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딱 잘라 말해 ‘과거’다
대학 동창인 리에코, 아키히코, 마키오, 세쓰코.
졸업한 지 십 몇 년이 지나, 네 사람은 함께 세계자연유산인 Y섬을 여행한다. “이번 여행의 테마는 ‘비일상’이므로 각자 지금껏 풀지 못했던 과거의 수수께끼들을 한가득 지참하고 올 것”이라는 아키히코의 ‘안락의자 탐정 기행’ 계획에 따라 그들은 기기묘묘한 삼나무들이 가득 들어찬 태고의 원시림으로 들어선다.
이들의 여행은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는 것 같다. ‘일상’을 떠나 정적이 깃든 숲을 더듬어가며 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다는 전설의 벚나무를 찾으러 가는 것이 표면적인 목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들의 여행은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물들 간의 과거의 관계는 언뜻 잘 모르겠지만, 넷은 계속해서 이상한 사건 이야기들을 이어간다. 말 그대로 네 사람이 각자 안락의자 탐정의 역할을 맡는 셈. 하지만 명쾌하게 진상이 밝혀지는 것이 있으면, 실컷 이야기를 벌릴 대로 벌려놓고 그걸로 끝나버리는 것도 있다. 또는 이야기를 언뜻 비추기만 하고 그대로 지나가버리는 것도 있다. 그러면서 서서히, 베일이 한 겹 한 겹 벗겨지고, 각자의 눈앞에 자신이 잃어버렸던 퍼즐조각들이 나타난다.
과연 네 사람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 모든 수수께끼의 매듭을 풀 수 있을까.
숲은 살아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_ 리에코
숲에 들어서면 늘 누군가에게 사랑 받는 기분이 든다. _ 아키히코
숲길 저편에서 누가 온다. 내가 잘 아는 누군가가. _ 마키오
숲은 일요일 아침 같다. _ 혼다 세쓰코
그들의 과거, 그들의 수수께끼
이 책의 각 부에는 주인공 4명의 이름이 각각 붙어 있다.
리에코, 아키히코, 마키오, 세쓰코는 차례대로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그들의 시선과 기억을 따라가던 우리는 희미하고 어두운 과거 어딘가에서 예기치 않게 이어지는 고리에 놀란다.
이들의 이야기는 한 가지 사건만을 중심으로 하지는 않는다. 자주 꾸는 꿈 이야기에서부터 뉴스에서 본 미해결 사건, 고등학교 시절 일어난 수수께끼의 도난 사건, 알 수 없이 무서워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호텔에서 만난 노부인들의 정체 등, 그들의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리고 그러는 틈틈이 주인공들이 공유하는 과거의 사건에 대한 단상과 기억들이 교차한다.
사실, 이 책에는 이 네 주인공의 기억 속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가지와라 유리. 회상 속에서 등장하는 그녀의 비중은 이야기가 클라이맥스로 향할수록 더 커진다. 리에코의 대학 시절 단짝이자 본의 아니게 마키오, 리에코와의 삼각관계에 얽혀 괴로워했던 그녀는 졸업을 앞두고 한 1인극 이후로 모습을 감추었다. 네 친구들은 함께 그녀의 마지막 공연을 보러 갔었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리에코는 유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반드시 알아내려 한다.
제1장 - 리에코
마키오, 세쓰코의 고등학교, 대학 동창. 아키히코와는 대학 동창.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마키오와 사귀다가 대학 4학년 가을에 헤어졌다. 두 사람이 헤어진 데에는 리에코의 친구 유리가 얽혀 있는 듯 하다. 차분하고 조신한 이미지이지만 두뇌 회전이 빠르고, 어딘가 크게 ‘일렁이는’ 듯 불안한 부분을 남모르게 지니고 있는 여자.
본격적으로 Y섬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그 냄새가 한결 짙어져서 나의 콧구멍과 눈과 귀와 목으로 스며들어온다. 누구나 안쪽에 감추고 있는 두려움과 의혹의 냄새가.”라고 직감하는 리에코는 ‘진짜 과거’, 곧 상처 입은 과거의 진실과 그 이유를 알아내고, 감당할 수 있을까.
제2장 - 아키히코
“그렇다면 무엇이 미스터리인가? 미사키 아키히코가 생각하는 미스터리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딱 잘라 말해 '과거'다. '과거'에야말로 진짜 미스터리가 있는 것이다. 시간에, 기억에, 길모퉁이에, 광 한구석에, 소리 없이 묻혀가는 것들 속에 '아름다운 수수께끼'가 있다.”
거창한 프롤로그로 이 여행의 서두를 장식하는 아키히코는 마키오의 대학 친구. 마키오를 통해 리에코, 세쓰코와도 친하다. 능력, 용모, 집안, 재산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자신의 ‘타고난’ 위치에 대해 늘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듯, 그 불편함이 괴팍한 성격과 독설로 발산되는 듯하다.
‘무엇이 무서운가’라는 질문에 ‘수국’을 떠올리고 스스로도 의아해하는 아키히코. 그의 과거에 숨겨진 진실은 무엇일까?
제3장 - 마키오
리에코, 아키히코, 세쓰코와 각각 옛 애인, 가장 친한 친구, 소꿉친구 사이인 마키오.
외국계 보험회사에 근무하며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타입이지만, 사실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사람. 결혼해서 두 아이를 두었으나 얼마 전 이혼했으며, 남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지만 ‘혼자’이기를 선택한 상태.
리에코에게 어두운 상처를 안겨준 장본인이자 아키히코의 과거를 가까이서 관찰했던 사람으로서, 오랜 세월 동안 수수께끼였던 자신의 정체를 이번 여행에서 조금쯤은 알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제4장 - 세쓰코
마지막 장의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것은 세쓰코.
모든 이야기에 대해 중립적, 관찰자적 위치에 있는 듯한 세쓰코는 쾌활하고 거침없는 성격으로 사람들로부터 신뢰받는 사람. 그러나 그녀는 다른 친구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현실을 다부지게 이겨나가는 한편, 나머지 세 사람과 공유하고 있는 과거의 기억들을 통해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해 준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이 네 친구들은 어떻게 자기 자신의 과거, 자기 인생의 미스터리와 해후할 수 있을까? 이들은 전설의 벚나무를 볼 수 있을까.
‘삼월’의 세계로 한 걸음 들어서다
온다 리쿠의 작품세계는 넓고 다채롭다.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그녀의 작품세계에 굵게 한 획을 긋는 것이 이른바 ‘삼월’ 연작이다. 전작 ?삼월은 붉은 구렁을?(온다 리쿠 지음, 북폴리오 출간)을 원점으로 하여 총 4권의 책이 태어났다. 이 책 ?흑과 다의 환상?(상, 하)은 ?삼월은 붉은 구렁을?에서 언급되는 책 속의 책 《삼월은 심홍의 구렁을》의 1장 <흑과 다의 환상>을 발전시킨 작품이다.
제 1부는 <흑과 다의 환상>. 이 4부작에는 각자 부제가 붙어 있거든요. 이 장에는 ?바람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요. …… 네 명의 장년 남녀가 여행을 하는 이야기랍니다. 정말로 그것뿐이에요. 장소는 아마도 야쿠시마 섬이라고 생각되지만, 명확히 언급은 안 됩니다. …… 아무튼 잘도 떠들어대는 무리예요. 그것도 이상한 사건 이야기들뿐이거든요. 네 사람이 각자 안락의자 탐정의 역할을 맡는 셈입니다. …… 완전히 닥치는 대로인지, 아니면 오히려 치밀하게 계산된 건지는 모르지만, 각각의 이야기들이 실로 매력적이에요. 그런 작은 에피소드들과 경구 같은 대화를 싫어하는 사람은 싫어하겠지만 나는 홀딱 반했어요.
_?삼월은 붉은 구렁을? 中 <흑과 다의 환상>에 대한 소개
물론 이 책은 예의 <흑과 다의 환상>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또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읽지 않았다고 해서 이 책을 못 읽을 것도 아니다. 다만 ‘삼월’의 세계를 만끽하며 함께 읽으면 그 세계가 한층 더 넓어질 것이라고 옮긴이는 전한다.
마지막으로, 전작 ?삼월은 붉은 구렁을?에 따르면, 이 책의 제목 ?흑과 다의 환상?은 듀크 엘링턴의 재즈곡 에서 따온 것이다. ‘black and tan’은 미국에서 흑인과 백인 모두 드나드는 나이트클럽이나 흑인과 백인 혼혈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 주인공 네 남녀의 이름이 각 장의 제목이 되는 것은 4부작 구성에 영감을 준 작품으로 거론되는 로렌스 더렐의 ?알렉산드리아 사중주?에서 따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