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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선나무에서 아카시아까지 시가 된 꽃과 나무

김승희, 퍼시 비시 셸리, E. E. 커밍스, 페르난두 페소아,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저 외 33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아티초크(Artichoke Publishing House) | 2024년 01월 29일 리뷰 총점9.9 정보 더 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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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4년 01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144쪽 | 196g | 128*210*12mm
ISBN13 9791186643167
ISBN10 1186643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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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저자 소개 (38명)

1952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 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됐다. 미국 아이오와 대학교 국제작가프로그램 (IWP), 이탈리아 베네치아 카포스카리 대학교의 체류 작가를 지냈다.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 어바인 캠퍼스 등에서 한국문학을 가르... 1952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 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됐다. 미국 아이오와 대학교 국제작가프로그램 (IWP), 이탈리아 베네치아 카포스카리 대학교의 체류 작가를 지냈다.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 어바인 캠퍼스 등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쳤고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시집 『태양 미사』, 『왼손을 위한 협주곡』, 『미완성을 위한 연가』, 『달걀 속의 생』,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냄비는 둥둥』, 『희망이 외롭다』, 『도미는 도마 위에서』 등이 있고, 소설집 『산타페로 가는 사람』과, 산문집 『33세의 팡세』, 『어쩌면 찬란한 우울의 팡세』 등을 썼다. 연구서로 『이상 시 연구』, 『현대시 텍스트 읽기』, 『코라 기호학과 한국시』, 『애도와 우울(증)의 현대시』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올해의 예술상, 한국서정시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명예교수이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잉글랜드 서식스 주 필드플레이스에서 태어났다. 명문 이튼을 거쳐 1810년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 이듬해 「무신론의 필연성」을 써서 출판한 일로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 무렵 16세 소녀 해리엇 웨스트브룩과 사랑의 도피 끝에 결혼한다. 1812년 1월, 첫 편지를 시작으로 정치사상가 윌리엄 고드윈과 만나며 그의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는다. 당대의 문인들과 사귀며 지적으로 성장하고, 급진적 ...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잉글랜드 서식스 주 필드플레이스에서 태어났다. 명문 이튼을 거쳐 1810년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 이듬해 「무신론의 필연성」을 써서 출판한 일로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 무렵 16세 소녀 해리엇 웨스트브룩과 사랑의 도피 끝에 결혼한다. 1812년 1월, 첫 편지를 시작으로 정치사상가 윌리엄 고드윈과 만나며 그의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는다. 당대의 문인들과 사귀며 지적으로 성장하고, 급진적 정치운동에 투신한다. 첫 장편 철학시 「매브 여왕」을 비롯해 사회 개혁적인 산문들을 발표한다. 1814년 여름 해리엇과 헤어지고 고드윈의 총명한 딸 메리와 사랑에 빠진다. 함께 유럽을 여행하고, 1816년 5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바이런과 만나 우정을 쌓는다. 그해 11월, 해리엇이 자살하고 난 뒤에 메리와 재혼한다. 1818년 3월, 고국을 영원히 떠나 이탈리아를 방랑하며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써낸다. 장편 시극 「사슬에서 풀려난 프로메테우스」 「첸치 일가」, 단편시 「종달새에게」 「서풍의 노래」, 빼어난 산문 「시의 옹호」 등이다. 1822년 7월, 폭풍우에 배가 전복되는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라틴어 묘비명 ‘Cor Cordium’(마음들 중의 마음)이 말해주듯이, 그는 생명과 사랑의 시인이었으며 열정적인 사회개혁가였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다. 하버드대학교 정치학 교수였던 아버지는 기독교에서 파생된 유니테리언 교단의 목사가 되기도 했으며, 아버지의 신앙은 커밍스의 작품에서 초월적인 부분에 영향을 주었다. 커밍스는 1916년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자원입대하여 일차세계대전에 참전, 프랑스 수용소에 갇혔던 경험을 토대로 소설 『거대한 방The Enormous Room』을 집필한다. 참전하면서 접했던 유럽 아방가르드...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다. 하버드대학교 정치학 교수였던 아버지는 기독교에서 파생된 유니테리언 교단의 목사가 되기도 했으며, 아버지의 신앙은 커밍스의 작품에서 초월적인 부분에 영향을 주었다. 커밍스는 1916년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자원입대하여 일차세계대전에 참전, 프랑스 수용소에 갇혔던 경험을 토대로 소설 『거대한 방The Enormous Room』을 집필한다. 참전하면서 접했던 유럽 아방가르드에 큰 영향을 받았고 말년에는 자주 파리에 머물곤 했다. 전쟁 이후 그는 미국의 패션잡지 『베니티 페어Vanity Fair』의 프리랜서 작가로 일하며 뉴욕과 코네티컷주에 있는 농장을 오가며 생활했고, 오후에는 그림을 그리고 밤에는 글을 쓰는 일관적인 작업방식을 이어갔다. 1962년 사망했을 때, 커밍스는 로버트 프로스트에 이어 미국에서 두 번째로 많이 읽힌 시인이었다.
1888년 리스본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 때 가족 모두가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으로 이주했다. 1905년에 홀로 고향으로 돌아와 리스본 대학 문학부에 입학했으나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학업을 중단하고는 영어 무역 서신을 번역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1912년 『아기아』에 포르투갈 시문학에 대한 글을 발표하면서 작가 활동을 시작했고, 1915년 포르투갈 모더니즘 문학의 시초라 평가받는 잡지 『오르페우』를 창간했다... 1888년 리스본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 때 가족 모두가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으로 이주했다. 1905년에 홀로 고향으로 돌아와 리스본 대학 문학부에 입학했으나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학업을 중단하고는 영어 무역 서신을 번역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1912년 『아기아』에 포르투갈 시문학에 대한 글을 발표하면서 작가 활동을 시작했고, 1915년 포르투갈 모더니즘 문학의 시초라 평가받는 잡지 『오르페우』를 창간했다. 일생 동안 여러 잡지와 신문을 통해 130여 편의 산문과 300여 편의 시를 발표했고,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몇 권의 영어 시집을 펴냈다. 1934년 생전에 출간된 저서 중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로 쓴 시집 『메시지』를 출간했다. 틈틈이 기록해놓은 단상들을 모아 『불안의 책』을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간질환이 악화되어 1935년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엄청난 양의 글이 담긴 트렁크가 발견되었고, 아직도 분류와 출판이 진행되고 있다.
저 :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Gabriela Mistral, Lucila de Maria del Perpetuo Socorro Godoy Alcayaga,루실라 고도이 데 알카야가 (Lucila de Maria del Perpetuo Socorro Godoy Alcayaga))
스페인, 바스크, 인디언의 혈통을 이어받은 그녀는 칠레 북부의 한 마을에서 자랐으며 15세에 교사가 되었고 나중에는 교수가 되었다. 일생동안 교육자 문화부장관 외교관을 거치면서 창작활동을 하였다. 그녀는 1914년 3편으로 구성된 『죽음의 소네트』를 발표하여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굳혔으며, 이 작품은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두 시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와 프레데리크 미스트랄에서 따온 필명으로 발표되었다. 초기 ... 스페인, 바스크, 인디언의 혈통을 이어받은 그녀는 칠레 북부의 한 마을에서 자랐으며 15세에 교사가 되었고 나중에는 교수가 되었다. 일생동안 교육자 문화부장관 외교관을 거치면서 창작활동을 하였다. 그녀는 1914년 3편으로 구성된 『죽음의 소네트』를 발표하여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굳혔으며, 이 작품은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두 시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와 프레데리크 미스트랄에서 따온 필명으로 발표되었다.

초기 작품들을 수록한 「황량함 Desolacion」(1922)에는 연인의 자살로 막을 내린 연애의 후유증을 자세히 그린 시 「슬픔 Dolor」이 실려 있다. 이같은 슬픔 탓으로 그녀는 끝내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좌절된 모성애에의 강한 충동이 작품 속에 자주 나타난다. 「부드러움 Ternura」(1924, 증보판 1945)과 「파괴 Tala」(1938)에서는 인류에 대한 더욱 폭넓은 관심을 보여주었으나, 대표적 주제는 여전히 어린이들과 억눌린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이 시기에는 정신적 고뇌가 종교(가톨릭)를 통한 영혼의 구원으로 승화되고 있으며, 마지막 시집인 「포도 압착기 Lagar」(1954)에서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을 노래하여 성숙한 여류시인으로서의 부드러운 심정을 토로하였다.

그녀는 문화사절로서 가능한 한 많은 지역을 여행했으며, 국제연맹 및 국제연합의 사회·문화 위원회에서도 일했다. 풍부한 감성과 자신만의 독특한 비유와 언어로 채색된 그녀의 시는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인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1957년 랭스턴 휴스가 영어로 시선집을 번역하여 출판했고, 1971년 도리스 데이너가 또다른 시선집을 펴냈다. 또한 1996년 발행된 칠레의 5000폐소 지혜의 앞면에는 그녀의 초상이 담겨 있다.
저 : 알프레드 테니슨 (Alfred Tennyson)
제1대 테니슨 남작 앨프리드 테니슨은 영국의 시인으로, 빅토리아 시대의 계관시인이다. 아름다운 조사와 운율을 담은 작품들로 세계적으로 사랑받았다. 1809년 영국 랭커셔의 서머스비에서 태어났다. 테니슨 경(Lord Tennyson)으로 더 잘 알려진 그는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기도 하다. 문학적으로 조숙해서 다섯 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10대가 되기 전에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 제1대 테니슨 남작 앨프리드 테니슨은 영국의 시인으로, 빅토리아 시대의 계관시인이다. 아름다운 조사와 운율을 담은 작품들로 세계적으로 사랑받았다. 1809년 영국 랭커셔의 서머스비에서 태어났다. 테니슨 경(Lord Tennyson)으로 더 잘 알려진 그는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기도 하다. 문학적으로 조숙해서 다섯 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10대가 되기 전에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 월터 스콧(Walter Scott), 존 밀턴(John Milton)의 문체를 흉내 내어 글을 쓸 수 있었다.

1828년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칼리지에 입학하여, 1829년 ‘팀북투’로 총장상 메달을 받았다. 1827년에 이미 형 찰스와 『두 형제 시집』을 익명으로 내놓았다. 이어서 『서정시집』을 발표했고, 아버지가 죽자 대학 공부를 그만두었다. 테니슨이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만난 친구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친구로 역사가 헨리 핼럼(Henry Hallam)의 아들이며 후에 테니슨의 여동생과 약혼을 한 아서 헨리 핼럼(Arthur Henry Hallam)을 들 수 있다.

그와의 교제는 테니슨의 생애에서 가장 깊이 있었으며, 두 사람은 열렬한 지적 흥미를 가진 학부생 클럽인 ‘케임브리지 사도들(Cambridge Apostles)’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핼럼이 1833년 9월, 22세의 나이로 오스트리아의 빈을 여행하다가 갑자기 죽자 테니슨은 큰 충격을 받아 한동안 절망에 빠졌고 후에는 그를 위해 많은 헌시를 썼다.

1850년에 걸작 『인 메모리엄』이 출간되었으며, W. 워즈워스의 후임으로 계관시인이 되었다. 『인 메모리엄』은 그가 17년간 생각하고 그리워하던, 죽은 친구 핼럼에게 바치는 애가로, 어두운 슬픔에서 신에 의한 환희의 빛에 이르는 과정을 담았다.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 시이기도 하다. 테니슨의 명성은 생전의 바이런 못지않게 대단한 것이었으며 수입도 넉넉한 가운데 시골집에서 한적한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또한 1844년에는 그의 시를 좋아하고 그를 열렬히 찬미하는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으로부터 남작의 작위까지 받아 테니슨 경이 되는 영예까지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경제적인 성공과 인기는 그를 매너리즘에 빠지게 하거나 대중의 기호에 지나치게 영합하도록 함으로써 그의 창작력을 감소시켜 말년에는 중요한 몇 편의 작품을 빼고는 그다지 뛰어난 작품이 없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는 영국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83세의 나이로 1892년 10월 6일 세상을 떠났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미국의 국민시인으로 불리우는 월트 휘트먼은 스스로를 ‘미국인, 한 야성적 사나이, 하나의 우주’라고 정의하였다. 미국의 정신을 잘 대변해 주는,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인정받는다. 1819년 5월 31일 미국 롱아일랜드의 헌팅턴타운 근교의 웨스트힐스에서 농부이자 목수였던 아버지와 퀘이커 교도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아홉 명의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민중의 대변인으로, 형식을 깬 자유시를 통해 미국... 미국의 국민시인으로 불리우는 월트 휘트먼은 스스로를 ‘미국인, 한 야성적 사나이, 하나의 우주’라고 정의하였다. 미국의 정신을 잘 대변해 주는,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인정받는다. 1819년 5월 31일 미국 롱아일랜드의 헌팅턴타운 근교의 웨스트힐스에서 농부이자 목수였던 아버지와 퀘이커 교도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아홉 명의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민중의 대변인으로, 형식을 깬 자유시를 통해 미국의 민주주의 정신을 표현한 시인이다.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에 5∼6년 정도의 교육밖에 받지 못하고, 11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심부름꾼, 인쇄소 식자공으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지식을 깨우쳤는데, 그 덕분에 미국 작가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경심이나 영국 작가들에 대한 모방을 가르치는 전통적인 교육의 영향에서 벗어나 민중시인, 자유시인, 혁명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을 세울 수 있었다. 열일곱 살이 되던 해에 교사가 되었으며, 5년간 학교에서 일한 뒤 언론사에서 활동하며 시와 소설을 썼다.

저널리즘에 몸을 담아 뉴욕에서 활약했는데, 1838년에는 주간지 [롱아일랜더]를 창간했다. 1841년 『프랭클린 에반스』, 1842년 『한 아이의 챔피언』 등 소설을 발표하며 [뉴욕 오로라]의 편집자로 일하던 시기에 랠프 월도 에머슨의 ‘자연과 시인의 능력’이라는 강연에 감명받아 자유시 형식의 시 쓰기에 전념한다. 그리고 1842년 봄에 갑자기 편집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뉴욕 오로라]를 그만둔 후, [이브닝 태틀러], [롱아일랜드 스타], [브루클린 데일리 이글]과 같은 여러 신문사에서 기자, 자유 기고가, 편집인 등으로 10여 년간 활동하다가, 마침내 시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뉴욕으로 돌아온 후 신문사 [브루클린 프리맨]의 편집 일을 맡았다.

1848년에 휘트먼은 뉴올리언스에서 발행되는 [뉴올리언스 크레센트]의 편집을 맡아 달라는 제의를 받고 뉴올리언스로 떠난다. 이때 그는 여행을 통해 그는 미국의 광대함과 다양함에 대해 인지하게 되었으며, 이때 경험한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폭 넓은 비전은 그의 시에 스며들어 그를 미국의 위대한 시인으로 발돋움하도록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855년 7월, 제목 없는 열두 편의 시를 실은 『풀잎』 초판을 자비로 출판했는데, 에머슨이 이 시집을 극찬하여 시인으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풀잎』의 혁신적인 자유시 형식, 성에 대한 묘사, 민주주의적 감수성에 대한 찬미, 그리고 시인의 자아는 시, 우주, 독자와 하나라는 낭만주의적인 주장은 미국 시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휘트먼은 『풀잎』에 생명력과 민주주의에 대한 찬양을 담은 「아담의 아이들」, 「창포」, 남북 전쟁의 경험을 담은 「드럼-탭스」, 에이브러험 링컨에게 헌정한 「오, 캡틴! 마이 캡틴!」, 「나 자신의 노래」 등을 추가하며 ‘임종판Deadbed edition’이라 불리는 1891~1892년 판본에 이르기까지 평생에 걸쳐 수정과 증보를 거듭했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ia Lorca)는 1898년 그라나다 지방 푸엔테 바케로스에서 대지주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이 되던 1918년 로르카는 그라나다를 떠나 마드리드로 간다. 그는 그 후 10년 동안 마드리드 국립대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된다. 같은 해에 첫 작품이자 시적 산문집인 『풍경과 인상들(Paisajes y Impresiones)』을 출간한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ia Lorca)는 1898년 그라나다 지방 푸엔테 바케로스에서 대지주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이 되던 1918년 로르카는 그라나다를 떠나 마드리드로 간다. 그는 그 후 10년 동안 마드리드 국립대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된다. 같은 해에 첫 작품이자 시적 산문집인 『풍경과 인상들(Paisajes y Impresiones)』을 출간한다.

1920년에 희곡 [나비의 저주]를 무대에 올렸으나 청중의 반응은 냉담했다. 1921년에는 『시집(Libro de poemas)』을 출간함으로써 공식적인 시인이 되었다. 1927년에는 역사극 [마리아나 피네다(Mariana Pineda)]를 무대에 올려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로르카를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로르카로 인식시킨 작품은 시집 『집시 로만세(Romancero Gitano)』(1928)였다. 1929∼1931년 시기에 그는 뉴욕에서 몇 달을 보내며 현대 도시의 날카로움을 경험했다. 유럽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신세계의 도시 분위기는 로르카의 내면에 초현실주의에 대한 강한 욕구를 불어넣었다. 시집 『뉴욕의 시인(Poeta en Nueva York)』과 [관객]은 거의 같은 시기에 뉴욕과 쿠바에서 초현실주의라는 악령에 사로잡혀 써내려 간 것이다.

1931년부터 스페인 공화 정부 교육부의 지원으로 로르카는 「바라카」라는 극단을 창설하고 쉽게 연극을 볼 수 없는 민중을 위해 순회공연을 다니게 된다. 안달루시아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3대 전원 비극으로 알려진 [피의 결혼(Bodas de sangre)], [예르마(Yerma)],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La casa de Bernarda Alba)]은 이때부터 1936년에 처형되기 전까지 집필된 것이다. 1936년으로 들어오면서 스페인에는 파시즘의 유령이 떠돌기 시작했다. 마드리드에도 파시스트들이 활동하기 시작했고, 로르카는 동성애자, 집시 옹호자로써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

1936년 7월 17일 스페인은 시민전쟁에 돌입했다. 로르카는 시인이자 고향 친구인 루이스 로살레스의 집에 피신했다가 그라나다 국민전선 사령관에게 체포되었다. 1936년 8월 20일 새벽, 청색 하늘 아래 로르카는 임시감옥에서 끌려 나와 비스나르와 알파카르 사이에 있는 벼랑에서 재판도 없이 처형당했다.
19세기와 20세기의 문학적 감수성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 소설가.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작은 칼뱅주의 마을 애머스트에서 태어나 평생을 보냈으며, 평생 결혼하지 않다. 평생 살며 1800편의 시를 남겼다. 자신의 시를 직접 출판하거나 세상에 거의 공개하지 않았지만 소수의 친구와 가족, 지인들에게 보여주기를 좋아했다. 자연을 사랑했으며 동물, 식물, 계절의 변화에서 깊은 영감을 얻었다. 말년에는 은둔생활을 했으며 시... 19세기와 20세기의 문학적 감수성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 소설가.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작은 칼뱅주의 마을 애머스트에서 태어나 평생을 보냈으며, 평생 결혼하지 않다. 평생 살며 1800편의 시를 남겼다. 자신의 시를 직접 출판하거나 세상에 거의 공개하지 않았지만 소수의 친구와 가족, 지인들에게 보여주기를 좋아했다. 자연을 사랑했으며 동물, 식물, 계절의 변화에서 깊은 영감을 얻었다. 말년에는 은둔생활을 했으며 시작 활동을 했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매우 높은 지성을 표현하고 있으며 또한 뛰어난 유머 감각도 보여준다. 운율이나 문법에서 파격성이 있어서 19세기에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20세기에는 형이상학적인 시가 유행하면서 더불어 높은 평가를 받았다.

40여 편씩 시를 직접 필사하고 편집한 손제본 형태의 파시클fascicle 40권에 보관했고 더러는 편지봉투를 뜯어 그 안에 적어두기도 했다. 주변의 일상과 자연을 시에 담아 사랑, 죽음, 상실, 영원함, 아름다움, 글쓰기와 읽기의 즐거움을 노래한 시인은 당시 청교도의 엄숙함이나 가부장적 질서, 물질주의 생활양식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리듬과 형식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사유했다. 현재 독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미국 시인 가운데 한 명이며, 많은 후배 시인들과 비평가는 물론 음악가와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는 페미니스트 뮤즈이기도 하다.
영국 최고의 시인이자 극작가이다. 1564년 4월 23일 존(John) 셰익스피어와 메리 아든(Mary Arden) 사이에서 태어났다. 셰익스피어는 아름다운 숲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인구 2,000명 정도의 작은 마을 영국 잉글랜드 워릭셔주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서 존 부부의 첫아들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고,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셰익스피어는 주로 성경과 고전을 통해 읽기와 쓰기를 배웠고, 라틴어 격언도 암... 영국 최고의 시인이자 극작가이다. 1564년 4월 23일 존(John) 셰익스피어와 메리 아든(Mary Arden) 사이에서 태어났다. 셰익스피어는 아름다운 숲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인구 2,000명 정도의 작은 마을 영국 잉글랜드 워릭셔주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서 존 부부의 첫아들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고,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셰익스피어는 주로 성경과 고전을 통해 읽기와 쓰기를 배웠고, 라틴어 격언도 암송하곤 했다.

셰익스피어는 11살에 입학한 문법학교에서 문법, 논리학, 수사학, 문학 등을 배웠는데, 특히 성경과 더불어 오비디우스의 『변신』은 셰익스피어에게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셰익스피어는 그리스어도 배웠지만 그리 신통하지는 않았다. 이 당시에 대학에서 교육받은 학식 있는 작가들을 ‘대학재사’라고 불렀는데, 셰익스피어는 이들과는 달리 대학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타고난 언어 구사 능력과 무대예술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 다양한 경험, 인간에 대한 심오한 이해력은 그를 위대한 작가로 만드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제대로 교육받지는 못했지만, 자연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운 자연의 아들이자 천재였다.

1582년 앤 해서웨이와 결혼하여 딸과 쌍둥이 남매를 낳았다. 이후 런던으로 거주지를 옮겨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극작가로 성공했으며 희극 배우로도 활동했다. 후원자 사우샘프턴 백작의 도움으로 궁정에도 출입하며 엘리자베스 여왕과 제임스 1세에게 후대를 받아 1594년에는 궁내부장관 극단의 전속 극작가로 임명되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사업적 기질을 물려받았는지 재산 관리에도 능숙해 상당한 부동산을 구입하여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웠다.

수많은 희곡 중 셰익스피어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셰익스피어 4대 비극”. 무어인 장군 오셀로가 이아고의 간계에 빠져 사랑하는 아내를 질투하고 살해하는 비극을 다룬 『오셀로』, 자신에 대한 딸들의 충성을 시험하다 비극을 맞는 『리어왕』, 권력을 향한 욕망으로 비극을 초래하는 『맥베스』, 그리고 마지막이 이 4대 비극 중 가장 앞서 쓰였다는 『햄릿』이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클로디어스에게 복수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그렸다. 인간을 들여다보는 깊이 있는 시선은 셰익스피어가 쓴 작품들에 길고긴 생명을 부여한다. 끊임없는 재해석이 그 방증이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셰익스피어가 그려낸 인물들을 파고들고 해석하는데, 문학에서 찾아낼 수 있는 모든 가치를 그의 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

1590년 대 초반에 셰익스피어가 집필한 『타이터스 안드로니커스』, 『헨리 6세』, 『리처드 3세』 등이 런던의 무대에서 상연되었다. 특히 『헨리 6세』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그에 대한 악의에 찬 비난도 없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학 교육도 받지 못한 작가 셰익스피어 작품의 인기는 더해갔다. 1623년 벤 존슨은 그리스와 로마의 극작가와 견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셰익스피어뿐이라고 호평하며, 그는 “어느 한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1668년 존 드라이든(John Dryden)은 셰익스피어를 “가장 크고 포괄적인 영혼”이라고 극찬했다. 1610년경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셰익스피어는 대저택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내다, 1616년 4월 23일 52세의 나이로 서거하여 성트리니티 교회에 안장되었다.

셰익스피어는 1590년에서 1613년에 이르기까지 세계 최고의 극작가로서, 대표 작품으로는 『공연한 소동』, 『12야(夜)』, 『자(尺)에는 자로』, 등의 희극과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 『맥베스』, 『오셀로』, 『리어 왕』, 『줄리어스 시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등의 비극을 비롯해 『베니스의 상인』, 『한여름 밤의 꿈』, 『헨리 4세』, 등 10편의 비극(로마극 포함), 17편의 희극, 10편의 역사극, 『비너스와 아도니스』, 등의 시집 및 『소네트집』도 남겼다. 대부분의 작품이 살아생전 인기를 누렸다.
『수정과 장미: 현대 여류 시인 선집』(1959)을 펴낸 김남조 시인은 백국희의 시풍을 대단히 섬세하고 청초하다고 평했다. 스물다섯 살에 요절한 백국희는 이화여자전문학교 재학 시절 영문학자 변영로의 수업을 들으며 영국 시인 아서 시먼스의 시를 번역하고, 《신가정》을 통해 등단했다. 이화여자보통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불행한 결혼 끝에 병사했다. 『수정과 장미: 현대 여류 시인 선집』(1959)을 펴낸 김남조 시인은 백국희의 시풍을 대단히 섬세하고 청초하다고 평했다. 스물다섯 살에 요절한 백국희는 이화여자전문학교 재학 시절 영문학자 변영로의 수업을 들으며 영국 시인 아서 시먼스의 시를 번역하고, 《신가정》을 통해 등단했다. 이화여자보통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불행한 결혼 끝에 병사했다.
1920년 창간된 《폐허》의 동인으로 활약한 남궁벽은 당시 유행하던 퇴폐성 짙은 감상적인 시 대신에 자연과 생명의 시를 썼다. 글벗인 염상섭은 「풀」에 대해 “휴머니즘과 센티멘털리즘의 경향이 역연(歷然)함을 볼 수 있지만, 이것은 군의 전인격에 허 식과 과장이 없는 것과 같이 가장 순진하고 솔직한 내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평했다.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스물일곱 살에 요절했다. 1920년 창간된 《폐허》의 동인으로 활약한 남궁벽은 당시 유행하던 퇴폐성 짙은 감상적인 시 대신에 자연과 생명의 시를 썼다. 글벗인 염상섭은 「풀」에 대해 “휴머니즘과 센티멘털리즘의 경향이 역연(歷然)함을 볼 수 있지만, 이것은 군의 전인격에 허
식과 과장이 없는 것과 같이 가장 순진하고 솔직한 내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평했다.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스물일곱 살에 요절했다.
저 : 김영랑 (영랑令郞, 윤식)
시인, 본명은 김윤식이며 아호는 영랑(令郞)이다. 1903년 전라남도 강진에서 태어났다.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보통고등학교를 거쳐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 영문학과에서 수학했다. 그 후 1930년 3월 창간한 [시문학]을 중심으로 박용철, 정지용, 정인보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변영로, 김현구, 신석정, 허보 등 여러 시인과 더불어 아호인 영랑(令郞)으로 활동했다. 19... 시인, 본명은 김윤식이며 아호는 영랑(令郞)이다. 1903년 전라남도 강진에서 태어났다.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보통고등학교를 거쳐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 영문학과에서 수학했다. 그 후 1930년 3월 창간한 [시문학]을 중심으로 박용철, 정지용, 정인보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변영로, 김현구, 신석정, 허보 등 여러 시인과 더불어 아호인 영랑(令郞)으로 활동했다.

1935년에 첫 번째 시집인 『영랑시집』을 시문학사에서 간행했다. 『영랑시집』에는 총 53편의 시가 실려 있으며, 각각의 시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의 제목을 쓰지 않고 일련번호를 붙여 시집에 실었다. 이후 김영랑은 1949년에 중앙문화사에서 『영랑시집』을 출간했다.

김영랑은 조국 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및 삭발령을 거부했으며, 광복 후 신생 정부에 참여해 당시 중앙행정부인 공보처의 출판국장으로 일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유탄을 맞아 부상을 당해 9월 서울에 위치한 자택에서 4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현재 묘지는 서울 망우리에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사랑은 깊으기 푸른 하늘」 등 한국적 정서가 담긴 서정시를 많이 발표했다. 대표 시집으로 『영랑 시집』, 『영랑 시선』 등이 있다.
저 : 이상 (李箱, 김해경金海卿)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으로, 1910년 8월 20일에 태어났다.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현재 서울대학교) 재학 중 학생 회람지 [난파선]의 편집을 주도하면서 시를 발표했고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1929년 조선총독부의 건축기수가 되어 근무하던 중 12월에 건축학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도안 현상 모집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된다. 1928년 졸업 앨범에서 평생 동안 필명이 되는 이상(李箱)이라는 이름을 처음...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으로, 1910년 8월 20일에 태어났다.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현재 서울대학교) 재학 중 학생 회람지 [난파선]의 편집을 주도하면서 시를 발표했고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1929년 조선총독부의 건축기수가 되어 근무하던 중 12월에 건축학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도안 현상 모집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된다. 1928년 졸업 앨범에서 평생 동안 필명이 되는 이상(李箱)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는 1930년 [조선]에 첫 소설 『12월 12일』 연재를 시작하며 등단했다. 이후 『이상한 가역반응』 『파편의 경치』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내며 활발한 문학 활동을 펼친다.

1934년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를 연재했는데, 난해하고 파괴적인 형식에 독자들의 항의를 받고 연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오감도 작가의 말」은 연재 중단 후 쓰여 해당 잡지에는 발표되지 않았다. 1936년「날개」를 발표하여 큰 화제를 일으켰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날개」는 이상의 대표 소설이다. 이듬해는 1937년 2월 사상불온 혐의로 일본 경찰에 유치되었고, 같은 해 4월 17일 도쿄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사망하였다.

현대시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시인이며, 1930년대에 있었던 20년대의 사실주의, 자연주의에 반발한 모더니즘 운동의 기수였다. 그는 건축가로 일하다가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전위적이고 해체적인 글쓰기로 한국의 모더니즘 문학사를 개척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겉으로는 서울 중인 계층 출신으로 총독부 기사였던 평범한 사람이지만, 20세부터 죽을 때까지 폐병으로 인한 각혈과 지속적인 자살충동 등 평생을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던 기이한 작가였다. 한국 역사상 가장 독창적인 시와 소설을 창작한 바탕에는 이런 공포가 늘 그의 삶에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910년에 태어나 1912년 아들이 없던 백부 김연필(金演弼)의 집에 장손으로 입양되었고, 백부의 교육열에 힘입어 신명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마쳤다. 손가락이 잘리고 빈궁하게 살았던 친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와 자신을 입양한 백부에 대한 증오심으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영민하여 학업 성적은 우수하였고,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질이 있어 학창시절, 직장시절 내내 그림에 꿈을 품고 열중하였다. 또한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의 유창한 일본어 실력이 있었고, 예술적 이상향으로 동경(도쿄)을 꼽았다고 한다. 스스로를 선각자이며, 천재, 모더니즘의 기수이자 전위예술의 선구자라고 자처했는데, 식민지 시대임에도 민족적인 자각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범세계적이고 현대적인 문명에 심취하였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는 한국 고유의 색채를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유럽이나 일본 문학계에 유행하던 모더니즘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실제 생활은 나태하고 난잡, 무기력했다고 전해지며,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잡지 [조선(朝鮮)]의 1930년 2월호부터 12월호까지 9회에 걸쳐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이기도 한 『12월12일(十二月十二日)』을 」이상」이라는 필명으로 연재하였고, 1931년 『이상한 가역반응』을 발표하며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BOITEUX·BOITEUSE』 『오감도』 등을 [조선과 건축]에 발표했고, 1932년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을 [조선]에 발표하면서 비구(比久)라는 익명을 사용했으며,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발표하였다. 이후 [구인회]에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고, 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다. 미친수작, 정신병자의 잡문이라는 혹평을 받아 결국 30회로 예정되어 있었던 분량을 15회로 수정하여 연재가 중단되었지만 열화와 같은 찬반양론을 일으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소설 『지팡이 역사』 수필 『혈서삼태』와 『산책의 가을』 등을 발표하였고, 1935년에는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연재되는 동안 삽화를 맡아 그리기도 하는 등 창작 활동은 계속하였다. 친구인 구본웅(具本雄)과는 신명(新明)학교 동기동창일때부터 각별히 친했으며, 대학입학시 그가 선물한 스케치박스(사구상)에서 필명인 이상이 나왔다는 설이 전해진다. 화가 구본웅이 인쇄소 창문사에 이상의 일자리를 주선하여 근무하면서 1936년, 구인회의 동인지인 [시와 소설]을 창간하고 편집해 발간하지만 1집만을 발간하고 그만둔다. 이후 [중앙]에 『지주회시』 [조광]에 『날개』 『동해』를 발표하였다.

백부에게서 유산을 물려받고 가족들과 함께 살았으나, 가족들의 무지와 가난에 곧 질려서 보름만에 나와버렸다. 1933년, 무질서한 생활로 폐병이 심해져 각혈까지 한 그는 총독부 기사직을 그만두고 구본웅과 함께 황해도 백천에서 요양 생활을 시작했다. 그 곳에서 그의 연인인 금홍을 만났다. 서울에 올라와서도 금홍을 못잊고 방황 하다가 제비 다방을 마련해 그녀를 마담자리에 앉혔다. 그는 금홍과의 만남 이후에도 여러 여급들과 사랑을 나누었는데, 이들을 무척 사랑하긴 했지만 그 행복이 오래간 적은 없었다. 다만 이들과의 관계에서 문학적 영감을 얻어 작품들을 집필하였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그는 금홍과 권순희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가면 『봉별기』, 『날개』, 『지주회시』 그리고 『종생기』등과 전문시 음화시, 문명 비평류의 수필 등을 산더미처럼 쏟아내었다. 이 수많은 작품들이 술에 절어있던 한밤 중에 쓰여졌다는 사실은 ‘천재 이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그러던 그는 이화여전 출신인 여류문인이자 친구 구본웅의 이복동생인 변동림(이상이 죽은 뒤 순화 김환기의 부인이 된 김향안 씨)과 결혼을 하였다. 그녀는 금홍과 달리 빈민굴에서 고생하는 그의 가족과 깊은 친분을 맺었다. 하지만 그녀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그녀는 카페의 여급으로 일하며 입에 풀칠을 하게 되었다. 건강악화와 어려운 경제적 여건 등, 국내에서의 비참한 현실과 마주친 이상은 도피하기 좋아하는 그의 성격탓인지, 가족과 아내를 남겨둔 채 1936년에 동경행을 선택했다. 동경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가난을 절절히 겪던 그는 『종생기』, 『환상기』, 『실락원』, 『실화』, 『동경』 등의 수많은 작품을 엮어냈고, 『봉별기』를 [여성]에 발표하였다.

그의 마지막 여자인 변동림은 『동해』 『단발』 구필 『행복』 『종생기』의 『선』 『실화』의 『연』 등에서 지금까지 살아 숨쉬고 있다.이듬해 2월, 극도로 악화된 건강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이상은 1937년 불량선인(사상불온) 혐의로 운 나쁘게도 일본 경찰에게 검거되어 옥살이를 치렀다. 건강이 악화되어 거의 시체나 다름없게 된 그는 보석을 허가받아 평소 동경제대의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항상 여자와 문학에 빠져 살던 이상은 결국 날지 못한 채 변동림이 구해온 레몬의 향기를 맡으며 짧은 생을 마감했다. 유해는 화장하여, 경성으로 돌아왔으며, 같은 해에 숨진 김유정과 합동영결식을 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었으나, 후에 유실되었다. 20세기 한국문학사에 내장된 최고의 형이상학적 스캔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집이 출간되기도 하였다.
저 : 김소월 (金素月, 김정식)
1902년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에 있는 외가에서 부친 김성도와 모친 장경숙의 장자로 출생한다. 본명은 김정식이다. 태어난 지 백일 후부터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의 본가에서 자란다. 1904년 부친 김성도가 당시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를 하던 일본 목도꾼에게 폭행을 당한 이후 정신 이상 증세에 시달린다.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할아버지의 손에서 컸는데, 이 무렵 시인의 길로 가도록 영향을 준 숙모 계희영을 ... 1902년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에 있는 외가에서 부친 김성도와 모친 장경숙의 장자로 출생한다. 본명은 김정식이다. 태어난 지 백일 후부터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의 본가에서 자란다. 1904년 부친 김성도가 당시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를 하던 일본 목도꾼에게 폭행을 당한 이후 정신 이상 증세에 시달린다.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할아버지의 손에서 컸는데, 이 무렵 시인의 길로 가도록 영향을 준 숙모 계희영을 만났다. 1915년 평안북도 곽산의 4년제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김억과 사제관계를 맺게 되고 한시, 민요시, 서구시 등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다. 후에 경성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1923년 졸업했다. 이후 일본 도쿄 상과대학교에 입학 후 귀국했을 시점에 시인 나도향과 만나 친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별과 그리움을 주제로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을 노래하는 시를 썼다. 김소월은 자신의 문학적 스승인 김억의 격려를 받아 그의 지도 아래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920년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등 5편을 소월(素月)이라는 필명으로 동인지 『창조』 5호에 처음으로 시 「그리워」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오산학교를 다니는 동안 김소월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21년 [동아일보]에 「봄밤」, 「풀 따기」 등을 발표했다. 1922년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를 개벽지에 발표하였으며, 1925년에 시론 「시혼(詩魂)」을 발표하고, 같은 해 7월호에 떠나는 님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을 발표하여 크게 각광받았다. 이는 시인이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으로 기록된다. 그 밖에 1923년 『깊고 깊은 언약』 『접동새』 1924년 『밭고랑 위에서』 『생과 사』 1926년 『봄』 『저녁』 『첫눈』 1934년 『제이, 엠, 에스』 『고향』 등을 발표했다.

1923년 도쿄상업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9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중퇴하고 귀국했다. 김소월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돕다가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어 1926년평안북도 구성군 남시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개설하고서 이도 실패하자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기도 했다. 예민한 성격이었던 김소월은 이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류머티즘을 앓으며 친척들에게도 대접을 받지 못하는 등 고생하다가 1934년 12월 24일 만 32세의 나이로 평안북도 곽산에서 아편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39년 스승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素月詩抄)』가 발간된다. 1977년 [문학사상] 11월호에 미발표 소월 자필 유고시 40여 편이 발굴, 게재된다.
저 : 이육사 (李陸史, 이원록, 이활)
본명은 ‘원록’으로 1904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하여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한 뒤 1926년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27년 귀국했으나 독립운동으로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 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1930년에 첫 시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며 시단에 데뷔하였으며, 1937년 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 본명은 ‘원록’으로 1904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하여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한 뒤 1926년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27년 귀국했으나 독립운동으로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 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1930년에 첫 시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며 시단에 데뷔하였으며, 1937년 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 「교목」, 「절정」, 「광야」 등을 발표했다. 1943년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저 : 노자영 (盧子泳, 춘성春城)
시인 · 수필가. 호는 춘성(春城). 1898년 평남(황해도 송화군 상리면 양지리)에서 출생하였으며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한성도서주식회사(漢城圖書株式會社)에 입사했으며, 1925년경 일본으로 넘어가서 니혼대학[日本大學]에서 수학하였으나 폐 질환으로 학업을 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해 병상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서울]·[학생]지의 기자로 있으면서 감상문 등을 발표했으며, 19... 시인 · 수필가. 호는 춘성(春城). 1898년 평남(황해도 송화군 상리면 양지리)에서 출생하였으며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한성도서주식회사(漢城圖書株式會社)에 입사했으며, 1925년경 일본으로 넘어가서 니혼대학[日本大學]에서 수학하였으나 폐 질환으로 학업을 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해 병상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서울]·[학생]지의 기자로 있으면서 감상문 등을 발표했으며, 1934년 문예지 [신인문학(新人文學)]을 발간하였으나 자본 부족으로 중단, 1935년 조선일보사 출판부에 입사하여 [조광(朝光)]지의 편집을 맡았고, 1938년 기자 생활 청산 후 '청조사(靑鳥社)'를 직접 경영하기 시작했다.

1919년 8월 [매일신보]에 「월하(月下)의 몽(夢)」이, 그 해 11월에 「파몽(破夢)」·「낙목(落木)」 등이 시부분에서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장미촌], 1922년 [백조] 창간 동인으로 가담하여 [백조] 창간호에 시 「객(客)」·「하늘의 향연(饗宴)」·「이별한 후에」를 발표했고, [백조] 2호에 「우연애형(牛涎愛兄)에게」라는 수필을, 1923년 소설 「반항(反抗)」을 발표했다. 1924년 첫 시집 『처녀(處女)의 화환(花環)』, 1928년 제2시집 『내 혼(魂)이 불탈 때』, 1938년 제3시집 『백공작(白孔雀)』 등을 간행하였다. 1940년 10월 6일 41세 나이에 갑작스런 발병으로 사망했다.
소설가, 시인, 언론인, 영화배우, 연극배우. 1896년 평안남도 평양군 융덕면에서 태어났다. 1913년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시부야 국정여학교에 편입하였으나 중퇴했다. 1917년 잡지 [청춘]의 현상소설 모집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1919년에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으며 도쿄에 체류 중인 소설가 전영택의 소개로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인 문학가들이 창간한 종합문예 동인지 [창조]... 소설가, 시인, 언론인, 영화배우, 연극배우. 1896년 평안남도 평양군 융덕면에서 태어났다. 1913년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시부야 국정여학교에 편입하였으나 중퇴했다. 1917년 잡지 [청춘]의 현상소설 모집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1919년에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으며 도쿄에 체류 중인 소설가 전영택의 소개로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인 문학가들이 창간한 종합문예 동인지 [창조]의 동인으로도 참여했다. 1925년에는 한국 여성 시인 최초로 시집 『생명의 과실果實』을 간행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평론가, 극작가, 기자, 배우로 활동을 하며 5개 국어를 능통한 번역가였다. 영국 작가 애드거 앨런 포의 『상봉』,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과 게르하르트 하웁트만의 『외로운 사람들』을 최초로 번역했다.

그 외에도 단편소설 「처녀의 가는 길」(1920), 「칠면조七面鳥」(1921), 「외로운 사람들」(1924), 「탄실이와 주영이」(1924), 「돌아다볼 때」(1924), 「꿈 묻는 날 밤」(1925), 「손님」(1926), 「나는 사랑한다」(1926), 「모르는 사람같이」(1929) 등과 시 「동경」(1922), 「옛날의 노래여」(1922), 「거룩한 노래」 「시로 쓴 반생기」(1938), 시집 『애인의 선물』(1928) 등의 작품을 남겼다. 2000년까지 밝혀진 김명순의 작품은 시 86편(번역시 포함), 소설 22편(번역소설 포함), 수필·평론 20편, 희곡 3편 등이다.

그의 소설 작품은 인물에 대한 지적인 분석과 심리 묘사에 치중하고 있으며, 시 작품은 연정戀情, 자연의 아름다움, 추억 등을 노래한 것이 주류를 이룬다.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한 탄실은 그의 필명이자 아명이기도 하다. 일본 유학 중 당한 성폭력 사건 이후 각종 스캔들에 휘말리다 끝내 가난과 정신병을 이기지 못한 채 1951~1953년 무렵 일본 도쿄 아오야마 뇌병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암울했던 식민시기와 더불어 기생의 딸이라는 낙인, 성폭력, 문단의 공격 등 여성에 대한 억압이라는 이중고를 겪으며 활동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소설가로서 5개 국어를 구사하며 서양 문학을 조국에 선보인 번역가이기도 하다. '자유연애'를 역설하며 여성해방을 꿈꾼 신여성이자 선각자이다.
저 : 오일도 (낙안, 오희병, 일도)
예술지상주의의 꽃을 피게 한 순수시 전문잡지 [시원]을 창간하여 한국현대시의 발전에 커다란 이정표를 남긴 시인. 경상북도 영양 출생, 본관은 낙안(樂安), 본명은 오희병(吳熙秉), 아호는 일도이다. 아버지는 오익휴(吳益休), 어머니는 의흥 박씨(義興朴氏)이다. 예술지상주의의 꽃을 피게 한 순수시 전문잡지 [시원]을 창간하여 한국현대시의 발전에 커다란 이정표를 남긴 시인. 경상북도 영양 출생, 본관은 낙안(樂安), 본명은 오희병(吳熙秉), 아호는 일도이다. 아버지는 오익휴(吳益休), 어머니는 의흥 박씨(義興朴氏)이다.
저 : 한용운 (韓龍雲, 만해, 한유천)
승려·시인·독립운동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에서 몰락한 양반 출신의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이며, 용운은 법명, 호적상이름이자 본명은 한정옥이다. 6세 향리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9세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 『통감』『서경』 등을 통달하여 총명한 어린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풍습이 그러함에 따라 14세 향리에서 천안 전씨全氏 전정숙과 일찍 혼인하였으... 승려·시인·독립운동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에서 몰락한 양반 출신의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이며, 용운은 법명, 호적상이름이자 본명은 한정옥이다. 6세 향리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9세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 『통감』『서경』 등을 통달하여 총명한 어린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풍습이 그러함에 따라 14세 향리에서 천안 전씨全氏 전정숙과 일찍 혼인하였으나, 집을 나가 떠돌고 출가하기를 반복했다. 가출하여서는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고, 고향 홍성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불교서적을 탐독했다. 21세에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였고, 이때를 전후해서 세계여행을 계획하였다.

1894년 동학군에 가담하여 투쟁하다 실패했다.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은거, 수년 간 불경을 공부하는 한편 근대적 교양서적을 읽어 서양의 근대사상을 접했다. 1904년(26세) 설악산 백담사에 들어가 불목하니 노릇을 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27세 백담사에서 김연곡사金蓮谷師에게서 득도. 백담사에서 전영제사全泳濟師에 의하여 수계受戒. 백담사에서 이학암사李鶴庵師에게 『기신론』, 『능엄경』, 『원각경』 등을 수료. 29세 강원도 건봉사에서 수선안거(최초의 禪수업)를 성취하였다.

30세 강원도 유점사에서 서월화사徐月華師에게 『화엄경』을 수학하였고 4월, 일본의 시모노세키, 교토, 도쿄, 닛고 등지를 주유하며 신문물을 시찰하였다. 도쿄 조동종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 철학을 청강하였으며, 10월, 건봉사 이학암사에서 『반야경』과 『화엄경』을 수료하였다. 31세에 강원도 표훈사 불교 강사에 취임하였고 1910년(32세)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 1911년(33세) 박한·진진웅·김종래·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한일불교동맹 조약 체결을 분쇄하였다. 1913년(35세) 불교강연회 총재에 취임하였고 『조선불교유신론』을 불교서관에서 발행하였다.

1914년(36세) 『불교대전』을 범어사에서 발행하고 1917년(39세) 『정선강의 채근담』을 신문관에서 발행하였고 항일 투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12월 3일 밤 10시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의정돈석擬情頓釋이 되어 진리를 깨치고, 오도송을 남겼다. 1918년 청년계몽운동지 [유심]지를 창간했다. 1919년(41세) 3.1운동을 주도,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하고 공약삼장을 첨가하였다. 1923(45세)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지원하였고,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지원하는 강연을 하였다.1924년 불교청년회 회장, 총재를 역임하였다.

1925년(47세) 오세암에서 『님의 침묵』을 탈고하엿다. 1927년(49세) 1월 신간회를 발기하였으며, 5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에 뽑혔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민중대회를 개최하였다. 1931년(53세) 월간 [불교]지를 인수하였고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었으며, 1932년(53세) 조선불교 대표인물 투표에서 최고득점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한용운 422표, 방한암 18표, 박한영 13표, 김태흡 8표, 이혼성 6표, 백용성 4표, 송종헌 3표, 백성욱 3표, 3표 이하는 생략. 불교지 93호에 발표됨). 1933(54세) 유숙원씨와 재혼하였고, 이때를 전후하여 『유마힐소설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벽산 스님이 집터를 기증하고, 몇 분의 성금으로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지었으며, 이때 총독부 돌집을 마주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짓도록 하였다.

1940년(62세) 『불교』지 2월호에 『유마힐소설경』 연재를 시작하였고, 1943년(65세) 조선인 학병의 출정을 반대하였다. 1944년(66세) 6.29 심우장에서 영양실조로 입적하였으며 유해는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한용운은 불자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민중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등 사회 참여가 활발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3·1운동에 가담하고 독립선언서를 공개하여 낭독하는 등의 활동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는데, 기존의 시조 형식을 깬 산문시 형태를 취했으며, 향토적 정서가 묻어나는 언어와 서민적인 시어 활용으로 민중정신을 반영했다. 독립을 향한 열망, 자연 등을 ‘님’으로 표현했고,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화법으로 검열을 피하기도 했다.
저 : 박인환 (Park In-hwan,朴寅煥,)
1926년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에서 출생했다. 인제공립보통학교 입학, 서울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 경기공립중학교 자퇴하고 한성중학교에 다니다 명신중학교 4학년에 편입, 평양 의학 전문학교를 다니다가 8·15 광복을 맞으면서 학업을 중단, 종로 2가 낙원동 입구에 서점 ‘마리서사(茉莉書舍)’를 개업했다.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시부가 주최한 ‘예술의 밤’에 참여하여 시 「단층」(... 1926년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에서 출생했다. 인제공립보통학교 입학, 서울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 경기공립중학교 자퇴하고 한성중학교에 다니다 명신중학교 4학년에 편입, 평양 의학 전문학교를 다니다가 8·15 광복을 맞으면서 학업을 중단, 종로 2가 낙원동 입구에 서점 ‘마리서사(茉莉書舍)’를 개업했다.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시부가 주최한 ‘예술의 밤’에 참여하여 시 「단층」(斷層)을 낭독하고, 이를 예술의 밤 낭독시집인 『순수시선』(1946)에 발표함으로써 등단했다. 1948년 김경린, 김경희, 김병욱, 임호권과 『신시론』 발간했다. 1949년 김경린, 김수영, 임호권, 양병식과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발간했으며, 동인그룹 김경린, 김규동, 김차영, 이봉래, 조향 등과 ‘후반기’를 발족하여 활동하였다. 「거리」「남품」「지하실」 등을 발표하는 한편 「아메리카 영화시론」을 비롯한 많은 영화평을 썼고, 1949년엔 김경린, 김수영 등과 함께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여 본격적인 모더니즘의 기수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50년 [경향신문] 입사 후 6·25 동란이 일어나자, 9·28 수복 때까지 지하생활을 하다가 가족과 함께 대구로 피난, 부산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했다. 1952년 존 스타인벡의 기행문 『소련의 내막』 번역해서 간행하였으며, 6월 16일「주간국제」의 ‘후반기 동인 문예’ 특집에 평론 발표했다. 1954년 유두연, 이봉래, 허백년, 김규동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 발족하였다. 1955년 시작품 『목마와 숙녀』(시작), 『박인환 시선집』, 『선시집』을 간행하였고 그 다음 해인 1956년에 시작품 「세월이 가면」 이진섭 작곡으로 널리 불리다 3월 20일 오후 9시 심장마비로 31세 젊은 나이에 자택에서 타계해 3월 22일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59년 3주기를 맞아 윌러 캐더의 장편소설 『이별』 번역해서 간행되었으며, 그가 사망한지 20년 후인 1976년에 시집 『목마와 숙녀』가 간행되었다.
혼란한 정국과 전쟁 등의 당대 상황에서 적지 않은 총 173편의 작품을 남기고 타계한 박인환 시인은, 암울한 시대의 절망과 실존적 허무를 피에로의 몸짓으로 대변한 당대의 정신적 제왕이자 모더니즘, 리얼리즘, 실존주의의 시세계를 구축하며 전후 문단의 지평을 넓힌 기린아였다. 전쟁의 충격에 함몰되지 않고 시인다운 세계 인식을 가지려 노력하며 자신이 살아가는 황폐한 시대를 새로운 시 형식으로 반영한 그의 작품들은 우리에게 미학과 역사성이 결합하는 접점을 확인시켜 준다.
1875년 세비야에서 태어났다. 1883년 온 가족이 마드리드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이 학교에서 민속학을 강의하기 시작했고, 안토니오 마차도와 한 살 위의 마누엘 마차도는 마드리드에 창설된 “자유 교육 학교”에서 새로운 교육을 받게 된다. 나중에 안토니오 마차도가 98세대의 일원이 되고, 평생을 사회주의자로 살게 된 것은 이때의 교육 때문이다. 20대 초부터 안토니오는 문학잡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나중... 1875년 세비야에서 태어났다. 1883년 온 가족이 마드리드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이 학교에서 민속학을 강의하기 시작했고, 안토니오 마차도와 한 살 위의 마누엘 마차도는 마드리드에 창설된 “자유 교육 학교”에서 새로운 교육을 받게 된다. 나중에 안토니오 마차도가 98세대의 일원이 되고, 평생을 사회주의자로 살게 된 것은 이때의 교육 때문이다.
20대 초부터 안토니오는 문학잡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나중에 98세대로 불리게 되는 작가들, 미겔 데 우나무노, 바예 인클란 등과 친분을 가지게 되었고, 특히 후안 라몬 히메네스?98세대에 속한 시인은 아니었다?와 각별한 문학적 우정을 나누게 된다.
1899년과 1902년 안토니오는 파리를 방문한다. 특히 1902년의 파리에서는 니카라과 출신의 시인 루벤 다리오를 만나게 된다. 루벤 다리오는 이미 두 번에 걸친 마드리드 방문을 통해 젊은 시인들에게 자신의 ‘모데르니스모(Modernismo)’ 시학을 전염시킨 적이 있었다. 안토니오 마차도, 마누엘 마차도, 후안 라몬 히메네스 등 젊은 시인들의 첫 작품들은 루벤 다리오의 거대한 영향에서 시작했다. 그 후 안토니오와 후안 라몬은 전혀 다른 시적 미학으로 방향을 바꿨고, 마누엘 마차도는 감각적인 모데르니스타로 끝까지 남았다.
1903년에 안토니오 마차도는 첫 시집 『고독』을 출간한다. 안토니오는 이미 쓴 시를 고치거나, 출간한 시집을 확장했다. 1907년 안토니오는 『고독』을 확대한 『고독, 회랑들, 다른 시들』을 발표한다. 『고독』이 루벤 다리오의 그늘이라면, 『고독, 회랑들, 다른 시들』은 모데르니스모의 형식성과 감상적인 시와 그것에 저항하는 시들이 섞여 있고, 『카스티야 들녘』을 예상하게 하는 객관적이고 건조한 언어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1908년 여름 고등학교 교사 임용 시험에 응시했고 1907년 4월에 교사 자격을 얻어 얼마 후 소리아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한다. 거기서 열아홉 살 연하의 레오노르 이스키에르도와 사랑에 빠져 1909년 7월 결혼하지만 레오노르는 곧 결핵으로 쓰러진다. 1912년 6월 『카스티야 들녘』이 출판되었고, 그는 “나의 레오노르, 안토니오”라고 쓴 『카스티야 들녘』 초판을 아내에게 바친다. 그녀는 7월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 후, 안토니오는 소리아를 떠나 바에사로 간다. 바에사에서는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면서 많은 작품을, 시뿐만 아니라 산문을 썼다.
1919년 세고비아로의 교사 발령은 새로운 인생을 의미했다. 그는 세고비아에서 한 시간 거리인 마드리드를 주말마다 드나들며, 카페에서 잡담을 하고 떠들썩하게 시 낭송 모임을 갖는다. 1924년 세 번째 시집 『새로운 노래들』을 출간한다. 바에사와 세고비아에서 쓴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스페인 시민전쟁이 국민 전선으로 거의 기울어 가던 1939년 1월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망명을 시도한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콜리우르라는 지중해 어촌 마을에 도착한다. 1939년 2월 22일 안토니오 마차도는 숨을 거두고, 사흘 후 어머니 도냐 안나 루이스도 아들의 길을 따라갔다.
1770년 4월 7일 영국의 코커머스에서 아버지 존 워즈워스와 어머니 앤 쿡선 워즈워스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친척들과 이웃의 보살핌 속에 유년 시절을 보냈다. 1787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했으나, 학문에는 뜻이 없었다. 잠시 프랑스혁명을 지지하기도 했으나, 일련의 불행한 사건들을 겪은 후 자신의 시적 재능과 소명을 확신하게 되었다. 여동생 도러시 그리고 벗 콜리지와의 문학적 교류로 유명하... 1770년 4월 7일 영국의 코커머스에서 아버지 존 워즈워스와 어머니 앤 쿡선 워즈워스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친척들과 이웃의 보살핌 속에 유년 시절을 보냈다. 1787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했으나, 학문에는 뜻이 없었다. 잠시 프랑스혁명을 지지하기도 했으나, 일련의 불행한 사건들을 겪은 후 자신의 시적 재능과 소명을 확신하게 되었다. 여동생 도러시 그리고 벗 콜리지와의 문학적 교류로 유명하며, 그 결실이 바로 낭만주의 영시의 기폭제가 된 『서정담시집』이다. 1843년 계관시인이 되었고, 1850년 4월 23일에 사망할 때까지 수많은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대표작으로 「저녁 산책」, 『서술적 소묘들』, 『변방 사람들』, 『폐허가 된 오두막』, 「틴턴 사원」, 『루시 시편들』, 「솔즈베리 평원 기행」, 『그래스미어 고향집』, 『서곡』, 「마이클」, 「결심과 독립」, 「의무에 부치는 송가」, 『영혼불멸의 송가』, 『소요』, 『라일스톤의 하얀 암사슴』, 『마부』, 『피터 벨』 등이 있다.
저 : 요제프 어틸러 (Jozsef Attila,아틸라 요제프)
1905년 4월 11일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1937년 12월 3일 발라톤사르소 기찻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다섯 살 경부터 남의 집에 위탁되어 돼지치기로 일했고, 극심한 노동으로 아홉 살에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열일곱 살 때 첫 시집 『아름다움의 구걸인』을 낸 요제프는 행상, 청소부, 과외 교사, 선박 급사, 건설 인부, 배달원, 외판사원, 경비원, 속기사 등으로 생계와 학업을... 1905년 4월 11일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1937년 12월 3일 발라톤사르소 기찻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다섯 살 경부터 남의 집에 위탁되어 돼지치기로 일했고, 극심한 노동으로 아홉 살에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열일곱 살 때 첫 시집 『아름다움의 구걸인』을 낸 요제프는 행상, 청소부, 과외 교사, 선박 급사, 건설 인부, 배달원, 외판사원, 경비원, 속기사 등으로 생계와 학업을 유지하며 『외치는 것은 내가 아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다』 『비탄하지 말고 자본을 쳐라』 『슬럼가의 밤』을 출간했다. 1930년 당시 헝가리에서는 불법이었던 공산당에 입당했고, 1936년에는 문예지 《셉소》의 공동 창립자가 되었다. 시인으로서 국제적인 명성은 사후에야 찾아와 헝가리를 대표하는 국민 시인으로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 요제프의 시는 앨런 긴즈버그와 존 버거를 매료시켰고, 유네스코는 2005년을 ‘아틸라 요제프의 해’로 정해 그의 인생과 작품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부다페스트 국회의사당 근처 다뉴브 강가에는 아틸라 요제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서른두 살에 비운의 삶을 마감한 헝가리 현대문학 최고의 시인이다. 1926년 헝가리 최고 문예지였던 [뉴거트]에 시 「진심으로」가 실려 주목받기 시작했다. 생전 모두 7권의 시집을 출판했고, 초기 시집은 아직 모방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작품들이 실려 있지만, 파리에서 유학하며 활동하던 1927년부터 공산주의, 아방가르드, 실존주의, 아나키즘 등 다양한 세계문학의 이념과 철학을 섭렵하면서 자신만의 견고한 작품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세 번째 시집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다』(1929)부터 마지막 시집인 『너무 아프다』(1936)에 이르기까지 자유진보주의, 공산주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같은 가장 현대적인 사상과 이념 들을 바탕으로 세련되고 정제된 글쓰기를 추구하면서도 한결같이 가난하고 소외된 도시 노동자와 시골 농민의 대변인이 되기를 자처했다. 그의 작품은 현대사회와 인간의 문제점들을 직관적이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20세기 초, 세계대전 사이에 활동한 요제프 어틸러는 1989년 이전까지 헝가리 공산주의 체제에서 ‘프롤레타리아 대표 시인’으로 불렸으나, 체제 전환 이후 오히려 그의 깊고 다양한 시 세계가 드러나며 21세기를 이끄는 현대문학의 고전으로서 현재까지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
1757년 11월 28일 런던의 브로드가(Broad Street) 28번지에서 아버지 제임스 블레이크(James Blake)와 어머니 캐서린 블레이크(Catherine Blake)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2세가 되는 1769년부터 짧은 시들을 습작했고, 이때의 작품들은 『시적 소묘(Poetical Sketches)』(1783)에 실려 있다. 15세 때부터 7년 동안 당시 꽤 알려져 있던 판화가 제임스 ... 1757년 11월 28일 런던의 브로드가(Broad Street) 28번지에서 아버지 제임스 블레이크(James Blake)와 어머니 캐서린 블레이크(Catherine Blake)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2세가 되는 1769년부터 짧은 시들을 습작했고, 이때의 작품들은 『시적 소묘(Poetical Sketches)』(1783)에 실려 있다. 15세 때부터 7년 동안 당시 꽤 알려져 있던 판화가 제임스 버자이어(James Basire) 밑에서 도제 생활을 했다. 그의 이른바 완성작이라고 불리는 동판화 시화집 제작에 필요한 밑그림, 수채화, 유화 등의 기술들은 이때 연마한 것이다.

청년 블레이크는 남의 책에 삽화를 그려 넣거나, 판화를 제작해 돈을 벌었고, 간간이 시를 쓰기도 했다. 그는 25세가 되던 1782년에 채소 농장을 경영하던 윌리엄 바우처(William Boucher)의 딸 캐서린 소피아 바우처(Catherine Sophia Boucher)와 결혼한다. 결혼한 이듬해에 인쇄된 『시적 소묘』 이후 블레이크는 더 많은 자신의 글과 그림을 동판화로 제작하는데, ‘채색 인쇄법(illuminated printing)’이라는 자기 고유의 동판화 제작법을 고안해 내기도 한다. 『순수와 경험의 노래』를 위시한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은 모두 이 방법에 의해 동판화로 제작되었다.

1790년 템스 강의 반대편 지역인 램버스(Lambeth)로 이사하고 이곳에서 ‘램버스 예언시’라고 불리는 일련의 예언시들을 쓴다. 이때의 블레이크는 출판업자 조지프 존슨(Joseph Johnson)의 출판물에 삽화를 그려 넣기도 하며, 그의 집에서 당시의 급진적 개혁주의자들인 조지프 프리슬리(Joseph Priestley),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등과 회동하게 된 것도 이 어름이다.블레이크가는 1800년에 남부 해안의 시골 마을 펠펌(Felpham)의 조그만 오두막으로 이사하게 된다. 이곳에서 그의 장시 3부작을 구상하거나 일부 창작했다.

1803년 8월에 있었던 펠펌에서의 술 취한 국왕 직속 기병대 소속의 사병 ‘스코필드(John Schofield) 사건’은 그의 시세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그는 스코필드와 그 동료를 『예루살렘』에서 악당의 한 무리로 형상화해 심판한다. 나아가 그는 후기의 장시들을 두꺼운 개인적 신화 체계로 둘러싸 시의 상징적이고 암시적인 분위기를 더욱 강화했다.

만년의 블레이크는 시 창작보다는 동판화 작업에 더 경주했다. 이 시기 초서(Geoffrey Chaucer)의 『캔터베리 이야기』, 그리고 [욥기] 및 단테의 작품, 밀턴의 『복낙원』 등의 삽화를 제작했다. 블레이크는 1827년 8월 12일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세기 중엽 스윈번(Algernon Charles Swinburne)을 위시한 라파엘 전파의 시인들이 그의 천재성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20세기 초엽을 지나며 그의 시 세계가 지닌 독창성과 문학적 가치는 영국 낭만주의 문학의 대표적인 성취로 인정받게 되었다.
고전파의 대표자이자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독일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1749년 8월 28일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법학을 공부한 황실 고문관이었던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와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이었던 어머니 카타리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부족할 것 없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라틴어 등 어학에 뛰어났으며 독서량도 많았다. 어렸을 때 라틴어와 그리스어, 불어와 이탈... 고전파의 대표자이자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독일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1749년 8월 28일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법학을 공부한 황실 고문관이었던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와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이었던 어머니 카타리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부족할 것 없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라틴어 등 어학에 뛰어났으며 독서량도 많았다. 어렸을 때 라틴어와 그리스어, 불어와 이탈리아어 그리고 영어와 히브리어를 배웠고, 미술과 종교 수업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첼로 그리고 승마와 사교춤도 배웠다. 괴테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2000권에 달하는 법률 서적을 비롯한 각종 문학 서적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한다.

괴테는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1765년부터 1768년까지 당시 “작은 파리”라고 부르던 유행의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전공인 법학 강의보다 문학 강의를 더 열심히 들었다. 1770년 독일 질풍노도 운동의 실질적 선도자인 고트프리트 헤르더를 만나 독일 민속과 정신에 대한 깨우침을 얻었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법학 공부를 마친 후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프랑크푸르트에서 작은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에 더 사로잡혀 있었다.

이때 쓴 작품은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으로 『괴츠 폰 베를리힝겐』과 『초고 파우스트』와 같은 드라마와, 문학의 전통적인 규범을 뛰어넘는 찬가들을 쓰게 된다.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인 『괴츠 폰 베를리힝겐』이 1773년 발표되자 독일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는데, 독일에서 드라마의 전통적인 규범으로 여기고 있던 프랑스 고전주의 극을 따르지 않고 최초로 영국의 셰익스피어 극을 모방했기 때문이었다. 프로이센의 왕까지 가세한 이 논쟁으로 인해 괴테는 독일에서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1768년 건강상의 이유로 요양 생활을 했는데, 그 무렵 신비주의와 중세의 연금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77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 공부를 위해 머물다가 헤르더를 알게 되면서 셰익스피어 문학에도 심취했다. 변호사가 된 그는 1772년 제국 고등법원의 실습생으로서 몇 달 동안 베츨러에 머물렀다. 이때 이미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 부프를 사랑하게 되는 아픔을 겪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44)을 써, 문단에 이름을 떨쳤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때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주인공 베르테르의 옷차림이 유행하고 모방 자살까지 일어나는 등 유럽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774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발표되자 괴테는 일약 유럽에서 유명 작가가 되었다.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젊은 작가를 만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몰려들었다. '슈투름 운트 드랑'(질풍노도시대, 문예의 혁명 운동)의 대표작으로서 전 독일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알려졌다. 1775년 제2의 고향이 되는 바이마르로 가서 공작의 고문이 되고 1782년에는 귀족 반열에 들었다. 1786년의 이탈리아 여행은 괴테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이 여행을 통해 그는 고전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 1794년부터 실러가 기획한 잡지에 협력하여 우정을 맺은 괴테는 이후 실러의 격려와 이해에 용기를 얻어 많은 작품을 완성했다.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파우스트』에 다시 손을 댄 것도 이 시점이다.

자신의 장래에 대해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던 괴테를 18세에 불과했던 바이마르(Weimar)의 카를 아우구스트(Karl August, 1757∼1828) 공작이 초청했다. 처음에는 잠시 체류하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고 아버지의 권유대로 이탈리아로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괴테는 이미 유럽에 널리 알려진 유명 작가로 그곳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았고, 빌란트(Wieland)를 비롯해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바이마르의 예술적 분위기와 첫눈에 반해 버린 슈타인 부인의 영향으로 그곳에 머무르게 된다. 괴테에 대한 공작의 신임은 두터웠고 공국의 많은 일들을 그에게 떠맡기게 되었다.

여러 해에 걸친 국정 수행으로 인한 피로와 중압감으로 심신이 지친 괴테는 작가로서의 침체기를 극복하기 위해 바이마르 궁정을 벗어나 이탈리아로 여행을 감행했다. 1년 9개월 동안 이탈리아에 체류하면서 괴테가 느꼈던 고대 예술에 대한 감동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얻게 된 고대 미술의 조화와 균형, 그리고 절도와 절제의 정신을 자기 문학을 조절하는 규범으로 삼아 자신의 고전주의(Klassik)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 문학사에서는 괴테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1788년부터 실러가 죽은 1805년까지를 독일 문학의 최고 전성기인 “고전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괴테와 실러는 바이마르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고전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활동을 했는데,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유형(類型)”을 통해 “유형적인 개성”으로 고양(高揚)되는 과정을 추구했던 것이다. 괴테와 실러의 상이한 창작 방식은 상대의 부족한 면을 보충해 주어 결과적으로 위대한 성과를 올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실러의 격려와 자극으로 괴테는 소설『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1796년에 완성하고, 프랑스 혁명을 피해 떠나온 피난민들을 소재로 한『헤르만과 도로테아』를 1797년에 발표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미완성 상태의 『파우스트』작업도 계속 진행해 1808년에 드디어 1부를 완성하게 된다.

실러는 지나친 의욕과 격무로 인해 1805년 5월 46세의 나이로 쓰러지는데, 실러의 죽음은 괴테에게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바이마르 공국은 영토가 크게 확장되어 대공국이 되었다. 괴테는 수상의 자리에 앉게 되지만 여전히 문화와 예술 분야만을 관장했다. 1823년『마리엔바트의 비가』를 쓴 이후로 괴테는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저술과 자연연구에 몰두해 대작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1829)와『파우스트 2부』(1831)를 집필하게 된다. 서사시와 서정시, 산문과 시극, 비평과 수기, 4편의 소설과 1만여 통의 편지를 남긴 괴테는 독일민족이라는 정체성의 태동기에 독일문화와 독일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832년 3월 22일 낮 1시 반, 괴테는 심장 발작으로 사망한다. 그는 죽을 때 “더 많은 빛을(Mehr Licht)” 하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3월 26일 바이마르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이 누워 있는 왕릉에 나란히 안치되었다.
저 : 제라르 드 네르발 (Gerard de Nerval,제라르 라브뤼니 Gerard Labruni)
본명 제라르 라브뤼니. 1808년 파리에서 태어나, 로망주의가 격동했던 프랑스에서 독특한 문제의식과 서정성 가득한 문체를 완성했다. 19세의 젊은 나이에 괴테의 『파우스트』를 처음으로 프랑스어로 번역 소개하였고, 그 유려한 번역에 괴테가 깊이 감동했음은 유명한 일화이다. 이로써 문단의 주목을 받은 그는 로망주의의 총아(위고, 고띠에, 보렐)들과 교류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군의관인 부친의 희... 본명 제라르 라브뤼니. 1808년 파리에서 태어나, 로망주의가 격동했던 프랑스에서 독특한 문제의식과 서정성 가득한 문체를 완성했다. 19세의 젊은 나이에 괴테의 『파우스트』를 처음으로 프랑스어로 번역 소개하였고, 그 유려한 번역에 괴테가 깊이 감동했음은 유명한 일화이다. 이로써 문단의 주목을 받은 그는 로망주의의 총아(위고, 고띠에, 보렐)들과 교류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군의관인 부친의 희망이었던 의사로서의 길을 포기하여 평생 부친과 갈등을 겪으면서도 다양한 독일 문학작품 번역, 문학잡지 창간, 극작품 창작, 신문 기고 등의 다양한 문학 활동을 했다. 프랑스 남부, 이탈리아, 벨기에, 몰타, 이집트, 시리아, 키프로스, 콘스탄티노플, 나폴리 등지를 여행했다. 여배우 제니 콜롱을 사랑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고, 1841년 첫 정신병 발작을 일으킨 이후 10년의 잠복기가 지난 뒤 계속 재발하여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1842년에 행해진 장기간의 동방여행과 기회 있을 때마다 끊임없이 떠돌아다녔던 그의 편력은 『동방여행기』와 여러 산문에서 주옥같은 이야기로 나타난다. 1852년 초, 두 번째 정신병 발작 이후, 필생의 작품들을 책으로 엮는 동시에 걸작들을 새롭게 발표하였고, 『불의 딸들』에 이르러 그의 문학 절정을 이루었다. 1854년 문인 협회의 중재로 퇴원했으나 거처가 없이 무일푼으로 방랑하다가, 1855년 1월의 새벽에 비에이유-랑테른가에서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되었다.

'신비주의와 제교 통합주의(諸敎 統合主義 syncretisme)'로 일컬어지는 그의 작품 세계는 자살이라는 비극적인 결말로 인해 한동안 편견과 망각 속에 놓여 있다가 20세기 이후 앙드레 브르똥, 프루스트, 앙토넹 아르토에 의해 새롭게 발굴되었다. 오늘날에는 루소, 스탕달, 프루스트와 함께 프랑스 최고의 산문가 중의 한 작가로 손꼽힌다.

주요 작품으로 『몬테네그로 사람들』, 『라마잔의 밤』, 『동방 기행』, 『실비』, 『오렐리아』, 『불의 딸』, 『보헤미아의 작은 성들』, 『콩트와 해학』, 『환상 시편』 등이 있다.
프랑스의 시인이다. 프랑스 시에서 팽 드 시에클(Fin de siecle, 세기말이라는 뜻)의 대표자 중 한 명이다. 시 「여인과 고양이」 등을 썼다. 프랑스의 시인이다. 프랑스 시에서 팽 드 시에클(Fin de siecle, 세기말이라는 뜻)의 대표자 중 한 명이다. 시 「여인과 고양이」 등을 썼다.
부모가 노예였던 던바는 집필만으로 생활을 하려고 했던 미국 최초의 흑인 작가였다. [뉴욕타임스]는 그를 “흑백을 아우르는 진정한 민중시인”으로 평가했다. 시를 써서 이름을 얻자 미국과 영국에서 시 낭송회를 가졌던 던바는 여러 소설과 시집을 남기고 서른세 살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부모가 노예였던 던바는 집필만으로 생활을 하려고 했던 미국 최초의 흑인 작가였다. [뉴욕타임스]는 그를 “흑백을 아우르는 진정한 민중시인”으로 평가했다. 시를 써서 이름을 얻자 미국과 영국에서 시 낭송회를 가졌던 던바는 여러 소설과 시집을 남기고 서른세 살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저 : A.E. 하우스먼 (A. E. Housman, Alfred Edward Housman)
영국의 학자, 시인. 영국 출신이며 캐임브리지대학의 유명한 고전학자로 20세기의 대표적인 학자 시인. 그의 시는 고전적인 간결한 표현과 절제되고 소박한 문체로 낭만주의를 표현한 서정시를 써서 유명해졌다. 『마지막 시 Last Poems』(1922)가 시집으로서는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두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1859년 3월 26일 잉글랜드 서부 우스터셔(Worcestershire) 포크베리(Fockbury)... 영국의 학자, 시인. 영국 출신이며 캐임브리지대학의 유명한 고전학자로 20세기의 대표적인 학자 시인. 그의 시는 고전적인 간결한 표현과 절제되고 소박한 문체로 낭만주의를 표현한 서정시를 써서 유명해졌다. 『마지막 시 Last Poems』(1922)가 시집으로서는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두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1859년 3월 26일 잉글랜드 서부 우스터셔(Worcestershire) 포크베리(Fockbury)에서 태어났다. 어린 하우스먼은 버밍엄의 킹 에드워드 스쿨(King Edward's School, Birmingham)에 다녔는데, 학업성적이 매우 우수하고 시도 잘 지어 여러 차례 상을 받았다. 그렇게 탁월한 성적과 수상경력을 인정받아 1877년에 옥스퍼드 세인트존스칼리지(St John's College, Oxford)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대학에서 고전을 전공하게 된다. 1882년부터 1892년까지는 런던 특허청에서 근무하였으며, 십여 년을 거의 매일같이 퇴근 후에 대영박물관에 들러 라틴어 고전들을 독학한 끝에 고전문헌에 있는 오류를 수월하게 수정할 정도의 탁월한 실력자가 되었다. 하우스먼은 자신의 연구 결과물들을 여러 문예지에 기고하였고 자연스럽게 학자들의 주목을 끌게 된다. 그리고 1892년, 마침내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University College, London)의 라틴어 교수로 임명된다. 1910년에는 케임브리지 트리니티칼리지(Trinity College, Cambridge)의 라틴어 교수로 채용되어 여생을 케임브리지에서 보내게 된다.

1911년 케임브리지대학교 라틴어 교수가 되어 강의록 『시의 명칭과 본질 The Name and Nature of Poetry』(1933)은 하우스먼의 신중한 예술관을 보여주는 책이다. 그의 형제인 로렌스는 그의 시를 골라 유고집 『알려지지 않은 시 More Poems』(1936)를 출판했다. 『서간집 Letters』은 1971년에 나왔으며, 그의 생애와 작품을 소개한 A. S. F. 가우의 『A. E. 하우스먼 A. E. Housman』은 1936년에, 리처드 퍼시벌 그레이브스가 쓴 전기 『학자 시인 하우스먼 A. E. Housman : The Scholar Poet』은 1979년에 각각 출판되었다.
저 : 안나 마골린 (로사 하닝 레벤스보임)
본명은 로사 하닝 레벤스보임이며 러시아제국 태생의 유대계 미국 시인이다. 1920년에 뉴욕에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1929년 첫 시집을 냈다. 마골린은 주로 자신의 심리 상태와 공명하는 자연을 노래했다. 본명은 로사 하닝 레벤스보임이며 러시아제국 태생의 유대계 미국 시인이다. 1920년에 뉴욕에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1929년 첫 시집을 냈다. 마골린은 주로 자신의 심리 상태와 공명하는 자연을 노래했다.
1888년 뉴질랜드 웰링턴에서 부유한 가문에서 출생하여 1923년 프랑스 퐁텐블로에서 사망했다. 1903년 처음으로 영국으로 건너가 당대 최고의 여학교 퀸스칼리지에 등록해 그곳에서 음악과 문학, 데카당파, 열정적인 우정에 심취하였다. 런던을 사랑하고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여기기 시작한 시기였다. 맨스필드는 유학차 런던에 온 이후 결국 고국의 웰링턴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1906년 다시 뉴질랜드로 돌아가서 ... 1888년 뉴질랜드 웰링턴에서 부유한 가문에서 출생하여 1923년 프랑스 퐁텐블로에서 사망했다. 1903년 처음으로 영국으로 건너가 당대 최고의 여학교 퀸스칼리지에 등록해 그곳에서 음악과 문학, 데카당파, 열정적인 우정에 심취하였다. 런던을 사랑하고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여기기 시작한 시기였다. 맨스필드는 유학차 런던에 온 이후 결국 고국의 웰링턴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1906년 다시 뉴질랜드로 돌아가서 음악가의 길을 선택하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끝내 단념하고, 1908년 이후로는 아예 고국을 떠나 유럽에서만 거주했다. 전기학자 클레오 토말린은 유럽은 그녀에게 일시성의 습관을 불러일으켰다고 보았는데, 이방인의 시각으로 관찰하고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느낌이 그녀의 제2의 본성이 되었다고 해석했다.

어린 시절의 원고를 제외하고 [뉴에이지]에 처음으로 글을 발표한 이래로 정기적으로 이 잡지에 기고했으며, 1911년 ‘캐서린 맨스필드’라는 필명으로 첫 단편집 『독일 하숙에서』를 출간했다. 1912년부터는 후에 자신의 남편이 된 존 미들턴 머리가 편집자로 있던 [리듬]지에 글을 게재하기 시작했다. 1916년 「전주곡」에서는 단편소설 작가로서의 독특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나 1917년 결핵에 걸린 이후 여러 휴양지를 전전하며 치료에 몰두하는 한편, 『전주곡』, 『축복』 등 주옥같은 단편집을 발표하며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한다.

1921년 두 번째 소설집 『행복』을 발표하고 그로부터 1년 후 1922년에는 세 번째 소설집이자 생애 마지막 책인 『가든파티』를 출간하며 평단의 극찬을 받고, ‘의식의 흐름’, ‘다중 시점’ 등 실험적인 서사 기법을 선보임으로써 ‘모더니즘 문학’에 한 획을 긋는다. 이 책은 맨스필드가 연상과 상호 언급이라는 방식을 빌려 책 안의 여러 이야기들을 공조하여 새로운 연관성을 만들어내 완성한 소설집으로, 에피소드적이고 모더니즘적이며 개방적이다. 1923년 프랑스에서 요양하던 중 객혈을 시작하고, 결국 3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나는 비를 좋아해. 내 얼굴로 비를 느끼고 싶어.”라는 유언을 남겼다. 사후에 소설집 두 권과 『서간집』, 『일기』가 발간되었다.

맨스필드는 자의식이 강한 모더니즘 작가로서 창작 활동과 인생 모두에서 실험적인 면모를 드러냈으며, 런던에서 버지니아 울프, D. H. 로렌스 등 동시대 작가들과 교류하며 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고, 문필가로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전 생애를 글쓰기에 투자한 작가로서 “내가 쓰는 모든 것은 나의 존재”라고 피력하였다. 버지니아 울프는 캐서린 맨스필드에 대해 “그녀는 내가 찬미하고 필요로 하는 특성을 갖추었다. 내가 추구하던 예리함과 현실성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라고 평했다. 삶과 창작 모두에서 실험적이고 독창적이었으며, 그녀가 존경했던 체호프의 작품과 비견되는 그녀의 소설은 단편이라는 장르의 발전과 모더니즘에 이바지했다는 평을 받는다.
1898년 2월 10일 독일 아우구스부르크(Augsburg)에서 종이 공장에서 일하던 아버지 베르톨트 프리드리히 브레히트(Berthold Friedrich Brecht)와 브레칭(Brezing)에서 태어난 어머니 조피(Sofie)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7년 10월 2일 뮌헨 대학에 입학했다. 이듬해 뮌헨의 ‘카머슈필렌’ 극장에서 그라베(Grabbe)의 「고독한 사람(Der Einsame)」이라는 공연을 보고,... 1898년 2월 10일 독일 아우구스부르크(Augsburg)에서 종이 공장에서 일하던 아버지 베르톨트 프리드리히 브레히트(Berthold Friedrich Brecht)와 브레칭(Brezing)에서 태어난 어머니 조피(Sofie)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7년 10월 2일 뮌헨 대학에 입학했다. 이듬해 뮌헨의 ‘카머슈필렌’ 극장에서 그라베(Grabbe)의 「고독한 사람(Der Einsame)」이라는 공연을 보고, 이 작품에 대한 응답으로 5월 1일 「절반은 희극인 바알(Die halbe Komodie Baal)」을 완성했다. 1920년에 「바알」을 고쳐서, 게오르크 뮐러 출판사(Georg Muller-Verlag)에서 출판하고자 했으나, 출판을 거절당했다. 1922년 9월 29일 ‘카머슈필렌’ 극장에서 「한밤의 북소리(Trommeln in der Nacht)」를 초연했으며 같은 해 11월 3일에는 마리아네 초프(Marianne Zoff)와 결혼했다. 1923년 3월 12일 딸 하네(Hanne)가 태어난다. 1928년 8월 31일 ‘쉬프바우어담’ 극장에서, 에리히 엥겔(Erich Engel) 연출로 「서푼짜리 오페라」를 초연한다. 이듬해 4월 10일 헬레네 바이겔과 재혼한 브레히트는 1933년 가족과 함께 프라하로 이주한다. 1940년 1월 헬레네 바이겔이 스톡홀름에 연기학교를 세운다. 4월 17일 나치 군대가 덴마크와 노르웨이에 침입하자, 브레히트는 가족과 함께 헬싱키로 피난한다. 이듬해 7월 2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브레히트는 할리우드 근처의 산타 모니카(Santa Monica)에 거주하기 시작한다. 1947년 10월 30일 ‘반미활동조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브레히트는 미국에서도 추방당한다. 10월 31일 파리로 출발한 브레히트는 11월 5일 스위스 취리히에 도착한다. 1956년 5월 초 감기 증상이 나타났다. 8월 10일 마지막으로 ‘베를리너 앙상블’ 극단 연습장에 나타난 뒤, 8월 14일에 사망했다.

주요 작품으로 『한밤의 북소리』, 『남자는 남자다』, 『서푼짜리 오페라』, 『마하고니 시의 흥망』, 『어머니』, 『제삼제국의 공포와 참상』,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사천의 착한 사람』, 『갈릴레이의 생애』, 『푼틸라 나리와 그의 하인 마티』, 『코카서스의 분필 원』 등이 있다.
엘라 윌러 윌콕스(Ella Wheeler Wilcox, 1850-1919)는 미국의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였다. 당대의 기준으로 파격적인 에로티시즘이 가미된 시를 쓴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했다. 1850년 위스콘신주 존스타운에서 네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윌콕스는 어려서부터 대중문학을 탐독했고 열네 살에 쓴 글이 《뉴욕 머큐리》라는 주간지에 실릴 정도로 조숙했다.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1년간 수학한 뒤 글쓰기에 전념했... 엘라 윌러 윌콕스(Ella Wheeler Wilcox, 1850-1919)는 미국의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였다. 당대의 기준으로 파격적인 에로티시즘이 가미된 시를 쓴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했다. 1850년 위스콘신주 존스타운에서 네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윌콕스는 어려서부터 대중문학을 탐독했고 열네 살에 쓴 글이 《뉴욕 머큐리》라는 주간지에 실릴 정도로 조숙했다.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1년간 수학한 뒤 글쓰기에 전념했고, 1872년에 금주에 관한 첫 번째 시집 『물방울』을 발표했다. 그 후 출간하려 했던 사랑에 관한 시집이 시카고의 한 출판사로부터 내용이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거절을 당했으나 1883년 다른 출판사에서 『열정의 시』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집은 출간 후 2년 동안에만 약 60,000부가 판매되었고, 미국을 넘어 유럽의 독자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았다. 1916년 남편과 사별한 뒤 윌콕스는 강신론에 심취했고, 1918년 프랑스에 주둔한 연합군 부대를 다니며 강연과 시 낭송회 활동을 펼쳤다. 1919년 10월 30일 코네티컷주 쇼트 비치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803년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나 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고학으로 하버드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했다. 7대에 걸쳐 성직을 이어온 개신교 목사 집안 출신답게 그 역시 1829년에 목사가 되었다. 1821년 하버드대학교 졸업반 때, 그는 새로운 독일 철학자들을 반박하고 토머스 리드와 듀갈 스튜어트를 옹호함으로써 상을 받았다. 졸업 후 1829년 반 삼위일체적 개신교회인 유니테리언 보스턴 제2교회의 목사가 되었으나, ‘... 1803년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나 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고학으로 하버드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했다. 7대에 걸쳐 성직을 이어온 개신교 목사 집안 출신답게 그 역시 1829년에 목사가 되었다. 1821년 하버드대학교 졸업반 때, 그는 새로운 독일 철학자들을 반박하고 토머스 리드와 듀갈 스튜어트를 옹호함으로써 상을 받았다. 졸업 후 1829년 반 삼위일체적 개신교회인 유니테리언 보스턴 제2교회의 목사가 되었으나, ‘성찬의식’에 대한 에머슨의 자유로운 입장에 대해 교회가 반발해 갈등을 빚었다. 결국 그는 성찬의식이 현대 교회가 지켜야 할 의무사항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교회의 형식적이고 영감 없는 설교를 비판하며 1832년 목사직을 사임했다.

목사직 사임 후 유럽으로 건너가 유럽을 여행하고 당대의 지식인들을 만나면서 견문을 넓혔다. 그때 만난 지식인 중에는 에머슨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된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토머스 칼라일도 있었다. 에머슨은 1835년 미국으로 돌아가서 얼마 뒤 콩코드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곳에서 ‘콩코드의 현자’라고 불리며 청교도의 기독교적 인생관, 편협한 종교적 독단, 형식주의를 비판했다. 대신에 자신을 신뢰하며 인간성을 존중하는 개인주의 사상을 주장해, 자연과 신과 인간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로 돌아간다는 범신론적인 초월주의 철학 입장에 섰다. 정신을 물질보다 중시하며 직관으로 진리를 깨닫는 에머슨의 이상주의는 1800년대 미국의 사상계와 문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40여 년간 1,500여 회의 강연을 하며 개인주의와 초월주의를 전파한 그는 노예제도의 폐지를 주장했으며, 인디언에 대한 가혹한 조치에 반대했다. 저서로는 『자연』 『미국의 학자』 『제1 수필집』 『제2 수필집』 『미국 젊은이』 『위인이란 무엇인가』 『영국인의 특성』 등이 있다.
영국의 저명한 여성작가 앤 테일러의 딸로 태어났다. 자장가 「반짝반짝 작은 별」의 가사를 쓴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유아를 위한 시』 의 성공 이후 『동요』(1806)와 『유아를 위한 찬송가』(1810)를 출판했다. 1824년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영국의 저명한 여성작가 앤 테일러의 딸로 태어났다. 자장가 「반짝반짝 작은 별」의 가사를 쓴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유아를 위한 시』 의 성공 이후 『동요』(1806)와 『유아를 위한 찬송가』(1810)를 출판했다. 1824년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일제강점기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일제 강점기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노래한 민족시인. 우리 것이 탄압받던 시기에 우리말과 우리글로 시를 썼다. 윤동주는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 실을 가슴 아파하는 철인이었다. 그의 사상은 짧은 시 속에 반영되어 있다.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윤영석과... 일제강점기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일제 강점기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노래한 민족시인. 우리 것이 탄압받던 시기에 우리말과 우리글로 시를 썼다. 윤동주는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 실을 가슴 아파하는 철인이었다. 그의 사상은 짧은 시 속에 반영되어 있다.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윤영석과 김룡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윤동주는 청춘 시인이다. 절친한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의 시 ‘동주야’에 의하면 아직 새파란 젊은이로 기억되고 있었다. 한글을 구사하면서 작품을 발표한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만주 용정과 경성 신촌 일대에서 문학청년들과 몸을 부대끼며 시를 썼기에 청춘의 고뇌가 담겨 있다. 1925년(9세) 4월 4일, 명동 소학교에 입학했다. 1927년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 [새 명동]을 발간했다. 1931년(15세)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16세)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1934년(18세) 12월 24일, 「삶과 죽음」, 「초한대」, 「내일은 없다」 등 3편의 시 작품을 썼고 이는 오늘 날 찾을 수 있는 윤동주 최초의 작품이다. 1935년(19세)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로 편입했다. 같은 해 평양 숭실중학교 문예지 [숭실활천]에서 시 ‘공상’이 인쇄화되었다. 1936년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여 숭실학교를 자퇴하고 [카톨릭 소년]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를, 1937년 [카톨릭 소년]에 동시 「오줌싸개 지도」, 「무얼 먹고 사나」, 「거짓부리」를 발표했다. 1938년(22세)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문과에 입학했고 1939년 조선일보에 「유언」, 「아우의 인상화」, [소년(少年)]지에 「산울림」을 발표하였다. 처음 윤동주 시들은 노트에 봉인된 채, 인쇄되지도 않았고 신문 지면에 발표되지 않았다. 그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지고 난 후 동문들이 그의 노트에 있던 시를 모아 정음사에서 출판한다. 유해가 안치된 지 3년 후, 그러니까 1948년, 조선은 대한민국으로 국호가 바뀌어 혼란한 시기에 청춘 시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광복 후에 정병욱과 윤일주에 의하여 다른 유고와 함께「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만주 북간도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에 「달을 쏘다」, 「자화상」, 「쉽게 씌어진 시」를 발표하였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6개월 후에 교토 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하였다.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복역 중이던 1945년 2월 16일 광복을 여섯 달 앞두고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로 타계하였다.
서울에서 태어나 브루클린과 마드리드에서 성장했다. 비교문학을 공부했으며 여성과 소수자 문학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번역서로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시집 『밤은 엄마처럼 노래한다』가 있다. 서울에서 태어나 브루클린과 마드리드에서 성장했다. 비교문학을 공부했으며 여성과 소수자 문학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번역서로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시집 『밤은 엄마처럼 노래한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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