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다시 연암을 읽어야 하는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조선 후기의 뛰어난 문장가이며 실학자(實學者)이다. 연암의 글은 생동하는 언어와 파격적인 문체로 인해 당대인뿐만 아니라 후대인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읽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연암의 글을 소재로 하여 출간된 책으로는 1차 번역본부터 저자의 다양한 의견이 수렴된 책까지 수십 종에 달한다. 또한 작년에는 연암 서거 200주년을 기념하여 다양한 학회와 행사가 열리는 등 학문적으로도 많은 성과가 있었다.
기출간된 연암 관련 책들을 보면 연암의 전체 상(像)을 보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한쪽 면만을 과장되게 부풀리거나 강조하는 경향이 많다. 또한 연암의 글쓰기에서 그 고심처(苦心處)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고 사려 깊게 음미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연암의 겉모습만 보고 흥밋거리만 찾아내는 듯한 경향이 없지 않다. 문맥에 맞지 않은 견강부회식 번역 또한 무수하며, 서양의 문예 이론과 철학을 가져와 비교하거나 그것을 기준으로 연암의 글을 섣부르게 평가하는 등 깊이 있는 연암 읽기를 하지 않는 책이 많다.
연암의 산문은 매우 까다로워 한문 원문으로 읽는 게 쉽지 않은 일일 뿐더러, 그 다층적인 미학적·사상적 의미망을 구조적으로 적확하게 해독해 내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설사 해독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지금의 우리말로 쉽고 정확하게―그러면서도 왜곡과 과장과 단순화의 잘못을 범하지 않으면서―옮기고 풀이하는 건 정말 고도의 지적 능력과 오랫동안 축적된 공부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적어도 연암의 산문을 제대로 이해하고 느끼기 위해서는 연암 정도의, 혹은 연암과 방불한 사유와 고심, 인문적 교양과 식견을 갖출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식견 없이 데리다가 유행하면 데리다를 흉내 내고 푸코나 들뢰즈가 유행하면 그것을 베끼거나, 포스트모더니즘의 권위를 빌려 연암을 이야기한다면 우리 학문의 주체성을 세울 수 없다. 또한 단순한 흥밋거리로 「호질」, 「양반전」, 『열하일기』 등 시사 비판과 풍자에 뛰어난 작품만을 골라 소개하고 연암의 탁월한 언어 감각만을 논한다면 이것은 연암 문학의 일면만을 본 것이다.
이 책의 집필은 이러한 기존의 책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고 있다.
필자는 5년 전부터 연암강회(燕巖講會)를 통해 대학원생들과 함께 연암 산문을 강독해오고 있으며, 이 모임을 통해 연암의 문장을 한글세대에게도 쉽게 읽힐 수 있는 유려한 우리말로 표현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연암 제대로 읽기’를 위해 필자는 집필 내내 연암과 함께 생활하다시피 하였다. 필자의 표현을 인용해본다면, “연암이 벗들과 술을 마실 때 나는 그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연암과 그 벗들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과 한 마디 한 마디 말에 희비를 함께하였다.” 즉 이 책은 필자의 그러한 체험의 외적 표현인 셈이다.
이 책은 연암 글쓰기의 진수, 자신의 사유를 풀어내는 놀라운 능력, 자구(字句)를 단련하면서 물샐틈없이 삼엄하게 한 편의 글을 조직해 내는 빼어난 능력, 자신의 안팎을 반성적으로 성찰해내는 연암의 깊은 시선 등에 대해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작품을 예로 들어가며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연암을 제대로 읽는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연암의 삶과 내면, 그 사유와 미학을 읽는다
이 책의 제목 ‘연암을 읽는다’의 1차적 의미는 바로 연암의 뛰어난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옛날의 문(文)은 그 범위가 단순히 문학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문(文), 사(史), 철(哲)이라고 할 때의 이 ‘문’은 현대적 장르 개념인 ‘문학’을 넘어선다. 중세 이전의 ‘문’은 삶의 전반을 담아내는 그릇이었다. 이 책에서의 ‘읽기’는 바로 ‘연암 알아가기’이다. ‘문’으로 표현된 연암의 글을 읽음으로써 연암 박지원의 사유(思惟)와 그의 생애, 교유 관계, 문예미학 등을 총괄해서 읽어내는 것이다.
「술에 취해 운종교를 밟았던 일을 적은 글」의 마지막 단락을 번역하고 필자는 그 단락의 평설을 다음과 같이 평설을 붙였다.
만일 이 글이 이 마지막 단락 없이 앞 단락에서 끝났다면 어땠을까, 이런 질문을 한번 던져 보자. 만일 이 마지막 단락 없이 글이 끝났다면 이 글은 그야말로 세상에 버려진 존재들이 달밤에 만취하여 하릴없이 어슬렁거리고 다니면서 동류의식과 자기연민을 보여준 데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연암은 거기서 글을 종결짓지 않고 자신들이 그런 존재조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아니 오히려 그런 존재조건에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진실하게) 선비로서의 정신을 결코 놓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을 살짝 끝에 덧붙임으로써 이 글에 기복(起伏)과 파란(波瀾)을 부여하고 있다. 그 결과 이 글은 대단히 성찰적이고 반어적인 울림을 획득한다. 왜 성찰적이고 반어적인가? 스스로의 존재조건을 응시해 내고 있다는 점, 자기연민의 감정까지도 대상화하고 반추해 내는 고도의 냉철한 지적 능력을 보여준다는 점, 이상한 기행(奇行)을 연출하면서도 그 기행이 하릴없는 데서 연유하는 것임을 스스로 꿰뚫어보면서 기행 저 너머에 있는 선비 본연의 사회적 책무를 스스로 환기해 내고 있다는 점, 이 여러 가지 점에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성찰성’과 ‘반어성’은 연암 산문의 기저부(基底部)를 이루는바, 이 점을 알지 못하는 자, 연암 산문의 껍데기만 읽은 자라 할 것이다. ― 본문 84∼85p
연암의 글 속에 담긴 선비로서의 경세적(經世的) 책임 의식 즉, ‘사(士)에의 자각’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을 알지 못한다면 정말 필자의 표현대로 연암 산문의 껍데기만 읽은 것일 것이다.
「정석치 제문」은 연암의 글 중에서도 파격 중에 파격으로 읽힌다. 또한 재미있는 표현으로 읽는 이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글의 마지막 총평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평을 하고 있다.
이 글은 그 형식도 묘하고, 문체와 어조도 묘하고, 표현도 재미있다면 재미있다. 하지만 한갓 이런 점에만 눈을 빼앗긴다면 연암옹(燕巖翁)이 자못 섭섭해할지 모른다. 왜냐면 연암은 늘 글을 읽을 때 눈에 빤히 보이는 거죽이 아니라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작자의 고심(苦心), 즉 작자의 마음을 읽을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본문 278p
「정석치 제문」은 슬픔, 애통함 등의 말은 한 군데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재미있는 표현과 형식의 파격에만 눈을 돌리고 정작 그 속에 담긴 연암의 슬픔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제대로 읽은 것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연암을 읽는다’는 것은 이처럼 텍스트를 통해 연암이라는 한 인간의 삶과 내면 세계, 그리고 그의 사유와 미학을 읽는 것이다.
연암 정독 ― 단락별 번역, 주해, 평설, 총평을 통한 ‘연암 제대로 읽기’
연암 박지원의 산문은 마치 잘 빚은 항아리처럼 물샐틈없이 삼엄한 완정미(完整美)를 보여준다. 예리한 통찰력과 기발한 상상력이 가득하고, 때로는 논리적이고 심오하다. 유머러스한 속에도 깊은 연민이 담겨 있고, 때로는 몹시 슬프고 아름답다. 하지만 이 다양한 면모의 바탕에는 연암의 사회와 현실에 대한 진지한 성찰, 더 나아가 나라와 인민에 대한 선비로서의 경세적 책임감이 들어 있다.
이처럼 연암의 글은 워낙 치밀한 데다 깊은 사유와 미학적 고려를 담고 있으며, 고도의 구성과 안배(按排)를 해놓고 있기에, 범범하게 글 전체만 갖고 대강 논의해서는 수박 겉핥기가 되기 쉽다. 정작 연암이 글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미묘하고 아름다운 국면들을 놓쳐 버리기 십상인 것이다.
이 때문에 연암 정독을 위해서는 ‘주해’, ‘평설’, ‘총평’이라는 분석적인 접근 방식으로 연암의 글을 평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매 작품마다 먼저 한 편의 글 전문을 번역하여 보여준 다음, 다시 단락 별로 글을 나누어 자세히 음미했으며, 최종적으로 다시 글 전체로 돌아가 총평을 가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주해’에는 해당 단락에 등장하는 고유명사(인명, 지명 등)와 용어를 풀이하여 본격적으로 작품을 분석하기에 앞서 사전 지식을 보충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평설’에서는 본격적으로 해당 단락의 내용을 분석하고, 아울러 연암이 이 글을 쓸 당시의 배경(교유 관계, 연암의 형편 등), 연암의 생각 등을 다른 문집의 자료들과 함께 비교해보기도 하고, 문장 구조를 분석하기도 하는 등 자세한 내용 분석이 이어진다.
‘총평’에서는 필자의 작품에 대한 평가, 그리고 창강 김택영, 연암의 처남인 이재성 등 여러 문인들의 연암 글에 대한 평가를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