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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신채호 조선 상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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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신채호 조선 상고사

김대현 글 / 최정규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09년 11월 16일 리뷰 총점9.0 정보 더 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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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신채호 조선 상고사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11월 16일
쪽수, 무게, 크기 233쪽 | 728g | 188*254*20mm
ISBN13 9788934936022
ISBN10 8934936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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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저자 소개

글 : 김대현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중국에 있는 대련한국국제학교에서 역사 교사로 근무 중이다. 『만화 김부식 삼국사기』를 썼다.
그림 : 최정규
조선대학교 회계학과를 졸업했다. (주)천재교육 미술팀에서 일러스트와 만화를 그렸으며 잡지 「삶이 보이는 창」에 '곰씨 이야기'를 연재하며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한주 시집 『너희들 키만큼 내 마음도 자랐을까』의 일러스트 작업, 『만화 토마스 모어 유토피아』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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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독후감 대회 참여작 (3개)

예스24 어린이 독후감 대회에 응모된 이 책의 독후감입니다.
역사기록을 똑바로 잡은 신채호 선생님
경기의정부서5-* 이*호 | 2012-08-27 | 제9회 YES24 어린이 독후감 대회
역사 기록을 똑바로 잡은 신채호 선생님
 

이 책을 고른이유는 처음에는 신채호라는 분도 몰랐고 이책도 몬 지 잘 몰라서 이책을 선택 하겠되었습니다. 이 책은 과거의 잘못 된 기록을 똑바로 잡아주는 책입니다. 어느 한 박사가 말하였습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끝임없는 대화다.이 말의 뜻은 오늘을 살고있는 우리들에게 영향을 주고 또 받기떄문에 이렇게 정의 한 것입니다. 신채호 선생님 께서는 정말 중요한 기둥을 세워 주신 것 같습니다.

이제 신채호 선생님에 삶을 알려 드리 겠습니다.


1880년 12월 8일 충정남도 대덕군 산내면 시골 산내면 가난한 양반집 아들로 태어났습니다.의 18대 할아버지는 잘 나가는 조선의 양반이었지만 신채호의 어린시절은 어려웠습니다.

비록 망해버린 집안 이였지만 가문은 뼈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날 하루는 할아버지 써레와 쟁기를 들로 나가는 할아버지를 보고 시를 지었습니다

조출부이씨 논거지다기"라고 시를 지었습니다.
뜻은 "이른 아침에 써래와 쟁기를 지고 나가네, 논을 가니 흙이 많이도 일어나네"라는 뜻입니다.

어릴 때 이시가 나중에 멋진 글솜씨를  예 라고 볼수 있습니다 또어릴 떄 쓴것인데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채호는 책은 많이 읽었지만 어려운 환경 때문에 학구열을 채우지 못했습니다.(학구는 오로지 학문 연구에 몰두하는 것을 뜻합니다.) ]

그렇게 가난해도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이 대단 한것 같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신채호를 신기선 대감집으로 데려다주어 책이 많아 마음껏 시간 날 때마다 책을 읽었습니다. 그 후 1898년 성균관에서 공부하였지만 나라의 사정은 어두웠습니다. 성균관은 조선 때 서울에 설치 한 최고의 국립 교육 기관 유교를 가르치는 문묘가 있었습니다. 3년전인 1895년 국모인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을미사변이 있었습니다.(국모는 임금의 아내나 임금의 어머니를 뜻합니다.)
을미사변은 일본 자객들이 명성황후를 죽이고 친 러시아 세력을 제지하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입니다.
 
또 1896년 일본의 압력을 피해 곧장 러시아 공사관으로 숙소를 옮긴 아관파천이 있었습니다. 또한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을 두고 힘겨루기 하는 상황에 미국, 영국 등은 돈이 될만한 목재, 금광, 철 등으로 헐값으로 빼가고 있었습니다. (헐값은 물건이 지닌 값보다 훨씬 싼 값을 뜻합니다.)
 
신채호는 3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1905년 성균관에서 시험을 보고 박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신채호는 다시 교수직을 포기하고 시골로 내려갔습니다. 이 때 신채호는 상투를 자르게 됩니다. 그 후 산동학당이라는 학교를 세워 젊은이를 가르치던 중 <황성신문>의 사장 정지연이 찾아와서 논설을 써줄 것을 부탁해 그의 부탁을 받고 바로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근무를 시작한 1905년은 우리 역사에서 불행한 해입니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을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고종은 을사조약서에 도장을 끝까지 찍지 않았지만 협박을 해 강제로 맺어서 조약이 아니라 늑약이라고 합니다. 당시 황성신문을 쓰는 장지연이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써 일본에 의해 1910년 9월에 폐간되었습니다.
 
실의에 빠진 신채호에게 찾아온 양기탁이라는 사람이 영국인 베텔이 운영하는 <대한매일신문>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 논문을 썼습니다. 발행인이 영국인이라 일본인이 함부로 폐지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신채호는 울분을 당하고 친일파들을 질타하면서 일본을 비판할 수 있는 신문사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이런저런 핑계로 영국인 베델과 양기탁 선생을 감옥에 보내고 새로운 사장이 영국 사람 만함 이 되었습니다. 근데 이사람은 베델과와는 다른 사람 이였습니다 그래서 신문사를 1910년 5월 27일 몰래 팔아 일본을 비판하는 신문이 일본을 찬양하는 신문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신채호 선생은 사표를 쓰고, 바로 떠났습니다.
 
신채호는 세수를 할 때에는 허리를 굽히지 않고 세수를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에게 굴복하는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나라를 생각 하는 애국심이 깊게 나타나있는 것 같습니다.
 
러시아에서 1년동안 일하고 중국 상하이로 갔습니다. 이 망명생활로 질병을 많이 겪었습니다. 특히 이 시기에 윤세복이 초청장으로 고구려가 평양으로 옮기기전까지 고구려의 중심지로 광개토 대왕 까지의 고구려의 유물과 유적을 을 답사하였습니다.(망명생활이란 : 정치, 사상, 따위의 이유로 탄압을 받거나 위험을 피해 자기 나라에서 살지 못하고 다른 나라로 몸을 피하는 것)
 
현재 제일 오래된 책은 삼국사기 입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만주지역에 역사는 사람, 때, 땅도 모두 잘못 기록 되어있습니다.
 
화가로 비유하면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사과를 보고 포도를 그리고 사과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강감찬, 이순신을 연개소문으로 그린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훌륭한 임금 세종대왕은 역사를 정리했지만 몽골 침략기 이전을 기록하지 못하고 이후는 기록하여 한계를 넘지못해 신채호는 아쉬워하였습니다. 또 잘못된 것은 안시성 645년 고구려의 양만춘 장군이 당태종의 침략을 끝까지 싸운 곳입니다. 당태종은 눈에 화살을 맞아 돌아가고 비단을 양만춘에게 선물했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안시성 공격을 포기한 당태종이 성을 잘지킨 양만춘을 훌륭하게 생각하고 비단 백필을 주고 격려하였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정확한 기록이 아닌 것을 알고 신채호는 화가 많이 났다고 합니다.
 
그 후 베이징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고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생기자 상하이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신채호의 기대를 채우지 못하였습니다. 또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가 베이징에 공부하러 온 박자혜와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범이라는 아이도 얻었는데 망명 생활을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아 혼자 남고 조선으로 아내와 아들은 보내주었습니다.
 
신채호는 원고를 써 생계비 보태었습니다. 1924년 연구 결과 끝에 <조선상고사>를 집필하였습니다. 신채호는 독립운동 연구에 힘을 많이 썼습니다. 신채호 선생 덕분에 더 자세한 삼국의 기록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신채호는 역사라는 것은 개별 사건을 수집해 과거 인류의 행동을 살아 있듯이 그려내서 후세 사람들에게물려주는 것을 믿었고 또한 바로 잡아야 이해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예를 들자면 옷을 바르게 입으려면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하는데 역사에서도 단추가 잘못 꿰어지면 나머지도 잘못 꿰어진다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신채호는 특히 중국의 역사책은 인용할 때 주의할 점이 위조한 내용을 잘 골라내야 된다고 믿었고, 다른 민족, 언어, 풍속, 고대의 지명과 지명의 뜻을 알아내 민족의 이동이나 풍속의 차이 등을 밝혀내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쓸만한 사료들은 일본이 가져간 상황이라 마음을 아파하였습니다.
 
일본 학자들이 부럽지만 지금까지 동양학 분야에서 위대한 인물이 나오지 않아 샘통이지만 자기들 마음대로 조선의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 정말 화가 납니다. 일본이 다시 우리를 넘볼 수 없게 남북이 통일되어 넘보지 못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옛날 우리 사람들은 강을 리라라고 불렀는데 그것을 나라로 바꾸어 국가의 의미로 썼습니다.또 밭은 불, 벌등으로 불렀는데 그 이유는 밭을 일구기 전에 풀과 나무를 태워 자리를 만들어 (불)=벌 이라고 불린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한자로 쓸떄 음을 블려 썻기 떄문에 똑같은 발음을 쓰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아리라를 중심으로 뿌리를 내려 나라를 이루어 나갔고 그들이 살며 개척한 땅을 부여 또는 부리 등으로 불렸습니다.
 
조선상고사에서는 우리의 역사의 시작을 수두시대라고 불렀습니다. 수두란 제사를 지내는 제단을 의미 하는 말입니다. 조선 민족들은수두를 중심으로 하여 1년에 두 번 제사를 지냈으며 또 때로는 일어날 일을 점을 치기도 하엿습니다. 원래는 수두는 중국의 삼국지에서 소도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표현하기 위해 수두라고 읽어야한다는 신채호의 주장입니다. 수두시대를 이끈 사람은 대단군 왕검입니다. 단군 왕검은 나라에 모든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단군을 포함해 세명의 왕이 있었는데 신한은 왕검, 말한, 불한으로 단군을 돕는 작은 왕들입니다.
 
수두에서 제일 잘가는 수두를 산수두라고 하는데 세명의 단중에서 으뜸을 신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명의 한중에서 으뜸을 신한이라고 한 것 입니다. 이 세명의 왕들은 세 곳에 수도를 세워 3경이라하여 이곳을 각각 나누어 다스렸습니다.
 
조선은 10세기경 대략 5-6백년간 전성기를 누리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나라들과 전쟁을 하면서 국력이 약해져 조선은 신조선, 불조선, 만조선이라는 세개의 나라로 분리되고 말았습니다. 신조선은 진한, 불조선은 변한, 만조선은 마한입니다. 분리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힘을 모아 선비족 연나라를 치는 등 크게회복하였지만 연나라가 쓴 속임수로 다시 넓은 땅을 빼았기고 말았습니다.
 
중국은 진나라가 등장하면서 통일 왕국을 이루었는데 왕은 진시황입니다. 진나라는 별로 오래가지 못하고 이어서 한나라가 들어갔습니다. 이 때 중국 지역은 매우 혼란스러웠는데 이 때 흉노족이 신조선을 침략해 국력이 쇠약해지고 말았습니다. 분리의 원인은 불조선인데 신조선을 배신하고 연나라와 연합하였는데 나중엔 다시 신조선과 연합해 연나라를 공격하였습니다. 한나라가 들어선 혼란한 시기에 위만이라는 사람이 불조선에 찾아와 귀화를 요청하였습니다. (귀화란 다른 나라의 국적을 얻어 그 나라의 국민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후 위만은 세력을 키워 불조선의 왕을 밀어냈습니다. 불조선의 왕은 월지국의 왕이 됬지만 마한 사람들에게 죽고 말았습니다.
 
마한은 말조선인데 처음 수도는 평양이었는데 남쪽으로가 월자국에 도읍을 이루었습니다. 전쟁의 위험 때문에 조용한 곳을 찾아 전쟁이 없다고 추측하고 있었습니다. 마한은 신조선의 유민들에게 진한부에 정착하게 하고 불조선의 유민들에게는 변한부에 정착하게 했습니다.
 
낙랑국은 말조선에 있던 최씨가 평양지역에 다스리고 그루 25개의 작은국을 다스려 힘을 합쳤습니다. 이후 작은 세력들이 점차 힘을 키워 경쟁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를 열국 쟁웅시대라고 합니다.
 
이런 시대란 존재 했을까? 아님 약간씩의 오차가 있을까? 한 번 타임머신이 만들어 진다면 과거로 가 확인 해 보고 싶습니다.
 
열국쟁웅시대에는 부여,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등이 등장하는데 고구려의 영토는 삼국사기에서 기록되어 있지 않고 고구려의 연대가 실제보다 1백 수십년 줄어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시조인 추모왕의 13세손으로 나와 있는데 광개토 대왕릉비에는 17세손으로 기록되있고 고구려가 망하고 약 500년이나 지나서 쓰여진 <삼국사기>의 기록과 고구려 당시 사람들의 기록과 비교한다면 더 정확한 것은 고구려인의 기록인데 신라가 고구려와 벡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와 백제의 연대기록을 삭제했는데 신라의 김부식은 그 고구려의 땅이 자기 것들이 아니라며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다음은 부여 이야기인데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부여왕 해부루는 아기가 없어 늘 산천을 돌아다니며 아들 얻기를 빌었습니다. 그러다 곤연이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말이 큰 돌을 보고 서서는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여 돌을 들쳐보니 그 아래 황금색 개구리 모양을 한 아기가 있었습니다. 이름을 황금 개구리라는 뜻으로 금와 라하고 태자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얼마있지않아 나라의 대신 아란불이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천신이 나타나서 천신의 후손이 나라를 세울꺼라면서 부여를 동해 바닷가 가섭원으로 옮기라고 하였습니다. 아란불이 이꿈을 해루부에게 이야기 하자 해부루는 나라를 옮기고 동부여를 세웠습니다.그쪽에는 천신의 아들인 해모수가 내려와 나라를 다스렸다고 합니다.
 
신채호 선생님은 이것을 토대로 부여의 역사를 재구성하였습니다. 북부여와 두 개의 동부여와 고구려는 모두 신조선에서 나온 나라들인데 신조선에서는 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그 책임을 왕인 대단군왕검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해부루가 나라를 옮길 당시 부여는 흉노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나라의 힘이 약홰졌기 때문에 해부루는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이란불과 논의하여 길가나로가 동부여를 세웠고 그 후 부여가 있던 나라에 해모수가 북부여가 세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동부여가 옮겨간 갈가나의 기방은 어디이며 그 듯은 지금 두만강 건너편 훈춘 지방이며 그 뜻은 살림이 우거진 나라라는 말입니다.
 
또 우리 옛말에 숲이 우거진 살림을 갓 또는 가시, 가시리라는 말이 있었고 이것을 이두로 옮겨 쓸 때, 갈사국, 가슬라 등으로 썼습니다. 중국에서는 가시라를 옥저라고 하였는데 <천주원류고>라는 책에 의하면 옥저는 와지를 나타낸 말입니다. 해부루가 옮겨온 이후 금와, 대소로 이어가고 고구려의 대무친왕과 싸우다 대소는 죽고 그의 동생과 사촌 동생이 왕위를 차ㅏ지하려고 다투다가 결국 동생은 동부여에 북갈사(북동부여)를 세우고 사촌 동생은 두만강 남쪽으로 내려가 남갈사(남동부여)를 세웠습니다. 북갈사는 북옥저 남갈지는 남옥저로 역사책에 기록되었습니다.
 
고구려를 세운 사람은 주몽인데 광개토 대왕릉비에는 추모라 기록되있기 때문에 추모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합니다.
 
추모는 처음에 금이왕 아래에서 자랐는데 동부여에서 성장한 추모는 동부여 왕자들의 위협을 피해 남쪽 졸본부여에 가서 소서노를 만나 결혼을 하였습니다. 소서노는 원래 우태와 결혼했는데 우태가 일찍 죽어 과부로 지내고 있었는데 추모는 소서노와 함께 힘을 모아 홀승골산위에 도읍을 두고 나라를 세우니 그 나라는 가우리입니다. 이것을 이두로 쓰면 고구려라고 합니다.
 
추모왕이 죽은 이후 유리왕(유류왕) 대무신왕(대유류왕)이 왕위를 이으는데 이 당시 동부여와 고구려 사이에 많은 갈등과 충돌이 있었습니다. 이 때 동부여가 크게 힘을 키워 고구려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고 왕자를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했는데 태자는 인질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다 그만 병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또 다시 동부여는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하자 왕자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서 부여의 사신을 꾸짖어 쫓아보내고 말았습니다. 유류왕은 왕자 주류에게 책임지라고 하여 주류는 꾀를 내어 학빈령이라는 고개에서 크게 물리쳤습니다. 다음에는 주류가 왕이 되 국력을 키워 동부여의 왕 대소를 죽이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동부여는 힘센 나라여서 고구려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후 고구려는 동부여 낙랑국도 정복을 하게 됩니다. 낙랑국을 정복할수 있었던 이유는 호동이라는 아들이 이었는데 낙랑국 공주와 결혼을 하게 되는데 당시 적이 친입을 하면 울리는 북과 나팔이 있었는데 호동은 공주에게 북과 나팔을 없애 달라고 하여 고구려가 기습을 하였을 때 저항도 못하고 바로 항복 하고 말았습니다.
 
백제의 건국은 온조인데 소서노의 아들입니다. 소서노는 원래 졸본 부여의 왕의 딸로 부여에서 내려온 추모를 도와 고구려 건국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우류가 그 어머니인 예씨와 함께 추모를 찾아오자 소서노와 비류 온조는 위기감을 느껴 남쪽 마한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마한 왕에게 재물을 바치고 미추홀과 하북 위례홀 등지의 땅을 얻어 백제를 세우고 소서노가 백제의 왕이 되었습니다. 소서노가 죽자 서북쪽에 있는 낙랑의 침입을 막기 위해 나라를 옮기려고 하엿습니다. 비료와 온조의 의견은 맞지 않아 비류는 미추홀 온조는 위리홀로 동, 서 백제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이후 비류의 백제를 흡수하여 다시 하나가 되어 마한을 무너뜨렸습니다.
 
중국의 역사책에서는 항상 실패하거나 부끄러운 일을 감추어 씁니다. 예를 들자면 한나라가 고구려에게 패한 사실을 기록하지 않앗습니다. 한나라의 목표는 위만 조선이었는데 위만 조선 사람들은 돈 같은 것에 욕심이 많아 많은 양의 황금으로 유인한 작전으로 위만 조선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 한나라가 위만조선의 땅에 설치한 4개의 군현인 한사군이라고하는데 한사군의 위치는 한반도에 있느냐 중국에 있느냐의 주장이 있는데 신채호 선생님의 주장은 한사군은 진번, 임둔, 현도, 낙랑의 4개군을 말하는데 당시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는 북부여와 고구려 동부여와 낙랑국 등이 있었기 대문에 한사군은 이들 나라 이외의 지역에 설치되었다고밖에 볼 수 없는 것이 신채호 선생님의 주장입니다.
 
이런 차이가 생긴 이유는 지명이 같고 다음을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한나라가 위만 조선을 멸하고 요동군을 만들고 그것으로 부여와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을 대신 하려고 신조선, 말조선의 지명을 가져다가 위만조선의 옛지명을 대신 하게 하였는데 그 떄 같은 이름의 다른지명이 생겨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옛 기록이 참되고 거짓된 것을 구별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한사군의 위치는 <무릉서>라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이 <무릉서>라는 책을 쓴 사마상이라는 사람은 한사군이 설치되기전 10년전에 죽은 자인데 어떻게 한사군의 위치를 알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무릉서>라는 책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 볼 수 없고 따라서 이책을 인용한 책인 <한서>의 기록 또한 잘못된 사실입니다.
 
다음은 신라의 건국 이야기입니다. 계립령은 지금의 문경 새재인데 그 남쪽이라 함은 지금의 경상도 일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신조선과 불조선이 망하면서 그 유민들이 내려와 마한에 의해 진한부와 변한부로 나누어졌는데 이곳은 지리적으로 볼 때 북쪽에서 태백산이 가로 막고 계립령 일대에서 서쪽을 막아 북쪽에서 고구려 동부여, 위만 조선이 한나라가 전쟁을 일으킬 때 큰 영향을 받지 않고 풍요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마한이 백제에게 멸망한 뒤에는 형식적으로 백제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점차 힘을 키워 진한부는 신라 변한부는 6가야 연맹국이 되어 백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의 경상남도 등지에 변한의 12개 자치부가 설치되 있었는데 이를 대가라 라고 하였습니다. 뜻은 큰 못, 또는 큰 눈을 뜻합니다. 각 부족이 제방을 쌓고 냇물을 막아, 그 주변에 살아 그렇게 불렸습니다. 이들 6개의 연맹체로 발전하엿는데 그 첫째는 김수로의 김해 금관국이고 둘째는 고령의 담라가라 또는 임나라라고도 불리었습니다. 이들은 그 후손들의 세력이 강력하여 대가라 또는 대가야라고 불리었습니다. 셋째는 함인의 인라가라 또는 이라가라라고도 불리고 넷째는 함천의 고령가라 다섯째는 성주의 벌리가라 또는 성산가라, 벽지기 가라라고 불립니다. 이 여섯 가라는 형제국이었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서로 멀어져 독립국이 되어 각자 행동하였습니다. 이 가라의 역사는 전해지는 것이 정확하지 않고 그 수가 적어서 역사책에 기록 된 가라가 이 여섯 가라 중 어느 것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신라의 역사가 정확하다고 알고 있지만 신채호는 오히려 신라의 역사에 거짓 내용이 더 많다고 보았습니다. 이유는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린 뒤 모든 역사를 신라 중심으로 고쳤기 때문입니다.
 
흰 말이 우는 것에 큰 알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나온 박혁거세 다나나국의 왕자였지만 버림받아 상자에 태워져 동해안으로 오던중에 석탈해 닭이 울 때 시림의 금궤 속에서 태어난 고알지 이 세사람이 박씨, 석씨, 김씨의 시조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박혁거세가 왕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진한 6부 궁 하나의 사랑부 출신인데 처음부터 서로간에 결혼하는 거대 귀족이였고 함께 논의하여 신라에서 성씨 사람들이 돌아가며 왕을 맡는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고구려에서 제일 왕위를 많이 차지한 사람은 고구려의 태조 왕인데 그는 7살 때부터 왕위에 올라 이 94년동안이나 왕위에 있었고 죽어서가 아니라 너무 나이가 들어 자기 동생인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는데 수성의 나이는 76세였고 또 그뒤를 이어 77세 나이로 즉위하였습니다. 이것은 형과 동생의 나이차이가 거의 20년차인데 신채호는 여기서 이상하게 생각하여 형과 동생사이가 아니라 아버지와 서자의 관계라고 보았습니다.
 
태조왕때는 고구려는 한나라의 침략을 물리치고 국력을 회복하는 등 권력이 강력하였습니다. 특히 태조왕은 수성에게 군사권을 맡기고 모든 전투를 당당하게 하였습니다. 수성은 한나라가 쳐들어 오자 뛰어난 지략을 발휘하여 몰아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한나라를 공격하여 예전에 위만 조선이 당하면서 한나라에게 빼앗겼던 요동의 옛땅을 모두 회복하였습니다. 이때 고구려가 강한 국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지 신채호는 고구려의 선배제도에 그 원동력이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라는 화랑도를 바탕으로하여 국력을 키웠고 마침내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습니다.
그 화랑도의 뿌리가 되는 제도가 바로 고구려의 선배제도입니다.
하지만 역사책 어디에도 선배제도는 기록되있지 않았습니다.
 
신채호는 역사책속에 묻혀있는 작은 기록 등을 언어학적인 방법으로 재해석하여 고구려의 선배제도를 찾아내었습니다. 이두 문자로 先-(먼저선)人(사람인)이라 하는데 先은 선의 뜻 人은 배의 듯입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고구려의 관직에는 조와, 선인 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선인이 바로 선배제도를 말합니다. 이것은 원래 수두시대부터 있었던 것인데 그 당시에는 선배라는 것이 신등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별칭이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의 태조와 때에 매년 3월과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낼 대 군중들을 모아놓고 칼춤을 추기도 하고, 활을 쏘기도 하고 택권이나 사냥시합을 하였는데 시합에서 승리하는 사람에게 선배라고 불렀습니다. 이 선배들에게는 나라에서 집과 먹을 것을 주어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지 않게 한 대신 오로지 국가와 사회를 위해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바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들은 보통 머리를 깍고 검은 천을 허리에 둘었습니다. 대장은 신크마리, 두대형, 태대형이라 불렸습니다.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면 바로 이 신크마리가 선배들을 전부 불러모아 전쟁터에 나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습니다.
 
신채호는 본래 우리 역사 전체를 쓰려고 했지만 아쉽게 중간에 일제에 뤼순 감옥에 들어가는 바람에 백제 멸망까지밖에 쓰지 못하였습니다. 신채호 덕분에 역사의 사실을 알고 새로운 제도, 사실을 알아내엇습니다.
 
그가 말하고자 한 우리 역사를 더 이상 알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조선상고사는 중요한 자료로 다루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유는 그의 글이 현재 전해지지 않는 자료라, 민간에 떠도는 설화나 전설 등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의 역사 연구 방법이 실증적인 연구방법에 익숙해 있는 학자들로부터 인정 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채호가 중국을 돌아다니면서 한 노력을 연구하지 않는 학자들이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이라도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연구해 더 자세한 역사의 사실을 밝혀 냈으면 좋겠습니다.
 
고구려가 국력을 키울 수 있었던 방법은 선배제도와 을파소 덕분에 크게 국력을 키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을파소는 안류라는 사람이 을파소를 추천하여 중외대부라는 높지 않은 벼슬을 주어 을파소는 거절하였습니다. 왕은 을파소의 뜻을 파악하고 신하들 중 제일 높은 신하 즉 상가로 임명하여 국경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처음에는 신하들은 시기하고 질투하였지만 왕은 더 오히려 을파소를 더 크게 믿어 주었습니다. 을파소는 백성들을 위해 좋은 제도를 만들어 낸 훌륭한 재상인 것 같습니다.
 
고구려는 수, 당의 싸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중국기록에는 전염병이나 배가 침몰하여 자연재해로 인한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패하였다고 기록을 하고 우리나라 장수들이 활약을 한 것은 중국의 기록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자기 나라가 패했다고 그것을 기록하지 않는 중국이 참 얄밉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 이야기 : 바보온달
신라와 백제에게 차례로 한강 유역의 땅을 빼앗긴 고구려는 언제나 다시 찾기 위해 계속 신라를 공격했지만 끝내 그일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 그 과정에서 평원왕의 사위였던 온달장군도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온달은 옛음으로 온대라고 하는데 백조라는 뜻입니다. 온달은 못생기고 가난한 처지였지만 마음은 시원시원하였습니다. 언제나 밥을 얻어다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갔는데 사람들이 모두 바보온달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고구려 평원왕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어릴 때부터 울기를 잘해서 왕은 자꾸 울면 바보온달에게 시집을 보내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공주가 커서 시집갈 나이가 되자 왕은 귀족가문과 결혼시키려 하엿지만 공주는 어려서부터 바보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는 아버지의 말을 지키겠다며 귀족과의 결혼을 반대하였습니다. 결국 궁궐에서 쫓겨난 공주는 온달을 찾아가 그와 결혼 한 후 그에게 말타기와 활쏘기 등을 가르쳤습니다. 온달은 솜씨가 누구보다 뛰어나 3월 3일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열리는 사냥대회에 참가하여 우승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왕은 사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주나라의 무제가 요동으로 쳐들어 왔을 때 어떤 사람이 싸워 수백명의 적들을 죽이는 것을 왕이 보고 누구인지 알아보게 하였는데 바로 온달이었습니다. 평원왕은 이 때부터 온달을 극진히 아끼고 사위로 인정하였습니다.
이후 영양왕이 즉위하자 신라에게 빼앗긴 그 땅의 유민들이 늘 이를 원통해하면서 부모의 나라를 잊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대왕께서 제게 군사를 주신다면, 한 번에 그 땅을 회복하겠습니다."라고 온달이 정하였습니다. 영양왕이 허락하자 온달이 출정에 앞서 선언하였습니다. 하지만 아깝게도 온달장군은 신라인과 싸우다가 이자성 부근에서 화살을 맞아 죽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시신을 가지고 돌아와 장례를 치르러 하였지만 관이 땅에 꽉 붙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공주가 친히 와 “국토를 찾지 못하고 서야 님이 어찌 돌라 가랴, 님이 아니 돌아 가시는데 이첩이 어찌 홀로 돌아가랴. 그후 공주도 쓰러져 다시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이 기록과 삼국 사기에 마지막 기록이 차이가 납니다. 삼국 사기에는 관이 안 움직여 공주가 “삶과 죽음이 이미 결정 되었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소서”라고 하자 관이 움직여 장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신채호가 다르게 쓴 이유는 그런말은 공주가 국토에 대한 열정도 없었을 뿐 이 아니라 남편에 대한 사랑도 너무 옅고 그 동안 온달에게 말타기와 활쏘기를 가르친 본래의 뜻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나아가 온달이 편안한 부귀영화를 버리고 전쟁터에 나선 참된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삼국사기의 기록 보다는 공주와 온달이 함께 죽어 장사를 지냈다는 조선사락의 기록을 인용 하였습니다.
 
신채호는 가족에도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삼국사기에 가족에 사랑이 얕은 이야기인데 조선사락은 사랑 깊은 이야기 이기 떄문에
신채호는 가족을 소중히 생각 하여서 이렇게 수정하여 쓴 것 같습니다.
 
다음 이야기:고구려와 수.당과의 전쟁
 
고구려의 역사상 중국과 치열하게 싸워 큰 승리를 거둔 전쟁에 대해 이야기 해드리겠습니다. 신채호는 이 시기는 우리가 중국과 크게 이겨 동아시아에 가장 강성한 떄 였지만 중국과 우리 역사에는 그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또그나마 기록들도 중국 중심으로쓴 춘추 필법으로 쓰인 것이 많아 정확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정통 역사서인 삼국사기나 중국의 역사책을 따르지 않고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나 다른 책의 이야기가 더 정확한 사료라고 생각하여 거기에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서술 하였습니다. 고구려와 중국은 많은 전쟁을 하였지만 나라의 흥망을 결정한 만큼의 치열하고 큰 전투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수나라가 등장 하면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수나라의 첫 임금이었던 문제는 중국을 통일하여 힘을 키우자 중국 주변의 있던 돌궐이나 토욕훈 등의 나라들이 모두 신하의 예로써 중국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만은 수나라에 대하여 고개를 숙이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한 다른 원인은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를 미워하여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치도록 요구한 것도 들 수 있습니다.
왜 고구려 만 갖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고구려가 만약에 멸망하지 않고 계속 남았다면 큰 발전을 했을 텐데 말입니다.
 
우선 수나라는 고구려의 영양왕에게 모욕적인 국서를 보냈습니다. 이 국서에는 중국을 통일한 자신의 힘과 업적을 과시 하면서 이에 빗대어 고구려를 작은 나라로 무시 하였습니다.
이 국서를 받은 영양왕은 크게 화를 내고 신하들을 모아 놓고 답할 문서를 보내려고 하였는데 이때 강이식 장군이 “이와 같이 오만하고 무례한 글은 붓이 아니라 칼로 회답해야 할 것입니다.” 난 이 말을 듣고 참 통쾌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왕은 그의 주장을 따르면서 전쟁은 시작 되었습니다.
영양왕은 강이식 장군을 병마원수로 삼아 임유관으로 나아가 싸우게 하였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강이식 장군은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데, 신채호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서곽잡록의 기록을 인용 하였습니다. 중국 측 기록에는 이렇게 서술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임유관 전투에서 수나라는 전염병을 만나 군사가 죽어가고 또 풍량을 만나 배가 침몰 하여 자연재해로 인한 불가항령적인 이유로 패하였다”
진 놈들이 말도 많고 또 왜곡을 하다니 비겁한 놈들 이라고 생각 합니다.
하지만 신채호는 이 전투에서 강이식 장군의 활약으로 고구려가 수나라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라고 답하였습니다. 어쨌든 이 임유관 전투 이후 수나라의 문제는 고구려를 크게 두려워 하여 10여년 동안은 고구려와 싸우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수나라와 싸운 전투 가운데 가장 큰 전투였던 살수 대첩은 을지 문덕 장군이 지금의 청천강인 살수에서 수나라 군사를 물리친 단지 하나인 전투로만 알고 있는데 신채호는 이 전쟁을 살수전쟁이라고 명했습니다. 그 첫 번째 지금의 대동강인 패강에서 승리 두 번쨰는 살수 전쟁 마지막 새 번째 는 요동의 오열홀에서 거둔 승리입니다.
수나라가 완벽하게 패한 거 같아서 정말 샘통이라고 생각 합니다.
왜곡을 한 벌을 받은 거라고 생각 합니다. 기록은 좀 뒤에 했지만 벌을 받은 것 같습니다.
 
수나라의 침략 배경은 수나라를 세웠던 문제가 죽고 그의 아들인 양제가 왕이 된 후
수나라는 해마다 풍년이 들어 전국이 풍요로웠습니다.
 
이렇게 나라 안이 풍요 롭고 안정이 되자 이제 서서히 밖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떄마침 양제의 신하였던 배구가 “고구려를 정복해야 합니다.”라고 예전 문제의 치욕을 들먹이며 양제를 부추겼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611년 수 양제는 고구려를 치겠다는 조서를 내려 전국에서 병사를 모집하고 군비를 모으는 등 1년여에 걸쳐 전쟁을 준비 했는데 전투병이 모두 113만 3천 8백명 이였고 군량과 물자를 수송하는 병사도 4백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기록의 의하면 이 모든 군사가 출발 하는데 40일이 걸렸으며 군대의 처음부터 마지막 까지 이어진 길이가 960리나 되었다고 합니다.
 
수나라는 그 만큼의 많은 군사를 모아도 고구려를 이기지 못하다니 고구려는 정말 대단 한 것 같습니다.
 
특히 수 양제가 직접이끈 어영군은 그 뻗친 길이가 80리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한 수나라의 침략에 맞선 고구려의 전술은 선수 후전 이라고 할수 있는데 그래서 처음에 육지에 있는 군사들은 백성들에게 먹을 양식을 거두어서 성 안으로 들어가 머물게 하였고, 바다를 지키는 군사들도 항구 안으로 물러나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런후 수나라의 군대의 양식이 다 떨어지면 그 EO를 기다려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 군사들을 고구려 깇숙이 유인하기 위하여 거짓으로 패하면서 점점 군사를 뒤로 물렸습니다. 그러자 수 양제는 처음에는 선봉대만 보냈었는데 고구려가 계속 패하자 마침내 모든 병력을 거느리고 요하를 건너 요동 땅으로 들어옴과 동시에 군량을 실은 배와 군사를 먼저 평양으로 보냈습니다. 당시 평양성은 영양왕의 도생 고건무가 지키고 있었는데 앞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평양성의 모든 백성들을 성 안으로 피신시킨후 거리에 재물과 돈을 떨어뜨려 놓았습니다. 그것을 주워 가지려고 더투면서 어지럽게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틈을 타서 고건무는 수나라 군사를 공격했는데 이 때 수나라 군대가 싣고 온 군량선은 모두 바다속에 침몰시키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 것이 바로 패강(대동강) 전투인데 신채호는 통감고이라는 책에서 “군량선이 패하지 않았다며 우문술이 살수에서 패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번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가장 큰공을 세운 사람은 우리가 보통 알고있는 을지문덕이 아니라 고건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우리나라를 지킨 모든 장군들이 훌륭하고 대단 한 것 같습니다.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 군사를 계속 유인 하기 위해 거짓으로 패하여 평양 까지 이르렀습니다. 처음에는 승리에 도취된 수나라의 군사들이 아무 생각 없이 쳐들어 왔지만 군량미를 수송 하던 군대가 고구려에게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만 싸울 힘이 사라져 다시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이떄 을지문덕은 이미 사람을 시켜 살수(청천강)의 상류를 모래주머니로 막아 놓았습니다. 수나라 군대는 꼭 건너야 하는 곳이라 배가 없자 머뭇 거리고 있는데 마침 승려7명이 바지를 걷고 건너는 것을 본 수나라 군사는 강물이 깊지 않은 줄알고 서로 다투어 강물에 뛰어 들었습니다. 수나라가 반도 채 건너지 못하였을떄 고구려군이 상류의 모래 주머니를 터트림과 동시에 을지문덕의 군사들이 기습 공격을 하니 수나라 군사는 물에 빠져 죽고 화살과 칼에 맞아 죽어 놀랍게도 30만5천명의 군사 중에서 살아 간자가 겨우2천700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자연을 이용한 을지문덕 장군이 똑똑하고 자랑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가 수나라와의 전쟁을 마루리한 곳은 오열흘(요동성)에서의 전투 였습니다.
수 양제는 우문술의 군대가 살수에서 크게 패하여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요행수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이싸움은 이미 싸울의지를 상실한 수나라의 대패로 결정되어있었습니다.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 군사를 기습하여 대피 하였는데 이처럼 수나라와의 두 번째 전쟁은 패강,살수,오열흘 우리 고구려군에 대승으로 끝났습니다.
 
전투는 3개 밖에 없지만 자세히 읽어보니 꽤 긴 내용인 것 같기도 하고 재밌고 흥미 진진 하고 많은 것을 알 수있었습니다.
 
이 전쟁 이후에도 수 양제는 두 번이나 더고구려를 침략 하였지만 모두 실패 하였고 마침내 멸망의 길로 접어 들고 말았습니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꼴이 된 것입니다.
 
이제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투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이 부분에서 신채호는 연개소문에 대한 재평가와 안시성전투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연개 소문 장군은 연개소문에게 고구려 멸망의 책임이 있다고 하여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장군이자 정치가로 보기도 합니다.
 
신채호는 연개소문이 호국공화제라는 고구려의 옛 제도를 타파하여 정권을 통일 하였으며,,
장수태왕 이후 추진 된 북수남진 정책을 버리고 남수북진 정책을 추진하였고,
마침내는 당나라를 격파한 당시 동아시아 전쟁사의 유일한 중심 인물이라고 보고있습니다.
하지만 연개소문의 자료는 부족한 편 인데다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내용도 부정적이라서 재대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신채호는 다양한 자료와 이야기를 통해서 연개소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서부 출신인데 어렸을 때 중국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 했다고 합니다. 어린데 중국을 돌아 다니며 정보를 수집했다는 게 정말 대단 하다고 생각 합니다.
이 이야기는 그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 인데 신채호는 중국에 전해오는 갓쉰동 전이라는 이야기가 바로 연개소문에 대한 이야기로 그가 중국을 정탐 했었다는 근거로 삼소 있습니다. 한동안 중국에 들어가 그 사정을 정탐한 후 귀국한 연개소문은 강력한 북진남수 정책으로 중국에 강력하게 대응 할 것을 주장 하였지만 당시 고구려의 왕과 귀족들은 장수태왕 이후로 추진해 오던 북수 남진 정책을 유지했기 떄문에 의견 대립이 심하였습니다 그래서 고구려의 귀족들은 연개소문이 자기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 받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 하기도 하였지만 연개 소문은 큰 새력을 앞에 자신을 궅혀 훗날을 대비 할줄 아는 인물이어서 마침내 그 직위를 이어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연개소문을 못 미더한 왕과 귀족들은 제거 하려는 음모를 꾸몄는데 이일을 미리 안 연개소문은 먼저 계책을 써서 군대 열병식을 개최한다는 명목으로 귀족들을 모아 모두 죽이고 말았습니다 나아가 왕까지 죽인 연개소문은 왕의 조카 보장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태대대로의 지위를 얻어 마침내 고구려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연개 소문이 정권을 장악한 후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는 당시 신하와 동맹을 맺고 있었던 당나라는 호시 탐탐 고구려를 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연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권력을 잡자 이를 핑계 삼아 고구려를 침략 하였습니다 당나라 태종은 매우 신중한 사람이어서 과거 수나라가 고루려를 공격하다가 실패한 이유를 분석하고 대응책을 마련했는데 준비 기간은 무려20년 이였습니다. 그만큼 많은 대책을 새워도 계속 당나라는 밀려나가 습니다. 그 곳을 지키는 장군과 군사들의 용기로 그 성을 지킨거 같았습니다. 당나라가 많은 대책을 새워도
계속 패하다 눈보라가 치자 당태종은 도망치다 전쟁에서 얻은 상처로 죽고 말았습니다.
이만큼의 많은 전쟁을 하다보니 당연히 고구려가 지칠만 한데 신라의 연합으로 멸망 하고 말다니... 정말 아깝다고 생각 합니다.
 
신채호 선생님은 신라 백제 고구려에 대해  쓰다  중간에 뤼순 감옥에서 쓰시다 돌아가셔서 다 알수는 없어서 안타깝고 신라 백제 고구려에 대한 자세한 정보 제도 일어난 일을 알 수있어서 좋은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도 자신의 나라를 위해서 똑바른 정보를 알려 주시려고 노력 하셧다는게 정말 감동 스럽고 애국심이 깊으신것 같습니다 

율곡이이꼐서 말하 신 것처럼 역사책을 읽어서 과거와 현재의 일이 변화하는 양상을 꿰둟어야 한다고 생각 하였습니다.
해석 하자면 역사책을 읽어서 과거와 현재의 일이 변하는 개념을 꿰뚫어야 한다는 것 처럼
과거를 똑바로 알아야 현재를 알 수있습니다. 
신채호 선생님은 과거를 똑바로 알려주어 우리가 잘못된 과거가 아니라 똑바른 과거를 알려 주시기 위해 이 책을 쓰신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비디오, 역사
경기부천부곡6-* 유*정 | 2010-09-28 | 제7회 YES24 어린이 독후감 대회
 

우리들의 비디오, 역사

‘신채호 조선상고사’를 읽고

부천부곡초등학교 6학년 1반 유의정

 

   우리나라에서는 한․미 FTA, 천안함 사건, 광우병 등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났다. 나는 그 중에서도 중국의 역사 왜곡이 싫다. 중국은 고구려의 역사가 자기들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1880년대에 태어난 신채호는 나라를 빼앗기는 시대에 살았다. 그래서인지 신채호는 나라를 되찾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신채호는 일본인들이 일부러 우리나라의 역사를 사실과 다르게 지어내는 데에 화가 났다. 그래서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공부했다. 그런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내용이 너무 빠져있거나 한 나라를 중심으로 쓴 것이 많았다. 그래서 여러 가지 자료들을 알아보고 사실들을 모아 쓴 책이 바로 조선상고사이다.

 

   내가 조선상고사를 읽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여러 역사책이 거짓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고구려왕(영류왕)과 귀족들은 연개소문을 죽이려고 하자 눈치 챈 연개소문이 꾀를 써서 귀족들을 불러 다 죽였다. 그리고 왕까지 죽인 연개소문은 왕의 조카 보장왕을 왕으로 만든 후 최고로 높은 권력을 얻었다. 그런데 신라와 동맹을 맺었던 당나라는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권력을 잡았다는 핑계로 고구려에 처 들어갔다. 그런데 당나라 군대가 계속 이기자 당태종은 안시성을 치기 위해 토산을 쌓게 했다. 고생해서 쌓은 산은 오히려 고구려 군대가 차지하니까 당 태종과 군대는 도망쳤고 결국 당태종은 전쟁 상처로 죽었다. 하지만 옛날 역사책에는 나라의 부끄러운 일을 숨길 때가 있는데 이것 때문에 당태종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다 다르게 기록됐다.

  

  중국이 본격적으로 한국의 고대사를 왜곡하기 시작한 것은 1996년부터이다. 같은 해 중국은 핵심 연구과제로 고구려 역사를 선택했고 2001년 6월부터는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 역사로 만들려는 의도로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동북공정이란 중국의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 프로젝트이다.

   중국이 왜곡한 것들은 이런 것이 있다. 첫째 고구려인은 숙신의 후대인 여진족이 세운 부여에서 왔기 때문에 여진족과 같은 족속이다. 따라서 별종이 아니고 중국의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다. 둘째 발해 역시 당 현종이 대조영을 군왕으로 임명하였을 뿐 말갈족으로 이루어진 지방정권이기 때문에 당연히 중국사에 포함된다.

 

   만약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성공하게 된다면 고구려 역사는 모두 중국 것이 될 거고 이어서 백제, 신라 등 많은 우리 역사들을 자기들 것으로 만들 것이다.

   동북공정이 성공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역사를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진실된 역사를 세계인들에게 알려야 한다.

 

   나는 역사를 알아가면서 해야 할 일은 역사를 거짓으로 만들 생각은 버리고 좋지 않은 역사를 다시 일어나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우리들의 비디오 같다. 우리는 역사를 보면서 과거에 대해 반성하고 되풀이되지 않게 만들어야 겠다.

조선상고사를 읽고
경북김천양천6-* 이*광 | 2010-09-20 | 제7회 YES24 어린이 독후감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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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님께 배송되는 모든 상품을 CCTV로 녹화하고 있으며,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작업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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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품/교환 안내

※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반품/교환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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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품/교환 가능기간
  •  출고 완료 후 10일 이내의 주문 상품
  •  디지털 콘텐츠인 eBook의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의 상품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직수입 음반/영상물/기프트 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 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30%를 부과할 수 있음

    단, 당일 00시~13시 사이의 주문은 취소 수수료 면제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 전자책 단말기 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 예) CD/LP, DVD/Blu-ray,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주문 제작되는 상품의 경우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  LP상품의 재생 불량 원인이 기기의 사양 및 문제인 경우 (All-in-One 일체형 일부 보급형 오디오 모델 사용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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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피해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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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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