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의 중요성이 과거의 어느 때보다 대두되는 시대에
소설의 세계 속 경이로운 가능성과 아이디어를 탐구한다
80권이 넘는 소설과 그래픽노블을 우리말로 옮겨온 번역자, 영국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한 연구자, 스릴러 소설을 발표한 성공한 덕후, 다양한 매체에 서평과 문화 비평을 게재해온 칼럼니스트 박산호 작가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탐독해온 소설의 ‘어떤 쓸모’에 대한 에세이집을 펴낸다.
우리는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웹툰, 게임, 뉴스레터 등 볼거리와 읽을거리가 넘쳐나고 이야기의 중요성이 과거의 어느 때보다 대두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야기가 가진 흥미도와 메시지의 낙폭이 세상의 많은 것을 좌우하는 현시점에서, 저자는 이야기의 대표적 그릇 중 하나인 소설을 들여다보며 그 세계 속의 또 다른 경이로운 가능성과 아이디어를 탐구한다. 그리고 그 가능성과 아이디어를 우리의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을지, 적용이 가능하다면 그 방향성은 어떠해야 할지 고찰해본다.
이 책에는 21세기의 많은 독자와 콘텐츠 제작자가 주목해야 하는 소설 17편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으며, 저자가 스릴러와 미스터리 소설 분야에서 신뢰받는 전문가인 만큼 범죄소설 혹은 그만큼 어두운 그림자가 감도는 SF소설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범죄소설의 아이디어와 전개와 미학을 들여다보는 일은 일반 소설을 연구하는 일과 똑같은 유용함을 가지고 있다. 현대의 많은 작가와 전문가와 독자는 이제 더 이상 범죄소설을 하위 문학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들은 범죄소설도 다른 모든 소설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심지어 어쩌면, 범죄문학이 형성해온 고유의 특성과 구조 때문에 좀 다른 면에서 더 나은 효과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G. K. 체스터튼이 “아무리 평범한 스릴러물의 스릴일지라도, 오직 스릴만이 양심과 의지에 다소나마 관심을 보인다”라고 한 것처럼 말이다.
● 소설을 읽는 사람만이 더 빨리, 더 깊게 도달할 수 있는,
강력하고 신선하고 미스터리한,
어떤 힘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에세이
“이야기 너무 좋아하지 말어. 이야기 좋아하는 사람은 가난하게 살아.”
어린 시절 저자는 밤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할머니는 매일 밤 손녀에게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손녀의 장래가 걱정되셨는지 이야기를 너무 좋아하지 말라고 타이르셨다. 하지만 할머니의 말은 놀라운 예언과 저주로 돌아왔고, 학창 시절 내내 소설에 빠져 산 저자는 대학 시절에 675권의 책을 독파했고 훗날 스릴러소설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가가 되어 부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성공한 덕후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영국 문학을 자세히 공부하고 싶어서 영국으로 건너가 브루넬 대학원에 입학해 19세기 영국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연구했으며, 한편으로는 다양한 매체에 서평, 문화 비평을 발표해왔다.
저자는 이렇게 오랫동안 문학을 탐구해온 이력을 바탕으로, 매혹적인 소설 17편에 담긴 아이디어와 메시지를 자신만의 시각으로 짚어낸다.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주인공 유니스가 등장하는 『활자 잔혹극』을 다룬 편에서는 ‘세상이 이토록 문자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면’이라는 대담한 상상력을 발휘한다. 유니스는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이 들통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기억력과 관찰력이 비상하게 좋았다. 만약 유니스가 글을 읽는 능력이 아닌, 다른 능력과 감각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사회적 배려를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고용주 일가를 살해하지 않는 미래가 존재할 수도 있었을까?
미스터리한 배경 설정이 가득한 SF소설 『시녀 이야기』와 스릴러소설 『걸 온 더 트레인』을 다룬 편에서는 ‘질문’과 ‘의문’이 중요 키워드로 부상한다. 저자는 『파친코』의 작가 이민진을 직접 인터뷰했을 때 얻은 창작 팁을 자세히 풀어놓으면서 글쓰기를 직업으로 갖고 있는 작가는 물론이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왜 질문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지 또렷하게 설명한다.
한편, 영국 대학원에서 『제인 에어』를 연구했던 저자는 20세기의 범죄소설 『레베카』를 읽다가 로체스터의 첫 부인 버사 메이슨이 『레베카』에서 되살아났음을 깨닫는다. 레베카는 강렬한 카리스마와 매력으로 작품 내내 모든 등장인물을 지배하고, 어수룩하기 짝이 없는 어린 화자 ‘나’는 그런 레베카에게 주눅이 들어 있다. 저자는 세상에 의해 미스터리 앞으로 내던져진 초라하고 미숙한 ‘나’를 다정한 시선으로 돌보는 한편, 소위 ‘사악하고 미친 여자’ 버사 메이슨과 레베카를 대조하면서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생긴 점진적인 변화가 작품에 반영된 점을 짚어낸다.
이외에 『어둠의 왼손』을 다룬 편에서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과 ‘인생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인간’이 핵심 키워드가 된다. 저자는 사람이 인생의 불확실성과 미지의 타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까닭은 통제력을 상실할 가능성에 대한 공포, 태어나서 지금까지 쌓여온 자동 재생되는 편견과 습관을 계속 가동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너를 본다』 편에서는 여성이 잔인한 살인마에게 끌려다니다가 목숨을 잃는 콘텐츠가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지적하며, 우리가 왜 똑똑하고 치밀한 여성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읽을 필요가 있는지 이야기한다. 살인이 등장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작품 가운데 하나인 〈모두가 땅에 앉아 있었는데〉 편에서는, 작품 속에서 코믹하고 아이러니하게 표현된 ‘소통’이라는 아이디어를 자세히 살펴본다. 시종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외계인들보다 더 소통이 안 되는 막무가내 인간들을 등장시켜 소재의 효과를 극대화한 점을 짚어내면서 저자 자신이 두 차례의 모임에서 겪은 불통 에피소드들을 들려준다. 저자가 해학적으로 묘사한 불운(?)에 크게 공감하면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지만, 마지막에는 산뜻한 카타르시스와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의 또 다른 즐거운 포인트 중 하나는, 20년 가까이 번역자로 활동해온 저자의 여러 직업적 경험담 속에서 세간의 편견과 오해를 엿보고 통찰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가 이름 때문에 ‘남성 스릴러 번역가’로 자주 오해받은 경험이나 “집에서 일하니까 아이도 돌보고 살림도 잘할 수 있겠다”며 무수히 오해받은 경험 등이 바로 그렇다. 경쾌한 미스터리 소설 『스위트홈 살인사건』을 다룬 편에서는 번역자도 번역을 하다가 역할에 빙의(?)할 수 있다는 재미있는 설을 들려주기도 한다.
사실, 현실과 픽션의 세계를 숨 쉬듯 오가며 사는 우리는 늘 누군가를 응원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벌하고 싶어 한다. 여기서 스릴이 발생하고, 우리는 개인의 양심과 의지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에세이집 『소설의 쓸모』는 그 점을 정확하게 짚어내며, 오직 소설만이 전달할 수 있는 복잡하고 미묘한 메시지와 새로운 발상들을 수면 위로 건져 올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설을 한층 더 사랑하게 만들어준다.