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혜경의 보석 상자에는 여러 세대를 넘어 사랑 받아온 보석과도 같은 피아노 작품들이 가득하다. 이 중에는 처음부터 피아노 독주를 위해 만들어진 곡들도 있지만 오페라 극장이나 콘서트 홀에서 갈채 받던 작품들을 피아노 연주용으로 편곡한 것들도 있다. 피아노라는 이 훌륭한 악기는 플루트나 사람의 목소리는 물론 오케스트라의 연주까지도 모방할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또한 이 한 장의 CD는 1730년대 바흐가 살던 라이프찌히로부터 20세기 에드워드 맥도웰의 미국과 라흐마니노프를 추방했던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시공을 초월한 여행으로 우리를 이끈다.



J. S. 바흐의 음악은 가장 심원한 지적 기쁨과 함께 지상의 것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멜로디로 가득찬, 하나의 우주 그 자체이다. 바흐의 작품을 두고 "멜로디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 사람들에게는 플루트 소나타 E플랫 장조(BWV1031)중 '시칠리아노'나 성가곡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의 코랄 전주곡을 권하고 싶다. 코랄 전주곡은 바흐 당시 루터교 예배 중에 어떤 오르가니스트에 의해 즉흥적으로 흘러나왔을 법한 음악을 상기시키는 곡이다. 바흐는 거의 200여 곡에 가까운 오르간 작품을 썼으며, 이 작품들을 통해 옛 교회에서 사용한 대위법으로 어떻게 기억에 남을 만한 새로운 멜로디를 만들어 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쇼팽이 작곡한 열두 개의 연습곡(Op. 25)는 그가 26세 되던 해인 1837년에 출판됐다. 그보다 먼저 작곡된 Op. 10의 연습곡들처럼, 이 곡들도 문자 그대로 새로운 피아노 테크닉을 '공부'해 보는 작품들이었다. '에올리언 하프'로 알려진 Op. 25의 1번, A플랫 장조의 연습곡에서는 재빠르면서도 잔물결처럼 소근거리는 반주 위로 높이 날아오르는 듯한 멜로디를 얹었다. 반면, Op. 25의 12번, C단조 연습곡인 '바다'는 급격한 물결로 건반을 가득 채우는 일단의 아르페지오로 마무리된다. 쇼팽은 1834년에 즉흥 환상곡을 완성했으나, 곧바로 악보를 서랍 속에 넣어버렸다. 때문에 그의 사후에 출판된 이 작품들은, 불온함과 시적인 음악의 드라마틱한 조합으로 인해 쇼팽의 가장 유명한 곡들 중 하나가 되었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Op. 27, 2번)는 초기 낭만주의 음악의 아이콘이 되었다. 이 곡에 '달빛'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루트비히 렐슈타프는 작곡가가 아닌, 시인이자 비평가였다. 베토벤 자신은 이 곡을 '판타지 형식으로 씌어진 소나타'라고 불렀다. 소나타 알레그로 형식에서 전통적인 긴 악장을 쓰는 대신에, 이 수수께끼와 같은 아다지오로 '월광'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라흐마니노프는 1934년 작곡된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Op. 43)'의 18번 변주곡과 같은 멋진 멜로디로 인해 '현대'의 가장 '낭만적' 작곡가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라흐마니노프의 장난끼 넘치는 위트는 바로 그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이 황홀하기 그지없는 멜로디를 그는 단지 파가니니의 펄쩍펄쩍 뛰는 듯한 바이올린 곡조를 느리게 하고, 위 아래 음을 뒤집는 것만으로 만들어 냈던 것이다.



프란츠 슈베르트의 드라마틱한 가곡 '마왕'은 소름 끼치는 동화를 담고 있는 수많은 옛 시가로부터 나온 설화 음악(이야기체 노래)이다. 이 우화적인 이야기에서 연달아 치는 셋잇단음표는 말에 올라 죽음을 피해 달리는, 그러나 종국엔 비극적 결말을 맞는 아버지와 그의 어린 아들을 묘사한다.



프란츠 리스트의 찬사를 받은 에드워드 맥도웰은 유럽에서 학업과 음악 활동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20세기의 전환점에서 가장 존경 받는 미국 작곡가가 되었다. 그가 공부하고 또 강의하던 독일에서, 22세 되던 1883년에 작곡한 매혹적인 곡 '마녀의 춤'은 그의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로서의 면모를 잘 드러낸다.



모차르트와 친인척 관계였던 카를 마리아 폰 베버는 오페라 전문 작곡가로 성공하려는 열망이 있었다. 그는 콘서트 지휘와 피아노 리사이틀 개최와 같은 혹독한 스케줄을 연이어 소화하면서, 작곡에 온 몸과 마음을 집중시켰다. 이것이 베버 초기의 독일 낭만 오페라 '마탄의 사수'와 같은 획기적인 작품과 빛나는 피아노 명곡들이 우리 곁에 남게 된 이유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피아노 곡은 '무도회의 권유'(Op. 65)이다. 무도회의 한 장면을 묘사하는 드라마틱한 시와, 피아니스트의 몫인 화려한 기교 모두를 지닌 곡이다. 1819년에 작곡된 이 '론도 브릴란테'는 한 세대 또는 두 세대 후에 등장한 풍부하고, 향수어린 슈트라우스 왈츠의 선례가 되었다.



35세 되던 해인 1847년, 연주여행에서 은퇴한 직후 프란츠 리스트는 '위로'라는 제목으로 여섯 개의 피아노 곡을 작곡했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대중의 인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이전 시절과 작별을 고하는 듯한 암시를 받게 된다. 6개의 곡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세 번째인 '위로' D플랫 장조이다. 이 곡은 대단히 쇼팽다운, 꿈꾸는 듯한 녹턴이지만 리스트 풍의 하모니로 이루어진 몇 번의 두드러진 터치도 함께 발견된다. 리스트는 비르투오소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에게 영감을 받아 바이올린의 매력에 빠졌으며 1840년에는 파가니니의 연습곡 5번 '사냥' 여섯 곡을 피아노 연주용으로 편곡했다. 이 곡은 사냥의 나팔 소리와 폭발적인 음계의 진행을 드러낸다. 인상적인 공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 2번'은 공연 당일로부터 그의 은퇴 작품이 되었다. 이 곡과 함께 연작으로 작곡된 다른 열여덟 개의 곡은 헝가리 출신의 이 작곡가가 어떻게 음악적인 뿌리를 찾고 그에 접근하는 지를 보여준다. 후에 리스트는 어느 헝가리 집시촌에 앉아 그곳 음악가들이 서글픈 '라수'(lassu)나 열광적인 '프리스카'(friska)를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이 곡들을 썼노라고 술회한 바 있다.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는 18세기 중반 오페라의 중요한 개혁자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포착된 멜로디를 드라마틱한 상황에 접목시키기로 결정했고, 이를 통해 모차르트의 훌륭한 오페라로 향해 나가는 방법을 준비했다. '오르페오'는 이제 가장 자주 공연되는 그의 오페라가 되었고, 이 중 몇몇 곡은 리사이틀 무대에서도 인기가 높다. 이들 인기곡 중에는 레스피기와 함께 1900년 즈음 이탈리아 기악 음악의 부흥을 이끌었으며 리스트의 수제자이기도 한 조반니 스감바티에 의해 편곡된 것들도 포함돼 있다.



프란츠 슈베르트는 아련한 회상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빼어난 완성도로 마무리된 일군의 피아노 작품을 썼다. 이 곡들은 (낭만적인 의미에서) 작곡가 자신이 그 작품들을 매우 가볍게 썼음을 암시하는 '즉흥곡' 혹은 '악흥의 순간' 등의 이름으로 출판업자에 의해 발간됐다. 사실 슈베르트의 G플랫 장조 즉흥곡(Op. 90, 3번)은 이 '보석상자'에 모인 음악 중 가장 정밀하게 세공된 보석이라 할 수 있다.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내는 선율은 보조적 역할로 간혹 언급되는 정도의 저음부, 속살대는 반주와 절묘한 결합을 이룬다. 이 소리들은 평온과 혼돈을 번갈아 전한다. 관념의 측면에서는 통일을 이루면서도 하나로 얘기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더 이상의 말을 잇지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이 작품은 슈베르트의 가곡을 대하는 것과 같은 감흥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