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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내용과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봄에는 밤 벚꽃, 여름엔 별, 가을엔 보름달, 겨울엔 눈.
그것만으로도 술은 충분히 맛있다.
…
너도 언젠가는 술맛을 알게 된다.
그 때는 맛있는 술을 함께 나누자.
- <바람의 검심: 추억편> 中
이따금 술이 한 잔 생각나는 밤. 같이 술잔 기울여 줄 이 하나 없을 때면, 집 앞 편의점에 나가 소주를 몇 병 사들고 와 혼자 즐겨보는 작품이 있다. <바람의 검심: 추억편>이 내게 있어 그런 작품이다. 몇 번을 다시 봐도 질리지 않는, 명작 중의 명작. 원래는 <바람의 검심> 전체 작품 중 후반에 등장하는 과거 회상 부분이며, 일종의 프리퀄 혹은 비긴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람의 검심: 추억편>만 본편에서 따로 떼어놓고 본다 하더라도,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 무리가 없을 만큼 독립적인 완성도가 매우 높다.
작품의 배경은 19세기 중엽의 일본. 막부와 유신의 세력이 치열하게 격돌하던 동란의 시대를 그리고 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격동의 시대에서 벌어지는 두 세력 간의 치열한 전투, 그리고 그 안에서 그려지는 운명의 소용돌이. 더 많은 이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잃어야만 했고,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한 유신지사의 처절한 이야기가 <바람의 검심: 추억편>이다.
- 검은 흉기, 검술은 살인술
역병으로 부모를 잃고, 유랑하는 인신매매 집단을 따라 떠돌던 주인공 켄신은 작품이 시작하자마자 산적들의 습격을 받는다. 불의의 습격으로 인해 일행 모두를 잃게 되지만, 그의 스승이 될 남자 히코 세이쥬로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고, 그가 가진 최강의 검술 비천어검류를 계승할 제자가 된다. 시간이 흘러 켄신은 수년간의 혹독한 수련 끝에 거의 모든 검법을 익힌다. 어릴 적 자신처럼 동란의 한가운데에서 피를 흘리고 있을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그들을 구하기 위해 세상에 나가겠다고 그의 스승에게 밝힌다. 하지만, 그의 스승 히코 세이쥬로는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검은 흉기, 검술은 살인술.
그 어떤 미사여구로 포장해도 그것이 진실.
- <바람의 검심: 추억편> 中
결국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 반대급부에 있는 이들을 향해 검을 휘두를 수밖에 없다는 반박할 수 없는 논리다. 즉, 그 누구도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서 생사를 여탈할 권리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약하고 죄 없는 사람들이 칼날에 스러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기에, 신시대를 만들기 위해 결국 켄신은 스승 곁을 떠난다. 처절한 운명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한 것이다.
- 양립할 수 없는 행복의 모순
그렇게 하산한 그는 오래된 막부세력을 부수고 신시대를 만들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일념 하에 유신 세력에 가담하여 암살자가 된다. 수많은 막부 세력의 요인들을 베고, 그 과정에서 키요사토라는 젊은 사내를 죽이게 되는데, 그 사내는 훗날 자신의 아내가 될 토모에의 약혼자다. <바람의 검심: 추억편>의 가장 드라마틱한 장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을 지키겠다고 다짐한 켄신이, 정작 자신이 훗날 가장 소중히 여기게 될 사람의 행복을 파괴해버렸다. 키요사토의 복수를 위해 켄신을 암살할 계책을 세우던 집단에 들어간 토모에는, 켄신과의 위장결혼 생활 중 그가 가진 정의의 진정성에 그를 용서하고 사랑에 빠진다. 이 모든 부조리한 상황이 설명이 되는 이유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던 현실과 흑선으로 상징되는 서양 열강의 침략, 구시대를 부수고 신시대를 만들겠다는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이 만들어낸 시대상 때문이다.
난 약한 자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베어왔다.
하지만, 너는 그것 때문에 행복을 잃은 것이다.
난 너의 소중한 것을 빼앗아 버렸다.
나에게는 너를 지킬 자격따윈 없었다.
그래도 나는 너를... 지킨다.
- <바람의 검심: 추억편> 中
토모에의 행복과 켄신의 정의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가치였다. 결국 켄신은 자신을 암살하려던 집단을 말살하고, 토모에를 구출하기 위한 싸움을 벌이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고 만다. 그 때, 토모에는 적장에게 스스로의 몸을 던져 켄신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온몸으로 막아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적들의 계략에 의해 눈과 귀가 일시적으로 멀었던 켄신은 토모에를 적장과 함께 베어버린다. ‘나는 너를 지킨다’라며, 굳게 다짐했던 토모에를 자신의 손으로 베어버린 것이다.
- 약하고 선량한 자들의 행복을 위하여
토모에를 자신의 손으로 베어버린 뒤, 켄신은 더욱 맹렬하게 검을 휘두른다. 신시대에는 모두가 안심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올 거라고 굳건히 믿으면서. 그렇지 않으면 그는 토모에를 희생시킨 자신을 결코 감당해 낼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작품의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 토모에의 혼령이 나무 밑동에 지쳐 기대어 있는 켄신을 슬며시 안아주는 장면은 그의 그런 간절함을 아련하게 드러낸다. 막부가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동란이 끝나고, 켄신이 자취를 감추는 것으로 작품은 마무리가 된다. 이후 이야기는 <바람의 검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본 작품 <바람의 검심: 추억편>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과 인물, 그리고 작가 노부히로 와츠키의 상상력이 더해져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가 작품을 통해 그리려했던 것은 역사의 잔혹성, 현실의 부조리, 그리고 저마다가 자신의 정의를 위해서 싸우는 모습이다. 인간은 그 어느 누구도 모든 것은 지킬 수 없으며, 자신이 옳다고 믿는 정의를 위해 싸울 수밖에 없는 숙명의 굴레를 지고 있다. 결국 역사는 유신 세력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참혹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결국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결코 싸움을 피할 수 없다면, 약하고 힘없는 자들과 선한 이들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싸워야 함을 작품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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