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필하모닉과 그 예술 감독인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1997년 10월 유럽 투어 중 파리에서 연주회를 가졌을 때, 프랑스의 주요 신문들은 이런 헤드라인과 그 비슷한 문구로 대대적으로 보도를 했다. 프랑스 언론(일반적으로 그러한 찬사를 보냄에 보수적인)의 찬사는 아바도의 베를린 시대가 차별적인 위업임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셈이다. 100년 넘도록 존재하는 한 오케스트라의 계속되는 성공 스토리는 모든 좋은 시절과 나쁜 시절을 함께 하며 이들을 영원히 세계 제일의 앙상블로 남을 수 있도록 오케스트라를 다루는 지휘자의 독점적인 지배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베를린에서 아바도의 재직은 신기함으로 시작되었다. 필하모닉 역사상 처음으로 수석 지휘자를 자유, 비밀, 민주적 투표를 통해 정하기로 했다. 필하모닉의 최초 세 명의 지휘자-한스 폰 뵐로, 아르투르 니키쉬, 그리고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들이 상임으로 있을 동안은, 현악파트 단원들은 당시 베를린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연주회 대행사 볼프(Wolff)의 지배 하에 있었다. 급하기로 정말 최고였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조차도 이 '자유 예술단체'의 리더로 무대에 오르기 위해선 그들의 추천이 떨어지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 다음, 이미 알려진 대로, 감독관인 게르하르트 폰 베스터만 (Gerhart von Westermann)이 카라얀을 불러내 '매우 기쁜 맘으로' 허락을 했던 것이다.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추대하도록 더 큰 무게가 그의 후계자 계약에 실렸다. 음악인들은 그를 원했다. 그들은 자신의 예술 감독으로 (우선 7년 동안) 그를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그에게 미치는 중요성은 아바도가 리디아 브라마니 (Lidia Bramani)와의 대화를 엮은 책 [Musica sopra Berlino] (1997)에서 밝힌 바와 같다. 이 점에 대해 그녀가 물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내게 가장 기뻤던 것은 음악인들이 날 뽑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건 한 지휘자에게 정말로 중요한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 외부로부터의 간섭은 없었어요. 문제가 되는 건 예술적인 것들 뿐이었습니다."
이 말은 기본적으로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믿음에 대한 언급이다. 자신의 일에 있어서 평범하고 어디에나 있을법한 '장식물' 따윈 그에겐 흥미가 되지 못했다. 그에겐 예술 그 자체- 예술 미학과 문화 메시지 등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만 즐거운 것이었고, 특히 정치에 대한 예술의 방어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결코, 음악의 실제가 예술을 위한 예술 (l'art pour l'art)의 정신을 대신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특히 베를린 필에 있어선 아바도에게 주문할 수 있었던 것, 즉 그들에게 인간적이며 열정적인 표현을 함으로써, 그의 아이디어를 예술적, 인도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긴장의 분위기였다.
그가 1990년 필하모닉을 이끌기 위해 이 도시를 찾았을 땐 베를린 장벽이 막 무너진 때였다. 동독과 서독은 서로를 만나고 있었는데, 때로는 성공적이기도 했고, 때론 상당한 오해를 보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음악은 최상의 실력으로 최소한 중재자의 역할이라도 시도할 수 있었다. 아바도는 시작부터 이런 태도를 취했다. 아바도는 [Musica sopra Berlino]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정말 민감하고 힘든 독일, 특히 베를린에서의 이 모든 사태는 매우 의미심장한 사실이었습니다. 필하모닉의 우리 모두는 그걸 느끼고 있었죠. 음악 속에 항상 본질적으로 존재했던, 상상과 표현의 자유와 정밀한 조사 등의 혼합은 갑자기 베를린이 직면한 상황을 이끌어줄 모델로 떠올랐던 것입니다. 나는 진행되고 있는 모든 일들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함을 느끼고 있었구요."
이런 의지, 이런 욕구는 아바도의 베를린 필하모닉 프로그램 속으로 빠르게 융해 되었다. 항상 모든 다양한 예술 형태에 눈을 돌렸던, 이해심 많고 학식 있는 인도주의자의 통찰력 있는 사람의 눈매로, 아바도는 최우선의 주제를 살폈다. 청중의 만족을 위해서도 그랬다.
복잡성과 결합의 풍요로움을 가진 여러 사이클들을 궁리했는데, 이들은 음악과 신화와 사회적 현실성 사이의 필수 불가결한 연결을 만들어내었다. 그 첫 번째 '구조물'은 1991/92 시즌의 '프로메테우스'로서 베토벤과 아바도의 친구인 루이지 노노의 이상이 꼭 일치하는, 의사 결정의 개인 자유를 지지하는 음악적 논문처럼 되었다. 이어서 훨씬 더 흥미로운 프로젝트가 이어졌다. 'Hslderlin', '신화와 태고'로 시작해서, 다음엔 마음을 사로잡는 '파우스트'사이클 (1994/95), '세익스피어' , 'Berg/Bychner', '방랑자', '사랑-죽음' 등 주제가 있는 사이클들을 선보였다. 팔스타프 분위기의 '음악, 즐거움의 세계'라는 타이틀로 아바도와 필하모닉은 재미있는 오락의 영역으로 옮겨갔고, 2001/02 시즌에는 다시 한번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주제를 붙들었다. 파르지팔의 'Here time becomes space' (여기서 시간이 공간이 되도다) 라는 어구로 시작된 것이다.
그러한 주제의 의욕적 선택(그리고 거기서 생겨난 프로그램의 덕으로)으로 발현되는 극적이고 음악적이며 또한 음악학적인 거대한 효과는,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한편으로 그 유명한 '필하모닉 정신'을 고스란히 유지하는 동시에 거대한 강을 건너 얼마나 지적이며 동시에 신중하게 필하모닉을 이끌려고 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아바도가 이들을 이끈 후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세 번째 바뀌었다. - 앙상블은 이전에 그렇게 젊은 사람이 있어본 적이 없었다. 주요 포지션들이 새로 계약을 하고, 서둘러 후임자들은 요구 받은 책임에 익숙해졌다. (빽빽한 연주회 일정, 연주여행, 녹음 스케줄 등의 와중에 일어 나기도 했다) 아바도는 경이롭게도 이런 교묘한 일들을 아주 잘 처리해 나갔다. - 곧장 이어진 첫번째 연주 여행에서 아바도와 그 단원들은 이미 서로에게 말을 걸 때 'Du'(당신)라는 말에 익숙해져 있던 참이었다. 비교하자면, 무엇보다도 신중하고 간결하게, 피할 수 없고 때론 여지없이 고통스런 평가에 대해 설명을 했다는 것이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이렇게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은 항상 훨씬 더 나은, 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길 원합니다. 이 오케스트라에선 음악인들이 자기들 스스로 연대하여 바로잡는다는 것이죠. 그들은 정말 자기 비판적입니다."
자기 비판적인 사람들은 성공하기 마련이었다. '음악 표현에 있어 영감에 찬 해석자'(이 말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자이퉁 FRANKFURT ALLGEMEINE ZEITUNG이 그를 표현한 것)인 아바도와 오케스트라는 시간과 공간과 비평가들의 맥박을 계속 붙잡아 두었고, 틀림없는 반향의 언어로 키워나갔다. 조금씩 조금씩 넓은 멜로디 아치, 탁월한 관현악 레가토, 담백하고 우아하게 확실히 구별되는 포괄적인 사운드로 기록되는 그 전형적인 '아바도 사운드'가 개발되었다. 여기서 얻어지는 장점은 특히 말러 (아바도의 베를린 활동 중 핵심을 차지한다)와 베토벤, 브람스 심포니를 연주할 때 두드러졌는데, 만일 전혀 새로운 해석이 아니라면 새로운 표준을 세우는 것은 재고해야 할 것이다. 연주회장- 한스 샤로운이 지은 아름다운 베를린 필하모니 홀에서 이를 직접 경험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이 시기동안 도이치 그라모폰과 협력하여 내 놓은 방대한 음반 중 하나를 참고하면 될 뿐이다. 사람들은 이 음반에서의 생기와 유연성으로 계속 놀라게 된다. 말러, 베토벤, 브람스 셋 중 하나의 심포니건 아니건,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슈톡하우젠의 아주 복잡한 그루펜, 모차르트의 레퀴엠 혹은 최근 출시된 팔스타프건 간에 말이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베토벤 피아도 협주곡 (마우리치오 폴리니 협연), 프로코피에프 제 1번과 제 3번 협주곡 (에프게니 키신 협연),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숨막히는 연주로 잊혀지지 않는 차이코프스키 제 1번 피아노 협주곡 등도 모두 마찬가지다.
그를 시샘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이의를 제기할 만한 또 다른 면도 있다. 이 모든 레코딩의 증인인 아바도는 우리 시대의 제 1의 지휘자 중 한 사람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점, 단순히 역사적 연주 연습을 채용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예술적 해석력의 영향을 주는 성과를 올린 사람이란 점이다. 그런 속에서 아바도는 알프레드 브렌델의 주장- 해석자는 반드시 그 음악을 떠받쳐야만 한다-을 구체화했다. 이 말은 지금은 유명해진 말러의 말만큼이나 구체화 되었다. 1909년 초에 말러는 이렇게 썼다
"내가 음악을 들을 때, 그것은 낯설다. 심지어 내가 지휘하고 있는 중이라도 그렇다. 종종 내 자신의 질문에 대한 명백한 답을 듣고서야, 난 완전히 깨끗하고 확실해진다. 아니라면 사실상 그것들은 전혀 질문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명백하게 깨달았다."
의문의 여지 없이 베를린 필하모닉과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결합은 그 자체가 행운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아바도 자신에게도, 단원들에게도, 또 집에서 오디오로 음반을 듣는 만큼이나 연주회장에서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인 대중에게도 말이다. 역시나 의문의 여지가 없는 일인데, 아바도와 베를린 필하모닉과 도이치 그라모폰의 협력은 예술 감독으로서 작별을 한 이후에도 계속 될 것이다. 한번 더, 단원들은 말러의 심포니와 한판 접전을 벌였다. 훌륭한 본보기인 심포니 3번, 7번 9번의 라이브 레코딩이 2002년 봄 출시를 앞두고 있다. 무엇보다 프랑스 레퍼토리를 준비 중에 있는데, 드뷔시의 녹턴,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및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에서 발췌한 곡들이다. 브람스의 음악 역시 길 샤함과 지안 왕과의 협연으로 바이올린과 이중 협주곡이 녹음될 예정이다. 여러분은 예민한 기대로 미래를 주시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