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노 리세의 두 번째 이야기 ― '삼월' 연작의 제4작
어느 오래된 서양식 저택을 둘러싸고 각자의 속셈이 복잡하게 얽힌다. 이 작품의 전편이라 할 수 있는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의 끝에서 영국으로 떠났던 미즈노 리세는 할머니의 유언을 계기로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할머니는 '내가 죽더라도 미즈노 리세가 이 집에 반년 이상 살기 전에는 집을 처분할 수 없다'는 묘한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그녀가 어린시절을 보냈던 집에는 지금 할머니의 의붓딸들인 리나코, 리야코 자매가 살고 있다. 일년 내내 저택을 채우고 있는 백합향과 더불어 집안 여자들의 불운한 이력 때문에 '마녀의 집'이라고 소문난 집에 돌아온 리세. 옆집 사는 도모코와 학교에서 만나 친구가 되지만, 몸이 약해 늘 집에만 있는 도모코의 남동생 신지는 어쩐지 불안하고 안타까운 눈길로 리세를 좇는다.
외양이나 성격이나 서로 정반대이면서도 어쩐지 표리일체 같은 느낌을 주는 리나코, 리야코 자매는 리세의 귀환에 민감한 반응을 드러내며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할머니의 일주기를 앞두고 리세와 어린시절을 함께 보냈던 사촌오빠 미노루와 와타루가 집으로 하나하나 돌아온다. 그리고 이 모든 인물들 각자가 마음에 품고 있는 의문들, 누구도 해명하지 못한 불의의 사고들에 대한 의심이 순식간에 뒤엉킨다.
짙은 백합향 가득한 오래된 서양식 저택의 수수께끼
오래된 저택이 연극 무대라도 되는 듯 하나하나 나타나는 등장인물들은 각각 서로를 의심하고 있으므로 상대방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온 집안을 짙은 향기로 채우는 백합이라는 모티프가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가운데, 독자들은 등장인물이 주고받는 대화에 이끌려 각각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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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이건 애완동물이 아냐. 이 '주피터'는 뭔가 다른 것이야. 병이니 먹이니 하는 건 뭔가 다른 비유일 거야." "대체 뭘까?" "그걸 알고 싶다구." 리야코가 눈을 번들거리자, 리나코는 갑자기 불안해하는 것 같다. "너, 설마 그게." 거기까지 말하고 리나코는 입을 다문다. "그래. 분명 그거야. 어머니는 우리를 신용하지 않았으니까." 리야코는 초조한 모습으로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냈다.
리나코는 상처받은 표정이 된다. "그럴 리 없어." "적어도 나만은,이라고 말하고 싶지? 너는 믿지 않았지만, 나는 믿었다고." 리야코가 독살스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리나코는 흘끗 동생의 얼굴을 본다. 여기서 동생을 자극하면 또 공격당할 게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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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서양식 저택에는 뭔가 사연이 있는 듯하고, 할머니가 남긴 일기장에 적힌 글은 암시로 가득하다. 그리고 리세가 할머니에게 보낸 옛 편지에 등장하는 '주피터'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작품의 키워드이자 단서가 되기도 하는 '백합'은 작품을 한껏 감각적인 이미지로 묘사하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전반에 짙은 그림자처럼 깔려 있는 요사스러운 분위기가 실로 온다 리쿠의 작품답다. 이야기가 후반으로 달려가면서 백합장의 비밀과 주피터의 정체 등 의외의 진상이 차례차례 밝혀진다. 그리고 그것은 그때까지 겉으로 보였던 인물들 간의 관계와 어울려 놀라운 전개를 보인다.
나쁜 소문이 도는, 수수께끼의 고풍스러운 저택에 살게 된 여주인공, 불길하고 으스스한 분위기, 의문의 사건, 겉과 속이 다른 등장인물들 등은 전편인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 고딕 로맨스(미스터리)의 요소를 부여한다.
'빛'과 '어둠'의 경계를 넘나드는 수상한 등장인물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등장인물들. 누가 적이고, 누가 신뢰할 수 있는 자기편인지 명확히 구분이 안 되는 불안감 속에서 저자의 특기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들 간의 날카롭고 신랄한 대화가 이야기 전편에 흐른다. 독자는 대사들을 통해 인물을 파악하려 들지만,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몫. 등장인물들이 보이는 예상 밖의 모습에 독자들은 묘한 쾌감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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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쳐줄까. 주피터는 판도라의 상자야. 그래서 우리가 몰래 처치하려고 하는 거라고. (……) 참견하지 마. 상관하지 마. 안 그러면 정말 후회하게 될 거야." "나, 나를 협박할 생각?" 고집과 공포가 뒤섞인 목소리로 리야코가 뒷걸음질치자, 미노루는 코웃음 쳤다. "협박이라고? 농담도. 협박이란 건 상대가 뭔가 가치 있는 걸 갖고 있을 때 성립하는 거지, (……) 당신이 고급 창녀였던 시절은 끝났다구."
"이렇게 모욕당하고, 내가 그냥 넘어갈 줄 아니." 그래도 리야코는 기죽지 않고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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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묘한 매력이 넘치는 히로인, 미즈노 리세의 후일담 격이다. 전편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의 독특하고도 비현실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분위기에 익숙해졌던 사람이라면 이 작품을 보다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인 리세의 행동이나 그녀에게 주어진 '운명'은 전혀 16세의 소녀답지 않지만, 그것이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만화적이면서도 당돌한 설득력이 '삼월' 세계의 트레이드마크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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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은 어렴풋이 안다. 악은 모든 것의 근원이다. 선 따위, 어차피 악의 웃물 중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악을 돋보이게 하는, 말하자면 손수건 테두리의 자수 같은 것일 뿐이다. 그렇지 않고는 왜 늘 선이 그렇게 약하고 무르고 덧없는 것인지 설명할 수 없다. 요컨대 이 세상 모든 것은 거대한 악의 침대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악의 침대는 항상 새로운 피가 필요하고, 그 피를 타고난 자는 어느 시대에나 반드시 존재한다. 악의 존속은 인간의 필연이며, 자연의 섭리에 따라 강하게 운명지어지는 것이다. 할머니도, 아버지도, 그런 맥락으로 이어지는 흐름 위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와타루는 다르다. 와타루는 윗물의 행복한 한 방울. 그는 밝은 빛 속을 걸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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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히로인, 미즈노 리세의 또 다른 후일담을 기대한다. (출판계 소식에 따르면, 현재 저자 온다 리쿠는 미즈노 리세의 다음 후일담에 해당하는 소설을 일본의 모 잡지에 연재 중이라고 한다.)
일본 아마존 독자 서평
* 나는 이 책을 세 번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에는 반가운 등장인물들에 기뻐하면서 전개에 경악. 두 번째는 그들의 심정에 감정이입해서 같이 괴로워했다. 세 번째는 이야기의 전개 속에서 '퍼즐 조각들'을 주웠다.
* 두근두근하며 읽었다. 무엇이 진실인지, 누구를 믿으면 좋을지…… 독립된 이야기로 읽어도 괜찮지만, 전작들을 읽는 편이 훨씬 좋다.
* 갖가지 복선이 깔리는 가운데, 결말을 향한 에너지가 쌓이고 또 쌓이면서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 좋은 의미로 어딘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주는 부분이 온다 리쿠다운 독특한 매력!
* 온다 리쿠의 작품은 마지막 순간까지 읽는 사람을 사로잡는다. 이 작품도 예외가 아니다. 마지막 부분이 약간 아쉬웠으나, 속편이 있을 거라면 오히려 이런 아쉬운 느낌이 안성맞춤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