해 왔다. 김 수석의 보고를 받고 우리는 “좋다, 단 한번이다. 그러나 상대는 강석주 부부장이 아닌 김용순 비서로 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양해했다.
우리는 강석주 부부장보다는 김일성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김용순과 대화하게 함으로써 “미국이 단독으로 북한과 대화를 할 수 없다. 남북한 당사자 회담이 한반도 해결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김일성에게 확실하게 통보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즉 미북 간 대화를 통해 북한에 ‘남한과 접촉하는 길밖에 없다’는 인식을 심어 주려 했던 것이다.

-6者회담 반대의 이유

제6공화국 시절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이 북한 방문을 희망하면서 우리 쪽에 의견을 물어온 일이 있었다. 그는 한국 측의 동의를 받지 않고 그냥 가는 것이 모양새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우리 측의 의사를 타진해 왔다. 우리 측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내놓자 그는 방북(訪北) 의도를 철회했다.

-“김일성은 유죄, 꼭 전하라”

나는 9월6일 오후 4시 연(延) 총리 등 북한 측 대표단 열 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남북한 문제 전반에 대한 우리 측 입장을 설명하고 남북 정상(頂上)회담의 조기(早期) 개최를 제안했다.
나는 연 총리와 개별면담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김일성 주석은 6·25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6·25는 우리 민족을 그렇게 많이 죽이고 피를 흘리게 했으므로 그만큼 그 죄의 당사자다. 나는 당시 학생이었다. 나 자신 전쟁터로 나가 싸웠다. 많은 친구와 동료들이 죽었다. 나는 분명한 피해자다. 이 엄연한 비극이 앞으로 우리 역사에서 지워지겠는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잘못을 뉘우치고 무언가 죄 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양극(兩極)으로 대립하고 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비극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한다. 남북한 간에 협력관계가 이루어져 우리 민족에게 큰 희망을 안긴다면 죄를 벗는 큰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김 주석이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는가. 나는 아직 젊다. 나는 앞으로 누구와도 만날 기회가 있다. 하지만 김 주석은 노령(老齡)이어서 그럴 기회가 별로 없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라기보다도 정상회담은 당신들 주석을 위해서도 백 번 좋은 일이다. 그러니 이 뜻을 솔직하게 그대로 전해 달라.”
연 총리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예, 알겠습니다. 꼭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내가 본 연형묵은 착하고 무던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때 나는 진실로 김일성을 위하는 마음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김일성이야말로 이 엄청난 역사적 비극을 낳은 당사자가 아니던가. 결자해지(結者解之)를 해야 하는 장본인이 바로 그였다.

-김일성, “고려연방제 해야 한다” 되풀이

10월18일 오후에는 김일성 주석이 강(姜) 총리를 금수산 주석궁으로 초청해 20분간 단독면담을 한 후 대표 일행과 10분간 공동면담을 했다.
사실 우리측 대표들은 냉랭해진 회담 분위기를 감안할 때 김 주석과의 면담이 제대로 이루어질지 회의적이?으나 어쩐 일인지 북측은 예정대로 면담을 진행시켰다.
이날 나의 지시에 따라 강 총리가 고위급회담의 한계성을 거론하며 “두 정상께서 만나서 평화협정과 불가침선언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논의하시면 좋겠다”고 하자 김 주석은 “총리회담에서 모든 것이 합의된 후에 노 대통령을 만나 악수를 해야 의미가 있지 그 전에 만나 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두 개의 지방정권을 두고 한 나라 한 민족을 만들어 가야 한다”며 불쑥 고려연방제를 언급했다는 것이다.

제42장 南北 막후 話

-김일성의 ‘이상한’ 남북 정상회담 제의

제6공화국 시절 남북 정상(頂上)회담이 실현되지 못한 것은 북한 측의 여건이 덜 갖춰졌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입장에서는 자신감이 생기고 무언가 플러스가 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와야 하는데 실제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김일성은 “하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고 “하자”는 원칙에만 동의하면서 자꾸 핑계를 댄 것이다.
김일성은 단 한번 나를 북한에 초청한 적이 있었다. 1992년 봄 윤기복(尹基福) 조평통 위원장이 김일성의 특사로 친서와 초청장을 갖고 서울에 왔다. 초청 시기가 김일성의 생일과 맞물려 있었다.
게다가 북한 측 비밀창구 역할을 해온 박철언(朴哲彦) 체육청소년부 장관의 이야기로는 김일성의 초청이 ‘돈’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나는 정상(頂上)회담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모양새가 너무 나쁘다고 판단해 초청을 거절했다. 모양새를 구겨 가면서까지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비밀창구

나는 북한의 오판(誤判)을 막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정상회담을 생각했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이전의 박정희 대통령이나 전두환(全斗煥) 대통령도 그랬을 것이다.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단번에 합쳐지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북한이 우리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했다. 김일성이 서울에 와서 이곳저곳을 보게 되면 감히 전쟁을 도발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일성이 오판(誤判)을 해서 우리나라를 전쟁의 불바다로 만들어 국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만은 절대로 막아야 했다. 나는 나라를 책임지면서 이 점을 가장 먼저 생각했다.

-남북을 오간 사람들

그해 12월23일에는 스티븐 솔라즈 미 하원의원이 북한을 방문하고 귀국하는 길에 나를 예방했다. 그는 첫 인사부터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김영남 등과 7시간30분 동안 면담했는데 김일성 등 북한 측 인사와 대화를 하는 것이 마치 치과환자가 마취를 하지 않고 이를 뽑는 것과 같이 고통스러웠음을 고백합니다”라고 말했다.

-남북교류의 窓口 단일화

대북(對北)관계에 있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어디까지나 정부가 하고 민간이 해야 할 일은 민간이 하도록 허용하겠다는 것이었다. 민간도 정부를 거쳐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민간 차원의 통일 논의란 위험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다. 북한에 대한 정확한 인식 없이 통일 자체만을 목적으로 삼아 모든 것을 안이하고 낭만스럽게 보는 경향이 강했다. 남한의 정치인·재야인사·학생·문인 등이 앞다퉈 ‘교류하자’, ‘대화하자’며 평양에 가겠다고 법석을 떠니까, 만날 사람을 고르고 만날 시기를 정하는 ‘칼자루’를 북한이 쥐게 된 것이다.

-내가 만난 북한 인사들

내가 만난 북한사람 중에 특별히 ‘가능성이 있겠다’고 느낀 사람은 김달현 부총리였다. 김 부총리는 자신들의 어려운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을 줄 알았다. 나는 그의 그런 면모를 보면서 “채찍보다는 당근을 많이 주면 효과가 있겠구나”하고 느꼈다.
김종휘 수석 역시 그가 가장 개방적이고 상당히 실무적인 힘도 갖고 있다고 했다. 퇴임 후에 들으니, 김달현이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가 개혁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다가 김정일한테 미움을 받고 한직(閒職)으로 밀려났고, 그 후 자살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산업 시설을 시찰하고 느낀 바가 많았을 것이고 문제의식도 생겼을 것이다. 이것이 그에겐 비극의 단초가 된 셈이다.

-조작은 없었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북풍(北風)사건이 불거지자 “6공화국 말기에 일어났던 이선실 사건이 조작극이 아니었느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다. 당시 여당의 대통령 후보인 김영삼 씨를 당선시키기 위한 선거용이 아니었느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115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KAL기 폭발사건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도 되지 않는 헛소리다.
이선실 사건은 여·야 할 것 없이 정치인이 많이 관련되었다고 하지만 정책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청와대에서 논의될 성질의 사안은 아니었다.
1992년 10월 당시 이현우(李賢雨) 안기부장이나 정형근(鄭亨根) 안기부 1차장 선에서 다뤄졌던 이 간첩 수사 사건에 대해서 김종휘(金宗輝) 수석이나 다른 청와대 참모들은 사전에 전혀 몰랐다고 했다.

제43장 한반도 非核化 선언

-非核化 선언, 核不在 선언

그때 마침 김종휘 수석으로부터 “미국이 전(全)세계적으로 배치된 전술 핵무기를 철수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한국 내 전술 핵무기도 곧 철수할 것 같다”는 정보 보고를 들었다. 나는 “그러면 됐다. 미군의 핵무기 철수 방침을 정책적으로 활용하자”고 결심했다. 나는 1991년 9월 부시 대통령이 ‘핵 군축 선언’을 하기 직전 두 차례에 걸친 정상(頂上)회담을 통해 이 같은 입장을 밝히고 곧 바로 비핵화 선언을 발표했다. 당시 언론은 핵무기가 여러 군데 배치되어 있는 것처럼 보도했지만 실제로는 한 군데뿐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나의 구상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협조를 해주었다. 북한의 핵무기를 없애기 위해 먼저 주한미군에 배치된 핵무기를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부시 미 대통령이 전(全) 세계적인 전술 핵무기 철수 방침을 추진하고 나섬으로써 절묘한 타이밍을 잡은 셈이었다. 미국 측은 내가 주도해서 비핵화 선언을 내놓을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지를 했다.

‘핵무기를 보유하려는 노력 자체가 안보를 취약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주한미군사령관, “전술핵이 있습니다”

미군의 한국 내 전술핵 배치는 과거 많은 사람들이 짐작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만 해외 핵무기 배치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다’(NCND: Neither Confirm, Nor Deny)는 미국의 오랜 정책에 따라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 사실을 공식으로 알게 된 것은 대통령에 취임한 지 며칠 안 되어서였다.
릴리 주한 미 대사와 메네트리 미 8군사령관이 “매우 중요한 사항에 대해 노 대통령께 보고하겠다. 여기에는 김종휘 수석이 통역을 하고 일절 다른 사람을 배석시키지 말아 달라”고 연락을 해왔다. 그 자리에서 메네트리 사령관은 “대한민국에 전술핵이 있습니다”라고 알려줬다. 미국 측은 한국 국방부 장관에게도 공식적으로 남한에 핵무기가 존재하는 것을 확인해 주지 않았고 대통령인 내게만 직접 보고를 통해 확인해 주었다.

-부시에게 “조건부 전술핵 철수 수락” 제안

주한미군이 한국 내에 갖고 있는 핵무기의 철수를 맨 처음 거론한 것은 나였다. 1991년 7월2일 오전(한국시간 2일 밤) 나는 부시 미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頂上)회담을 하면서 한반도 핵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정식으로 제기했다.

제46장 북방외교의 철학

-북방정책 추진의 원칙

나는 북방정책을 추진하면서 일시적이거나 즉흥적이지 않았다. 한반도의 군사적 대치 상태를 해결하고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큰 틀을 설정해 놓고 그에 맞는 전략을 구사했다. 때문에 북방외교는 소련과 중국, 남북한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 가면서 전개되었다. 예를 들면 소련을 놓고도 단지 소련만이 아니라 중국·일본·미국·남북한 간의 관계를 모두 고려하면서 전략과 구상을 세웠다. 최고통치자로서 구체적인 목표뿐만 아니라 그 효과까지도 철저하게 분석한 후에 큰 틀 안에서 결정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한국 외교를 종래의 추종(追從)외교에서 자주(自主)외교로 전환시켰다. 나는 냉전 시절부터 ‘자유진영에 속한 나라들이 공산진영의 나라들과 마음대로 교류하고 수교하고 다하는데 우리는 왜 못하는가’하고 생각했다. “남의 눈치 보고, 추종하고, 이게 무슨 자주 외교권을 가진 나라인가. 그러고도 민족의 자존이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라고 자문(自問)하곤 했다. 북방외교에 내재(內在)된 나의 기본 철학은 바로 이것이었다.

제47장 退任과 歸鄕

-인수인계할 기회 없었다

나는 그가 내 뜻에 대략적으로라도 동의하고 그렇게 따르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일어나는 현상은 내 기대와는 너무나 어긋난, 충격적인 것들이었다.
나는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고부터 취임할 때까지 석 달간 청와대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세부적으로 인계해야 할 일, 또 다짐해야 할 일들이 많았지만, 아무 것도 이루어진 게 없었다.
물론 나 자신도 대통령에 당선된 후 취임 때까지 청와대를 방문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때는 경우가 달랐다. 내 전임자가 번거로움을 피하려고 나의 방문을 사절하는 대신 그가 우리 사저(私邸)를 방문했다.
어쨌든 김 당선자와는 2개월 반 동안 대화가 끊긴 채 1993년2월25일 대통령 취임식을 맞았다. 새 대통령 내외는 취임식 당일에야 청와대를 공식 방문했다. 그러나 극히 의례적인 방문에 지나지 않았다. 함께 앉아 차 한 잔 나누는 정도에 불과했다. 집무실과 별실을 소개하고 한두 가지 중요 사항을 인계하면서 몇 마디 담소한 것이 고작이었다.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전율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을 들으면서 나는 전율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순간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 데 대해 대한 자책감(自責感)을 느벲다. 투쟁적 구호로 점철된 취임식이 끝날 무렵 나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수많은 관중들을 향해 양손을 번쩍 들고 흔들었다.
왜 그렇게 했을까? 나는 순간적이지만 그의 취임사를 듣고 불안하게 생각할지도 모를 많은 관중들에게 안도감을 안겨 주고 싶은 생각에서 의식적으로 그 같은 행동을 취한 것이었다. 나는 김 대통령의 참 모습이 취임사와는 다를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아내와 함께 연희동 집으로 향했다.

-무기도입 과정은 깨끗했다

나는 무기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티끌만 한 의혹도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6공화국에서는, 국가안보를 위한 율곡 사업을 통해 비자금이나 통치자금을 조성하지 않았다. 나는 외국의 방위산업체 사람들을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일부 언론에서는 청와대가 무기 구입에 관여한 것처럼 보도하곤 했는데,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
일부 언론에서는 ‘군(軍)이 차세대 전투기 도입 시 F/A-18 전투기를 계속 건의했는데, 청와대가 반대해 F-16으로 번복 결정했다’는 식으로 보도한 적이 있는데 이 대목은 사실과 다르므로 여기에서 명백하게 해명하고자 한다.

-F-16 선정의 진실

공군은 F-16의 공대공 미사일 장착 능력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기 때문에 나는 외교안보수석실의 부정적인 검토 의견에도 불구하고 “가격이 틀림없는가, 기술이전 조건을 틀림없이 지킬 것인가” 하는 두 가지 사항을 다짐받으면서 F/A-18로 결재했다. 이에 대해 국방부 장관과 공군참모총장은 “그 조건들은 확실하다”고 보고했다.
그 후에 “F-16의 문제점이 해결됐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가격에 이상이 없다는 두 번째 확인이 있은 한 달 후인 1990년 9월, 맥도널 더글러스 측에서 기종 결정 당시 총 50억 달러로 규정했던 F/A-18 구입 가격을 62억 달러로 높여 제시해 왔다. 이는 달러 베이스로는 24% 상승이지만 환율 변동까지 고려하면 원화의 국방예산상 약 50%가 늘어나는 셈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가격을 절충하고 기종(機種) 선정을 재검토한 것이다.
이종구 국방장관과 한주석 공군참모총장은 1990년 10월 내게 세 가지 대안을 보고했다.
첫째 전투기 대수를 120대에서 80대로 줄이는 안, 둘째 구매 기간을 늘리면서 도입을 지연시켜 예산을 확보하는 안, 셋째 국내 조립을 포기하고 완제품을 도입하는 안 등이었다.
나는 이(李) 장관에게 “3개 안 모두 문제가 있으므로 기종(機種) 선정, 획득 방법 등 모든 차원에서 총체적으로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기종 선정 작업을 국방부와 공군에서만 하지 말고, 합참·국방과학연구소·국방연구원 등 관계부처의 전문가들도 참여시켜 광범위한 의견을 들으라고 당부했다.
그 결과 1991년 3월 국방부에서 ‘F-16을 들여와도 문제가 없다’는 수정 건의가 올라왔다. 얼마 전에 있었던 걸프전에서 F-16의 우수한 성능이 입증되고, F-16이 새로운 중거리 공대공 미사일 ‘암람’을 장착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F-16은 가격 면에서 F/A-18보다 15억 달러가 적어 비용 대 효과 면에서 유리하다는 의견이었다. 나는 다시 그 건의를 받아들여 F-16으로 최종 결정한 것이다.
F/A-18은 훌륭한 최첨단 전투기이고, 만약 맥도널 더글러스가 가격을 인상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도입했을 것이었다. 세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정치적 흑심이나 리베이트에 관심이 있어 F-16을 결정하려 했다면 당초부터 F-16을 택하지 무엇 때문에 복잡하게 바꾸려 했겠는가.
율곡사업과 관련한 해외 발주에서 과거에는 리베이트가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다. 그러나 5공화국 시절 전두환 대통령은 “국제관례라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런 관례가 있다면 그 돈을 받지 말고 그만큼 원가를 낮추라”고 지시했다.
나는 당시 그 말을 듣고 ‘참으로 전(全) 대통령이 잘한 조치’라고 생각하고, 참모들에게도 여러 차례 그 같은 말을 했다.
그 후 김영삼 대통령 정부에서 율곡사업에 의혹이 있다며 강도 높은 감사, 수사를 했지만 하나도 밝혀진 것이 없다.

-“(YS,) 권력 잡자마자 TK 사냥”

"YS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 사람이 어떻게 해서 내 가슴에 비수(匕首)를 꽂겠는가. 그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다만 내가 바라지는 않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30년간 군부(軍部) 출신들에게 억눌려 온 정치세력이 권력을 잡고 보니 그간에 억눌렸던 분노가 터진 것이다."
나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김영삼 정권으로부터 견디기 어려운 피해를 입고 있는 당사자가 김영삼 정권의 입장을 옹호하고 나선다는 것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제48장 國政 리더십에 대하여

-德이 있는 지도자

시대마다 그 시대가 요구하는 인물이 있다. 평상시에는 덕(德)을 갖춘 지도자가 바람직하지만, 전시(戰時)에는 유능한 군사전략가를 요구하고, 혼란기에는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를 필요로 하게 된다.
나는 어늶 시대건 지도자에게 있어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은 바로 덕(德)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결코 강성(强性)은 아니었다. 남을 누르고 앞서 가는 것을 본능적으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럭비를 예로 들어도 개인 플레이가 아닌 팀 플레이에 그 정수(精髓)가 있질 않은가. 리더일수록 팀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을 감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믿어 왔다.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내가 속한 조직이 발전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을 보람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간단히 정리하면 ‘화합’과 ‘인내’가 내 인생의 대표적인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화합에서 양보가 나오고, 인내에서 포용이 나온다고 믿는다.
민주화의 출발점이 된 6·29선언, 야당과의 연합을 꾀한 3당 합당, 그리고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여는 데 기여한 노사정책, 적대(敵對)관계에 있어 온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 나로부터 이뤄진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은 바로 이 ‘화합’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그것은 독실한 불교신자이신 할머니와 어머니의 공력(功力)으로 태어났다는 출생의 의미에서 얻어진 ‘베풂’과 연결되어 있다. 내가 만난 스님들은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주어라. 그리 하면 채워질 것이다”는 말씀을 자주 들려 주셨다.
나의 이런 뜻을 담아 어느 참모가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냈다. ‘참·용·기’, 즉 ‘참고, 용서하고, 기다린다’는 것이다.

-친인척 관리

내가 언제나 미안함을 금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친인척과 친지(親知), 그리고 학교 동기와 선후배, 고향 사람들이다.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제대로 챙겨 주기는커녕 관심조차 기울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오히려 불이익을 당한 사례까지 있었다. 친인척 가운데 능력 없이 어떤 직책을 받거나 큰 돈을 번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자부할 수 있다.

처남인 김복동(金復東·육사11기·육사교장·예비역중장·광업진흥공사 사장), 동서인 금진호(琴震鎬·5공화국 상공부 장관) 같은 이들은 능력이 출중한 데도 친인척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직(公職)에 중용하지 못했다.
그러면 “박철언(朴哲彦)은 왜 등용했느냐”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나는 측근들에게 “박철언은 친인척 개념에 넣지 말라”고 이해를 시켰다.
굳이 따지자면 처가쪽으로 먼 친척(처고종사촌)이긴 해도 그보다는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 시절부터 공직에 기용되었던 사람이다.

제49장 정치자금

-原罪

나는 1995년 11월 수감 직전에 발표한 ‘국민에 드리는 말씀’을 통해 “나 혼자 모든 책임을 지고 어떤 처벌도 나 혼자 달게 받겠다”고 밝혔다.
이후 정치자금과 관련해서는 어떤 발언도 하지 않았다. 인터뷰에도 일절 응하지 않았다. 이제 회고록을 작성해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는 마당에 사실관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여기서 언급하는 내용으로 인해 또 다른 논란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역사와 국민 앞에 내 인생과 철학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남겨 놓는 진실된 술회라고 믿어주었으면 한다.

-정치자금 모집의 원칙들

5공화국 시절 통치자금은 집권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되지 않았나 싶다. 나 자신 5공화국에서 공직(公職)을 맡고 있는 동안 자금조성에 관여한 일은 없다. 내가 느낀 분위기가 그렇다는 점을 기술할 따름이다. 5공화국 시절의 자금조성에는 다음과 같은 원칙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1. 이권(利權)을 전제로 한 자금은 받지 않는다.
2. 제공되는 자금에는 조건을 달지 않는다.
3. 외국기업인이 수주(受注) 대가로 제공하는 커미션은 받지 않는다(대신 원가에서 그 액수만큼을 깎게 한다).

이런 원칙은 과거에 비해 진일보(進一步)한 것으로 보인다. 제5공화국은, 외국기업의 자금이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가 말썽을 빚은 일본의 전철(前轍)을 밟지 않았다.
나는 6공화국에 들어서서는 앞의 원칙에 몇 가지를 추가했다.

1. 재무제표(財務諸表)가 나쁜 기업
2.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 기업
3. 정치자금 헌납으로 기업운영에 지장을 초래하는 기업
이런 기업들로부터는 정치자금을 일절 받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이런 뜻을 몇몇 측근들에게 주지(周知)시켰다.

이하 49장은 발췌 생략. 全文 참조

제50장 따뜻한 눈으로 역사를 보자

-과거 부정, 자기 부정
우리 사회풍조 가운데 ‘어용(御用) 기피증’이라는 병이 있는 것이었다.
교수 언론인 등 식자(識者)들은 ‘저 사람은 어용’이라는 낙인(烙印)이 찍혀버리면 사회적 생명이 끊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잘못된 것은 비판하고, 옳은 정책은 밀어 주고, 그 정책이 시행 과정에서 차질을 빚는다면 그것을 지적해 길을 열어 주는 것이 학자와 식자(識者)들의 도리요 사명이거늘, ‘어용’이라는 낙인을 두려워해 몸을 사리거나 비판만 하는 경우를 자주 보아왔다.

-産母를 부정한 金泳三 정권

이런 감정이 복 바쳐 오를 때도 있었다.
‘오호라, 국민들이여! 특히 식자들이여! 그대들은 어찌하여 이 위대한 일을 이룩한 기성세대를 매도하고 부정하고 죄인시(罪人視)하는가! 서글프고 슬프도다.’
위대한 건국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박사가 말년(末年)에 측근의 잘못으로 3·15 부정선거를 저질렀다고 해서 평생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이바지한 업적, 광복 후 혼란기를 극복하며 건국한 업적, 그리고 투철한 반공이념으로 김일성의 남침(南侵)을 좌절시킨 업적을 없었던 일처럼 역사에서 지워 버릴 작정인가?
4·19 이후에 1년간이란 단명(短命)으로 끝난 장면(張勉) 내각을 무능한 정권이라고 해서 버릴 것인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군사혁명, 독재, 장기집권을 했다고 해서 국민들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키고 조국 근대화에 불을 붙여 경제발전을 성공시켜 민주주의의 기반을 다진 업적을 없애 버릴 수 있는가?
10·26 이후의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난국(難局)을 극복해 경제를 발전시키고 약속대로 단임(單任)만 하고 물러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을 군사반란이라는 죄목으로 역사에서 지워 버릴 셈인가?
제6공화국은 6·29선언의 약속에 따라 여야 합의로 국민투표에 부쳐 개정된 헌법에 의해 출범했다. 그 헌법에 따라 국민들이 나를 대통령으로 직접 선택했다.
그럼에도 집권당인 6공화국의 민정당(民正黨)과 합당해 민자당을 만들고 그것을 모체(母體)로 출범한 김영삼(金泳三) 정권이 산모(産母) 역할을 한 나를 군사반란이란 죄목을 뒤집어씌워 단죄(斷罪)해 역사의 표면에서 지워 버릴 수 있는가?

-美化도 自虐도 필요 없다

우리가 이룩한 일들은 너무나 많다. 그것들을 차곡차곡 챙겨서 우리가 쌓아올린 탑을 확인하자. 그것을 이룩한 우리, 서로에게 참으로 수고했노라고 위로하자. 성취한 보람을 함께 나누자. 후세들에게 우리가 이룩한 것이 이것이라고 떳떳하게 물려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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