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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9권 ]
정석, 엄명섭, 박상절, 정도응, 조수도 저 외 5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지만지한국문학 | 2024년 02월 20일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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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4년 0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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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13 9791128826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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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저자 소개 (10명)

경봉 정석(鏡峰 靖錫, 1892∼1982)은 구한말,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거쳐 1980년대까지 살다 간 통도사의 대표적 선승이자 근대 한국 불교의 산증인으로 법명(法名)은 정석(靖錫), 법호(法號)는 경봉(鏡峰), 시호(詩號)는 원광(圓光)이다. 16세에 통도사로 출가해 통도사 강원에서 공부했다. 젊은 시절 ‘양로 염불 만일회(養老念佛萬日會)’를 결성해 염불의 대중화에 앞장섰고, 경남 일대 포교당의 주지를... 경봉 정석(鏡峰 靖錫, 1892∼1982)은 구한말,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거쳐 1980년대까지 살다 간 통도사의 대표적 선승이자 근대 한국 불교의 산증인으로 법명(法名)은 정석(靖錫), 법호(法號)는 경봉(鏡峰), 시호(詩號)는 원광(圓光)이다. 16세에 통도사로 출가해 통도사 강원에서 공부했다. 젊은 시절 ‘양로 염불 만일회(養老念佛萬日會)’를 결성해 염불의 대중화에 앞장섰고, 경남 일대 포교당의 주지를 맡아 지역 포교에도 열정을 쏟았다. 24세(1915)부터는 본격적으로 구도 행각에 나서서 천성산 내원사 혜월 선사를 시작으로 선지식들을 친견하며 법을 물었고 당대 선식이었던 백용성 선사로부터 게송과 함께 법을 전해 받는다. 36세에 화엄산림 기간 중 오도한 이후 통도사 극락암에 선원을 개설하고 조실로 추대되어 매주 법회를 열어 수행과 경책을 하면서 선승이자 시승으로 수많은 납자들을 제접, 근대 선(禪)과 시(詩)의 중흥을 이끌었다.

1982년(91세) 7월 17일 가벼운 질환을 보이던 중 시자가 “스님 가시면 보고 싶습니다. 어떤 것이 스님의 참모습입니까?” 하고 물으니 웃으시면서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 하고 입적하니 세수 91세요, 법랍 75세였다.
엄명섭(嚴命涉, 1906∼2003)의 본관은 영월(寧越)이고, 자는 성솔(性率)이며, 호는 경와(敬窩)다. 엄주용(嚴鑄容)과 충주 지씨(忠州池氏) 지용재(池龍載)의 딸 사이에서 1906년 3월 10일 전남 곡성군 입면 금산 285번지에서 4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일찍이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에게 수학해 《사서삼경집주언해(四書三經集註諺解)》, 《소학집주언해(小學集註諺解)》, 《독서기의(... 엄명섭(嚴命涉, 1906∼2003)의 본관은 영월(寧越)이고, 자는 성솔(性率)이며, 호는 경와(敬窩)다. 엄주용(嚴鑄容)과 충주 지씨(忠州池氏) 지용재(池龍載)의 딸 사이에서 1906년 3월 10일 전남 곡성군 입면 금산 285번지에서 4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일찍이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에게 수학해 《사서삼경집주언해(四書三經集註諺解)》, 《소학집주언해(小學集註諺解)》, 《독서기의(讀書記疑)》 등의 저서를 남겼다. 훗날 문집으로 간행하기 위해 시와 산문 등 문체별로 손수 적어 정리한 6권의 필사본이 현재의 《경와사고(敬窩私稿)》다.
자고당(紫皐堂) 박상절(朴尙節, 1700∼1774)은 박진영의 아들인 완석당 박형룡(朴亨龍, 1614∼1696)의 여섯 아들 가운데 다섯째인 박창조(朴昌兆, 1666∼1748)의 맏아들이다. 자는 성보(成甫)로,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의 문하에 종유했고, 벼슬은 통덕랑이었다. 학문이 정심(精深)하고 효우가 순지(純至)해 고을 원이 두 번이나 재랑(齋郞)에 천거했고, 이인좌의 난 때는 창의해 격문을 ... 자고당(紫皐堂) 박상절(朴尙節, 1700∼1774)은 박진영의 아들인 완석당 박형룡(朴亨龍, 1614∼1696)의 여섯 아들 가운데 다섯째인 박창조(朴昌兆, 1666∼1748)의 맏아들이다. 자는 성보(成甫)로,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의 문하에 종유했고, 벼슬은 통덕랑이었다. 학문이 정심(精深)하고 효우가 순지(純至)해 고을 원이 두 번이나 재랑(齋郞)에 천거했고, 이인좌의 난 때는 창의해 격문을 돌리기도 했다. 학문에도 뛰어나 《이전작해(理全酌海)》와 문집 15권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정도응(鄭道應, 1618∼1667)은 본관이 진주이며, 자는 봉휘(鳳輝), 호는 무첨재(無?齋)·휴암(休庵)이며, 1618년 12월 6일 부친 정심(鄭?)과 모친 여강 이씨 사이에 태어났다. 7세에 조부 정경세에게 《사략(史?)》을 배웠고 12세 때 노준명의 문하에 나아가면서 학문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여덟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열여섯 살에는 할아버지를, 스물한 살에는 할머니를 여의었고 그 이후로는 홀어머... 정도응(鄭道應, 1618∼1667)은 본관이 진주이며, 자는 봉휘(鳳輝), 호는 무첨재(無?齋)·휴암(休庵)이며, 1618년 12월 6일 부친 정심(鄭?)과 모친 여강 이씨 사이에 태어났다. 7세에 조부 정경세에게 《사략(史?)》을 배웠고 12세 때 노준명의 문하에 나아가면서 학문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여덟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열여섯 살에는 할아버지를, 스물한 살에는 할머니를 여의었고 그 이후로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생전에 조부인 정경세에게 부탁받은 고모부 송준길의 세심한 가르침을 받았다.

스물한 살에 유성룡의 아들인 유진의 딸과 결혼해 29세에 아들 석교(錫僑)를 얻었다. 31세였던 1648년(인조 26), 12월,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내시부교관(內侍府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다음 해 1월 도성에 들어가 사은(謝恩)하고 2월에 천연두를 앓는다고 아뢰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2월에 부사용(副司勇)이 되고 4월에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제수되었으며 6월에 세자시강원자의(世子侍講院諮議)에 발탁되어 7월에 도성에 들어가 사은(謝恩)하고 소를 올려 사양했으나 윤허받지 못했다. 10월에 친병(親病)을 아뢰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57년(효종 8), 40세에 세자익위사부솔(世子翊衛司副率)에 제수되고 다시 시강원자의에 제수되어 몇 차례 체직을 요청했으나 윤허받지 못했다. 1658년에야 비로소 윤허받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몇 차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대부분 사양했다. 1667년(현종 8), 4월 22일 율리의 바깥사랑채에서 50세의 나이로 졸해 현의 북쪽인 가도(佳道)의 동향에 장사 지냈다.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경직(景直), 호는 신당(新堂)으로 초명(初名)은 일도(一道)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조지(趙址, 1541∼1599), 할아버지는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조정언(趙庭彦), 증조할아버지는 의금부경력(義禁府經歷)을 지낸 조연[趙淵, 1489∼1564. 호는 내헌(耐軒)]이다. 어머니는 습독(習讀)을 지낸 권회(權恢)의 딸 증(贈) 정부인(貞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경직(景直), 호는 신당(新堂)으로 초명(初名)은 일도(一道)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조지(趙址, 1541∼1599), 할아버지는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조정언(趙庭彦), 증조할아버지는 의금부경력(義禁府經歷)을 지낸 조연[趙淵, 1489∼1564. 호는 내헌(耐軒)]이다. 어머니는 습독(習讀)을 지낸 권회(權恢)의 딸 증(贈) 정부인(貞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다. 그는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출생지는 경북 청송군 안덕이다. 퇴계 이황의 문인인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에게 사사했다. 어릴 때부터 지혜와 재능이 출중했으며, 자라면서 문장이 아름답고 풍부해 문단에 이름이 있었으나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고도 입격하지 못했다. 충효와 우애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 유가 지식인으로서 꿈을 실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안타깝게도 1593년 2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신필영은 1810년(순조 10) 음력 11월 초5일 경기도 지평현 옥현리의 종애(鍾崖)에서 낭암(朗巖) 신효선(申孝善, 1783∼1821)과 함종 어씨(咸從魚氏, 1779∼1853)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치량(穉良)이고 호는 옥파(玉坡)·옥파거사(玉坡居士)·자이고객(自怡藁客)·이당옹(怡堂翁)·비원거사(賁園居士)·민재(敏齋) 등이다. 신필영은 황해북도 평산군(平山郡)을 본관으로 하고, 고려의 개국 ... 신필영은 1810년(순조 10) 음력 11월 초5일 경기도 지평현 옥현리의 종애(鍾崖)에서 낭암(朗巖) 신효선(申孝善, 1783∼1821)과 함종 어씨(咸從魚氏, 1779∼1853)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치량(穉良)이고 호는 옥파(玉坡)·옥파거사(玉坡居士)·자이고객(自怡藁客)·이당옹(怡堂翁)·비원거사(賁園居士)·민재(敏齋) 등이다.

신필영은 황해북도 평산군(平山郡)을 본관으로 하고, 고려의 개국 공신의 일원인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을 시조로 하는 평산 신씨(平山申氏) 가문에서 태어났다. 부친 신효선을 일찍 여의고 외가인 함종 어씨 집안에서 수학했으며, 20세 무렵부터 홍길주(洪吉周, 1786∼1841)의 자제인 홍우건(洪祐健, 1811∼1866)과 교분을 맺고 홍석주(洪奭周, 1774∼1842)의 문하에 출입하며 풍산 홍씨(豊山洪氏) 집안의 자제들과 교유했다. 신필영은 당대 명문에 속하는 함종 어씨 집안과의 척분 및 풍산 홍씨 집안과의 각별한 교분을 통해 19세기의 유명 문인 학자들과 폭넓게 교유하면서 활발한 문학 활용을 벌였다.

신필영은 만년에 참봉에 제수되기 이전까지 포의(布衣)로 살며 주로 문학 활동에 치중해 방대한 양의 시 작품을 남겼다. 문(文)을 창작하는 것에는 별 뜻이 없었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그는 평생 시 창작에 몰두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필영은 50세이던 1859년(철종 10)에 증광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54세 때인 1863년(철종 14) 7월에야 비로소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이후에 대과(大科)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참봉에 제수된 지 만 2년 만인 1865년(고종 2) 10월 12일에 유행성 감기로 인해 경기도 지평현 옥현리 주애(注崖)의 정침(正寢)에서 향년 56세로 타계했다.
예암(豫菴) 하우현(河友賢, 1768∼1799)은 진주 사곡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양(晉陽), 자는 강중(康仲), 호는 예암(豫菴)이다. 수곡면 사곡 마을에 진양 하씨 터전을 처음 잡았던 석계(石溪) 하세희(河世熙)의 현손이다. 하우현의 학통은 남명학을 계승하며 가학으로 이어진다. 그 계보를 간략히 정리하면, 하항(河沆, 1538∼1590), 하수일(河受一, 1553∼1612), 하세희(河世熙, 1647∼... 예암(豫菴) 하우현(河友賢, 1768∼1799)은 진주 사곡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양(晉陽), 자는 강중(康仲), 호는 예암(豫菴)이다. 수곡면 사곡 마을에 진양 하씨 터전을 처음 잡았던 석계(石溪) 하세희(河世熙)의 현손이다. 하우현의 학통은 남명학을 계승하며 가학으로 이어진다. 그 계보를 간략히 정리하면, 하항(河沆, 1538∼1590), 하수일(河受一, 1553∼1612), 하세희(河世熙, 1647∼1686), 하세응(河世應, 1671∼1727), 하필청(河必淸, 1701∼1758) 등을 거쳐 하우현에 이르고, 이후 하봉운(河鳳運, 1790∼1843) 하협운(河夾運, 1829∼1906) 하재문(河載文, 1830∼1894) 하겸진(河謙鎭, 1870∼1946)까지 이른다. 평생 벼슬하지 않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몰두하다 만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진우재(眞愚齋) 양황(梁榥, 1575∼1597)은 함양 출신으로, 자는 학기(學器)다. 그는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기록은 그다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여러 곳에 산재한 그의 행적을 찾아 유추해 보면 그는 상당한 문재(文才)를 지닌 비범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스승이었던 우계(牛溪) 성혼(成渾)은 양황에 대해 “양 모(梁某)의 재기는 평범하지 않으며, 학문과 문장으로 힘써서 그... 진우재(眞愚齋) 양황(梁榥, 1575∼1597)은 함양 출신으로, 자는 학기(學器)다. 그는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기록은 그다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여러 곳에 산재한 그의 행적을 찾아 유추해 보면 그는 상당한 문재(文才)를 지닌 비범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스승이었던 우계(牛溪) 성혼(成渾)은 양황에 대해 “양 모(梁某)의 재기는 평범하지 않으며, 학문과 문장으로 힘써서 그의 문장은 참으로 대문장가의 솜씨다”라고 극찬했고,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는 “크고 넓구나. 만약 성취한다면 세상에서 드문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며 그의 장래를 크게 기대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양황이 전장에서 지은 시가 발군이라 “일시의 뛰어난 선비들이 문채로 복종하며 비록 이름이 알려진 자라 할지라도 사귀기를 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평했다. 양황의 벗인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는 양황의 감식안(鑑識眼)은 ‘하늘이 감춘 것도 간파할 만큼 뛰어나다(破天藏)’고 시에서 말했다. 그러나 양황은 안타깝게도 그 재능을 다 꽃피우기도 전에, 1593년 2월에 있었던 제4차 평양성 전투에 참여해 입은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2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1729년(영조 5) 4월 28일 전라도 흥덕현 구수동(현 고창군 성내면 조동)에서 황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5∼6세의 나이 때부터 할머니 김씨 부인에게서 글자를 익히기 시작했고, 7세에 《소학》을 배우면서 《사기》와 사서오경을 두루 읽게 되고 제자백가까지 열람했다. 6세에 쉬운 글자를 맞추어 시를 짓는 법을 할머니로부터 배웠고, 9세 때에는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그의 뛰어난 재주가 알려졌다. 황윤석의... 1729년(영조 5) 4월 28일 전라도 흥덕현 구수동(현 고창군 성내면 조동)에서 황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5∼6세의 나이 때부터 할머니 김씨 부인에게서 글자를 익히기 시작했고, 7세에 《소학》을 배우면서 《사기》와 사서오경을 두루 읽게 되고 제자백가까지 열람했다. 6세에 쉬운 글자를 맞추어 시를 짓는 법을 할머니로부터 배웠고, 9세 때에는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그의 뛰어난 재주가 알려졌다.

황윤석의 자(字)는 영수(永?)이며, 호(號)는 이재(?齋)·이재려인·실재·서명산인·운포주인·산뢰·산뢰노인·산뢰려인·산뢰산인·산뢰수·순양자·월송외사 등이 있다. 그런데 아버지가 《주역》의 산뢰이괘(山雷?卦)를 인용해 서실에 이(?) 자를 크게 써 붙여 놓고 ‘말을 조심하고, 음식을 절제한다’는 뜻을 명심하게 해 주로 ‘이재[?齋, 《주역》 이괘(?卦)의 내용을 실천하겠다는 뜻]’를 사용했다.

14세에 임영(林泳, 1649∼1696)의 《창계집(滄溪集)》을 읽고 세상의 시작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6세에 그의 책 중 하나인 《이수신편(理藪新編)》을 쓰기 시작했다.

황윤석은 24세 무렵을 시작으로 평생 동안 26차례에 걸쳐서 한양의 과거에 응시했고 이를 위해 22차례나 서행(西行, 한양행)을 했다.

어려서는 집에서 수업을 받았고 성장해서는 양응수와 김원행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뛰어난 학문적 역량에도 불구하고 31세에 비로소 진사시에 합격했고, 여러 번 대과(大科)에 응시했지만 운이 없었던 탓인지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던 중 학문이 호남 인물 중 최고라고 알려져 1766년(영조 42) 그의 나이 38세에 장릉참봉의 벼슬을 받았다.

3년간 장릉참봉을 지내고, 40세에는 의영고 봉사, 41세에는 사포서와 종부사 직장, 43세에는 6품직으로 올라 사포서 별제가 되었다. 48세 되던 1776년(영조 52)에는 익위사 익찬, 50세에 사복시 주부, 그해 12월에 장릉령이 되었고, 51세가 되었을 때 드디어 평소의 꿈이었던 현감이 되었다. 목천현감의 직함을 얻게 된 것이다. 하지만 늘 꿈꾸었던 현감의 직위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재와 함께 일하던 아전들이 창고의 곡식을 도적질해 유용한 것을 차마 법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독촉해서 반납시키려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세금을 함부로 처리했다는 죄로 인사고과 성적이 하(下)가 되었고, 결국 파직되고 말았다.

56세에는 장악원 주부와 창릉령의 벼슬을 받았으나 어머니의 장례 기간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부임하지 않았다. 58세에는 전생서 주부에 이어 전의현감의 벼슬을 받았다. 그러나 이듬해에 암행어사가 전의에 출두해 황윤석이 전년도에 처리했던 일을 사적인 감정에 따라 처리한 것으로 여기고 이재를 파직시켰다. 파직된 뒤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집안의 일들을 정리하며 한양의 정치에도 늘 귀를 기울였다. 그 후 63세에 자신의 집 만은재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방선(柳方善, 1388∼1443)의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자계(子繼), 호는 태재(泰齋)다. 일찍부터 문명이 났으며, 10대 때 이색의 문인인 권근과 변계량에게 수학했다. 1405년 18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입격해 성균관에서 유학했으나, 1409년 부친 유기가 ‘민무구 형제의 옥사’에 연루되어 그의 가문은 정치적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19년에 이르는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음에도 《주역》의 태괘를... 유방선(柳方善, 1388∼1443)의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자계(子繼), 호는 태재(泰齋)다. 일찍부터 문명이 났으며, 10대 때 이색의 문인인 권근과 변계량에게 수학했다. 1405년 18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입격해 성균관에서 유학했으나, 1409년 부친 유기가 ‘민무구 형제의 옥사’에 연루되어 그의 가문은 정치적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19년에 이르는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음에도 《주역》의 태괘를 자호로 삼아 희망을 놓지 않고, 시를 통해 삶과 마음을 치유하고자 했다. 사면된 뒤 조정에서 주부(主簿)로 삼으려 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원주의 법천에 머무르며 시문을 강학했다. 1443년 56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감했다. 비록 가문의 정치적 시련으로 인해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그는 고려 말 시학의 전통을 이어받아 조선 초 시단을 진작하고 한시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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