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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7년 01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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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기기 | 크레마 /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 /아이폰 /아이패드 /안드로이드폰 /안드로이드패드 /전자책단말기(저사양 기기 사용 불가) /PC(Mac) |
파일/용량 | EPUB(DRM) | 35.18MB 파일/용량 안내 |
글자 수/페이지 수 | 약 9.9만자, 약 3.2만 단어, A4 약 62쪽 글자 수/페이지 수 안내 |
ISBN13 | 9788961962827 |
2024년 08월 21일 ~ 2024년 09월 30일
2023년 02월 09일 ~ 2024년 12월 31일
상시
3명의 예스24 회원이 평가한 평균별점
사람이란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기 마련이지만 은연중에 주변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어울리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보고 듣는 것에서, 머무는 공간에서. 개중에는 어느 상황이건 상관없이 제 뜻대로 밀고 나가는 당차고 의지 굳은 사람도 있는 법이지만, 나 같은 사람들이야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다 보면 때로는 해야 할 일 하지 않고 주변 정리만 하다 시간을 다 보내기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잠깐 이리저리 눈길을 주다가 머뭇거리고 생각하다 보면 마음이 돌아서는 것을. 사람 사는 게 원래 그런 것이려니 하면서도 그저 연장 탓만 하는 목수일 뿐이라 한심스럽다. 글 한 번 써봐야지 하면 책상이 깨끗해야 집중이 될 것 같아서 주변을 청소하고, 키보드의 먼지도 닦아보고, 키보드를 경쾌한 소리가 나는 것으로 바꾸면 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청축키보드로 바꿔보고, 생각해보니 키보드가 아니라 공책에 펜으로 끼적이면 또 잘 될 것 같아 좋은 펜과 공책도 사본다. 그러다 안 되니 이젠 괜히 내가 있는 공간 탓을 해보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치즈가 바글바글 녹아 서로 엉길 즈음, 퐁듀팟에 옮기고 손님들 앞에 내놓았다. 워머 속의 작은 양초의 불꽃은 치즈팟을 계속 따뜻하게 해줄 것이다. 조명을 어둡게 하고 시나몬 향이 살살 풍기는 촛불을 켰다. 붉은 그림자가 어두워진 창문에 어른거리자 부쩍 겨울 속으로 들어선 것 같다. 뜨거운 치즈와 차가운 와인. 밤은 깊고 와인은 점점 비어간다. 이야기가 길어져도 괜찮다. 치즈는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까. (p. 271)
칼럼니스트이자 에세이스트인 저자는 작업을 위해 노트북과 서류뭉치를 들고 커피숍을 전전한다. 아무래도 집에서는 일이 안 되기 때문이라는데 그 마음이 너무도 이해되었다. 왠지 집에서는 더 게을러지고 더 느릿해진다. 집은 그런 장소인 모양이다. 커피숍을 찾는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커피숍은 소란스러운 듯하면서도 너무 시끄럽지 않은 소음이 좋고, 군중 속의 한 개인이기에 오히려 더욱 자기 자신에게로 눈길을 돌릴 수 있는 장소이다. 하지만 항상 원하는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다 날마다 돈 들여 뭔가를 사먹어야 하니 돈도 돈대로 든다.
인생이란 기승전결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행렬에 슬그머니 끼어서 내 식대로 걷다가 슬그머니 하차하는 일일 터인데,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 사방이 막힌 이 공간에서도 나는 뚜벅뚜벅 걷는 인간이 된다. 그렇게 걷다 보면 아홉 평짜리 공간을 넘어서서 더 넓은 우주로 진입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먹빛 겨울 하늘의 가장자리, 연약한 별빛의 흔적을 따라 나는 발걸음을 옮긴다. 검은 우주를 올려다보면, 미래의 나와도 싸우고 과거의 나와도 싸우는 현재의 '나'를 만난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망각과 나이듦과 권태와 꼰대스러움에 저항하는 나. 암전된 세계와 싸우며 사랑하며, 끝까지 아름다운 언어를 토해내며 살아갈 것이라고 말해본다. (p. 300)
그래서 저자는 홍대 부근의 골목에 작업실을 연다. 프리랜서지만 자기만의 일터를 가지게 되어 그의 능률은 바짝 오른다. 더욱이 그는 작업실을 일터로서만이 아니라 모임과 배움의 장소로서도 활용한다. 날을 정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그들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차를 마신다. 책을 읽고 토론을 하며 강사를 초빙해 그들과 다른나라의 언어를 배우거나 공예 등을 배우는 아카데미의 기능도 한다. 저자도 책 중에 적었지만 귀부인들이 운영하던 살롱 또는 블룸즈버리 그룹 같은 모임과 비슷한 느낌의 흥미로운 모임이 됐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마치 내가 따스한 노란 불빛이 가득한 작업실 내부를 바깥에서 바라보는 듯한 흐뭇한 풍경이다. 나라면 난 이처럼 사교적인 모임을 절대로 운영하고 해나갈 수 없을 터다. 그래서 더욱 좋아보이고 아름다워 보였다.
실패한 처음들도 여러 번 겪었고 그것을 만회했던 두 번째도 있었다. 만회하려 했으나 여전히 실패했던 두 번째도 분명 있고, 지금껏 계속 실패만 하는 것들도 있다. 이 무수한 처음들은 내가 과거의 연장선에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 그때 나를 설레게 했던 것들은 여전히 유효한 매력을 갖고 있다. 원래의 성정들을 그대로 유지한 채 나는 시작된 곳에서부터 큰 나선을 그리며 퍼져 나간다.
그러므로 마지막 책은 첫 책의 그림자 속에 있을 것이다. 그 처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리석고 서투른 결과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해내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뛰어넘어 그다음으로 가기 위해 쏟았던 시간들은 오롯이 내 몸 속에 들어 있는 것임을, 몇 번의 처음과 또 몇 번의 두 번째, 세 번째를 경험한 나는 잘 알고 있다. (p. 315)
무언가 토대를 쌓아놓은 것도 없이 무작정 작업실을 열 수 있을 리는 없다. 그러니 집 외의 다른 공간을 갖는 것은 꿈이다. 카페라도 전전하며 뭔가 해보자는 생각으로 책장을 넘겼다. 이건 자기만의 공간을 가진 데에 대한 동경만은 아니었다. 저자처럼 문장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글을 읽으며 봄날의 따스한 햇살 속에 먼지들이 떠올라 춤추고 전면 유리창 앞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소품들은 제 크기만큼 작은 그림자를 동그랗게 드리운 풍경이 떠올랐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처럼 저자의 작업실은 내겐 달콤하다기 보다는 담백한 비스킷 같은 맛이다. 외따로이 떨어진 혼자만의 공간에 대한 내 동경과, 자꾸 머뭇거리기만 하는 내 망설임에 대해 우선은 앞으로 나아가라는 고요한 응원을 받은 기분이 드는 책이었다. 좋은 에세이스트를 안 것 같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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