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장편소설 『악령』 고급 한정판 출간
『죄와 벌』 『백치』 이어 세 번째 … 150부 제작, 정가 29만 원, 4월 17일부터 예약판매
24K 금박 문양과 고유번호 찍힌 명품 … 『죄와 벌』 한정판 100만 원에 거래되기도
김정아 박사, 2016년부터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단독 번역 대장정 … 한국 최초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의 하나인 『악령(Бесы)』 고급 한정판이 4월 24일 선보인다. 『악령』은 ‘지만지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한정판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으로 150부만 제작돼 정가 29만 원에 판매된다. 이번 한정판은 가죽 하드커버의 앞, 뒤, 세네카(책등)에 섬세한 24K 금박 문양을 입히고 케이스에도 금박 문양을 찍었다. 금색 공단 가름끈에 금색 면지를 사용했는데 면지에는 역자의 친필 사인이 들어간 소장 카드를 부착했다. 책등에는 고유 번호를 찍어 한정판의 소장 가치를 높이도록 제작했다.
지식을만드는지식(대표 박영률)은 2020년 『죄와 벌』 한정판을 일주일 만에 완판한 데 이어 2021년에도 『백치』 한정판을 발간해 완판하는 등 명품책 시리즈를 잇달아 성공시킨 바 있다. 『죄와 벌』은 중고시장에서 최고 100만 원에 거래되는 등 한정판 소장가치는 해를 더할수록 높아지는 특성도 있다. 하지만 한정판을 출간하는 출판사는 별 이익이 없다. 장기간의 번역기간과 편집에 들어가는 비용, 고가의 제작비 등을 감안하면 오히려 손해다. 그런데도 한정판을 출시하는 이유는 뭘까?
지만지 최정엽 편집주간은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을 한국 최초로 한 번역자가 단독 번역하여 독자들이 도스토옙스키의 사상과 독특한 문체를 일관되게 이해하고 느낄 수 있도록 하려는 취지에서 이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면서 “4대 장편의 보급판 판매로 적자를 보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도스토옙스키의 4대 장편을 한 사람이 단독으로 번역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드물고 우리나라 문학사에서는 유일무이하다는 설명이다. 대장정을 시작한 번역가는 김정아 박사다. 그는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대학교에서 『죄와 벌』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도스토옙스키 전문가다.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외에 『지하생활자의 수기』 『가난한 사람들』 등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장단편 11종을 번역했다. 그는 “도스토옙스키 같은 천재 작가의 언어는 풍부하고 아름답고 충만하다. 그것을 원어가 가진 힘 그대로 한글로 번역해 내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하나의 단어, 하나의 문장을 곱씹고 또 곱씹어서 최대한 그의 뜻에 가깝게 한국어로 옮기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익숙했던 도스토옙스키 번역의 구태를 과감히 부수고 있다”고 말했다.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은 살인과 폭력이 주요 사건으로 등장하지만 『악령』에서는 나머지 세 작품을 다 합한 것보다 훨씬 많은 죽음이 나온다. 이 모든 죽음에 가공할 악령이 임한다. 그 악령은 뛰어드는 나방을 태워 죽이는 불빛처럼 파괴적인 에너지를 내뿜는다. 정신이 성한 사람이건 미친 사람이건, 진실한 사람이건 비열한 사람이건, 정숙한 귀족 처녀건 경박한 귀족 여인네건 간에, 심지어 갓난아기와 도망 나온 유형수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그저 악령에 씐 돼지 떼처럼 속절없이 죽는다. 육체가 썩는 냄새, 정신과 영혼이 곪아 문드러지는 냄새, 인간이 인간임을 포기하고 질퍽거리는 시궁창으로 내려앉으며 내뿜는 메스꺼운 냄새가 진동한다. 음모, 살인, 자살, 방화가 가득한 이 ‘악령’의 세계는 피비린내로 범벅이 된다. 작중 어느 인물도 이 세계를 구원해 낼 힘이 없다. 지옥은 딴 곳이 아니라 신이 없는 바로 이 세상이다.
『악령』은 정치적 사상가이자 묵시록적 예언가로서 도스토옙스키의 면모가 부각되는 작품으로 비교적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악령』을 넘어서면 도스토옙스키의 다른 작품들은 훨씬 수월하게 읽고 즐길 수 있다. ‘지만지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한정판 시리즈’는 2025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끝으로 마무리된다.
삽화로 보는 이야기
책에는 총 40개의 삽화가 수록되어 작품의 분위기를 살린다. 러시아 비타노바 출판사(Вита Нова)에서 출간된 『БЕСЫ』에 수록된 것으로 미하일 가브리치코프(Михаил А. Гавричков)가 그린 작품들이다. 가브리치코프는 1963년 레닌그라드(현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레닌그라드 회화·조각·건축학교를 졸업했다. 화가, 그래픽 아티스트, 조각가 등으로 활동하며 러시아를 포함 전 세계 전시회에 120회 이상 참여했고 개인전을 18차례 열었다. 작품은 예르미타시, 러시아국립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거대 사상들의 각축장
『악령』은 작가 작품의 전반적인 특징과 더불어 정치적 사상가이자 묵시록적 예언가로서 도스토옙스키의 면모가 상당히 부각되는 작품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을 사상의 담지자(ideolog)라고 칭한 바흐친의 이론을 이만큼이나 잘 증명하는 작품도 드물 만큼 작품 속 주요 인물들은 각자 하나의 거대 이데올로기를 대표한다. 다시 말해 『악령』은 도스토옙스키를 평생 괴롭힌 거대 사상들의 각축장이다. 도스토옙스키 이후 러시아 사상가들 중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한 비평가 베르댜예프의 말은 과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그의 사상의 영향에 대한 과소평가다. 왜냐하면 그의 사상은 후대 러시아 사상가뿐만 아니라 저 유명한 니체의 초인 사상과 영원 회귀 사상으로부터 21세기의 히친스에까지 이르며, 아마도 몇백 년 후라 하더라도 시공을 초월해 그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그가 답을 찾으려 고뇌하며 던지는 질문은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물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갖게 되는 근본적인 질문들이기에 그러하다.
근본적이지만 심오한 철학적 질문들과 신과 인간의 문제에 더불어 『악령』에는 예수 재림이 러시아 땅에서 이루어질 것이고 러시아 정교가 기독교의 중심이요, 러시아가 로마, 비잔틴을 잇는 제3의 로마가 되리라는 러시아 제3로마 이론, 어머니 대지 신앙, 또 참칭자 드미트리란 역사적 인물과 이반 차레비치(царе?вич : 왕자)의 신화, 러시아 정교의 특징 중 하나인 유로디비(юродивый) 전통, 더 나아가 러시아의 정체성을 다루는 동과 서의 문제 등이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다.
“악령”에 씐 러시아
1860년대 러시아는 법률, 경제, 행정, 군사적 개혁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었고, 그 결과 유럽식 자본주의의 물결이 강하게 밀려들어 시민의 의식과 세계관에도 많은 변화가 일던 시기다. 유럽식 자본주의와 함께 서구적인 사고방식과 철학 역시 대거 유행하며, 이런 물결의 추종자들을 서구주의자라 불렀다. 이에 반해 서구의 개인주의와 로마의 가톨릭, 자본주의가 가져온 물질 만능주의의 유물론적 사고관 등에 맞서 모든 러시아인들이 어머니 대지 앞에 형제라는 형제애, 동포애, 세상에 고통이 있는 한 모두가 그리스도 앞에, 또 서로에 대해 죄인이라는 러시아 정교 신앙을 옹호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이 바로 슬라브주의자들이고, 말할 필요도 없이 도스토옙스키는 그 선봉에 선 기수다. 도스토옙스키에게는 서구 사상에 물들어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판치는 세상으로 변해 가는 러시아가 너무도 안타까웠다. 그의 눈에 이런 것들은 서구에서 온 “악령”이나 다름없고, 이 “악령”에 씐 러시아는 성경에 나오는 악령에 씌어 고통받는 미친 사람이며, 악령을 돼지 떼에게로 몰아내어 몰살한 연후에야 러시아가 정교 신앙으로 다시 태어나 그리스도의 품 안에 안기리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