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 하나님에 대한 숙달된 강론이라면 성경신학은 성경에 그 기반을 둔 하나님에 대한 숙달된 강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오늘날에는 소수의 신학자만이 성경신학이라는 말을 정확히 이런 의미로 사용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은 같은 것을 다루지만, 성경신학은 두 분야의 기반을 이루는 책 본체를 밝힌다는 점에서 조직신학보다 좀 더 특수하다.
그러나 오늘날 신앙고백 영역에서 보면 지배적 용법이 약간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명칭이 암시하는 것처럼 조직신학은 주제적 · 논제적 · 초시간적 · 논리적 방향을 따라 조직된다. 조직신학은 체계적이다. 다 기록되면 조직신학은 하나님, 죄, 창조,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등에 대해 말하는 장들로 구성된다. 이것은 조직신학자는 두 성경 사이의 명백한 차이, 성경 저자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문학 장르, 성경 수사학의 힘, 후기 성경 저자들의 초기 성경 저자들에 대한 처리 또는 충실한 주석과 해석에 들어가는 것의 복잡성을 간과한다는 것을 암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조직신학의 조직 원리가 주로 논리적이고 초시간적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사실상 모든 조직신학책의 목차를 훑어보면 이것이 증명된다. 반면에 성경신학은 성경 자체가 구속사의 역사적 진행을 보여 준다는 관찰에 기반을 둔다. 그러므로 다 기록되면 성경신학은 시간 요소를 포함한다. 삼위 하나님의 통일성은 성경의 줄거리 속에 언제 어떤 방법으로 들어왔는가? 아모스는 자기가 살던 시대와 장소에서 성경이 죄에 대해 말하는 것에 어떻게 공헌하는가? 성전 주제는 구속사의 진행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는가? 물론 답변하려면 문학 장르, 해석학, 주제의 종합을 붙들고 씨름해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성경신학은 시간적 순서 때문에 조직신학에는 없는 제약이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이다. 문제를 약간 다르게 제시하면, 조직신학 분야는 초시간적 신학 형태에 제약받는 경향이 있으나 성경신학 분야는 역사의 시간적 요구에 제약받는 경향이 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조직신학자 가운데 성경신학자와 관계를 맺는 자는 거의 없고, 성경신학자도 조직신학자와 관계를 맺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이 두 분야는 각각 상대 진영을 상호 보완적으로 보지 않고, 해석학적으로 해롭다고 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도움은 되지 않는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이 두 분야는 구약 신학과 신약 신학이 처음 등장한 1800년경에 (우리가 전체 성경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과 반대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이로 말미암아 종종 예를 들어 오경 신학이나 바울 신학이나 요한 신학과 같이 세부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이런 전개는 어느 정도 중대한 이득이 있었다. 학자들은 특정 성경책이나 성경 묶음이 실제로 말하는 세부적 의미에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나 손실도 상당히 컸고, 결국은 너무 단조롭게 되었다. 곧 많은 이가 성경신학의 부분들을 통합하거나 “하나님의 전체 경륜”의 온전함에 대해 반성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수고가 많이 있었다. 예를 들어 바울 신학, 공관복음 신학 등을 다루는 장을 따로 둔 신약 신학 관련 책들이 많이 등장했다. 상대적으로 이 장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거나 지면을 할애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이 장들의 순서는 성경전서의 기록 순서에 대한 학자의 인식에 따라 결정되었다. 따라서 바울이 마태보다 먼저 오고 요한은 마지막에 온다.
이런 전개가 차단된 것은 게할더스 보스의 공헌이었다. 1948년에 출판된 보스의 『성경신학』은 ‘성경신학은 시간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그가 깨달은 것뿐 아니라, 시간 순서는 인식된 책의 기록 연대가 아니라 구속사의 계시 사건들의 진행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고 그가 주장하는 것에 맞추어 저술되었다. 여기서 작은 유비를 들어 보자. 윌리엄 시러는 2차 세계대전 역사를 저술할 때 자신의 방대한 자료 곧 전쟁 직후에 수년 동안 신중하게 추린 자료에 주의를 기울인 훌륭한 역사가임을 보여 주었다. 그렇다고 해도 시러는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세계 냉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에 역사를 쓴 이후 역사가들과 조금 다른 소리를 낸다. 이후의 많은 역사적 판단은 시러의 판단과 달랐다. 그 까닭은 특히 그런 판단들이 시러가 겪지 못한 일을 겪으며 살아온 역사가의 생각에서 나온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시러와 이후 역사가들은 20세기 후반의 역사에 대해서가 아니라 2차 세계대전에 대해 썼다고 아무리 강하게 주장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무도 반세기 전에 일어난 일을 드러낸다고 주장하는 역사적 글에서 그 역사를 재현해 낼 수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마가복음은 요한복음보다 수십 년 전에 기록되었을 것이고, 각 복음서 저자가 살았던 삶의 배경을 어느 정도 조심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들은 그들 자신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에 대해 말하기 위해 글을 썼다. 보스는 성경신학 자체는 구속사의 역사적 전개 속에, 아니 더 엄밀히 말해 계시 과정의 역사적 진행에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고 통찰력 있게 지적했다.
많은 이가 보스의 이 강조점을 간과했다. 그렇게 된 한 가지 이유는 보스가 신약 성경을 이해할 때 이 강조점의 의미를 충분히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팔머 로버트슨이 이 공백을 채우는 임무를 맡았다. 구약 성경의 계시 과정을 추적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로버트슨은 이제 신약 성경에 대해서도 비슷한 작업을 시작했다. 이 책은 삼부작으로 기획된 프로젝트의 첫 번째 작품이다. 나는 이 책이 참으로 좋다. 마침내 조직신학도 함께 사랑하고 보스의 접근법의 지혜와 통찰력을 파악하는 성경신학자가 여기 있다.
- D.A. 카슨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 신약학 명예 교수)
이 책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가 아니다.
첫째, 이 책은 로버트슨 박사의 성경신학에 대한 이해를 담은 책이다. 로버트슨은 오늘날 다양하나 종종 사실상 완전히 다른 견해들 가운데, 게할더스 보스의 구속사적 접근법을 발전시키는 데 전념한다. 로버트슨의 관심사는 성경신학 또는 (보스가 더 적절한 지칭으로 여긴) “특별 계시의 역사” 연구에 대한 보스 자신의 깨달음을 보존할 뿐 아니라, 이 책에서 하는 것처럼 보스의 유산을 확립하고 확대하는 것이다.
성경신학을 행하는 공인된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니지만, 로버트슨이 이어받은 보스의 방법과 같은 구속사적 접근법은 다른 접근법들과 달리 성경적 보증을 명백히 보여 준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이 좋겠다. 이 보증은 히브리서 첫 부분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많은 시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마지막 날에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1-2a, 필자의 번역).
이 소개 진술은, 우산과 같이, 히브리서 나머지 부분에서 말하는 것에 대해 근본적인 종합적 관점을 제시한다. 동시에 이 소개 진술은 (창조 당시의 일반 계시와 타락 이전의 특별 계시와 구별되는) 하나님의 전체 특별 계시 또는 구원에 대한 자기 계시에 제공하는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개요로 명확히 이해된다. 이런 자기 계시와 관련해, 이 소개 진술은 성경 나머지 부분에 비추어 보면 명시적이든 함축적이든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상호 관련된 요소를 제시한다.
첫째, 이 계시는 명확히 역사적 과정으로 여겨진다. 이 구절들은 긴 역사 곧 (지속적 적용과 구분되는) 단번에 성취된 구속 역사를 염두에 두고 있다. 이 역사는 타락과 함께 시작되고, 전개될 때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완수될 때까지 하나님의 옛날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역사와 주로 통합된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문서들(각기 이 역사 과정에서 다른 시기에 나온 문서들)은 이 역사를 충분하면서도 유일하게 오류 없이 기록한다.
둘째, 이 계시 역사는 다양성이 특징이다. 다양성이 이 계시의 전개를 이룬다. 다양성이 “많은 시기에”와 “다양한 방식으로”라는 두 어구로 강조된다. 이 두 어구는 각각 부사인 두 헬라어 단어를 번역한 것이고, 헬라어 본문을 보면 이 진술의 첫 부분에 함께 배치되어 강조된다. 의미가 비슷한 이 두 어구는 차이도 있다. 첫 번째 단어(πολυμερ??, ‘폴뤼메로스’)는 다수의 부분이나 시기를 가리키지만, 두 번째 단어(πολυτρ?πω?, ‘폴뤼트로포스’)는 다른 방식이나 양식을 가리킨다.
셋째, 결정적인 것은 아들에 대한 언급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계시 역사의 끝점 또는 최종 목표로 여겨지고, 관련된 모든 다양성을 통합하는 초점으로 나타난다(예컨대 고후 1:20을 참고하라). 더구나 이 성취는 단순히 상대적이거나 제한된 의미에서가 아니라 절대적인 의미에서 사실이다. 그 까닭은 아들이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말씀하신 것만 말하고, 아들 자신이 하나님의 종말론적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곧 성육신하신 그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시는 행위 계시든 말씀 계시든 다 폐하거나 능가할 수 없는 최종성을 갖고 있다. 그리스도는 계시 역사를 끝내시므로 계시를 완성하시는 분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아들 안에서 마지막 날에 말씀하신 것 곧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큰 구원”은 “들은 자들이” 확증한 계시 증언을 동반한다(히 2:3). 이 증언은 사도들의 귀의 (그리고 눈의) 증언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친히 권한을 준 증언으로(예. 행 1:8. 참고. 2, 21-22절), 교회 출범 시기에 사도들의 말과 사도들과 관련된 다른 이들의 말은 예수 자신의 말씀과 같고(예. 고전 14:36-37; 살전 2:13), 신약 정경의 최종 결과로 주어진다.
넷째,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저자가 강조한 다양성을 구성하는 인간 활동은 대부분 계시 역사에 필수적이다. 히브리서 저자가 이 활동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놓치거나 잘못 해석해서는 안 된다. 히브리서 1장 1-2절의 핵심 단언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라는 것이다. 말씀하심을 의미하는 두 동사(분사[1절]와 주동사[2절])의 유일한 주어는 하나님이다. 다른 모든 말은 구문상으로나 의미상으로 종속 어구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 활동 곧 “선지자들을 통하여”는 도구적 의미 말고 다른 의미가 없다. 이 활동(구술이든 기록이든)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독립적이거나 긴장 관계 속에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은 다양한 인간 도구를 사용해 그들의 말이 자신의 말씀이 되게 하신다. 따라서 그들의 말은 완전히 진실하고 최종적으로 권위가 있는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므로 종합하면 히브리서 1장 1-2절은 타락 이후로 특별 계시(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과 함께)는 대체로 기본 특성으로 “구속사”(또는 “구원사”)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적절함을 증명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은 다수의 인간 행위자를 포함해 다양한 수단을 통해 형성되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완전하고 통일된 역사적 과정을 기록하고, 모든 면에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단번에 이루신 유일한 사역에서 절정에 달하므로 그 아들의 사역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건전한 성경 해석은 구속사의 전체적 흐름의 맥락 속에서 다양한 성경 문서 각각의 특수한 위치와 내용을 고려함으로써 그 문서들을 다룰 것을 요구한다. 이런 해석은 다수의 인간 저자 각자가 공헌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되, 다양한 측면을 가진 성경이 구현하는 통일성과 전체적 진실함을 손상하거나 흐리지 말아야 한다. 보스는 자기가 살던 시대에 성경 계시의 구속사적 내용에 이처럼 당연히 주의를 기울였고, 그것도 전례 없이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에 헌신한 성경신학의 아버지로 정당하게 인정된다. 보스는 로버트슨이 이 책에서 그러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따라야 할 본보기를 보여 준다.
히브리서 1장 1절에서 다양성을 강조하는 (헬라어) 부사들은 특별히 옛 언약 아래 주어진 특별 계시를 가리킨다(“선지자들을 통하여……우리 조상들에게”). 그러나 다수의 저자와 다양한 문학 장르라는 다양성은, 신약 성경의 구성을 대충 훑어보아도 증명되듯이, 하나님이 아들 안에서 마지막 날에 말씀하신 계시적 증언의 특징이다.
여기서 이 책의 또 하나의 특별한 중요성이 드러난다. 로버트슨은 네 복음서의 성경신학에 대한 포괄적인 구속사 접근법을 제시함으로써 성경신학에 크게 공헌한다(그의 분석적 개관은 하나의 조감도를 보여 준다).
복음서의 신학에 대한 보스 자신의 연구는 자체로 깊이가 있고 통찰력이 있으나 그의 『성경신학』과 다수의 논문에서 비교적 간략한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어 단지 부분적이다. 보스는 하나의 심층적인 종합적 설명을 하지 않았다.
보스의 구속사 접근법을 따르는 이런 광범한 설명은 어떠해야 할까? 이 책에서 로버트슨은 우리에게 높은 수준의 본보기를 보여 준다. 먼저 예수의 사역에 대한 네 복음서의 공통적이고 일치된 증언을 제시하고, 그런 다음 이에 따라 각 복음서 저자의 특징적이고 보완적인 공헌을 설명하는 로버트슨의 종합적 구조는 복음서의 성경신학이 그들의 궁극적인 신적 저자에게 참이 되려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한 본보기다.
독자는 로버트슨이 네 복음서 저자들의 증언의 통일된 다양성 안에서 네 복음서에 제시된 대로,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아들 안에서 말씀하신 구속 계시의 다양한 풍성함을 충분히 보여 주려고 네 복음서를 다룰 때 큰 유익을 얻을 것이다.
- 리처드 개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성경신학 및 조직신학 명예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