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부다페스트 세계 청소년 페스티벌'과 1950년 하누스 비한(Hanus Vihan) 경연대회에서 로스트로포비치와 공동 우승했던 인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샤프란은 곧잘 로스트로포비치와 비교 평가되어왔다. 그런데 대개 평가의 결과는 서방세계에서 세계적인 명사가 된 로스트로포비치보다는 소련 내에서 비교적 평범한 연주가의 삶을 살았던 샤프란을 더 높이 사는 경향을 보이곤 했다. 로스트로포비치가 샤프란보다 못하다는 단정은 매우 위험한 것이지만 필자 역시 일반 비평가들의 중평에 상당한 정도로 호의를 표하는 편이다. 적어도 브람스 연주만 놓고 본다면 필자는 단언까지도 할 수 있다. 샤프란의 연주에는 그 훌륭한 거장 로스트로포비치도 다다르지 못한 정서적 깊이와 정신적 높이가 있음이 명백하다고 말이다.
샤프란은 강렬하고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비브라토를 구사하며, 독특한 악센트로 개성이 뚜렷한 해석을 들려주는 연주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보윙은 화려하고 거침이 없지만, 그것이 항상 완벽한 통제 하에 이뤄진다. 기술적인 솜씨가 실제로 대단하지만, 샤프란은 늘 음악적 표현을 먼저 생각하지 기교를 앞세워 과장된 연주를 하려고 덤비지 않는다. 음악적인 표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희생하면서까지 기교 그 자체를 과시하려 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는 참으로 중요한 연주태도이고 당연한 가치관이며 분명히 브람스의 가치관과 일치하는 것이다. 사실 진지한 예술가들은 대개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원칙을 샤프란처럼 제대로 실천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샤프란은 브람스의 작품을 맞아 연주에 대한 평소의 소신을 그대로 보여준다. 즉 기교를 과시하려고 하지 않고 내면으로 깊숙이 파고든 해석을 펼쳐 보임으로써 브람스 음악의 본질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비교적 여유로운 템포로 악곡의 특징을 명확하게 파악하여 가지런히 정리해서 들려주기 때문에 샤프란의 음반에서 브람스 음악의 묘미는 그 어떤 연주에서보다도 진하게 느껴진다.
샤프란의 브람스 연주를 생각하면 우리의 관심은 그가 사용하고 있는 악기가 브람스의 중후한 음악에서는 어떤 소리를 낼까 하는 점에 먼저 모아지기도 한다. 많이 알려져 있듯이 샤프란의 악기는 1937년에 소련 국가 첼로 경연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부상으로 받았던 1630년 산 아마티 첼로이다. 이 자리에서 아마티의 아름다운 소리에 대해 지레 흥분하며 긴 설명을 보탤 필요는 없겠지만, 그 명기가 샤프란의 연주미학을 온전하게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다른 첼리스트의 음반과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지만, 브람스 음원에서 샤프란이 끌어내는 아마티의 음색은 아주 독특하다. 저음역에서는 묵직하고 풍성한 육성을 내고, 중 고음에서는 단정하고 고운 소리를 낸다. 소리의 결은 매끄럽고 견고하며 높은 음은 때때로 비올라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그리 어둡지 않아 전아한 느낌을 준다. 오랜 세월 샤프란의 인생과 함께 했던 아마티는 그의 수족과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샤프란은 자신이 달통해있는 악기에서 예민하게 갈고 다듬어진 감미로운 톤을 끌어내어 매혹적인 브람스 음악을 선사한다.
북부 독일의 들판에 피어있는 야생화 브람(Bram)의 노란색, 렘브란트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어둑한 황토색. 브람스 음악의 잘 알려진 색감이다. 그런데, 브람스의 음악에서 감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색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은색이다. 어떤 사람은 브람스의 중후한 음악에서 '그을린 은'이 연상된다고 말한다.
금과 은을 정열과 이성으로 대조시켜 놓고 브람스가 내면의 금빛 정열을 냉철한 은빛 이성으로 가둔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이런 시각을 받아들인다면 브람스 음악에서 느껴지는 은빛이란 악곡에 포함된 색감인 동시에 절제된 이성의 상징이다. 샤프란은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에 숨어 있는 그런 은 빛깔을 가장 선명하게 느끼게 해준다. 샤프란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은색 프레임에 담긴 빛바랜 흑백 사진이나 추억의 은장식 비네트(Vignette) 같은 것이 연상된다. 뜨거운 청춘의 정열이 은빛 프레임에 갇혀 있다고나 할까? 아니 은빛 프레임에 곱게 간직되어 있는 뜨거운 정열이란 표현이 더 낫겠다.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는 브람스가 젊은 시절에 갖고 있던 음악가로서의 포부나 열정, 이루지 못할 사랑 때문에 마음속에 키우던 비련의 정서,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 등을 냉철한 이성으로 걸러서 쓴 감성 비망록이다. 악곡에 표현된 약동하는 스케르초 풍의 음형이나 슬프지만 군더더기 없이 순수한 맛을 지닌 선율이 그런 느낌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나이 들다보면 인생살이에 찌들어 둔감해지거나 잊혀지기 쉬운 젊은 시절의 순수 열정이나 고통에 대한 정서를 맑은 이성으로 여과해서 나중에 되새길 요량으로 써놓은 것이 첼로 소나타 1번이다. 클라라에게 했던 '나는 음악 안에서 말합니다'라는 브람스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인데, 브람스는 그렇게 음악 속에 자신의 내밀한 사연을 숨기는 것을 즐겼다. 20년이 지난 뒤 음악가로서 대성공을 거둔 브람스는 그 비망록을 들춰 보며 옛날에 써두었던 로맨틱 아다지오를 가져다가 오래 전의 그 감성을 다시 음미하며 또 하나의 비망록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첼로 소나타 2번이다. 그러니까 첼로 소나타 1번과 2번 사이에는 20년이라는 세월이 가로놓여 있지만, 젊은 시절 감성으로의 회귀를 꿈꾸고 있다는 점에서는 서로 상통하는 점이 많다고 하겠다. 비록 만년에 씌어졌지만, 첼로 소나타 2번의 풍경 역시 상당히 젊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한다.
샤프란은 이런 브람스 음악의 성격과 이미지에 대해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연주는 뜨겁지 않고 따스하다. 범람할 정도로 감정을 쏟아내지 않고 활활 연소시키는 대신 절제된 혹은 정제된 하나의 정서 이미지를 만든다. 그는 육중한 음량으로 우리의 가슴을 제압하지 않고, 고상하고 단아한 기품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의 첼로는 정말 고운 소리를 내지만 힘이 부족하거나 나약해보이지 않는다. 어느 곳이든 피아노와의 기세 싸움에서는 절대로 뒤지지 않는다. 빠른 악장에서는 기백이 넘치고, 끝없이 치닫는 악구에서는 당당함도 웬만큼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분수에 맞는 당당함이다. 은빛 프레임 속에 들어 있는 청춘의 열정, 그것은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이성이 적절히 균형을 이뤄야 가능한 것인데, 샤프란은 예리한 거장의 직감으로 그것을 아주 적절히 성취해낸다.
소나타 1번에서 2악장 미뉴에트는, 앞의 음악해설에서도 언급했듯이, 야릇한 슬픔을 간직한 악곡이다. 음표들이 춤을 추지만, 그것은 절대로 즐겁고 명랑하게 추는 춤이 아닌 것이다. 많은 연주가들이 이 악곡을 춤곡이라고 해서 흥겨운 느낌으로 처리하는 것을 보면 아주 실망스러운데, 샤프란은 이 곡의 '눈물 글썽한 미소'를 정확히 포착해낸다. 두 곡의 첼로 소나타 전 7개 악장 중에서 우리를 가장 긴장시키는 것은 역시 소나타 2번의 '아다지오' 악장이다. 이 악곡의 연주에 관한 한, 아무리 찾아봐도, 샤프란의 독특한 감성을 대신할 만한 것은 없다! 어디론가 멀리 멀리 풀어져 팽창하는 그리움, 팽팽한 긴장의 첼로 현이 펼치는 섬세한 칸틸레나, 고독감을 배가시키며 가늘게 떨리는 비브라토는 정말 압권이다! 중간에 구슬프게 선율을 노래하던 첼로가 푹 꺼져서 심연으로 가라앉는 부분이 있는데, 샤프란의 첼로는 여기서도 피아노의 기세에 전혀 밀리지 않고 먹이를 찾는 짐승처럼 어슬렁거리다가 크게 용틀임을 하고는 신음하며 가라앉는다. 이 부분에서 많은 연주들이 어물어물하거나 아주 설득력 없는 프레이징으로 순식간에 처리하고 빠져나오는 모습을 종종 흥미 없게 목격하곤 했다.
혹자는 단정하고 전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